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구원을, 죄는 죽임을 가져옵니다
에페 2,1-10; 루카 12,13-21 /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2024.10.21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인간인 우리 존재의 근본과 지향이라는 기본 사실을 일깨워주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물론 살아있는 동안 이룩한 업적과 모아 놓은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모두는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주도권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으며 종종 이 기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해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 기본 사실에 따라서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된 피조물로서 우리가 이룩한 선행의 업적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기본 사실을 알게 해 주는 힘은 믿음인데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 등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자 하시는 초점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지구의 중력이 어느 한 순간에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아 쌓은 재산이나 이룩한 업적 역시 그분께 봉헌해야 하는 예물이지 우리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를 착각한다면 낭패를 볼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도덕적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를 서양에서는 귀족의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라 합니다.
병역의무, 공공시설을 위한 재산 기부, 공동선을 위한 법안 제정 등에 있어서 귀족들이 솔선수범함으로써 고대 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전통은 중세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합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백 년 동안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장기간의 항전 끝에 더 이상 식량과 보급 물자가 떨어지고 원병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칼레는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을 지휘하던 에드워드 3세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 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6명의 목숨을 요구했습니다. 칼레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재산이 많았던 부자가 자원하자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 6명이 나섰습니다. 그들은 다음 날 처형당하기 위해 쇠사슬에 묶인 채로 교수대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임신 중이었던 왕비가 자신의 아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나쁜 일을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영국 왕도 이에 동의하여 살려주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면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서양에서는 기득권 계층의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서민층에 속하는 백성은 종교적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하겠으나 조선 시대 귀족의 특권을 누렸던 양반 선비들은 물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부자들과 정치인들이나 지식인 등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한 자들은 이 상식을 대놓고 어기기 일쑤였고 그 기득권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썼습니다. 그러니 사회통합이 무너지고 공동선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현안이요 가장 중대한 사회악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믿는 이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교훈과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비추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믿음에 따른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그로 인한 결과로 주어질 것입니다.
진정 복음화야말로 단순히 신자들을 늘리려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는 이들의 도덕적 의무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의한 행동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이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갈 은총을 받으며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간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세속적인 어느 특권보다도 더 귀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할 혜택이며, 또한 이 특권이자 혜택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귀하게 살아가는 삶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책임으로 남습니다. 이 사회적 책임이 입증되어야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치가 참된 것이며 가톨릭교회는 믿을 만하다는 가신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자 하는 원의도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과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모시는 신앙인들의 삶과 활동을 통해서 그분은 지금 여기에 부활하여 계시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화를 위해서나 우리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위해서나 공동선을 위한 투신이라는 이웃 사랑의 증거가 필수불가결합니다. 믿음은 구원을, 죄는 죽임을 가져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공동선의 가치는 실종되고 권력을 이용해서 사익을 도모하려는 소인배들이 득실 거립니다. 조만간 민심이 그 권세의 배를 뒤집어 엎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