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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만원 시스템공학 박사님이 5년간에 걸쳐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18만쪽에 달하는 5.18에 대한 사법부의 수사 및 재판기록을 연구하여 저술한 책자인‘솔로몬 앞에 선 5.18’을 참고하고,‘제5공화국 秘錄 1권 - 14권’ 姜英雲 편저, 한국매일출판사 발행(1988년 3월),‘정계내막 제5공화국 1권 - 15권’ 朱致鎬 편저, 한국실록사 발행(1988년 3월), ‘만화 토지’(박경리 원작 토지를 만화화한 작품), ‘울지마라 나의 조국아’ 정형기 저술 의병대하 소설과 ‘한국사대사전’ 이홍직 박사 편저등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5.18 재판의 허와 실>
□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 대한 문제의 제기
o 사법부는 1995년 7월 재판에서 권력공백기에 신군부가 12.12를 통하여 군을 장악하고 새정권을 창출해내기 까지 전형적인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심사대상이 아니라고 판시, 즉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불가라는 논지를 보임
o 그러나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을 제정․공포하여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재판을 통하여 종전의 판결을 뒤집음
- 1997년 4월 대법원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판결문을 내놓으면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굳어져 왔는데, 5.18역사에 내재한 가장 큰 약점은 1980년의 검찰이 파악한 사건 사실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이 똑같은 사건 및 사실을 놓고 판단하는 판사들이 시대 및 권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 것임
□ 기록은 1980년이나 1997년이나 똑 같은데 판사들의 판결만 달라
o 즉 1980년의 판사들은 북한의 개입과 불순분자들의 국가파괴행위에 초점을 둔 반면, 1997년에는 판사들이 반공세력을 역적세력으로 몰고 갔음
-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이요 김대중의 내란음모라고 판결한 반면,
- 1997년의 재판부는 5.18시위대를 준헌법기관으로 정의,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지키려 한 사실상의 준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국가는 시위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도와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이를 조기 진압한 것은 분명한 내란행위였다고 판결
o 이는 헌법수호를 위한 준헌법기관인 5.18시위대가 적어도 도청 부속건물 6동, 파출소, 방송국(MBC 및 KBS), 세무서를 방화하고 교도소를 습격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임
- 상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광주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경우 이 나라는 그 당시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임
o 또한 5.17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라며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자연법=관심법=여론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을 감행
⇒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되었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헌법파괴세력'이 되었음
□ 5.18 재판(지만원 시스템공학박사 관련) - 서울고법(2심)에서도 승소
o 5.18단체측이 지만원 박사를 고소한 시점은 2008년 9월인데 이들이 고소한 글의 내용은 지만원 박사가 2008년 1월 시스템클럽에 게시한 아래의 표현이었음
⇒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부대원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o 이 글을 대상으로 5.18단체측이 고소를 했고, 최초 공판일은 2009년 10월 8일, 이때부터 재판이 시작되어 1심 14회, 2심 9회 총 23회에 걸쳐 재판을 했고, 드디어 2012.8.23. 서울고법에서 부장판사가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피고인 지만원 박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
<5.18과 관련한 주요 이슈>
⇒ 이 내용은 전두환 대통령님이 광주사태의 희생자라는 점을 부각하는 것임
□ 5.18 통계의 문제점
o 수사기록상 10일간 벌어진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93명(민간사망자 154명,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신원불상 사망자 12명, 군사망자 23명, 경찰사망자 4명)이고 이외에도 47명의 행불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음
o 사망한 '민간 및 신원불상자' 166명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116명, 이 중 계엄군만이 보유한 M-16소총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뿐이고 나머지 80명(총상 사망자의 69%)은 카빈, M-1, AR자동소총, LMG, 공기소총등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들에 의해 사망
⇒ 결론적으로 이 80명 이라는 통계는 계엄군이 아닌 다른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임
⇒ 당시 광주시민도 모르고 국가정보기관들도 모르게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할 것임(아니면 광주 시민이 다른 광주 시민을 쏘았을 수 있다는 패륜적 추측에 대한 반증을 보여야 할 것임)
□ 발포명령은 누가 내린 것인가?
