2014년 4월 27일 부활 제2주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꼬
16,9-15)
He appeared to them and
rebuked them
for
their unbelief and hardness of heart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말씀의 초대
첫 신자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였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다. 이 희망은 우리의 상상이나 지적 노력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이다(제2독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직접 보고 믿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의 위대한
교황 두 분을 성인의 반열로 올리십니다. 시성되는 요한 23세 교황님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남긴 발자취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교황직이 봉사직이자 주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당신의 소박함과 미소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교회가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들을 먼저 배려하고 있음을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증언하셨습니다. 또한 비록 결과를 보지 못하신 채 선종하셨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을 통하여 교회가 지속적으로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분이 모범을 보이신 섬기는 자세와 쇄신의 길은 우리 교회의
변할 수 없는 기준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세계사적 격동의 시대에 교회가
자신의 중심을 잡으면서도 그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열려 있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그들과 자주 함께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야말로 세상의 어떤 사상보다도 앞서는 그리스도인 삶의 원천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혹독한 병고의 시기에 보여 주신 온전한 순종과 겸손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행복하라는
말씀은 우리 가슴속에 늘 간직되어 있습니다. 두 분이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시성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거기에 의탁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두 교황님의 전구로 우리가
더 깊이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 서로 나누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자신은 주님의 자비와 두 교황님의 전구에 힘입어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하도록
애써야겠습니다.
부활의 삶
-조재형 신부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십자가와 골고타를 넘어 죽음의 문을 넘어갔다 온 분의 인사 같지가 않습니다. 마치 어제 보았는데, 오늘 또 만난
사람들에게 하는 것 같은 인사입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근심과 걱정도
날려버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평화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여의도성모병원엘 다녀왔습니다. 아는 분께서 아프시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신
분이셨습니다. 몹시 아픈 중에서도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를 잘 모셨습니다. 환자 곁에는 언제나 힘이 되고, 위로가 돼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빠를 위해서 병실을 지켜 주는 딸들이 있었습니다. 환자분에게 "결혼 참 잘하셨지요?"라고 물으니 아이처럼 웃으셨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산보'를 자주 다녔습니다. 적성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저는 진성이에게 '산보'를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아이는 가방을 성당 교리실에 놓고 저와 함께
산보를 했습니다. 길가의 꽃도 보았고, 장날이어서 구경도 함께 했습니다. 산보를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왔는데 진성이가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그런데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아이는 산보가 어디에 있는 장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 보여 주셨는데 우리는 늘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엠마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엠마오'는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엠마오가 장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산으로도 가고, 섬으로도 가고, 바다를 건너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인생길에 지치고
힘들 때 위로를 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병원에 함께 가던 교우들에게서, 그날 다른 본당에서 환자를 방문해 주셨던 교우의
마음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병실의 보조 침대에서 새우잠을 주무시던 자매님들의 마음에서 위로를 얻었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엠마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 모습,
그때 입으셨던 옷, 그분 몸에 있었던 상처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주님의 부활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묻히셨을 때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정확한 시점을 아는 것이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부활의 순간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 부활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주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만으로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은사와 그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은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베드 1,6-9).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고, 토마스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초기신앙인들이 주님의 날이라 부르던 요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비밀리에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며,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별의 식사를 기억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발현은 그 집회 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발현 때,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의미합니다. 이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가 하는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고백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발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현행 고해성사를
연상하고,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진 일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의 죄든지...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이 반영된 말입니다.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화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제자들이 선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구약성서 창세기(2,7)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생명을 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보여 주신 진리, 곧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받겠다는 그리스도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와 함께 계시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베드로 1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신앙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새로운 생명, 곧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곧 기원후 100년 경, 공동체는 이미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베드로의
편지는 요한복음서보다 40년가량 먼저 기록되었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 신앙인들의 실태를 반영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시대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그분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존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기 생존의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의
생존을 가장 큰 과제(課題)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을 믿으며, 그분의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그 생명을 사는 자녀들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정체성이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면서 우리는 현명하게 처신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밀림 속 동물의 처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세술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어린이에게는 성숙한 인간의 자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미성숙하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익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지도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미숙함을 넘어 스스로를 베풀어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유를 실천해 보였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하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다 가는 생명들도 많습니다. 정직하게 노력하고도 실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모순들 앞에 주어진 답이 예수님이 가르친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그
질서를 실천하며 산 사람은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질서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삶 안에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 하느님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
부활은 믿는 사람들의
몫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유다인의
안식일 다음날,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한 인사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상당히 길지만 히브리어로는 '샬롬' 한
마디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다인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몸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주십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와 못에 박힌 손을 보여 주고(20절), 길게 "숨을 내쉬기도" 합니다(22절).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나타나 토마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 줍니다. 그제야 토마스는 비로소 믿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예수님의 몸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강조할까요? 또한 왜 두 번씩이나 나타나 옆구리와 손을 확인시켰을까요?
