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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개당귀
--사라지는 미래
김추인
웃지마라
아무데나 근본을 들이대는 족속이 아니다
오지 중의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 쯤이 아니면
문패를 걸지 않는다
뭐라。날 두고 개당귀라 했느냐
당귀와 비스무리 해서라 했느냐
이름이야 입성 하나 더 걸치는 것
내 이명은 지리광활,
좀 어려우냐
새삼 경이 같은 것 찾으러 들지마라
말순이나 말코플로나
말순이나 말똥가리나
말순이나 말오줌꽃이나 개오줌 풀이나
조물주 보시기에 모두 같은 각기 다른
아기 부처들
당신의 열손가락이다
개당귀라 함부로 골라 내버리던 것을
참당귀보다 항암효능 월등하다는 발표 업고
천정부지 귀한 몸 취급이냐
초부들 날 찾아 지리산을 허대느냐
몸 말려 너희 병질 치유에
쓰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내 생이 바뀌겠느냐
내 본시 시푸른 족속, 풀일 뿐이니
그 입 다물라
* 바디 나물속의 지리광활이라고도 불림.
최근 개당귀 추출물을 쥐에 투여한 결과 이식했던 암세포가 소멸됨을 발견 참당귀보다
효능이 특출함을 학계에서 발표함.
그러나 참당귀보다 독성이 강해 식용은 금지되고 있음.
----김추인, [개당귀--사라지는 미래](애지, 2008년 여름호) 전문
‘예술을 위한 예술’도 있고, ‘인간을 위한 예술’도 있고, 돈을 위한 예술도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순수예술가의 화두이고, ‘인간을 위한 예술’은 참여예술가의 화두이며, ‘돈을 위한 예술’은 대중예술가들의 화두이다. 순수예술가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 살아가지도 않으며, 또한 사회적인 혁명을 위해서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직 미적 자율성만을 믿으며, 자기 자신들의 영혼을 그들의 작품 속에다가 불어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여예술가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머나 먼 하늘나라의 전지전능한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허구(개념)보다는 부단히 짓밟히고 탄압받는 인간의 해방을 위해서 살아가며,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부르짖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중예술가들은 순수예술이나 참여예술의 이념과 그 가치 따위들은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오직 돈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들의 영혼마저도 팔아버린 자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순수예술가들은 한사코 사회 역사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보다 더 낫고 보다 더 행복한 사회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망각한 현실도피주의자들일 수도 있고, 참여예술가들은 예술의 미적 자율성을 무시하고 예술을 단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현실주의자들일 수도 있으며, 대중예술가들은 오직 돈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들의 영혼마저도 팔아버리는 기회주의자들일 수도 있다. 나는 예술의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예술지상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회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기보다는 그 예술작품 속에다가 이상 사회를 열망하는 만인들의 꿈과 행복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술 가운데는, 그것이 아무리 승화된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원을 이 세계에다 두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예술이 사회에 대해 취하는 그 적대적 입장으로 해서 사회적인 것이 되며, 예술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오직 자율적인 예술로서일 뿐이다”라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의 참된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무엇을 위한 존재이란 말인가?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존재이란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존재이란 말인가? 내가 있고 타인이 있다. 만일, 내가 있고 타인이 있다면 ‘나’의 존재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선하는 존재이며, 나는 나의 꿈과 욕망을 쫓아서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기적인 존재이며,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 따위에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무리를 짓고 살아가는 군축동물(사회적 동물)이지, 모든 것을 제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독립영양인간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 이기적인 ‘나’는 만악의 근원에 해당되고, 이타적인 ‘나’만이 착하고 선량한 인간이 된다. 나는 이타적인 존재이며 이해타산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직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자아 없는 존재이다. 타인들이 있고 내가 있지, 내가 있고 타인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나, 이 자아 없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라면, 우리 인간들의 생존과 삶 자체가 그 어떠한 의미조차도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와 부모형제,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들, 이민족과 우리 한국인들, 국가와 국가간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철두철미하게 자아 없는 존재, 즉, 이타적인 존재들만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일 수도 있고, 이타적인 동물일 수도 있다. 나는 나를 위한 존재일 수도 있고, 나는 타인을 위한 존재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나’와 ‘타자’의 경계, 또는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 속에서, 마치, 까마득한 외줄타기의 곡예가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 인간이기 이전에 자아의 존재 근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바로 그 자아의 존재 근거를 통해서 타인들을 만나고 그 타인들과 함께 공동체 사회를 보다 낫고 보다 행복하게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은 그가 그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으로서 우뚝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타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그가 그의 전문성을 통해서, 타인들의 고통과 불행을 치유하고 구원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인생이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이며, 이 외줄타기만이 순수예술인 것인지도 모른다.