o 광주사태의 과열성은 5월 18일 전남대등에서 소요(군인들에게 각진 돌을 투척)가 일어난 이래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음.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였으며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5월 19일 오후 5시 고립된 장갑차의 뚜껑위에 불타는 짚단을 수차례에 올려 놓아 불고기가 되려하자 뚜껑을 열고 총을 쏘아 1명의 부상자가 발생-이것이 계엄군의 최초 발포임)를 공격하고 군용차, 대형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는데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음
- 장갑차, 군용트럭 및 버스 등 중무장 시위대에 밀려 엄청난 총격전을 치른 후 계엄군은 5.21 오후 5시경 도청에서 도망쳐 나갔음
o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사한 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집단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음
o 전남도청앞에서 가장 큰 희생이 있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5월 21일 61명이 사망하였는데, 수사기록상 도청 앞에서 사망한 사람은 7명, 계엄군이 있었던 전남대 등에서 사망한 사람은 5명, 계엄군이 없는 지역들에서 사망한 사람이 14명, 그리고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는 불상지역에서 사망한 사람은 35명임. 당시 도청 앞 사망자들은 생존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즉시 챙겼을 것이기 때문에 불상지역은 도청 앞이 아닌 지역인 것으로 여겨짐
□ 무기고 및 차량 동시탈취
o 5.18 오래 이전에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였으며 지휘부(북한 특수군)가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바, 탈북자들은 북한 특수군의 지휘로 고정간첩들이 총동원 되어 3개월 동안 전남지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고 증언
o 1980년 5월 21일 오전 9시부터 4시간여에 걸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카빈, M-1, 기관총), 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발을, TNT 10여상자(8톤트럭분), 뇌관 35만개, 도화선 4만여m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
- 38개 무기고를 불과 몇 시간만에 모두 털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여 약도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는 의미가 되는바, 38개 무기고 위치파악은 북한 특수군이나 간첩같은 고도의 전문가들이 몇 개월 단위의 기간에 걸쳐 해낼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일반시민이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임
⇒ 그렇다면 5.18은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 일어난 즉흥적인 저항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왔다는 것이 되며 그것도 광주시민이 아닌 북한 간첩들에 의해 준비되어 왔다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그렇다면 5.18은 북한의 역사가 되는 것임(만일 이 사전준비를 광주시민이 주도 했다면 5.18의 민주항쟁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될 것임)
o 또한 총 779대의 차량이 탈취되었는데, 군용차 34대, 경찰차 50대, 군용트럭 328대, 일반차 367대로 이러한 노획은 순수한 시민들에게 어울릴 수 없는 기적의 수치임
- 특히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는 600명(300명은 20사단이동경로에 관한 극비사항을 입수하여 이를 기습하여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9시에 동 공장에 집결 + 300명은 5대의 대형버스에 타고 동 공장에 9시에 집결)이 탈취
☐ 거짓 위에 세워진 5.18 누각
o 황oo은 5.18의 원전으로 불리는 '광주 민주항쟁의 기록'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첫날부터 환각제를 마시고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손에는 곤봉을 잡고 다른 손에는 곤봉을 잡고 닥치는 대로 호박 찌르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고도 했는바, 광주에서 사살된 시민이 2,000여명이라고 했음
⇒ 진실이 담긴 검찰보고서*는 2004년말까지 창고에 꼭꼭 갇혀 있었는바, 1995년 7월 18일 역사바로세우기재판에서 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는 이와는 반대였음
o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음.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였으며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으로 공격에 사용
* 전남대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여단의 1개대대(220여명 정도)였고 그 40%가 호남출신들로 구성되었음** 검찰은 시민사망자는 166명이며 이중 12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은 신원불상자라고 밝힘. 또한 검찰은 헬기에 의한 기총사격은 없었고 화염방사기도 사용된바 없으며 환각제 사용은 없었고 대량 암매장 사건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고 못을 박았음
** 5.18측은 계엄당국이 광주가 미워 가장 많은 공수부대를 파견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계엄사령관은 광주에는 달랑 2개대대만 보냈는바, 1개대대(제33대대)는 전남대에, 1개대대(제35대대)는 조선대에 파견되었음
- 5월 18일, 대부분의 공수부대는 서울에 있었음. 예컨대 고대에는 4개대대, 동국대에는 3개대대, 성대에는 2개대대가 파견되어 있었음
☐ 광주교도소 무장공격
