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301) - 동행 40년의 소회
평온한 주말, 쿠알라룸푸르에서 베이징으로 가던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속보로 뜬다. 뒤이어 베트남 해역에 추락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위조여권으로 탑승한 자들의 테러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사고정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체 탑승자 239명(승객 227명, 승무원 12명)의 안위가 비관적이다. 국내의 여러 곳에서는 생활고와 실의에 빠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등 세상은 늘 어수선하하다.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산에 들에 꽃피고 새우는 봄날이다. 이를 자축하듯 어제 저녁에는 아담한 음식점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식사를 함께하며 단란한 시간을 가졌다. '산에 들에'라는 식당이름이 계절에 어울리네.
지난주에 결혼 40주년을 맞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동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숱한 시련과 변화를 겪는 인생 40년을 옛 성인은 잡스런 유혹에 휘둘리지 않는 불혹(不惑)이라 칭하였는데 뜻을 세우는 30세(三十而立)에 가정을 이루어 쓴맛, 단맛 맛보며 둘이서 함께 또 다른 불혹의 세월을 무사히 살아온 지난날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며칠 전 광주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강좌에서 들은 이야기, 광주에 20여명의 인간문화재들이 있는데 평균 70세, 대부분 40년 적공을 쌓은 이들이란다. 부모봉양하고 자식들 양육하며 이웃들과 우애하는 가운데 40년 세월을 동행한 커플들도 어엿한 인간문화재로 대접받아야 할 터. 아내와 함께 평범하지만 성공적인 동행 40년을 맞이한 지난날을 감사하며 남은 때가 더욱 아름답기를 염원하였다.
결혼에 앞서 우리는 50일 씩 기도하며 행복한 삶을 다짐하고 설계하는 글을 썼다. 동행 40년을 회고하며 그때 쓴 책을 펼쳐보니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기억나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결혼 때의 다짐이나 염원을 기록으로 남겨놓기 잘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글의 첫 머리 일부를 옮겨본다.
'나에게 삶의 환희와 행복을 안겨줄 여인이여!
하나님은 이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세기 2장 23절)이며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하나가 될지니 그 비밀이 크도다(에베소서 5장 31-32절)고 이르셨으니 그 아내 될 자를 자기 같이 사랑함이 어찌 혼자만의 일이겠습니까만 누구보다 더 그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선물로 드리려합니다. 그것은 서로 약속한 바와 같이 '결혼준비를 위한 50일간의 기도와 그 기간 동안 염원하고 구상한 '사랑과 행복에의 기원'을 담은 이글을 쓰는 일입니다.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이루시리라(시편 37편 5절)고 옛 시인이 말했거니와 우리의 결혼생활을 하나님의 지혜로운 손에 완전히 맡기고 구할 때에 반드시 그 축복을 힘입어 우리 앞에 밝음과 기쁨과 보람의 삶이 전개될 것을 확신하면서 결혼예식 때 주어질 이 사랑의 선물이 당신에게 장말 값지고 귀한 예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50일간 기도하려는지 설명한 적이 있지요? 첫째 오순절과 성년(희년)에서 의미하는 죄의 사유와 새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50일 또는 50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둘째 우리의 결혼생활이 적어도 50년은 함께 영위하여 이른바 금혼식을 기념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셋째 간절한 소망이과 기원을 구하거나 드릴 때 100일기도를 이야기하는데 둘의 기도가 합하여 100일이 되므로 우리의 결혼생활이 원만하고 행복하게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를 간구하는 뜻이라고.'
함께 하기를 염원한 50년 세월이 어느덧 80%에 이르렀고 어쩌면 120% 이상 목표초과달성도 기대할 만큼 주변 환경과 심신이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기념일 아침에 식탁에 앉아 서로를 치하하며 지인이 보내온 '늙어가면서 사귀어야 할 친구'라는 메일 중 '배우자'(열 번째 친구)에 관한 구절로 지난날을 회고하고 오는 날을 조명하였다.
