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05]모처럼 소설小說에 맘을 뺏기다
정읍에 사시는 지인형님이 지난 11일 밤 “1년 7개월만에 모처럼 기쁜 날. 가느다란 한줄기 빛이 보이네.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서점입니다』 읽어봐. 아주 따뜻한 소설이야” 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한줄기 빛’은 그날 치러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야당후보의 당선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색적인 제목만으로도 흥미가 일었고, 7학년 2반(72세) 형님의 “따뜻한 소설”이라는 추천을 받아 다음날 임실군립도서관을 찾았다. 정지아 작가의 책 두 권과 김진명 작가의 『글자전쟁』도 함께 빌렸다. 그리하여 모처럼 한 열흘, 소설 읽은 재미에 푹 빠졌다.
# 맨먼저 ‘큰글자’로 펴낸 김진명의 소설을 읽었다. 한자漢字를 중국인 창힐蒼頡이 최초로 만든 게 아니고,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은殷에서 만들었다(그러니, 한자가 아니고 ‘은자殷字’라 해야 마땅하다)는 다소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진명의 소설(천년의 금서, 직지, 최후의 경전 등)들은, 최인호의 역사소설(잃어버린 왕국, 상도, 유림, 해신 등)이 그렇듯, 언제나 시종일관 흥미진진하다. 사는 게 심드렁하고 일상이 무료할 때 읽기에 딱 좋은 소재들이다. 헷갈리는 한-중-일(미국까지) 역사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작가의 조국사랑이 한결같아 늘 놀랍다. 조弔와 조(口+巾)자를 둘러싼 한자의 원조시비. 우리가 자연스럽게 쓰는 ‘답沓’이 중국자전에는 왜 없는 것일까? 그들은 실제로 ‘답沓’을 ‘수전水田’이라고 쓴다. ‘집 가家’자도 한자 탄생 이전에 은나라에서 썼다고 한다.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한자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면, 무조건 무시할 일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럴 듯한 구성과 스토리텔링이 무척 재밌다. 그의 책들을 통독通讀하고 나면, 왠지 한국인이라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워진다. 픽션(가공)과 팩트(실제)를 버무리는 솜씨(글재주)가 절묘하다. 팩션faction하면 김진명. 작가는 말한다. “허구라는 장치를 통해 늘 진실을 알리고자 애썼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신 15/191001]소설 ‘직지(直指)’는 무엇인가? - Daum 카페
# 지난해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문단에 큰 화제(베스트셀러)를 불러일으킨 정지아는 이미 27살 때 쓴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소설로 그 이름이 뚜렷한 작가이다. 최근, 본인이 ‘술꾼’임을 만천하에 글로 공개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라는 에세이집을 접한 후 작가에 대해 더욱 흥미를 느껴(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9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 Daum 카페 ), 도서관에서 찾은 게 『나의 아름다운 날들』과 여성작가들(정지아, 손보미, 황정은, 김유담, 윤성희, 김강, 김애란)의 작품을 모은 『끌어안는 소설』이었다. 모두 이름도 처음 들어본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요즘 소설의 경향을 엿보게 하는데 충분했다. 한편 정지아의 단편 11편은 일단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다. 정여울 문학평론가가 작품해설의 제목을 ‘아름다운 소멸을 꿈꾸는 이들을 위하여’로 한 것은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같다. 그렇다. ‘아름다운 소멸’ 후에는 ‘희망의 불씨’가 있다.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즐거운, 작가의 그렇고그런 글의 수다가 반가웠다. 아버지가 수시로 ‘모자帽子’로 변신한다는 황정은의 <모자>나 출산율을 높이려는 ‘정자은행’과 인공수정 이야기인 김강의 <우리 아빠>는 주제가 넘 참신해 흥미를 끌었고, 정지아의 <말의 온도>는 남도 사투리의 억양까지 따뜻했다. 가끔은 이런 류의 소설을 접해야겠다.
# 대형 서점도 경영이 어려운데, 동네서점이 어떻게 망하지 않고 꾸려가는가?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황보름 작가의 장편소설 <휴남동 서점>이 그 궁금증을 다 풀어주었다. 책 머리에 쓰여진 소설가 닐 게이먼의 “서점이 없는 마을은 마을이 아니다. 스스로 마을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영혼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 것이다”는 말이 참 재밌다. 영주(책방 주인)는 이혼 후 오랜 꿈이었던 ‘동네책방’을 차리고 참 재미없게 살아가다, 바리스타, 지역주민 등 차례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엄마들과 독서클럽을 갖고 작가들을 초청하여 북콘서트를 열며, sns 등을 통해 동네책방의 존재를 알리며 ‘무엇이 동네서점을 살아남게 하는지’를 알게 된다. 커뮤니티(공동체)를 지향하는 작은 책방의 ‘열린 공간’은 조금씩 아프게 사는 소시민들에게 힐링의 장소로 제공되어 점차 활기를 찾는다. 사람이 모이고 감정이 모이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 소설의 출연인물들은 하나같이 조용조용하면서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친절이 흐른다. 억지가 하나도 없다. 뜨개질하는 여자도, 아무런 꿈이 없이 보이는 바리스타도, 글쓰기를 지도하는 평범한 직장인도, 아들에게 꿈을 심어주려는 엄마도 마음들이 따뜻하다. 작가는 소설을 쓰자고 작정할 때, 맨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휴’자, 한 글자였다고 한다. 힐링의 휴休, 동네이름이 휴남동이어서 무작정 그 동네에 책방을 차렸다는 영주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하나 하나’ 이야기인 듯하다.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해요. 책, 동네서점, 책에서 읽은 좋은 문구, 생각, 성찰, 배려와 친절, 거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끼리의 우정과 느슨한 연대, 성장,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화, 그리고 좋은 사람들”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매일 읽겠습니다』 『난생처음 킥복싱』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 등 작가의 다른 작품집 제목도 재밌어 빌려 읽어봐야겠다. 농한기인 올 겨울엔 밀리언셀러라는 『불편한 편의점』 등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읽어보는 걸로.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