o 광주교도소(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자수가 2,700명이었음)에서는 50명이상이 사망하였는데 이는 중무장한 폭도들이 정부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광주교도소를 5.21일 12시 이후 6차례나 무장공격을 하면서 이루어진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임
☐ 폭탄 설치 및 해체
o 시위대가 도청지하에 TNT 8통 트럭분의 폭탄을 설치(북한 특수부대원의 소행으로 추정)하였는데 이것이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음.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가 외부에 부탁하여 계엄군 전문가가 5.25일 밤9시부터 해체작업을 시작하여 26일 오후까지 또 해체작업을 벌였음
☐ 계엄군의 탈환작전
o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했는바, 공중정찰에 의한 사진뿐만 아니라 광주시내에 있는 정보제공자들을 활용함으로써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음. 그리고 5월 27일, 시민들이 잠든 새벽1시에 계엄군들은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병력을 소부대단위로 편성하고 정밀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음.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이었음
☐ 광주사람들의 정서와 관련한 사안
o 미 헤리티지재단 아시아 연구센터가 발표한 '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이라는 보고서(1985년 9월 16일 발간)의 내용
o 광주사태가 악화된 데는 지역감정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이는 데 광주사람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등에 따라 수백년 동안 중앙정권에 의해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함
* 훈요십조(訓要十條);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유훈으로서,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은 것임을 말하고, 사사(寺社)의 쟁탈 및 남조(濫造)를 금하며,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의 주신(主神)을 함부로 가감치 말며, 왕위는 적자적손(嫡子嫡孫)의 계승을 원칙으로 하되 원자(元子)가 불초(不肖)할 때엔 그 형제중에서 인망이 있는 자를 택하고,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며,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대업만대(大業萬代)의 땅이니 중시하되 차현(車峴 :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여 인심도 그와 같으므로 등용치 말라는 내용임
o 특히 다수의 전라도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전라도를 차별하고 경상도에만 혜택을 주었다고 말함
o 이어서 격돌이 발생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체포*하는 등 계엄확대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조치였다는 오해가 퍼져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됨
* 5월 15일 10만 이상이 모인 서울역 집회 직후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재야세력들은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5월 22일을 기해 전국 봉기**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인 선전포고를 공개적으로 함에 따른 것임
**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들을 향해서 5월 22일을 기해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과 군인들을 향해서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선동
o 소요 첫날부터 루머가 돌았는바,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었음. 첫날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지만 이날 소문은 40명이 죽었다고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처형됐다는 소문도 돌았는바, 시민들은 이 뜬소문을 믿고 시위에 동참했음
□ 광주의 한풀이 측면
o 황oo 저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에는 '전라도에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체제운동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이루어진 매판정책 추진과 불균등개발로 인하여 호남푸대접이라는 광범위한 대중적 불만의식이 만연했다.....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법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 고장에서도 인물이 하나 나와야 한다는 민중적 열망이 간절하던 차에 전남의 대중적인 영웅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좌절당하고 고난을 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음
o 5공시절 직선제 개헌이 발의된 이래 정권의 선순환을 거쳐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면서 본인의 한풀이를 한 동시에 다른 광주사람들도 한풀이를 한 측면이 있다고 사료됨
☐ 5.18 관련 북한의 책동 및 특수부대원의 암약상
⇒ 당시 광주시민도 모르고 국가정보기관들도 모르게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할 것임(아니면 광주 시민이 다른 광주 시민을 쏘았을 수 있다는 패륜적 추측에 대한 반증을 보여야 할 것임). 또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수사기록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엄청난 기록에 왜 눈을 감았는지 대답하여야 할 것임
o 5.18, 북한의 역사인가 남한의 역사인가?