'아내는 청년시절에는 연인, 중년시절에는 친구, 노년기에는 간호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싶으면 아내를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살피니 연인으로, 친구로, 보호자로 함께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첫 아이를 임신한 아내는 출산 직전에 두 차례 병원에 입원하였다. 첫 번째는 집에서 가까운 서울대학병원이었는데 의료수준이 가장 높은 병원도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였을까, 두 번째는 결혼 전 근무하던 경북대병원을 원하였다. 풀죽은 목소리로 대구에 가고 싶다는 전화를 받으며 아내가 붙잡을 끈이 나뿐인 것을 가슴에 새겼다. 출가외인이런가, 장인이 돌아기시기 전 1년여 장기 입원하였을 때 맏딸이면서도 제대로 간병에 임하지 못하고 멀리서 애태우던 모습이 지금도 안쓰럽다. 25년 전, 아내와 첫 해외여행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러 간 김포공항에서 출국금지(이사장으로 일하던 학교법인의 내분 때문)가 되어 트렁크만 미국으로 갔다가 한 달 여 만에 되찾은 적이 있다. 예상치 못한 출국정지에 당혹하여 면목이 없는데 아내가 중심을 잡고 의연하게 대처하던 일이 떠오른다. 정치네, 사업이네, 봉사네 하며 어벌쩡하게 벌여 논 일, 말없이 뒤치다꺼리하는 동행을 고마워하자. 두 아들이 순탄하게 장성하여 성혼에 이르고 손자와 손녀가 무럭무럭 잘 자라니 이 또한 큰 축복이라.(얼마전에는 봄방학 때 내려온 일곱살 손자의 여자 친구 덕분에 페밀리 레스토랑에 둘러리처럼 따라가는 헤프닝도 있었다.)
우리의 동행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수많은 국내외여행이다. 공직에 있을 때는 휴가철에나 잠시 동행할 수 있었지만 교직으로 옮긴 후 방학 등을 활용할 수 있어 활동무대가 넓어졌고 정년 후에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회상의 피란길걷기(15일, 320여km), 조선통신사옛길 한일우정걷기(서울-도쿄 1200여km), 한일동호인들과 한반도일주(서울-목포-부산 888km는 2년 전에 걸었고 부산-속초-서울 770여km는 금년 4월 예정)를 같이 걸은 것을 비롯하여1937년에 고려인이 겪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과정을 답사한 회상의 열차 탑승, 중국 상하이에서 중경에 이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경로를 되밟은 임시정부대장정, 한국문화의 일본전수과정을 되짚은 문화탐방 등 나라와 겨레의 애환을 담은 굵직한 이벤트에도 둘이 함께 하였다. 배낭여행으로 한 달 여씩 돌아본 티베트 주변과 동남아시아의 정겨운 여정들이 아름다웠고 30년 전의 약속 따라 얼굴도 모르는 체코 청년 얀 팔라흐의 무덤을 함께 찾은 일, 신혼부부의 로망이던 알프스를 알차게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두 아들과 미국여행을 함께 하고 그들이 연수하던 영국과 프랑스를 다녀올 수 있음도 행운이었고.
아들의 결혼 때 쓴 축하와 당부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얼마 전 중국여행을 하면서 좋은 글 하나를 발견하였다. 반니성장(伴您成長, 당신과 함께 성장)이라는 글귀인데 당신과 더불어 행복, 당신과 더불어 발전이라는 뜻으로 사용해도 좋으리라 여겨서 반니행복(伴您幸福)이라는 문구를 너희들의 결혼축하문장으로 선물하니 아무쪼록 더불어 행복한 삶을 이루어가기 바란다.'
이제 보니 반니행복(伴您幸福)이라는 문구는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터, 희로애락을 함께 한 40년 동행과 더불어 남은 때도 행복하여라.
* 세상이 변하여 황혼이혼이 늘고 늘그막에 청년보다 뜨거운 감성의 연애를 하는 이들도 많다. TV에서 본 한두 가지 사례
1. 3년 전에 한 달여 북부아프리카 배낭여행할 때 동갑의 여행가와 한 방을 썼다. 여행 마지막 날, 심중에 담고 있는 고충을 털어놓는다. 사연인즉 3개월 전에 아내와 사별하여 상심 중에 있다가 괴로움도 잊을 겸 출발 직전에 여행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노라고. 아내가 떠나기 전 재혼을 권유하며 후보자도 추천하였는데 당분간은 본인의 재혼보다 미혼인 아들의 혼사가 더 중요한 과제라며 처연한 표정이다. 몇 주 전 TV의 '배우자 찾기' 프로그램에서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3년이 자난 아직까지 아들도 미혼이고 본인도 짝을 만나지 못하여 공개구혼에 나선 것, 오랜 세월 해로하기 어렵고 새로운 동행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일임을 일깬다. 좋은 동행 만나시라.
2. jtbc 방송 '임과 함께' 프로그램에 탤런트와 스포츠맨으로 널리 알려진 임현식과 박원숙, 이영하와 박찬숙이 가상커플로 나온다. 배우자와 사별 또는 이혼한 경우인데 새로운 결합이 잘 어울리면서도 전배우자와 살았던 흔적들이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느껴지는 대목에서 마음이 시리다.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지금을 행복하게 여기는 반면교사로 삼아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