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와 평화(平和)
세상은 항상 이원론적 대립으로 갈등하고 있다. 정의와 불의, 평화와 전쟁,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 보수와 진보에서 싸우며 헤쳐 나가고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반합(正反合)의 일치를 이룬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어떤 삶이 구원에 이르는지 제자에게 가르치며 세상에 전파하라고 하셨다. 그의 열두 제자를 특히 사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 제자의 악의로 죽음에 이르셨다. 그의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은화 30냥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겨 죽게 했다. 그는 불의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어떠한 죄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를 하신다고 하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더 큰 죄악임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전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붙잡아서 넘기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자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다 순교로 삶을 마감하여 성인이 되었다.
도마 안중근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하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저격하여 암살했다. 당시 한국의 천주교 뮈텔 주교는 그를 살인자의 죄인으로 취급하며 성사를 베풀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도마의 행위는 세상 평화를 위한 정당방위로 받아들여 복권시켰으며 시복 운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라에서도 그를 의사(義士)의 칭호로 부르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도 불의에 항거함은 정의로움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의와 불의, 전쟁과 평화는 관점에 따라 바뀌어 해석하고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국의 입장에서는 정의로 상대의 불의에 항거하고 있다는 논리이다. 우리나라도 남북이 갈리어 일촉즉발의 상태이다. 북쪽의 저네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 무기를 만들고 핵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 강대국은 전쟁과 같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 과학과 기술의 우월성에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조그마한 국가지만 모든 면에서 상위권에 진입하여 그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 나라와 외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노벨상도 그런 선상에 놓여있지 않을까 싶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속담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더군다나 급속도로 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물질적 가치를 초월하여 정신적 가치에 삶의 방향과 목표로 나가는 정의와 평화가 있기를 바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