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4
6월17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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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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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ELfNhKhjfI8 (임재혁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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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잔소리와 조언을 구분하셨던 성모님!>
한 그룹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좋았다, 저런 게 좋았다,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아빠 잔소리 안 들으니,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지만, 정말 좋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쉼 없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또 반대로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잔소리와 진심 어린 조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잔소리 듣는 것 엄청 싫어하는 데, 어린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잘 동반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동반하셨는지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의 동반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귀갓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거슬러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게가 아니라 넌지시 나무랐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 또래 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12살 무렵 부터 메시아로서 탁월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를 향한 답변이 엄청 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세게 나온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직감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서서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거기다 더 이상 또 다른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십니다. 침묵 속에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노력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향해 할 말씀을 하셨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약 조절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위해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히 개입하시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렇게 균형잡힌 동반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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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을 사랑이 되게 하는 받아들임>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혈육 하나 없이 일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노인이 양로원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평생 가꿔온 호화주택을 내놓았습니다.
집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순식간에 10만 파운드까지 집값이 치솟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은 올라가고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노인은 허전한 마음에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단돈 1만 파운드만을 들고 집을 사기 위해 노인을 찾았습니다. “만약 이 집을 저에게 파신다면 어르신은 영원히 이 집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함께 차도 마시고 신문도 읽으며 제가 말벗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결국 노인은 그 집을 젊은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또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집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고독이고, 또 내가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고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란 상대 안으로 내 존재를 선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어줌’과 ‘받아들임’으로 모든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관계 단절이고 고독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전에 헨델이 가발을 찾아준 여인에게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악보를 선물하였지만 그 여인은 그 악보를 그저 머리 마는 것에 사용해버려 헨델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해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짝’으로 따라옵니다. 예수 성심은 한 영혼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마음이라면, 성모성심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 99마리를 남겨놓고 그 1마리를 찾아왔는데도 끊임없이 목자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 성심 기념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에 ‘짝(커플)’로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짝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짝이 자유로이 자신을 받아주는 이라야 내 안의 고독은 사라지게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카사노바처럼 산다면 외롭지 않을까요?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안주해야 할지 찾지 못한 떠돌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자신의 갈비뼈를 찾아 나섭니다. 왜냐하면 그 비어있는 갈비뼈가 채워지지 않으면 영원히 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또한 남자의 옆구리를 찾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안주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허전함과 불안함, 고독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이고 마음 속으로 깊이 새겼던 성모 성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986년 여름, 흑해에서 배 두 척이 충돌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참사의 원인은 전파탐지기의 고장이나 짙은 안개가 아니고 인간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양쪽 선장은 앞에서 배가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충돌을 피해 배의 진로를 바꿀 수 있었지만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양보하지 않았고,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강하면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모든 관계는 끝나고 맙니다.
자존심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하십니다. 즉 요셉을 당신 앞에 놓으십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자존심 상해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존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자아를 죽인 분입니다. 이것이 깨끗함이고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본질적으로 교만한 자아를 죽였다는 뜻인데 그 의미는 자아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공간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내거나 없었던 일로 잊으려 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셨던 것입니다.