요한의 공동체가 있었던
에페소 지역에는 당시에 이른바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시대적인 조류였습니다. 영지주의의 핵심 논리는 이원론(二元論)이고 그에 따라 인간도 영혼과
육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원래부터 아름답고 깨끗하지만 육체는 세상 욕심에 곧잘 빠져드는 약한 부분으로
간주했습니다. 우리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라는 말을 곧잘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역시 유한성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무한한 영으로 부활해야만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죽고 나서 백 년이면 뼈조차 사라지는 육체 따위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견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요한
1,14) 육체를 버리고 부활한다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세상 역사로 진입해 들어온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요한의 공동체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2,42-47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해 취할 수 있는
내용은 '빵을 나눔'(성찬례, 46절)을 통해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예수님 부활의 현재성을 기렸다는 것이고, 1베드 1,3-9에서는 특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8절)를 주목할 만합니다. 두 본문 모두,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실존을 체험하고 있다는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그분이 선포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줄행랑을 놓아 숨어있거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전갈에 코웃음을 치지 않았겠지요.
부활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보도들을 바탕으로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활한 예수님은 그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났지만 매년 부활절마다 세상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한 토마스가 바로 우리들의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부활의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순수한 믿음
-이중호
신부-
생명이 넘치는 달 4월,
각기 자신에 맞는 향기와 색채를 드러내며 뽐내고 있는 꽃망울들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생명력을 느껴보라고 더욱 재촉하는 듯 합니다.
이처럼 생명력이 살아 숨쉬는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진정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의심을 버리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앙" 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저를 아는 어떤
한 자매님이 하루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아들집에 일찍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주기 위해 가셨다고 합니다. 전화를 하지 않고 갑자기 가면 아들이 더
기뻐할 줄 알고 그냥 가셨답니다. 그리고 아들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자 며느리가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신원을 확인한 며느리는 나와보지도
않고 아들이 나오더랍니다. 이 자매님은 속으로 당신이 온 것이 무슨 부탁이라도 할 줄 알고 며느리가 귀찮아서 나와보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냥돌아 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며느리가 아직 마르지도 않은 머리에 물방울을 흘린채 오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어머니 출근
시간이 늦어 머리를 감다가 나가보지 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자매님은 의심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흉기인줄 새삼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자신 안에 작은 의심의 싹이 들어오는 순간 내 가정이든, 공동체든, 이웃이든
간에 그곳에는 점점 행복은 식어가고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결말을 낳게 됨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것,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며 그것이 삶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 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신앙이라 한다면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은
신앙인으로서도 훌륭한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자무식의 할머니나, 할아버지, 어린이들이 더욱 열심히
믿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앙이란 가슴으로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믿음은 계산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소박하게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사실 기적을 가져옵니다. 순수한 믿음, 의심없이 그저 하느님이 계시고, "그 분이 바로 하느님잉께 가능한거
아이미꺼."라고 하는 믿음에는 불신이나,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수한 믿음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며 이런 믿음이 우리
안에 싹틀 때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이웃 안에서도 의심 없는 믿음이 불타오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이 사람도
아닙니다!