김추인 시인은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고,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벽으로부터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등을 출간한 바가 있다. 당귀 當歸란 무엇이고, 개당귀란 무엇인가? 당귀란 산형과의 숙근초이며, 보혈작용補血作用과 활혈작용活血作用, 그리고 항암효과에 매우 뛰어난 약초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당귀란 말은 그 옛날 중국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데,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의 품속에 당귀를 넣어주면 그 남편이 당귀를 먹고 기력을 회복하여 반드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약리학적으로 당귀는 관상동맥의 혈류량을 촉진시키고 적혈구의 생산을 왕성하게 한다고 한다. 개당귀란 또다른 이명異名인 ‘지리광활’이라고도 불리우며, 참당귀와 유사한 식물을 말한다. ‘참’이라는 접두사는 ‘진짜’, ‘진실’ 등의 뜻을 나타내고, ‘개’라는 접두사는 ‘참된 것이 아닌’,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값어치가 없는’ 등의 뜻을 나타낸다. 참뜻, 참말, 참먹, 참숯 등은 전자의 예에 해당되고, 개꿈, 개떡, 개머루, 개당귀, 개죽음 등은 후자의 예에 해당된다. 요컨대 당귀는 참당귀가 되고, 개당귀는 가짜 당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추인 시인의 시적 화자는 ‘개당귀’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그 사회적 통념의 변모에 매우 화가 나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옛날의 마님의 말투를 빌어서 그 첫머리를 시작하게 된다. “웃지 마라/ 아무데나 근본을 들이대는 족속이 아니다/ 오지 중의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 쯤이 아니면/ 문패를 걸지 않는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다. “웃지 마라/ 아무데나 근본을 들이대는 족속이 아니다”라는 시구는, 비록, 제 아무리 너희들이 비웃을지라도 나는 부화뇌동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되고, “오지 중의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 쯤이 아니면/ 문패를 걸지 않는다”라는 시구는 오지 중의 오지, 즉, 그토록 맑고 깨끗한 곳이 아니면 그 터전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지조높은 자의 고귀하고 위대한 정신을 뜻하게 된다. “웃지 마라”는 개당귀로서 그 비웃음을 잠재우는 정언명령의 말이고, 그 정언명령 다음에는 ‘뭐라/ 날 두고 개당귀라고 했느냐/ 당귀와 비스무리해서라 했느냐“라고, 매우 강한 부정형의 의문문으로 반문을 하게 된다. ‘뭐라’는 ‘무엇이냐’의 준말이고, ‘무엇이냐’는 이름이나 그 내용이 불분명할 때 사용되는 의문문이다. ‘뭐라’라는 의문문 속에는 참당귀에 비하여 가짜 당귀, 즉, 개당귀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에 대한 강한 불쾌감의 표시이면서도 매우 신경질적인 그 옛날의 마님의 말투가 배어 있는 것이다. 마님은 아름답고 우아한 마님이고, 또한 마님은 그 천성이 매우 맑고 깨끗한 지조 높은 마님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자기 자신이 ‘개당귀’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으면서도, “이름이야 입성 하나 더 걸치는 것”처럼 별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 “이름이야 입성 하나 더 걸치는 것”이라는 시구는 세간의 호칭과 그 정평에서 너무나도 의연하고 꿋꿋하다는 것을 뜻하고, “내 이름은 지리광활”이라는 시구는 그 이름 자체가 옷 하나 더 입는 것처럼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내 이름이 ‘지리광활’이라는 어려운 이름으로 불리거나, 또는 가짜 당귀로 불리거나 간에, 그 이름 자체에는 아무런 경이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시적 화자의 너무나도 분명하고 단호한 전언인 것이다. 이름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며,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의 본질을 올바르게 드러내지 못한다. 이름은 그 이름을 부여한 자들의 한계내에서 붙여진 잠정적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이름이 지시하고 있는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게 되면, 그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개당귀가 참당귀로 변모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참당귀가 개당귀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들은 서로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을 뿐, 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서로가 다른 이름들, 즉, 그 차이는 존재의 개성을 뜻하고, 차별은 상하관계와 우열관계 등의 폭력적인 서열관계를 뜻하게 된다. 김추인 시인의 개당귀는 사회적 통념, 즉, 계급차별과 인간(사물)차별을 넘어서서 만인의 평등과 그 평등한 존재들의 개성을 옹호하고 있는 제일급의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당귀와 참당귀의 차별도 있을 수가 없고, “말순이나 말코플로나/ 말순이나 말똥가리나/ 말순이나 말오줌꽃이나 개오줌 풀이나” 모두가 다같이 “아기 부처들”의 “열손가락”인 것이다. 