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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단은 물론이고 정통교회에서 조차 성경을 새롭게 번역한다거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는 명분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여러 형태로 부정을 하며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말살하려 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단의 최고의 전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무너지면 곧 기독교 신앙은 자동적으로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믿는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놓고 이 성경을 계시적인 관점으로 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아래의 내용은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께서 현재 교역자 대상으로 여러 곳에서 진행하고 있는 고 김석준목사님께서 생전에 강의하신 ‘체계적 신앙신학’의 내용 중 ‘계시관’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순서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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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수인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성경이 특수인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할 때 특수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특수인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인간은 인간끼리의 관계에서 고저의 차이로 특수인이 될 수 없다. 빈부나 권세에 있어서도 특수인이 될 수 없다. 우열 격차에 있어서도 특수인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인이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구별한 인간을 의미하니 하나님만이 아시고 구별한 자를 지칭해서 특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시를 선포하는 것에는 그다지 특수성이 없다. (예) 계시선포는 하나님이 직접도 하시고 천사도 동원되고 심지어는 마귀나 사단도 동원되고 활동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이 특별계시 선포에 있어서는 특수성의 작용이 없고 일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계시에 있어서 극히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마귀나 사단까지 동원된 것이니까! 그러나 마귀의 말 액면 그대로가, 그 표현 그대로가 하나님의 말이 아니고 마귀나 사단이 한 말 속에 하나님의 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면 소위 신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의 주장과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성도 잘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이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이냐 하는 것에 대한 바른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귀나 사단이 한 그 말속에 그 뜻 그 단어 그 용어 그 액면 속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의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란 곧 의사표시이기 때문에 입으로 발언한 말만이 하나님의 말이 아니고 행동으로 동작한 것에도 하나님의 말이 들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사인 말씀을 일반적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성문화 시키는 데는 특수인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일반성이고 일반적인 것을 동원시켜 하신 것이나 이 말을 기록할 때에는 특수인을 동원시켜 기록하신 것이다. 물론 이 특수인도 원래부터 특수인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특수인으로 등용하시니 특수인으로 된 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말을 하면 하나님의 의사를 우리 인간에게 표시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의사표시(일반계시)와 특수적인 의사표시(특별계시)가 있는데 이 특수적인 의사표시를 우리는 특별계시라 하고 이것을 성문화시켜 놓은 것을 성경이라고 한다.
성경이 성경이 되기까지를 본다면
① 하나님께서 특수적인 의사표시 혹은 의사선포.
② 일반적인 것을 동원시켜 특수 의사 표시.
③ 특수인에 의하여 기록.
이렇게 되어진 것이 성경이다.
특별계시는 성경이 없을 때에도 있었다. 일반계시는 당신의 계시를 일반적으로 계시했다. 이 일반계시는 고정적이 아니고 연속적이다. 성경은 보편적인 의사표시가 아니고 특수적인 의사표시이다. 일반적인 것을 동원시켜 특수 의사 표시를 했다.
특수인이란 특수적인 사람으로 출생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특수직을 가진 것도 아니다. 출생 시는 공통성인데 하나님께서 특수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등용된 사람, 구별한 사람 중에는 성경을 기록할 특수권을 받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또 예수님의 종도 사도도 아닌데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도 있다(마가, 누가). 예수님의 12사도가 성경을 다 기록한 것은 아니다.
(1) 선지자 혹은 선견자를 통해서 기록했다.
선지자라 선견자라는 칭호는 주로 구약에서 많이 사용해 왔다.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말은 선견자라는 말과 비슷하나 선견자보다는 선지자라는 말이 더 힘이 있고 그 의미가 깊다.