-김호배 신부-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구요? 아! 용각산 광고를 조금 흉내내 보았지요. 어떻게
선전합디까?
“이 소리도 아닙니다.(또)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라고 선전하지요. 믿을 수 있는 진짜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광고 내용이지요. 믿지 못할
세상이니까 진짜 좋은 약을 권하는 광고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도 일상에서 늘 이 광고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믿을 수 있는
사람, 정치가, 지도자, 노조, 사장, 교사, 군인, 사목위원, 장상 등등이 누구냐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뱉습니까?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또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예를 들어 믿지 못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기 위해 상상 속의 투명인간이 되어 외적인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도대체 사람의
마음까지도 마지막까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이 거짓을 말한다 하더라도 일단은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을 원망하고 때로 세상을 원망합니다. 거짓이 아닌 참이 있는 그런 사람들,
그런 세상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이 없는 참된 세상을 만들려 애씁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노력에 주님은 반드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을 더 추가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을 거짓이 없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기보다 거짓인지 참인지 믿지 못하는 그것이 더
근원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는 주님 말씀에 힘입어 거짓말도 한번 믿어보는 태도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모두가 믿을 수 있는 행동과 말을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모두를 차라리 믿어보는 것이 더 수월하고 빠르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도 문제가 아니고 저 사람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믿지 못할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믿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문제지요.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말씀처럼 보지 않고 믿을 수 밖에 없지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구요? 당연하지요. 확인을 못하니까요. 하지만 부활은 또 결코 확인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구요?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 믿는다면, 믿는 이에게 부활은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체험되어 질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기양신부-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대형 유람선을 타고 유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승객이 많아 그는 누군가와 함께 방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지내게 된 사람이 도둑 같아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귀중품을 챙겨 들고 아래 선실로
내려가서 그 배의 사무장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좀 맡기고 싶습니다." "손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맡아드리지요. 그 분도 벌써 맡기고 갔는걸요." 그런 사람들을 한 방에 묶어 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불신이 깊을수록 불행도 깊습니다. 의처증, 의부증, 환자들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남편을 의심해 별의별 트집을
잡아 닦달하는가 하면 정도가 심하면 외출도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지옥이지요.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자꾸 따지고 들면 의심이 커지고, 반대로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신이 확신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시고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토마스 사도일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가 의심의 사도로 알려져 있지만 토마스 사도는 의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토마스의 의도는 믿음에 있었지요. 예수님 부활을 확신하고 싶었기에 의심했던 것입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의심하고 싶어서의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믿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굳게
믿으며 확신에 차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느 병원 부원장으로 계시는 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마취과 의사인 이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 인사라고 합니다. 이 분은 마취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에게 꼭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이 있으십니까?"
환자가 특별한 신앙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정중하고도 친근하게 다시 물어 봅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기도해 드려도 좋겠습니까?"
사실 마취를 한다는 것은
환자들에게 있어서 여간 불안하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더구나 의사인 그가 기도를 해 준다고 하니 환자들로서는 참으로 위안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환자가 이렇게 인사를 하면 그는 환자 손을 잡고 진심에 찬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의 손길과 기도로 환자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고 불안과 두려움은 슬며시 가라앉게 되지요. 이렇게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회복이 되면
제일 먼저 이 분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을 환자의 치유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쓰는 이 분은 믿는 바를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더 행복합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해 초조하고 불안했을 토마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온전한 믿음과 사랑의 울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행복한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몇 년 전, 종합검진을 받았다가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에 혹 같은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크기가 조금 커서 다시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지요. 다시 재검사를 하러
가는 날까지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정보를 찾아보면서 별 생각이 다 나더군요. 불안했고, 주님께 대한 믿음도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의심도 계속해서 생겼습니다. 이 모든 마음의 심정들을 정리하면 이러했지요.