o 2010년 5월 17일 연합뉴스는 5.18 30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광주인민봉기 3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다고 보도
o 통일부의 '주간 북한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매년 5월 18일이 다가오면 당정 최고 간부들이 총 동원되고 주요 언론들이 총 동원되어 여러날에 걸쳐 북한 전지역에서 5.18추모 행사 개최
o 북한에서 최고인 모든 것에는 5.18 칭호가 부여
- 북한에서 가장 큰 1만톤 프레스에 '5.18청년호'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천리마운동의 일환)'등 북한 최고의 것에 5.18의 명칭을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부여
- 이외에 탈북자들의 증언집에 의하면 상징성있는 전차에도 '5.18전진호', '5.18소년호 땅크', 일잘하는 생산직장에도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청년작업반', '5.18청년제철소'의 호칭을 부여하였는바, 북한은 전 당과 전 국가, 전 국민적으로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
o 1989 - 1991년에 걸쳐 북한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제작에 황oo씨가 시나리오를 썼고 윤oo씨가 배경음악('임을 위한 행진곡'등)을 작곡 - 이 두 사람에게 김일성은 '재간둥이'라는 별호를 내림
- 또한 윤oo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평양에 대지 5,150평, 15층 규모의 기와집으로 '윤oo음악당'을 지어주었고 황oo씨에게는 시나리오를 만들어준 대가로 25만달러의 상금을 수여
o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단행본(1982년 3월 20일 발행)의 내용
- 북한이 남한에서 수행했다는 대남역사 목록(총 27건)중 '광주인민들의 영웅적 봉기'와 '광주민중봉기 후 민주와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등이 들어 있음
- 이 모두가 김일성의 교시로 수행되었으며,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발생한 불만의 틈새를 적시에 이용하여 전략 및 전술을 개발하고 이를 교시로 내려주면 남조선에 있는 혁명세력과 민중세력이 죽음을 무릅쓰고 폭동과 반란을 수행했다는 것임
- 이 책은 5.18이 이들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들이 일으킨 반파쇼(반대한민국) 투쟁'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사건이라고 표현
o 북한 특수부대원의 암약상
-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는데 5.18 광주사태 당시에 남조선에 나갔다가 죽은 공화국 영웅들의 묘지가 대부분임
⇒ 비문에는 '여기에 누워있는 동지들은 1980년 5월, 남조선에 파견되어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산화하였다' 하는 식으로 내용이 적혀 있음
o 탈북자들의 무더기 양심선언
- 5.18광주사태에서 저질러진 살인만행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경악을 금할 수 없었음.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런 야만적인 살인극을 벌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이간질시키고 순진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가 있었는지 한 평생 북한체제에서 세뇌된 머리지만 상상할 수가 없었음
- 5.18공화국 영웅이 영화에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은 북한 특수부대원이 한 짓이라고 실토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언급
- 5.18 광주사태 때 북한 중앙 TV에서는 매일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 TV를 보는데 친구 한명이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이라고 하였음. 광주사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 사람들이라고 하였음.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음
- 광주봉기가 끝난후 북한에는 어느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영웅들이 수많이 배출되었는데, 어떻게 되어 영웅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광주봉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음. 그들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당과 수령이 돌봐주는 애국자로, 혁명의 핏줄을 이어나갈 세대로 지목되어 오늘도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음
o 4대 유언비어의 발상지는 북한
- 광주에서는 악성 유언비어들이 만연했다. ①'공수부대원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②'여학생을 발가 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③'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➃'공수부대가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음
- 이러한 끔찍한 유언비어들에 해당하는 동영상 및 영화가 북한에서 방영('님을 위한 교향시'에도 들어 있듯이 이러한 동영상은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만 방영됨)되었는데, 이는 북한특수부대원이 광주의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면서 동영상을 찍어 올려보낸 반면, 광주에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임
⇒ 북한은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광주시민들을 흥분시키고 그 힘으로 당시의 한국정부를 전복시키고 제2의 남침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심리전 작업을 했음. 5.18 광주사태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북한의 TV에서는 다른 것은 방송하지 않고 매일 광주사태에 대해서만 중대방송을 하였음
□ 광주사태시 북한 특수부대원의 개입여부와 관련한 문제
o 광주에 북한 특수부대원이 왔느냐에 대한 문제는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이지 5.18단체들의 명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함. 북한이 광주에 특수부대원을 보냈다면 이는 국제법과 휴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불명예요 이를 잡아내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의 불명예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5.18단체나 광주시민들의 불명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
o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5.18사람들은 북한군 소리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5.18단체들이나 광주시민들은 간첩이나 위장한 북한 특수군을 감별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럴 임무도 가질 수 없는 자연인들이다. 그런데 무슨 능력으로 '광주에는 절대로 북한 특수부대원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음
