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시간 저쪽의 뒷문 / 이영춘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 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그 목소리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때 푸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둥글어질 때까지 / 최영옥
눈물이 둥글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을 견뎌내야만 했을까
슬픔이 둥글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까
달빛은 둥글어질 때까지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삭이고 삭여야만 했을까
저기 저 하늘 밑 어둑한 들판을 서성이다
저기 저 강둑 밑 차가운 물가를 서성이다
달빛 그리움이 수놓은 창백한
손수건 한 장 펼쳐놓고
눈물을 궁굴리는 슬픔이여!
슬픔을 궁굴리는 눈물이여!
눈물 비켜선 자리마다, 슬픔 비켜선 자리마다, 말갛게 돋아난 별빛들
눈물을 끌어안기 위해
슬픔을 끌어안기 위해
밤새도록 이슬 헹구어
모가 난 가상이 뼈들을 깎아낸다
희붐한 동녘 하늘 아래서
붉은 햇귀, 둥글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