“마음의 평화가 없다.”
며칠 후에 재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예상했듯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였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초음파 검사 때 장기에 의해 생긴 그림자를 혹으로 본 것 같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제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처음에 가졌던 불안함, 흔들리는 믿음, 의심 등으로 인해 잃었던 마음의 평화를 다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의 삶을 새롭게 얻은 느낌이었지요.
새 삶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정신
차려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의 마음을 조금씩 잃어버린다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평화를 잃었을 때에는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없지요. 그러나 평화를 간직했을 때에는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성공한 삶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했더군요.
‘매일 밤 평화로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겨 있는데도 방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은 것은 제자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집의 문만 아니라 마음의 문도 닫아걸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다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거듭 위로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토마스가 있을 때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역시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이 평화의 의미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평화였습니다. 두 번째는 믿음이 아직 부족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이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평화였지요. 마지막은 의심을 품고 있는 토마스를 비롯한 제자들이 의심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평화입니다.
이러한 평화를 가지고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평화를 얻으려고 합니다. 돈, 명예, 욕심, 이기심...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는 전혀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 하는 우리들을 위해, 그리고 평화를 잃어가는
우리를 향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사랑 때문이다(마리아 세실리아 바르베타).
하느님의 자비와 파우스티나 성녀
긍정의 단어
많은 이들이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아니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아십니까? 긍정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유머 감각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피츠버그대
사라 프레스먼 연구 팀이 100여 명의 자서전에서 긍정적이고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표현들을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긍정적이고 유머
감각을 드러내는 표현을 많이 쓴 자서전의 저자들이 그렇지 않은 저자들보다 6년 반이나 오래 살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쓰는 말을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어떤 말을 쓰십니까? 긍정적이고 유머가 가득한 말을 쓰게 될 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좋지 않습니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김대열신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20,25) ----
불신앙을 상징하는 구절로서 오랜 동안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사도 토마스의 말임을 우리는 압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도 토마스의 태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성령강림 체험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쌓여 혼돈에 빠져있을 때,
가장 용기 있게 확실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자 했던 이가 토마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 야단을 맞는 장본인이 되었지만, 제일 먼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Dominus meus et Deus
meus!)” (요한20,28)을 고백한 이는 토마스였습니다.
과연 우리라면 어떠했을까요? 다른 열 제자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고, 충분히
토마스와 같은 태도를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장에 없었고, 그저 다른 동료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지 않고도 옳은 것만 믿을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도 토마스는 보통의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의
모습들 역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삶을 다하는 날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진위를 따지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닙니다.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지적 동물의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에 속아서 사이비 종교에
주저함 없이 빠져드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성격이나 성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성격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느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신의 성격에 백
퍼센트 만족할 이는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의 단점이나 약점은 오히려 하느님을 보다 더 잘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토마스 사도가 순교의 관을 쓰기까지의 신앙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기싸움과 갈등과 번민이 있었을까를
짐작해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린토2서12.9)
< 교회 안에 있는 치유의
힘 >
-전삼용신부-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그려낸 요즘
개봉중인 영화 ‘한공주’. 요즘 우리나라가 큰 슬픔에 잠겨있고 가슴이 먹먹하기 때문인지
과거의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재조명한 영화가 또한 잔잔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여학생인 많은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전학을 강요받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한공주’인 이 여학생은 그 어른들에게 눌려 이렇게
말합니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
그렇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여야만 하고 이 세상 누구도 그를 진정한 피해자로 받아들여줄 힘이 없다는 것.
이 한 마디가 온 영화를
지배합니다.
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 한공주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살라고 놓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잘못으로
전학 온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와 한 집에 살아야 하느냐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준다고 하니까 잘 받아들입니다.
성질이 사나운 분이지만 한공주는 이
어머니와도 잘 사귀어갑니다.