o 5.18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원이 왔을 것이라는 데 대한 증거들은 많이 있어도 5.18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원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은 없음. 이와 관련하여‘솔로몬 앞에선 5.18’은 북한 특수부대원이 남파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책인바 합리적이라고 생각함
o 1982년 북한이 발간한‘대남공작 역사책’에는‘봉기자들이 공격서열을 편성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주공과 조공이 명시된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이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목표를 배당해 주었다는 뜻인바 이는 민간인이 할 수 없는 것이고 북한 특수부대원이 기획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
☐ 광주의 북한 상황실 및 지휘통제
o 북한의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에는 광주의 상황이 일자별로 요약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검찰보고서와도 대체로 일치하지만, 일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경찰, 군, 국정원, 검찰보고서 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구체적임
o 수사기록보다 더 훌륭하게 작성된 북한자료! 이런 자료를 광주시민들이 작성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고는 생각되지 않음. 5.18광주에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이 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것은 결국 광주에 북한군 상황실이 있었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음
o 황oo는 '광주 5.18민중항쟁기록'에서 "지하*에 투쟁지도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썼음
* 체계적인 작전은 있었지만 광주사람들로 형성된 지휘부는 없었음
o 북한에서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에 '오후 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이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목표를 배당해 주었다는 뜻임 북한집단이 내려와 기획하였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묘사
- 이 공격서열이라는 용어는 수사기록 어디에도 없다. 단순한 시위에는 공격서열이 있을 수 없고,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기획하여 계엄군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기획능력이 없는 가운데 각 상황에 대한 전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고 수많은 시위대들에 공격목표를 정해주고, 주공과 조공이 명시된 공격서열을 정해줄 수 있었던 것임
o 동 대남공작 역사책에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 기록되어 있는 북한의 대남시위전술은 '① 주력시위(주공)는 시내 중심부에서 벌어야 한다. ② 이를 돕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하여 중단없는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 ③ 모든 시위대들은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인 효과를 높여야 한다. 우선 시위구호와 주장이 같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음
o 북한의 대남시위전술에는 '돌파', '제 역량의 배합', '역포위', '속도전', '주위선동'이라는 군사용어가 나오며 전략, 전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배합전'이며 이 전술이 우리나라 시위에서도 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
o 남한의 시위에 이런 높은 수준의 전술이 응용되었다는 것은 북한 전문가들이 시위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믿게 함
⇒ 1980년 5월의 시위들이 그냥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전술을 통달한 점은 '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계획, 명령, 상황파악)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임
o 한편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 실린 '광주 반파쇼민주화투쟁에 대한 3가지 교훈'은 ①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② 남조선 인민들의 해방투쟁 승리를 위해서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임, ③ 남조선 인민의 해방투쟁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지반위에서 반파쇼 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것임
⇒ 5.18시위에 관한 시위 전략이 있고 시위 전술이 있고 사후평가를 한 집단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인바, 5.18작전지휘를 북한 특수부대원이 와서 수행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
<광주와 전두환 대통령님 - 상생의 길(win-win) 추구>
☐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바, 광주사태이후 37년이 지났음. 그사이 김대중 대통령 및 노무현 대통령이 10년간 정권을 잡았는바, 이제는 광주사람들도 승자로서의 인식과 안목을 가지고 그 역할을 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함
o 정치면에 있어서 국민통합을 이루어야 하는바, 지역감정을 없애고 건설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여야 및 정부와 국민 모두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끌어 나아가는데 기여하여야 할 것인바 국민통합이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임
- 전두환 대통령님의 치적을 칭송하면 타지역 사람들은 ‘나는 괜찮은데 광주사람들이 싫어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지역구도가 팽배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임
o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합리적 진보와 양심적 보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철학이 내재된 정책 대결의 장을 펼쳐야 하는바, 진정한 정치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이며, 갈등의 조정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임
