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조절 장애(간헐적 폭발성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혀를 차며 말합니다.
"왜 저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술에 만취해 대뜸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시비 거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혀를 차게 되죠. 그렇다면 이렇게 누군가 분노하는 모습에 혀를 차는 이들은 살면
서 단한 번도 화를 내본 적이 없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 화가 나는가?" 하는 물음에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모든 이유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즉 통제되지 않는 무엇에 화를
냅니다.
가령 뉴스를 통해 접한 어떤 파렴치한 범죄자를 보고 분노한다면, 그 범죄자를 때려죽이고
싶지만 내가 때려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범죄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고, 애초에 범죄의 발생부터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화가 납니다. 또한 미쳐가는 세상을 보거나 사회의 부조리에 화를 내는 이유도 일개 시민인 내가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화를 내는 것도, 아무리 좋은 말로 달래고 어르려 해도 자녀가 말을 듣지 않고 통제되지 않
기 때문 이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는 것도 자신의 감정이, 의지가, 처한 상황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흘러가니까, 통제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인생의 질문을 탐구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분노'를 주제로 출연자들에게 살면서 가장 화를 많이 낸
상 대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출연자는 대부분 ’어머니‘를 꼽았으며, 그 밖에도 아버지와
형, 누나, 오빠, 언니, 동생, 배우자 등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가까운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왜 가장 사랑하거나 가깝다고 여기는 대상에게 화를
낼까요? 이 질문에 정재승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 했습니다.
"우리의 뇌는 자신을 인지하는 영역과 타인을 인지하는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요. 그러나 가
깝다고 여기는 관계일수록 나와 가깝게 저장되죠. 희한한 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를 인지
하는 곳에서 엄마도 같이 인지합니다. 나와 엄마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나라고 인지할 정도
로 가깝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자꾸만 엄마에게 화를 내죠. 나
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사랑해서 통제가 안 되면 불같이 화가 나는 거예요."
누군가가 내 생각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화는 시작됩니다. 뇌 과학적 논리대로라면 분
노 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은 뇌에서 나를 인지하는 영역에 타인을 불법 다운로드하는 셈입
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을 나 자신이라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
해서 발생하는 오류인 것이죠. 평소 에는 화도 잘 못내는 사람이 술 취해서 화를 내고 누군
가에게 시비를 거는 행위도 취해서 나를 인지하는 영역과 타인을 인지하는 영역의 질서가
교란되며 발생합니다.
그림을 그릴수록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모든 선과 모든 붓 터치를
내가 전부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통제에서 벗어난 부분은 지우고 수정하고를 반복
하죠. 설령 숙련자가 되어 어느 정도 선과 터치의 통제가 가능해진다 해도, 자신의 첫 의도
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결과물이 매번 나오지는 않습니다. 또한 내가 만족스럽게 그린 그
림이 항상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도 없죠.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은 세세한 과정부터
결과까지 모든 걸 다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선 내 생각과 감정 따위를 돌아보고 관찰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감정의
뿌리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한 층 더 나 자신을 이해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각
과 감정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거나 통제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노화가
진행되어 육체와 건강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듯이 말이죠. 인간이란 애초에 자기 자신을 완
벽히 통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통제되지 않는다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노력조차 하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중요
한 건 나 자신도, 내가 그리는 그림도, 내가 살아가는 삶도, 내가 대하는 타인도, 내가 사는
세 상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으니, 통제되지 않을 수 있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
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뇌 과학적으로 사랑하거나 친밀하게 느끼는 타인을 나 자신을 인지하는 영역에 가깝게 저
장해 그러한 타인과 나를 동일시 한다는데, 이 메커니즘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습니
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인지하는 영역에 모든 걸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는 너그러운 태도를 함
께 저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나와 가깝게 저장된, 나라고 생각하는 친밀한 대상들을
똑같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나, 너, 우리가 모두 서로
에게 너그러워지고, 화가 줄어든 세상 속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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