한공주는 우선
‘배신자’라고 부르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전화번호까지 바꿔놓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간신히 어머니가 있는 작은 마트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지금 간신히 재혼해서 살고 있는 자신도 힘드니 엄마를 위한다면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딸에게 몇 만원을 주며
밀어냅니다.
전학 온 학교에서 한공주를 아무 이유
없이 잘 대해 주는 친구가 생깁니다.
물론 한공주의 아픔이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는 천주교 신자 친구.
한공주는 그 친구를 통해 세상과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친구는 한공주에게 어떤 아픔이
있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결심합니다.
한공주는 곧 이어 수영을
배웁니다.
물에 뜨는 것은 다 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그러나 잘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필사적으로 수영을
배웁니다.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바로 자신의 처지에서 살아남고 싶은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아픔을 치유해가며 세상에
다시 발을 붙이려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느닷없이 사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 중에 있는 그녀의 가해자들 중의
한 명에게 돈을 받고 탄원서를 써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한공주는 사인을 해
줍니다.
아빠는 그렇게 그 가해자들이 준
위로금으로 흥청망청 살아갑니다.
딸의 아픔을 이용하는
아빠.
그 와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수십
명의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신들에게도 탄원서를 써 달라고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일어난
대소동.
아무 죄도 없이 쫓겨 다녀야 하는
한공주.
그러나 학교 교장 선생님은 한공주가
그런 연유로 전학 온지 몰랐다고 하며 학교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근신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던 집 아주머니가
사귀고 있던 파출소 소장은 그 아이가 어떤 일을 당한 아이인지 일일이 다 이야기해주고,
한공주의 친구도 같은 일을 당해
자살했다고 하며,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아이를
내보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공주는 그 집에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찜질방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부모님도,
학교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한공주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그녀의 현실 앞에서는 각자의 길을 가고 맙니다.
결국 자신을 그렇게 잘 대해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자신의 유일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도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그 아이들이 성폭행을 하며 찍어놓은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였는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하게만 살고 싶었던
한공주는 짐 가방을 들고 한강 다리를 걷습니다.
자신과 함께 당했던 친구가 이미
그렇게 했듯이,
자신도 물로 뛰어드는 것 외에는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듭니다.
다시 떠오릅니다.
살고 싶은 욕망.
그래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해
보지만 역시 한강의 빠른 물살에는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녀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을 하게
됩니다.
아마 줄거리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하실
것입니다.
그녀의 가해자는 대부분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당시 언론에 의해
실명과 얼굴까지 나가버리는 바람에 세상에서 죄인처럼 간신히 살아가거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나도 그녀의 지인 중 하나였다면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알겠지만 나조차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받아주며 그와 함께 아픔을 같이 할 자신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뭉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썩은 사과 하나를 상자 안에
넣어놓으면 며칠이 안 돼서 상자 안의 대부분의 사과들이 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뭉치더라도 그 썩은 사과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다른 누구로부터 받지 못하면 세상과 함께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교회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건물을 지으면 허물어지고
물건을 만들면 시간이 지나면서 고장 나고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교회는 교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불신앙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불신앙을 참 신앙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에너지가 어디에서부턴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2천년 동안 수많은 불신앙과 이단의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교회가 못마땅하여 뛰쳐나간 사람들은
많아도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의 신앙을 무너뜨린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성령의 힘이
작용함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상처 입은 사과가
다른 사과들까지 전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교회는 그 상처 입은 사과까지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불신앙으로 교회
안에 머물렀던 토마 사도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에게 믿음을 주신 것처럼 지금도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에게 온 가족을 잃은 고정원씨는
이 세상에서라면 그런 용서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분이 그분을 교회로 이끄셔서
그분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셨습니다.