- 이제는 지역구도 및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영․호남등 모든 지역의 국민과 정치인 모두가 정책대안을 합리적으로 숙고, 평가 및 참여하는 정치 선진화 및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임
o 특히 국민통합을 위하여 정치 지도자들의 공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인바,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보복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광주사람들도 전두환 대통령님의 치적과 관련하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기여한다면 국민통합을 통하여 서로 잘사는 상생(win-win)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함.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영광을 우리나라의 모든 후손에게 물려 주었으면 좋겠음
<전두환 대통령님 시절의 치적>
☐ 경제적 치적은 물가안정(2자리에서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엄정한 일일점검등를 통하여 1자리로 안정). 고도의 경제성장률 달성(연평균 10%를 넘어섬, GNP가 180억달러에서 600억달러로 3배이상 신장). 사상 최초의 무역수지 흑자(43억달러, 1986년). 이상 경제의 3마리 토끼를 잡은 것임
o 특히 물가안정에 대해서는 인기가 없더라도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은 절대로 구사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엄정한 물가안정에 성공하심으로써 서민의 주름살을 펴게하시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심. 또한 안전통화 공급, 예산동결, 임금가이드라인제 실시 및 부동산 투기규제등을 주요골자로 하는 강력한 경제안정화 시책을 추진
o 또한 경제에 대해서는 이미 경제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상당한 경지의 지식을 보유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관료(사공일 장관님등)에게 100% 힘을 실어주셔서 경제의 고도성장에 기여(교육방송에서 항우는 '이런 생각은 어떠냐'고 신하들에게 물어본 반면 유방은 '이러한 사항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고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한 것이 한나라 승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코멘트가 있었는데 대통령 시절의 치세를 연상케함)
o 5공시절에는 환율이 1달러 = 680원에 이르는 원화강세가 이루어져(최근에는 1달러가 1,000 - 1,200원선에서 거래됨) 수출상품의 단가가 상승하였음에도 기업의 경쟁력 및 생산성이 크게 상승하여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의 흑자를 이루는 가운데 원화자산의 국제적인 가치가 높아져 국력이 크게 신장하여 해외 어학연수, 유학, 해외여행등을 다녀오는 상황이 이루어져 우리나라의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음
☐ 세계 올림픽(24차)를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되었음. 특히 이번 올림픽 부터는 동서간 냉전의 벽이 무너져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모두 참여하는 지구촌 전체의 축제의 장이 마련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 속으로 웅비(우리나라가 올림픽 참가국중 4위 달성)하는 중대한 발판을 마련
o 올림픽은 올림픽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를 세계속으로 크게 홍보하며 국력신장을 위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 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2010년 G20의장국 역할 수행과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세계 경제 14위(GDP) 국가로 발돋음하여 선진국 문턱에 바짝 다가서고 있음
☐ 평화적 정권교체를 단행하심으로써 정권의 선순환과 국위선양, 국력신장 및 민생의 안정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
o 유신이래로 누적되어 온 사회구조적 병폐와 모순, 계층간의 갈등 및 정치구조의 치열했던 알력과 대립등 제5공화국이 그 험난한 여정속에서도 결국 평화적 정권이양이라는 광복후 40년 정치사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대과업을 달성
<전두환 대통령님을 국부로 추대하기 위한 제언>
□ 최근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건립되었음. 재임기간 16년동안 장기집권 및 유신체제의 폐해가 있었지만 새마을운동과 4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등에 따라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풍요로운 국가로 발전(연평균 9%대의 경제성장 달성) 시킨 공을 인정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바, 이는 거스르기 어려운 대세로 평가됨
□ 우리나라에는 지금 김영삼 대통령 기념관,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등이 설립되어 있음. 이분들도 공로도 있지만 IMF 체제로의 전락과 카드대란 및 신용불량자 양산 등 과오도 있음
⇒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우리들의 후손을 위하여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나아가 강대국으로 약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수많은 치적*을 쌓으신 전두환 대통령님을 국부**로 추대함과 동시에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여야 하겠음
*‘전두환 대통령님 시절 치적의 재조명’참조
**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오쩌둥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역사적 과오만 들춰내지 않았다. 그는 집권과정에서‘마오쩌둥의 공(功)은 7이요 과(過)는 3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명예를 지키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부로 옹립하는 역할을 수행
<5.18이 일어나기까지의 국내 정세등>
□ 10.26사건
o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궁정동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연락. 이때 김재규는 평소 마음먹었던 혁명을 하기 위하여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궁정동에 불러 대기케 했음. 자기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수하의 두 대령들에게는 권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에 김재규는 차지철과 대통령을 시해