사랑엔 자존심이 없습니다. 성모 성심을 본받는다는 의미는 아주 단순하게는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환원하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랑으로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것을 버린 ‘아멘!’, 이것이 사랑이 사랑이 되고 하는 순결한 성모 성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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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며칠 전 한 어린아이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해 주세요. 착한 누나는 스마트 폰 너무 보지 않고 책을 가까이 하게 해 주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떨어지지 않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저는 한 번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연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가 있습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입니다. 가사의 내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힌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힌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어제는 ‘예수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은 ‘순종’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희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종, 연민, 겸손, 희생’의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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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축일의 유래 :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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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군중’은 그때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엾은 마음’은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인간들의 처지를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고,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이라는 말은,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신약시대 때에는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떻든 단 한 순간도 목자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나쁜 종교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두 번째 이유는 목자이신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었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로 오신 분이고,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로 가는 길을 알려 주려고, 또 인간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이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빛이신 분’이고,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해방자이신 분’이고, 잃은 양들을 찾으려고 오신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또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또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을 주셔도 “나는 어둠 속에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면, 또 예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셔도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이곳에서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라고 주장하면서 감옥 안에 있겠다고 고집부리면, 또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가 없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구원을 못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신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 점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제대로 깨달았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고백했고, 예수님만이 그 처지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들이 사도로 뽑힌 것은 사도가 될 만한 자격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음에 제자가(신앙인이) 되는 과정에서부터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5,4-5)
어부들은 자신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즉 먹고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 쏟아도 얻는 것이 없는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또는 먹고사는 일만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에서 벗어나서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바로 그 해방과 구원을 주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겠습니다.”인데, ‘고기잡이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한 말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먼저 있었고, 기적이 나중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기도 하고, 감방으로 되돌아갈 때도 있고, ‘잃은 양’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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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어제 우리가 예수님의 성심을 기억하였다면, 오늘은 그분의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기억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심에 당신의 마음을 동화시키시려고 일생을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잉태 소식! 이해하기도 믿기도 어려운 소식이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남아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들을 찾은 어머니는 속상함을 토로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성모님께서는 아마도 “잘못하였습니다.” 하는 아들의 대답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어리둥절해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처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의 사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은 성모님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신비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십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예수 성심에 동화되고 성화되기를 열망하는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 바깥으로 밀쳐 내기보다 성모님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마음도 예수님의 성심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성모님의 성심이 받아들임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 마음의 성화도 받아들임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우리 주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좋고 쉬운 것만 있지 않고, 싫고 어려운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간 관계가 그러합니다.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웃이 어쩌면 우리를 성화로 이끄는 신비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이 사랑의 꽃을 피우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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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님]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
지난 월요일 청룡산에서 아빠 빠진 꿩 가족을 만났습니다. 엄마 꿩 주위에 병아리 꿩들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털이 보송보송 난 꿩 병아리들이었습니다.
나를 마주친 엄마 꿩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습니까? 엄마 꿩은 새끼들이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길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서있었습니다. 엄마 꿩은 “내 새끼들을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듯 했습니다.
엄마 꿩의 그 사랑을 범할 수 없어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습니다. 이윽고 길을 건너 꿩 가족들은 낙엽을 신나게 뒤적이며 평온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길을 버티고 서있던 그 엄마 꿩의 사랑은 저에게 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지만,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냥 길 한 가운데 멈추어 선 그 엄마를 어찌 하찮은 날짐승 한 마리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 마리 까투리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저에게 전해진 엄마 꿩의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꿩 가족을 뒤로하면서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의문표를 저의 가슴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저는 또다시 일상잡무 속에 파묻혀 그 고귀한 사랑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님의 마음을 우린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덜거리는 걸레처럼 찢겨질 대로 찢겨진 통고의 심장을 우린 눈물도 없이 그저 사랑이라 일컫습니다.
아들의 절규에 구멍이 뻥 뚫린 어미의 마음을 얄팍한 감상에 젖어 잠시 눈시울을 적시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일상잡무 속에서 그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짓거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갑남을녀가 된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돌아오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절규에 이제 마음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음을 어머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담긴 사랑과 고통을 이젠 우리 마음에도 담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밀어내면 사랑이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어미 꿩이 그랬듯이 언젠가 새끼 꿩도 엄마처럼 그렇게 새끼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어미 새가 저에게 전해준 그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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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당하는 고통>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정녕 복되십니다.”
