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와 교동도로 떠난 안보 견학
2019년 11월 21`일 오전 9시, 서울 수유동 통일교육원에서 안보 현장 견학차 강화도 제적봉 평화전망대와 평화의 섬으로 일컫는 교동도를 가기위해 안보 관광의 길에 올랐다.
버스가 강화도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2시간이 지난 11시경이었고,강화도 제적봉과 평화전망대를 올라 예성 강 너머 북녘땅을 응시하며 분단의 아픔을 되세겨 보는 시간과, 손 뻗으면 금방 닿을 듯 싶은 개성과 송악산을 바라본후, 다시 차를 몰아 교동도를 찾았다.
교동도에 도착한 일행은 우선 이곳 명물로 통하는 "젓국 갈비"라는 매뉴의 점심을 먹고,우리를 특별히 가이드하기 위해 관광해설사로 나선 김 영애( 민주평통 자문위 상임위원)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전통 재래시장인 대룡시장으로 들어섰다.
이 날은 비록 장날은 아니었지만,우리 일행 말고도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있기도 하였고,각 상가마다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마치 장날을 방불케하는 흥미로운 풍경들을 볼수있어 매우 좋았다.
해설사는 하나라도 우리들에게 교동도의 진모습과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더 들려주려고 열심을 다하는 성의가 대단했다.
골목 상가와 장터를 돌아보게 한후, 교동초등학교와 면사무소까지 안내하여 준비한 영상 브리핑까지 해주었고,마지막 코스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제사를 모신다는 망향대까지 안내를 해주기도 하였다.
필자는 파주 임진각에서 부터 연천과 철원, 강원도 고성에 이르기까지 DMZ전역을 탐사할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지만,이곳 평화의 섬이라는 교동도를 찾기는 처음인지라 더욱 흥미가 진진했고,하나라도 더 놓치지 않고 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전국 8대 명산의 하나로 꼽았다는 화계산과, 고려 충렬왕때 최초로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는 교동 향교를 미쳐 돌아볼수 없었음은 무척 안타까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에 다짐을 하며, 오후 4시경 일행과 더불어 교육원으로 돌아가는 귀로에 올랐다.
강화 제적봉 평화 전망대
제적봉 비와 수륙양용 장갑차
현장 지역 모형도
참고로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전에는 해구(海口), 혈구(穴口) 등으로 불리다가, 이 때에 강화현으로 편제되어 강화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강화도는 원래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왔다고....
섬의 남쪽에는 제일 높은 마니산(469m)이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강화도는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하여 한때는 고려의 수도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곳 강화도에는 임진강과 한강이 흘러들어오다 예성강을 만나면서 강으로써의 수명을 다하고 황해바다로 합수되는 곳이기도 하다.
강화군 관광안내도
붉은 표시가 있는 지역이 평화 전망대 위치
군인들도 현장 견학을 나온듯....
망배단
강 건너 바라보이는 곳은 북녘땅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북한 도발사가 연대별로 정리되어있고.....
제적봉비
박 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오시어 아기봉이라 하려다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아기봉이 있음을 알고, 붉은 적을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제적봉이라 이름한듯 싶다.
평화전망대 포토존
교동도에 도착하여....
원래 교동도의 이름은 대운도(戴雲島)였으며,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불렀으나,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단다.
교동현은 강화도보다 먼저 현이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고을이기도 하다.
평화의 섬 교동도
이곳 교동도는 남과 북이 대치한 최전방 지역이긴 하나, 양측이 서로 무장을 하지않기로 한 특별한 곳이라고....
그래서 이곳에는 철조망도 없고,군인들도 총을 매고 있지 않는 곳이란다.
교동도에는 원래 원주민은 기천명에 불과 했는데,연백지역에서 몰려온 피난민이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작은 섬에 3만명이상이 함께 어울려 살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었으리라.
하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다보니 벼라별 일들이 많았다는 애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룡시장은 교동도의 중심상권이자,애환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룡이란 명칭은 이곳 황룡 우물에서 기인된 이름인데,황룡 우물엔 커다란 황색의 대룡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단다
맨 끝자락 바라보이는 산이 교동도의 주산인 화계산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옛날 선거 벽보를 보라고 가리킨다.
해설사를 따라 골목길을 걷다보면, 마치 서울 어느 지역 옛 모습을 보는 듯 싶기도 하고,시골의 아련한 추억을 되돌아보게도 하였다.
내가 어릴적 살았던 우리 고향 마을에도 피난을 왔던 피난 가족이 서너 가정 있었는데,그분들은 두부를 만든다거나 조청 엿을 만들어 팔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이 두고온 고향을 그리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린 쳤던 그 시절일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옛 모습들을 간직한 상가의 현장
격강 천리라더니/두고온 고향을 그리는 애절함이 묻어나는 시 한 편이 가슴을 울리고....
강화 교동쌀은 명품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단다.
제비들과 제비집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 교동도에 피난온 사람들이 대부분 황해도 연백평야 지역에서 내려왔다는데,그 지역에 역시나 제비가 많았단다.
바다에 사는 고기며 제비까지도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곳에 온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
본래 연백평야와 개성이며 송악산까지도 해방후에는 우리 남한 땅에 속했는데,6.25를 겪으면서 북한 땅이 되고 말았다니 더욱 마음 아픈 일이기도 하다.
교동초등학교
교동도에는 이곳 초등학교 말고도 망향대가는 길목에 10명 학생이 다닌다는 작은 또 하나의 학교가 있었다.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서있다
금년이 113주년이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초등학교가 서울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인데 그 학교가 개교한게 1894년이었다고 하니 이 작은 섬 마을에 얼마나 빨리 학교가 세워졌는가를 알수 있다.
현재 이곳 교동초등하교는 학생수가 100여명,서울 교동초등학교 역시 100명 수준을 유지하다가 폐교 위기에 몰려 각종 특별 혜택을
부여하면서 원거리 학생들이 몰려들어 폐교위기를 벗어 났다고 들은바 있다.
화계산의 전경
화계산에는 화계산성과 봉수대가 있기도 하며,화계사라는 절이 있기도 하단다.
학교 건물을 끼고 면사무소를 향하여 오르는 길
담장엔 벽화와 시 들이 가득하였고....
교동 면사무소
상공에서 찍은 교동도
교동도는 본래 작은 섬들이었는데 고려말 최 영 장군이 방조제를 쌓아 오늘날 교동도가 되었단다.
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는 장면
한강,임진강,예성강 3강이 합수되며 나타난다는 합수장면 현상이 신기했다.
차로 이동하여 찾아간 망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