o 김계원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 놓고 군의관으로부터 대통령이 확실하게 서거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거 비상소집을 했음. 8시 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차지철과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보고를 받았음. 그런데도 총리는 이를 함구하면서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각료들을 국방부로 이끌고 가서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과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을 결정한 후 곧바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가서 이 사실을 귀띔까지 해주었음
o 한편, 김재규는 시해후에 피범벅이 되어 가지고 맨발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불과 50m 거리에 있는 정승화에게 달려가 큰일났다며 그를 자기 차에 태우고 육군 B2 벙커로 갔고,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을 제치고 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을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고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경호실 차장을 월권적으로 지휘하여 경호병력을 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동결하는 명령을 내렸고, 현장 접근을 확실히 저지하기 위하여 또 다른 차지철의 부하,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수경사령관을 월권적으로 지휘하여 청와대를 포위토록 지시. 벙커에 온 김계원 비서실장은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하였던 권총을 내 놓으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승화는 노재현 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다. 하지만 신군부측의 순발력에 의해 김재규는 곧바로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고,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사실을 실토
□ 12.12사건
o 신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치부하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김재규를 정승화 참모총장이 비호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 하니 노재현 국방장관이 먼저 결재를 하여야 한다고 해서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6명의 장군들이 9시 30분경 대통령을 찾아가 8시간 정도 기다리며 설득을 해도 안되어서 시국담론을 하다가 국방장관이 돌아온 새벽 5시 10분에야 결재를 얻었는바, 쿠데타라면 바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면에서 대통령의 재가를 중시했다는 점은 쿠데타라고 치부하기 에는 어려움이 있음
o 그리고 12.12부터 이듬해 9월 대통령이 될 때까지 9개월간 최규하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는바, 쿠데타라면 9개월씩이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 이는 다단계 쿠데타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바, 전례가 없는 평가로 여겨짐
□ 5.17사건
o 박정희 대통령께서 타계한 10.26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북한의 남침우려가 부각되었는바,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12월 20일에 인민무력부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음
o 이러한 위기의 계절에 안보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 하였음. 김종필씨는 공화당, 김영삼씨는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씨는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 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
o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규모로 확산되었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씨는 5월 7일, 제1차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퇴진과 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
o 5월 15일의 시위는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부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
o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씨는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 - 5월 22일을 기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임
-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들을 향해서 5월 22일을 기해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을 선동했고, 군인들을 향해서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선동
o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는바, 당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이후 선포되었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
⇒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임
o 일부 정치인등은 10.26이후 바로 내각 총사퇴 및 직선제 개헌 등을 시행하지 못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박정희 대통령의 빈자리는 너무 커서 조바심을 낼 경우 자칫하면 정치불안 및 국가위기를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인바,‘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경우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임
- 이는 마치 핵폭탄의 경우 핵분열이 빠르게 일어나면 대량살상 무기가 되나 카드미움 막대 등으로 만들어진 제어봉(control rod)을 사용하면 핵분열의 속도를 감속․제어시킬 수 있게 되어 경수로 및 원자력 발전을 이용함으로써 문명의 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연상케 함. 1980년 서울의 봄 상황은 극히 짧은 시간에 소용돌이 치며 혼란을 불러 일으켜 우리나라의 존립 및 정체성을 위협하였는바, 12.12 및 5.17은 불가피한 선택인 것으로 사료됨
* 끝으로 한 기도문을 보고 적어 봅니다.
주님!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시여
당신앞에 드리는 제 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
당신의 종도 이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뜻 아니한 허물을 누가 알겠습니다?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
주님,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시여
당신앞에 드리는 제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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