성모님께 있어서는 모든 이가 부러워할 정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복되다’라고 딱히 드러낼 만한 구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생애 막바지에 가서는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성모님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정녕 복되십니다. 고통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제목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의 버금가는(함께하는) 고통”(Passion of Christ and Compassion of Mary)으로 달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낳을 때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까지 늘 함께하셨기에,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복되다’라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며,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웠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학교’에서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것인지를 배울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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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왜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인 1942년에 전세계를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이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로마 전례력이 개정됨으로써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인 토요일에 성모 성심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성적인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된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영적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비체의 머리이며 만민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따라서 성모의 모성적 사랑은 성모의 덕행과 내적 생활, 하느님께 받은 갖가지 은총과 연결됩니다. 심장으로 표현되는 성모 성심은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음이므로 그에 합당한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더 우리의 삶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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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마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를 가득 채워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성모마리아는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 주십니다. 성모마리아는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경청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면 매우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장19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장 52절에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뜻 앞에서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이, 겸손하게 서 있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께서 당신을 완전히 차지하시고 당신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끔 자신을 성령의 손에 내어 드리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경청, 의탁의 자세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 서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게끔 내맡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성모님께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속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92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것의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계셨고, 이제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주검을 품에 안으셔야 했던 어머니,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전념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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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이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냐면서 화를 내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아들이 잘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것이 뭐 있는데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 화풀이를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 말에 아버지는 너무 서운했고 슬펐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정신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보셨습니까?”
이 형제님께서는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을 압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을까요? 혹시 모른 척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랑이 아닌 당연한 부모의 의무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말과 행위가 드러나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에 대한 복음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깊이 뉘우친 뒤에 아버지께 갑니다. 이를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루카 15,20)라고 루카 복음은 전해줍니다.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돼지 치는 일’을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행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루카 15,18)라는 생각을 행위로 드러냈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기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행위로 사랑이신 아버지를 만나고 사랑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진지한 결단이 담긴 말과 행위가 꼭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부터 시작해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 역시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불평불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루카 2,51 참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에 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신 성모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불평불만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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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안에>
루카 2,41-51 (예수님의 소년 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마음 안에>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계시듯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계시니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품듯이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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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을 먹는 우리>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는 예수 성심, 오늘은 성모 성심 축일 지냅니다. 아들 가는 데 어머니 가시니 우리의 전례도 아드님의 마음에 이어 어머니의 마음도 같이 기리는 거지요.
그리고 그 마음들을 기리며 우리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니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마음을 먹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마음을 먹기로 마음을 먹고, 성모님과 똑같은 마음을 먹기로 마음을 먹는 날입니다.
여기서 저는 왜 마음을 먹는다고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음식을 먹듯이 마음도 먹는 것인가요? 왜 마음을 먹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먹는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겁을 먹고, 나이를 먹고, 뇌물을 먹고.
내뱉지 않고 속으로 집어넣거나 삼킨다는 뜻입니다. 밖으로 내치지 않고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말과 있었던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말도 안 소리라고 바로 내치지 않으시고, 일단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이쪽 귀로 듣고는 저쪽 귀로 내보냅니까? 그런데 성모님은 아들의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성모님의 마음속이 잉태의 장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심으로써 아드님을 잉태하셨잖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정배가 되는 길입니다.
다른 잡것들은 마음먹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 간직하기로 마음먹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하고, 성령의 정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들을 ‘Sponsa Christi’, 그리스도의 정배라고 보통 부르는데 프란치스코는 특이하게도 클라라 수녀들에게 성령의 정배가 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정배가 되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동정녀였다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것도 좋지만 성령의 정배로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도 좋습니다.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고, 간직하고, 출산하는 어머니들이.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마음에 새길만 합니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무튼, 겁이나 나이나 뇌물을 먹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마음을 먹는, 그것도 주님과 성모님의 마음을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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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聖化)되십시오!”>
- 성화의 여정 -
“성화되십시오!"
제가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 아침 식사 전 최초로 들은 최고의 참 좋은 인사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문도미니코 수사님이 전기스토브에 구워진 식빵을 건네 주며 했던 이 인사말이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고 즉시 참 좋은 인사말이라 감사했습니다. 정말 형제자매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인사말입니다.