부처는 맑고 깨끗한 존재이며, 고귀하고 거룩한 존재이다. 부처는 우리 인간들(모든 사물들)의 미래의 이상형이지만, 그러나 그 부처는 누구나 다같이 되어갈 수 있는 부처이지, 머나 먼 하늘 나라의 부처가 아니다. 참당귀도, 개당귀도 부처이고, 말순이나 말코플로도 부처이다. 말똥가리나 말오줌꽃도 부처이고, 개오줌풀도 부처이다. 요컨대 모든 사물들은 다같이 아기 부처이고, 소중한 사물들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물신物神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며, 오직 돈만이 최고의미덕이 되고 있는 사회이다. 돈은 그 자체로는 한 장의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돈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곧바로 행복의 보증수표가 된다. 돈은 명예이고, 권력이고, 부이다. 돈만 있으면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쉽게 전도시킬 수도 있고, 또한 돈만 있으면 만인평등을 비웃으면서 그 모든 사람들을 가축화시킬 수도 있다. 유전무죄이고 무전유죄이다. 돈은, 단지 물물교환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오늘날의 돈은 전지전능한 물신이 된다. 우리는 돈을 숭배하고, 돈 앞에서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그 돈의 명령에 따라서 그 어떠한 살생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있고 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필요에 의한 생산은 사용가치를 위한 것이 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생산은 교환가치를 위한 것이 된다.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게 되고, 따라서 자원의 낭비와 자연의 파괴를 막을 수가 있지만, 그러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필요악이 되어버리고, 오직 더 많은 자원의 낭비와 생태환경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패턴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에 지나지 않게 된다. 돈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고, 또한 돈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별을 생산해낸다. 어제의 개당귀가 오늘의 참당귀가 되고, 어제의 참당귀가 오늘의 개당귀가 된다. 오늘의 참당귀가 내일의 개당귀가 되고, 오늘의 개당귀가 내일의 참당귀가 된다. 그 이름의 명명자는 돈이며, 돈은 새로운 의미의 생산자가 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돈은 영생불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화뇌동하는 존재이며, 돈을 위해서 살고, 돈을 위해서 그 모든 정절들을 다 바쳐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개당귀라 함부로 골라 내버리던 것을”이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참당귀보다 항암효능 월등하다는 발표 업고/ 천정부지 귀한 몸 취급이냐/ 초부들 날 찾아 지리산을 허대느냐”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암이란 무엇인가? 암이란 정상세포와는 다르게 무한히 증식하는 세포이며, 그 원발병소原發病巢로부터 아주 쉽게 그 전이가 가능한 악성종양을 말한다. 상피성上皮性 세포에서 발생하는 악성종양은 암종癌腫이라고 부르고, 비상피성 세포에서 발생하는 악성종양은 육종肉腫이라고 부른다. 암의 종류로는 폐암, 대장암, 유방암, 위암, 간암, 자궁경구암 등이 있고, 대부분이 현대의학으로도 그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암이란 무엇이고, 개당귀란 무엇인가? 암이란 불치의 병이고 개당귀란 항암효능을 지닌 약초를 말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암과 개당귀 자체의 구분도 없어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암 자체가 돈이 되고, 개당귀 자체가 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될 수 없는 질병은 질병----에이즈나 백혈병과도 같은 희귀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들은 타산성이 맞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제약회사들이 생산하기를 꺼려한다----도 아니며, 또한 돈이 될 수 없는 식물은 식물----돈이 될 수 없으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도 아니다. 너도 돈이고 나도 돈이다. 너와 나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행복한 존재이다. 너도 돈이 아니고 나도 돈이 아니다. 너와 나는 저주받은 존재이며 불행한 존재이다. 어제의 개당귀는 돈이 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개당귀는 돈이 된다. 따라서 오늘의 개당귀는 돈 자체가 되고, 그 돈의 노예들인 우리 인간들은 그 돈을 찾아서 “오지 중의 오지”인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 헤매게 된다. 개당귀는 참당귀가 되고, 참당귀는 ‘천정부지의 귀하신 몸’으로 돈 자체가 된다.