고정원씨는 세례를 받고 유영철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치유되고 남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교회로 이끌었던 그분의 대부는
세례를 받자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분을 감싸드릴 수
없지만 교회는 할 수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알아서
다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온전히 받아주어 내
상처가 치유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자신들 또한 그 상처의 아픔 때문에
고통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스처럼 세상
사람들이 아닌 교회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교회 안에 머무르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주 안에서만 이 세상 험한
물결을 이겨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나
여러 여인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모두 교회에 알리고 교회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본 가난한 집안에서 유명한
사무라이가 되었던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새로운 성의 기둥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아들이 그 힘으로 온갖 모욕이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을 벗어나는 즉지 그
어머니의 희생의 힘을 잃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작용하는 이 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처럼,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더라도 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토마스 한
사람에게는 타나나시지 않으셔도,
교회에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영원히 머무를 하느님의
치유의 힘을 믿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인영균신부- 복음서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 두려움 속에 갇혀있었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목숨도 언제 비명
속에 스러질 지 모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두려움의 더 깊은 이유는
자신들의 탓과 허물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스승이 잡혀서 고문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기까지 눈과 귀를 닫고 의식적으로 모른 채하며 숨어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면 이 죽음은 자신들의 탓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거운 죄의식이 제자들을 두려움 속에
갇혀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숱한
잘못을 저지르며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밝은 죄의식이 있는 반면 어두운 죄의식이 있습니다.
밝은 죄의식은 참다운 참회를 불러일으키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목말라합니다.
그러나 어두운 죄의식은 자기 안에 갇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파멸이며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면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기원하십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할 때 우리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우리를 풀어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부어줍니다.
죄의식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이끌어주는 양심의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 성야 빛의 예식 부활찬송에서 아담의 범죄를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고 칭송했습니다.
자비는 죄를 용서하고 기쁨 속에서 감사드리게 이끕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노래합시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이수철신부-
.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자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탁월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고,
교회는 2001년부터 매해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
특히 오늘 부활 제2주일이 각별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대의
위대한 두분의 교황인
요한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
시편 성무일도시 흥겹게 노래하던 시편 136장이 생각납니다.
두분 교황의 시성을 통해서도 우리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심을 깨닫습니다.
'눈을 통해서 영혼은 사물을 본다'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눈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온 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자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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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노란 리본이란 글이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예전에도 강론에 인용했던 적이 있는데 다시
인용합니다.
.
-노란리본-
수년간 감옥에서 출소한 사나이!
그는 시골 버스의 흥겨운 노래와 즐거움을 외면한
채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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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있던 사람들은 함께 하지 않는 이 사나이를
보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
.
그는 출소하기 전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나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마을 언덕에
있는
참 나무에 노란 리본을 걸어 달라.
버스 안에서 노란 리본이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되면 나는 버스에 내릴
것이고
노란 리본이 없다면 당신이 나에게 마음이 떠난 것으로
알고
멀리 가게 될 것이다’라고 편지를 썼다.
.
이 편지를 받은 부인은 참 나무에 노란
리본을
하나씩 하나씩 달기 시작하여
온 나무 전체에 가득 차게 매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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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한 사나이는 마을 어귀에 도착하였는데
고향사람들의 환영의 박수를 받으며
기뻐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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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이러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구체적 실천 방안에 대해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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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함께(together with)
살아가십시오.
함께 살아야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함께가 없는 혼자만의 고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함께 살면서 나눔의 기쁨 없이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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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이 사랑넘치는 공동생활의 축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용이 아름다워 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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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한 마음으로 모이고 이집 저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샀다,'
(사도2,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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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공동체, 식탁 공동체, 찬미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게 유토피아 공동체의 원형이요 이에 영감 받아 탄생한 수도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는 환히 계시됩니다.
이런 공동체는 인류의 영원한 꿈이자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해야 할 우리의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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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즐거워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온누리에 충만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으면 저절로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절로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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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하느님은 매사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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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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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서에서 베드로의 간곡한 권고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얼마 동안은 시련을 겪고 슬퍼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순수해져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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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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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넘치는 하느님의 자비에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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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이들은 저절로 평화의 사람들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화를 통해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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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라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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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화가 진짜 평화입니다.
