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부지 다수기' 안전기준 강화 마땅한데
사고관리계획서 쉬쉬, 공개 논의한 적 없어
후쿠시마에서 배운 미국, 연방법에 규정 추가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원안위법)> 1조에 정의된 원안위 설치 목적은 “원자력의 생산과 이용에 따른 방사선 재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전과 환경보전에 이바지함”이다. 원안위에 부여된 규제 권한은 온전히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안위가 규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사업자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법체계에서 원안위는 원자력진흥위원회 위원장인 총리 산하에 편제되어 있다. 원천적으로 ‘안전’이 ‘진흥’의 밑에 속한 셈이어서 그 기능 위축이 우려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원안위 운영 주체의 철학과 자세다.
원안위는 현재 원전 수명연장을 포함, 14건의 인허가 심사를 수행하고 있다. 추가로 전국 원전 중대사고 문제를 다루는 트럭 한 대분의 방대한 사고관리계획서가 2019년에 제출되어 2022년까지 3년의 심사 기간을 목표로 심사해 왔다. 하지만 기한이 지난 지 2년이 다 가도록 심사가 종료되지 못하고 있다. 그 속사정도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업자와 원자력안전기술원 간에만 심사가 진행 중인데 사업자 영업비밀을 보호하는 강력한 원자력안전소통법이 통과되는 바람에 더더욱 철통같은 안전정보의 은폐가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원자력안전소통법에 따르면 원안위는 사업자가 목록으로 제출하는 모든 영업비밀을 보호해야 한다. 사업자에게 불리한 안전정보까지 포함시켜 목록을 제출해도 영업비밀이라는데 할 말이 없다. 원자력안전소통법은 이 때문에 사업자 편의만 지원하고 시민 안전은 저버린다는 말을 듣는다. 미국 규제기관은 사업자가 규제기관에 제출하는 모든 정보를 극소수만 제외하고 공개하고 있다. 국민 안전에 영향을 주는 안전정보를 왜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가.
안전정보를 투명하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원전을 도입한 미국 규정(10CFR100.11)에 따르면, 핵연료가 녹는 중대 사고가 발생하면 주민이 전신 피폭 25 Rem, 갑상샘 피폭이 300 Rem 이하로 사고를 관리하게 된다. 이 때문에 대체로 원전 중심으로부터 900m 전후의 주민소개지역(제한구역)이 설정된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처럼 다수기가 동일 부지에 존재하여 사고 시 서로 연관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들 호기에서 전부 방사능이 배출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런 다수기의 경우 기존의 제한구역(EAB, Exclusion Area Boundary)을 확대 재설정, 검토해야 하지만 원안위는 이에 관한 안전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 눈높이에 부응하는 공개적인 논의를 수행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 원전은 표준화를 시행하여 후쿠시마 원전과 같이 여러 호기가 나란히 동일부지에 설치된 특징이 있다. 고리가 그렇고 월성, 한빛, 한울 모든 부지에 원전이 나란히 설치되어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다수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다수기 문제를 목격한 미국은 연방법(10CFR100.11)에 다수기 규정을 추가하여 사고 시, 주변 원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 모든 원전에서 방사능 사고가 발생한다고 가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경우 다수기가 동시 배출하는 방사능 전부를 합하여 주민 소개지역과 비상대책 수립을 검토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한 기 원전사고 시 반경 914m 거리를 제한구역으로 할 때, 동일부지에 있는 3개 호기가 방사능을 동시에 배출한다는 가정으로 기존의 제한구역을 훨씬 확대하거나 안전설비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한수원은 수명연장을 추진하면서 수명연장 주기적안전성평가서, 방사선환경평가서에서 최신 기술기준을 적용하는 등 다수기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23년 8월 24일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을 운영하는 도쿄전력이 처음으로 "처리수"(핵오염수)를 태평양에 방출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운영자가 위촉한 안전 전문가 패널은 2024년 2월 13일 그 전 주에 발생한 오염수 누출과 같은 사고에 대해 대중과 좀더 신속하게 소통할 것을 촉구했다. 2024.2.13. AP 교도 연합뉴스
경주 월성원자력발전소 전경. 둥근 지붕의 4기의 원자로 중 맨오른쪽이 폐로가 결정된 월성1호기다. @이원영
원안위의 <원자로 등의 기술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원자로 시설의 기술 기준에 관한 49개 조항이 있다. 최근 원전의 수명 연장을 추진하기 위해 한수원은 시설의 구조, 설비 및 성능에 관한 요건을 다루는 11조부터 49조까지만 검토하여 수명연장을 위한 주기적안전성평가서를 작성, 제출했다. 문제는 원자로 시설의 위치에 관한 최신 기준을 담고 있는 제3조부터 제10조까지 마땅한 이유 없이 적용을 제외한 것이다. 현재 수명연장이 진행 중인 원전은 전부 동일하다. 따라서 시설의 위치 규정이 담고 있는 지진, 지질, 기상, 위치 제한, 수문 및 해양, 인위적 사고, 비상계획의 실행 가능성, 다수기 문제 등 후쿠시마 이후 개선되어야 할 규정 요건들이 검토되어야 하는데 제외되었다. 원안위는 수명 연장을 검토할 때 위치 기준을 포함한 최신 기술기준을 적용하여 철저히 대비할 것을 사업자에게 엄중히 요구해야 한다. 이미 가동 승인되어 가동 중인 원전일지라도 안전 관련 국제기준이 개정되면 그 적용을 위해 시민에게 묻고, 필요한 조치를 위해 일시적인 가동 중단까지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설비가 과잉된 상태이므로 안전규정을 제외하면서까지 원전을 가동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원안위가 사업자 편익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국민 안전을 위한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모습이 아니다. 안전 수준을 낮추면 사업자는 이득을 본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원안위는 주어진 규제 권한으로 시민 안전 눈높이에 부합되도록 안전시설 보강 등을 사업자에게 요구하고 그 이행 여부를 공개, 확인해야 한다. 최신 안전기준 적용을 제외하려면 시민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주민 공청회다. 오로지 사업적 이해와 목적에 충실한 형식적인 규제와 형식적인 공청회는 시민 안전을 역행하는 것이며, 사회적 책임성과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핵의 폭력적인 본성만 드러낼 뿐임을 원자력계는 알아야 한다.
출처 :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국민 안전에 등 돌리려나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