참된 시인은 자기 자신의 이해타산에는 무관심한 존재이며, 오직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보편적 가치, 즉, 만인들의 행복의 원리로 승화시켜나가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대를 초월해서 머나 먼 미래의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인간 앞에서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없는 곳, 자기 자신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되 어떠한 부조리에도 휩쓸리지 않는 곳, 부귀도 음란할 수가 없게 하고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그 신념을 굽히지 않는 곳, 제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곳----, 바로 이 맑고 깨끗한 곳이 참다운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윤리를 공동체 사회의 윤리로 이끌어 올리고 있는 선구자이며, 그 사상과 이념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워주고 있는 선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동시대의 파렴치한이며, 그 저주받은 운명으로 보다 낫고 보다 행복한 사회를 창출해내는 진정한 시인이다.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범죄자가 그 낙인찍힌 수의囚衣를 벗게 되면, 그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 인간들의 문화적 영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자와 범죄자는 동일한 인물의 양면일 뿐인 것이다.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문명과 문화의 건설도 가능하지가 않게 된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며, 그는 그 거부의 몸짓으로 그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김추인 시인의 [개당귀]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개당귀’이지, 이타적인 존재로서의 ‘개당귀’가 아니다. 그는 그의 존재가 무한히 버림을 받고 소외되었을 때에도 오직 자기 자신이었고, 또한, 그의 존재가 그 교환가치에 의하여 귀하신 몸이 되었을 때에도 오직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늘, 항상, ‘오지 중의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쯤’에 그 존재의 집을 짓고,
몸 말려 너희 병질 치유에
쓰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
내 생이 바뀌겠느냐
내 본시 시푸른 족속, 풀일 뿐이니
그 입 다물라
라는, 매우 지조가 높고 절개가 곧았던 선비이었던 것이다. “웃지 마라/ 아무데나 근본을 들이대는 족속이 아니다”라는 시구와 “내 본시 시푸른 족속, 풀일 뿐이니/ 그 입 다물라”라는 시구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이며, 그 자본주의적 인간들을 교살하는 무서운 범죄의 채찍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개당귀는 사용가치로서의 개당귀이지, 교환가치로서의 개당귀가 아니다. 또한 개당귀는 예술지상주의자도 아니고, 현실주의자도 아니며, 더, 더군다나 대중예술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예술지상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홀로서기를 통하여, 그 사회를 비판하고 정화시키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있고 타인이 있다. 그 내가 있은 다음, 즉, ‘홀로서기’를 이룩한 다음부터는 타인이 있고 내가 있다. 그는 이기적인 인간에서 이타적인 인간으로, 또는, 개인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인간이며, 그 변모는 마치, 풋사과가 자기 스스로 익어서 더없이 맛좋은 사과로 변모하듯이, 그 사회적 인간의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며, 어느 누구도 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오지 중의 오지, 지리산 칠선계곡 쯤에다가 자기 자신의 존재의 집을 짓고, 그 지조가 높고 절개가 곧은 선비정신(혹은 마님정신)으로 우리 인간들의 불치병을 치료해주고 있는 개당귀여!
그 불치병을 치료해주고, 또, 치료해준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한 채 그 지조가 높고 절개가 곧은 선비정신으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찌든 우리 인간들의 불치병을 치료해주고 있는 개당귀여!
김추인 시인의 [개당귀]는 그의 홀로서기와 사회성이 돋보이는 시이며, 그의 아름답고 깨끗한 삶이 육화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나, 김추인 시인이 ‘사라지는 미래’라고 그 ‘부제’를 달았듯이, 이 지조가 높고 절개가 곧은 선비정신마저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에 반하는 그 모든 것마저도 자본화시키고, 자본이 자본의 목을 비틀고, 자본이 자본의 육체와 그 영혼마저도 자본(돈)으로 변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도 돈이 되고, 개당귀도, 개당귀의 영혼도 돈이 된다.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그 어떤 멸종의 속도보다 빨라서 하루 30여 종 이상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이러한 생태계 파괴는 운석, 지각변동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상황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우리 인류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경도된 나머지 생물의 남획, 훼손, 지나친 화석연료 사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점차 사멸되고 있는 종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지구의 상황 등등..... 내가 우리 인간들의 미래를 ‘사라지는 미래’로 보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김추인 시인 [사신] 중에서
김추인 시인은 인간 본연의 영성이 물질중심적 가치추구로 인해 상실되어가고 있는 참담한 모습을 ‘대화적 기법’을 통해서 형상화해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