선견자란 미래에 되어질 일을 환상으로 본 자들을 지칭해서 하는 말이요, 선지자란 구태여 환상을 보지 않고라도 하나님의 하실 사역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셔서 알게된 것을 말한다. 선지자라는 말을 한자풀이대로 풀이하면 먼저 안 자라는 뜻이 되나 성경에서의 선지자란 고유명사로서 하나님의 의사를 먼저 받은 자란 말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공적으로 받은 선지자도 있고 공적으로 받지 못한 선지자도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로는 공적으로 칭호를 받은 자만 선지자로 인정을 하고 있다. 공적으로 임명을 받은 선지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선지자로서 수류(기름부음)받은 자 중에는 제사장으로서의 수류자, 왕으로서의 수류자가 있다. 그러나 법적인 면으로는 비수류자이지만 그 중에서는 선지자적인 인물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노아도 선지자 중에 하나로 그는 자기의 세 아들들에게 미래에 그 자손들이 어떻게 되어질 것을 예언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그러했다. 특히 야곱은 12지파의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장래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구태여 공적인 수류자, 선지자만 등용시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비수류자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등용시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 선견자는 비수류자(기름부음 받지 않음).
선지자: 공적인 선지자(기름부음 받은 자). 비공적인 선지자(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자).
대부분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이 축복과 저주를 함으로서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미친다고 잘못 생각을 하고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예정에도 없는, 미지 미정된 축복과 저주를 함으로서 그들에게 그렇게 응했느냐? 아니다. 이미 결정된 것을 알려준 것뿐이다. 야곱도 마찬가지. 이들은 선지자이지 결정자는 아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사람도 결정자는 없다.
성경 기록자는 기름부음 받고 안 받고 와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특수인으로 선출하여 쓴다.
(2) 사도와 종들을 통하여 기록했다.
‘종들’ 하면 사도들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성경에 보면 특별사도가 있고 일반사도가 있다. 그리고 바울의 경우에도 성경을 통하여 바울을 사도라고 인정을 했으니 우리는 사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고로 사도들 중에는 아마 가룟유다가 빠져야 할 것이고 바울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도 12제자의 이름을 기록할 때에 빠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특별사도 중에는 베드로를 위시해서 가룟유다까지 기록이 되었고 일반제자는 그 외에도 많이 볼 수 있다. 누가와 마가는 특수제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일반제자 중에 포함되었으리라 볼 수 있다. 누가나 마가 혹은 야고보 같은 인물도 특수제자도 아니고 또 12사도 중의 한 사람도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반제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 구약을 기록할 때에 그 기록하는 인물들은 공적인 수류자인 선지자들만 동원시킨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비수류자들인 선지자들을 동원시켜 성경을 기록한 것같이 신약에서도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사도들만이 기록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특수제자들만이 기록한 것도 아니다. 바울은 특수사도는 아니다. 그러나 사도이었고, 누가와 마가는 특수제자나 사도가 아닌 일반제자였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실 때에 제도나 혹은 공적인 그런 것에 제한이 없이 선지자 사도들 비선지자 비사도들 일반제자들 등을 통하여 기록하게 했는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뽑으신 특수인으로서 즉,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께서 이미 선포한 것, 선포하실 것을 기록했다. 이미 선포된 것이란 구약에나 또 성경 기록 이전에 말씀되어 있는 것, 지나간 사건들은 이미 특별계시로 선포되어 있는 것이고, 현재 선포된 것이라는 말은 곧 신약성경의 서한 서신 계시 등을 말하고 구약의 선지서 예언서 시가 등을 말할 수 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특수인들을 동원시켜 기록하도록 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 인격을 기울여 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의사 혹은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구약에서는 선지자 제사장들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한 바가 있고 때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한 일도 있다. 꼭 선지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은 아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자들은 물론 특수제자인 12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도 했지만 세례요한의 경우는 선지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물론 시대 구분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을 구약으로 소속시키기도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어 세례요한을 구약에 속한 선지자 중에 마지막 선지자라고 하기도 하나 선지학적으로 구분할 때에는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 선지자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또 구분할 때에는 예수님의 출생,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준해서 신약시대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신약성경의 시작이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세례요한을 시간적으로는 신약시대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그 사역 면은 구약의 선지자에 속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특별제자나 사도가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약시대에 전한 자이다. 예수님을 직접 전한 자이다.
