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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에는 (이동원 목사)의 룻기 강해설교 <이렇게 선택하라> 중 “고통에서 찬송으로”(룻4:13-22/p101~110)를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마지막 장면이 슬프거나 허무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쓰린 심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맴도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그 끝이 아주 유쾌하고 깨끗한 해피 엔딩(happy ending)의 드라마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룻기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마라”, 즉 “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오미의 가정이 걸어야만 했던 길고 어두운 고통의 장, 쓰디쓴 ‘고통’의 장이 (1장)이었습니다.
- 그리고 (2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은혜”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2:2) 이렇게 은혜 입기를 원하는 룻의 모습으로 시작된 (2장)은 ‘은혜’의 장이었습니다.
- (3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안식”이란 단어입니다.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3:1) (2장)에서 은혜를 입은 룻이 드디어 안식에 대한 여명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룻의 삶의 장에 드디어 쉼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3장)은 바로 ‘안식’의 장인 것입니다.
- 그 다음 마지막 (4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찬송”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4:14) 그래서 (4장)은 ‘찬송’의 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룻기는 고통으로 시작했다가 찬송으로 끝난 해피 엔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고통에서 찬송으로”인 것입니다.
- 1. 전환을 위한 결단 : 룻기 (1장)에서 우리는 슬픔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우리는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만납니다. (1장)에서 우리는 불안하여 방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우리는 그들이 마침내 안전한 삶을 누리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1장)에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은 너무 빈곤하고 창백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는 풍요가 찾아옵니다. (1장)에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짙은 고독을 발견합니다. 외롭기 짝이 없는 허전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웨딩 벨(wedding bell) 소리와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의 희열에 찬 모습을 발견합니다.
- (1장)이 고독의 장이라면 마지막 (4장)은 교제의 장입니다. 룻기 (1장)에서 우리는 저주 받은 인생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우리는 회복된 사람의 삶, 다시 축복받은 사람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봅니다. (1장)은 장례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죽어있는 사람들의 시체 앞에서 슬픈 눈물을 흘려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4장)은 새로운 출발인 신혼의 입맞춤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1장)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명의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에 나타난 사람들은 역사의 무대 위에 스타로 군림하는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 이와 같은 (1장)과 (4장)의 날카로운 대조는 얼마나 극적인 한 편의 드라마인가요? 그런데 이 놀라운 전환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장례식의 슬픈 저주를 결혼과 새로운 출생으로 바꾸는 이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고독과 빈곤을 황금빛 풍요로 처리하는 이 위대한 드라마는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습니까? 불안과 슬픔을 위대한 찬양으로 이끄는 이 드라마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 여인의 결단, 룻이라는 여인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 먼저 룻기 전체를 통해서 룻의 중요한 결단 두 가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첫째로, 희생의 결단입니다. : 룻은 자기가 생각하는 보다 위대한 삶을 위하여, 보다 차원 높은 삶을 위하여,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희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미래도, 자기의 청춘도, 일신상의 편안함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좇아 낯선 베들레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희생이었습니다. 이처럼 룻에게는 그 누구도 쉽사리 할 수 없는 희생의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둘째로, 믿음의 결단입니다. : 룻의 결단은 또한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다시 (1장)으로 돌아가서 룻이 내렸던 신앙의 결단을 보십시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16)
-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어머니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선택이고, 믿음의 선택입니다.
-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2:12) 이 구절 말씀은 보아스의 입술을 빌어서 룻의 선택을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선택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 그 삶을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 2. 결단이 가져온 축복 : 이러한 희생과 믿음의 두 가지 결단이 룻을 축복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룻은 개인적으로 자신이 축복을 받았고, 또한 남에게 축복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남에게 축복을 끼친다는 사실은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다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룻은 문자 그대로 복을 받았고 복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 룻이 개인적으로 받은 축복을 헤어 보면, 남편 얻고, 자식 얻고, 재물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들어가고, 또 하늘나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룻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축복을 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첫째로, 룻은 나오미에게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 룻의 영광은 또한 시어머니의 영광이었습니다. (4장)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14-15절)
-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상에서 최고의 축복을 “일곱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룻을 두고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렇게 룻은 나오미에게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아기가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16-17절)
- (2) 둘째로, 룻은 새로운 남편 보아스에게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 보아스는 룻으로 인하여 메시아의 가계를 잇는 아름다운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이름 그 자체가 유명해졌습니다. 보아스는 아내 때문에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11절) 이처럼 룻은 남편에게 축복된 존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 (3) 셋째로, 룻은 자기의 삶의 장(場)인 베들레헴에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우리에게 베들레헴은 이미 유명해졌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점에서 베들레헴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베들레헴은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하나도 유명할 것이 없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그런데 룻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동네를 유명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헌신된 삶은 그의 삶의 터전인 그 사회에 영광을 안겨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4) 넷째로, 룻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11절) 이스라엘 민족이 결정적으로 형성되는 열두 지파의 기원은 야곱의 열두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열두 아들은 직접 간접으로 다 라헬과 레아 두 여인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 여인인 룻이 드디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사에 남기게 되는 이 굵은 발자취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룻은 민족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 (5) 다섯째로, 룻은 온 세상에 축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이 여인의 핏줄을 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건이 일어난 후로부터 약 1300년 후, 베들레헴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온 세상의 구세주 되신 그분이 오셨습니다. 사실 룻기에 전개되고 있는 사건은 한 여인이 남편을 사별하고 재혼하는, 그저 일상적인 범속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일상적 사건들의 굴레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그 위대한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라도 가볍게 넘기지 마시고,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성취될 수 있다는 이 사실에 놀라셔야 합니다.
- 그런데 룻기는 족보로 끝납니다. 그러면 말미에 붙어있는 이 족보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18-22절)
- 이 족보의 시작 인물인 베레스는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로부터 낳은 불륜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구세주의 족보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메시아의 핏줄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 당신 같고 저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이 죄 있는 사람을 쓰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용서받은 사람들을 쓰십니다. 우리의 범죄함이 주님 안에서 용서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 이 위대한 교훈을 위해서 시작되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이 말미의 족보를 주목해 보십시오. 살몬은 보아스의 아버지이고,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입니다(마1:5). 라합도 룻과 같은 이방 여인입니다. 메시아의 족보에는 이렇듯 이방 여인들과 범죄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은 사람들, 이방인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메시아의 위대한 역사는 만들어졌고, 그리고 거기서 구세주는 오십니다.
- 주님께서는 지금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삶이 가난하고 비참하다고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어서기를 원하는 재기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비극이 점철된 이 가정, 비극으로 시작된 이 여인의 삶이었으나, 그러나 그 삶의 마지막은 결코 슬픈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일어섰고, 붙잡힘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치유되고 새롭게 전개되는 인생의 드라마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저와 당신을 향한 얼마나 아름다운 교훈인지요?
- 이스라엘의 가장 혼란하고 하나님을 향한 불경건과 부도덕이 횡행하던 암흑의 사사 시대에 흰 장미처럼 나타난 여인 룻. 결국 룻기의 위대한 드라마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향하여 룻이 가졌던 신앙인다운 자세로 엮어진 것입니다. 고통을 극복하고 찬송을 가져온 이 삶의 드라마! 오늘 당신의 삶 속에 고통이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에 어둠이 있습니까? 이 고통을 극복하는 찬송의 드라마는 지금도 가능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선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신다면 말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