세상에는 거짓 평화도 무수합니다.
주님 선물의 평화가 진짜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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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제자공동체에 나타나실 때마다 우선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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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너희와 함께!“
거푸 세 번이나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종파를 초월해 온 인류가 희구하는 평화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결정적 평화의 답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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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도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주님의 평화 없이는 공동체는 분열, 불화, 불목, 불만, 불평 등 온갖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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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화가 개인의 내적일치는 물론 공동체의 일치도 이루어 줍니다.
하여 매일 공동체 미사를 통해 주님께
선사 받는 평화가 그리도 고맙고 소중합니다.
주님은 평화만이 아니라 기쁨도
선사하십니다.
평화와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한
세트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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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이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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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세가지 실천사항을 가르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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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함께 살아가십시오.
2.즐거워하십시오.
3.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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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의 최상의 응답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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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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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고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훗날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약속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비주일인 오늘 모두가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파우스티나 성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이 자비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 자신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신
것처럼, 측량할 수도 없고 다 써버릴 수도 없을 만큼 한없이 많고 큽니다.”하느님의 자비에 머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자비의 예수님 성화를 간략히
소개해 드립니다.
이 성화는 자비의 성모 수녀회의
파우스티나 수녀님께 1931년 2월 22일 폴란드의 플럭에 있는 수녀원에서 보여주신 환시에서 비롯됩니다. 수녀님께서는 고해신부님의 권고에 따라
일기를 쓰시게 되었는데 그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저녁에 방에 있을 때에 나는 흰 옷을 입으신 주 예수님을 보았다. 그분은
강복하시는 모습으로 오른 손을 들고 계셨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얹고 계셨다. 입고 계신 옷 속에서 ..두 줄기 굵은 빛이 비쳐 나왔는데
하나는 붉은 빛이었고, 다른 하나는 옅은 빛이었다. 붉은 빛은 우리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피요, 영원한 자비의 피다(영혼의 생명인 피). 엷은 빛은 영혼을 의롭게 하는 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을
의미한다. 이 보호속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299쪽)......잠시 후 예수님께서 ‘네가 지금 본대로 상을 그려라. 그리고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말을 적어 넣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화의 공경에 부여된 약속들이
있는데 상본의 공경은 신뢰에 찬 기도와 자비의 실천을 함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님이 아주 명확하게 밝혀주신 세 가지의 약속이
있습니다.
* 상본의 공경에 부여된
약속들
1. “나는 이 상본을 공경하는
영혼들이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즉 예수님은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신다.
2. “이미 이 땅에서 특히 임종의
시간에 원수를 누르고 승리할 것도 약속 한다.”이 말씀은 구원의 원수들을 누른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향한 길에서 높은 단계를 이루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특별히 임종의 시간에 내가
친히 그들을 내 영광으로서 지킬 것이다.”이 말씀은 행복한 임종의 은총을 약속한다.
이는 굳건한 신뢰의 정신으로 성화의
예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베푸시는 은혜의 범위나 크기에 한계를 안두시겠다는
의미이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 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사실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 합니다. 어째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 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좌절하여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이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주님께 의탁하면서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말은 잘 못하거나
얼굴은 못 생겼는데 말은 잘하면
‘천만다행’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는데 말도 잘 못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얼짱, 몸짱도 좋지만
마음짱이 제일입니다.
*** 베스트 거짓말
1. 자리 양보 받은 어르신 ;
에구…괜찮은데.. ; 양보 안 하면 속으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2. 정치인 ;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3. 옷가게 ;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맞춤옷 같아요. 얼굴이 뭔 상관있어 매상만 올리면 되지!
4. 음주운전자 ; 딱 한잔 밖에 안
마셨어요. 잔의 크기가 문제지….
5. 친구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조금 있으면 온 동네 소문나요!
*** 정직합시다.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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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