뿐만 아니라 70인 전도대를 선출해서 파송시킬 때에 그 70인들이 다 특수제자들은 아니었다. 또 일반제자의 칭호도 받지 못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자들은 특수사도들, 일반사도들, 그 외에 사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사들 중에도 유능한 집사들도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자, 전달할 수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수하게 선출해서 일반 사람들이 받기 어려운 특수사명인 성경을 기록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기록하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는 불가하고 또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했거나 안 하는 자는 불가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중에서 특수한 자이다.
특별계시를 표현하고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것을 동원했으나 선포된 것에 대해서 기록할 때에는 특수인에 의하여 기록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도 함부로 경솔히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은 생득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 자기들이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잘 지키면 구원박탈 안 당하고 이방인들은 율법과 계명을 지켜도 소용없다고? 세례요한은 예수님(구원)을 증거 했다. 율법과 선지자는 다만 세례요한의 일밖에 못한다. 구원도리를 가르치는데 불과하다.
(4) 하나님으로부터 기록영감의 감화 감동을 받은 자.
우리가 성경에 보면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다. 이 영감의 감화는 물론 성령은 한 분이나 그 감화는 여러 종류로 구별된다. 이 감화에는 중생한 자의 공통적인 내재적 감화가 있고 또 중생한 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수락적인 영감의 감화가 있고 또 받은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조명적 영감의 감화가 있고 또 한 이치를 인식할 때에 숨겨져 있는 다른 한 이치를 깨닫게 하는 각성적 영감의 감화가 있고 또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욕을 일으키는 현재적 충동적 영감의 감화가 있고 또 말씀을 받아 미래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것을 알게 하는 미래적 영감의 감화가 있고 또 이미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 일을 처리해 나가게 하는 활동적 영감의 감화가 있다. 이 활동적 영감의 감화에는 여러 가지 은사가 따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기록영감의 감화는 여러 영감의 감화 중에 특수영감의 감화이다.
이 특수영감의 감화를 구별한다고 하면 계시목적으로 등용되는
① 활동영감의 감화.
② 중생 시키는 감화. 하나님의 택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혀 중생 시키는 감화.
③ 기록영감의 감화. 이 감화만은 특수적인 감화이다. 이 감화 없이는 성경을 누구나 함부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도, 사도들 중에도 일반영감의 감화를 받은 활동도 하고 은사도 행했으나 성경을 기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특수영감의 감화를 받아야 만이 되는 것이다.
※ ‘나는 어떤 신을 받았다, 나는 어떤 신을 받았다’ 하는 것은 다신 종교에서 나온 사상이다. 곧 샤머니즘이다. 성령은 여럿이 아니고 한 분이시다. 감화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존재는 일반적이나 영감의 감화가 특수적이다. 특수계시와 일반계시는 구별된다.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을 등용시켜 특별계시를 표현하거나 선포했다.
(5) 기록영감의 감화(특수감화)
이 영감을 받을 때에만 성경을 기록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번 기록영감의 감화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쓴 글이나 편지 전부가 다 성경이 될 수가 없다. 아무리 그가 특수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 기록영감의 감화가 왔을 때에만 성경을 기록할 수 있지 기록영감의 감화가 오지 않을 때에는 기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록영감의 감화는 어떤 특정인에게 전매특허로 준 것은 아니다. 자기가 이 감화를 받아 가지고 언제든지 마음대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영감의 감화가 왔을 때에만 성경을 기록한 것뿐이다. 이 특별계시의 감화를 받았을 때에 자기 자신은 자신이 특수감화의 감화를 받아 기록을 하지만 자기가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일반영감이 있으면서 즉, 내재적인 영감이 내재적으로 있고 또 그 외에 여러 가지 영감이 있으면서 수락적 영감과 조명적 영감과 각성적 영감과 현재적 충동적 영감이 있은 후에 특수하게 기록영감의 감화로 성경을 기록했는데 자신은 기록영감의 감화로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를 잘 알지를 못한다. 일반영감의 감화는 자기 자신이 의식을 하고 인식을 하지만 이 특수영감의 감화만은 그 즉시로 인식을 못한다. 중생도 그러하고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도 그러하고 기록영감의 감화도 그러하다.
※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 또 아브라함이 걸어 갈 때에 ‘이것이 성경이 될 것이다’ 하고 걸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 의식을 못한다.
4. 계시목적에 의한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한 것만 기록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 여러 가지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다. 성경에는 주로 보면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기록할 때에 많은 사건들 중에서 교훈적 가치가 있고 히브리인으로 신앙적 가치가 있고 또 선민에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만을 선출해서 기록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성서신학자들은 대개 그렇게들 보고 있다.
이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에 몇 가지로 분석을 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선출방법
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건만 골라서 기록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이미 역사세계에서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는데 이 많은 사건들 중에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히브리인의 역사적 가치가 있고 교훈적 가치 교양적 가치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감화를 시켜 특별한 사건들을 선출하여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 성경기록은 특수인이라고 해서 언제라도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기록영감의 감화에 의해서만 그 때 그 때 기록된 것이다.
어떤 것을 기록했는가? 서한 역사 시가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역사서가 중요하다. 여기에 대하여 많은 이설들이 있다.
성경 기록을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을 골라서 기록했다고 하는 주장자가 많다. 그리고 선출방법에 있어서 성령의 감화의 활동의 영감의 감화가 아니고 기록자가 어떤 것을 기록할 줄 모르는데 예를 들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도록 감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 중 성령의 감화로 사건을 골라서 기록했다는 설이다.
(2) 인지(認智) 선출방법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기록할 것을 성령이 하나하나 선출해 준 것이 아니고 성경을 기록하는 저자가 자기의 지식으로 가장 가치성이 있는 것만 골라서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이 설을 주장한 학자들은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이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혹자들은 단회적 기록이 아니고 처음에 많은 역사를 더듬어 기록해 두고 일차적으로 기록된 그것 중에 더 많이 심사숙고하여 그 중에서 또 선출하여 가장 가치 있는 것만 골라서 성경으로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룻이 죽은 후에 룻이 겪은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룻이 겪은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다. 어떻게 시집왔다는 것, 어떻게 죽었다는 것 등 세밀하게 그 역사가 다 기록된 것이 아니고 간단하게 기록이 되었는데 그 여러 사건을 수집해 고르고 골라서 그 중에 제일 가치 있는 것을 선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성이 아니다.
① 선언적 하나님의 말.
② 편집적 하나님의 말.
③ 기록적 하나님의 말도 아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이냐?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존재를 특별히 동원시켜 가지고 활동된 것을 기록영감을 받은 사람에게 기록하도록 기록영감을 준 것이다.
기장 - 목적영감설. 예장 – 축자영감설로 갈라진다.
성경은 기록해 놓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것이다. 가장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직접 육성으로 통한 것도 있다. 누구를 통해서 말한 것도 있다. (예) 에스겔 선지자에게 ‘피난봇짐을 지고 담구멍으로 나가라, 인분으로 떡을 구워 먹어라’ 한 것은 행동으로 전달이다(행동적 풍자적으로). 성경에 보면 많이 있다. 대언적 전달도 있다. 활동영감의 감화에 의해서 당신의 의사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어떤 부분이 영감의 감화에 의한 활동인지 활동한 본인도 모른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들어가면서 성령의 영감의 감화의 활동에 의한 것인 줄 알고 들어갔을까? 사울도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랬을까? 모세는 어떻게 알고 기록했느냐? 사도들의 서한 기록들 중에 성경에 편집 안 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