예전에 “성인이 되십시오!”, “성녀가 되십시오!” 간혹 말씀드린 적은 있어도 위 인사말은 처음입니다. 언젠가 사찰에서 불자들이 “성불하십시오!”서로 합장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을 본 적에 감동한 적이 있는데 저는 “성화되십시오!” 인사말에 감동했습니다.
예수성심성월 6월중 어제 16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고, 오늘 17일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대축일’입니다. 아드님과 어머님의 축일 배치가 등급에는 차이가 있지만 참 보기 좋습니다.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했지만 저는 오늘을 포함해 하루하루 모든 날이 신자들의 ‘성화의 날’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성화의 여정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성화은총이 우리의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마침 어제 16일은 교황님께서 6.7일에 입원하셨다가 쾌차되셔서 퇴원한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 퇴원후 바티칸에 돌아 오자 즉시 관례대로 성모경당에 들러 성모님 이콘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참 거룩하고 아름다워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뿐 아니라 역대 모든 교황님들의 성모신심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고백의 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에 제가 주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제 늦게서야 우리의 성화를 바라시는 성모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는 고백기도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은 예수아기를 안 듯 당신을 찾는 우리 하나하나를 안으며 다음같이 되뇌일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선물을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안 듯
당신을 안는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어제 오후도 며느리와 손주를 둔 자매님들이 면담성사차 방문했기에 사죄경과 강복후 이 고백시의 마음으로 안아드리고 위 고백시를 출력하여 나눠드리며 당부했습니다.
“제가 이 고백시의 모범을 보여드렸습니다. 이 고백시를 잘보이는 곳에 붙여 놓으시고 이런 마음으로 남편을, 자녀를, 며느리를, 손주를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도 자매님도 성화될것입니다. 우선 남편한테 이런 마음으로 안아달라 하세요.”
얼마나 좋은 몸과 마음이 하나된 기도인지요! 성화의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지요! 성화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성화되십시오!” 하느님의, 예수님의, 성모님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도 가능한 저를 찾는 모든 분을 이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안아드리고 위 고백기도문을 출력하여 나눠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통과해 성화되어 성인이 될 수 있겠는지요? 광야인생여정 셋중 하나일거라 드린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자기를 잊고 살다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성화도 은총이자 동시에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첫째, 사랑의 찬미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찬미를 사랑하세요. 저절로 찬미입니다. 찬미의 은총이자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타고난 영적본능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의 맛, 찬미의 기쁨, 찬미의 재미로 살아갔던 성인성녀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가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성모님은 찬미의 어머니였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찬미의 고백은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고백이자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고백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아,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의 성화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 치유와 위로는 물론이요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사랑의 경청입니다.
사랑의 경청입니다. 경청을 사랑하세요. 저절로 경청입니다. 경청의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겸손, 사랑의 경청입니다.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잘 듣는 이가, 경청(傾聽, 敬聽)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거룩한 ‘성(聖)’자 안에 귀 ‘이(耳)’자가 들어있음이 이의 반증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 말로 경청의 달인이자 관상의 대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담아두는 내적공간이 큰지 감탄하게 됩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과 더불어 화도 났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거룩한 문제아(?)’일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 아드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점입가경입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동문서답, 적반하장입니다. 사과가 아니라 성모님의 몰이해를 추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성모님은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경청의 지혜, 인내의 믿음입니다. 불같이 화를 낼법도 한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간직합니다.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는 깨달아 이해할 때 까지 끝까지 담아두기로 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 어머니들은 물론이요 믿는 이들 모두가 배워야 할 성모님의 경청과 관상의 자세입니다.
셋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자발적 순종의 사랑입니다. 이런 자발적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그러니 순종을 사랑하세요. 순종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순종의 달인이자 순종의 대가였음을 이미 수태 예고시 들은 바 그대로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참으로 부모의 삶이 반듯하면 자녀들의 삶도 십중팔구 반듯합니다.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겸손도 순종도 보고 배웁니다. 복음 후반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면 지냈다.’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모중 특히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삶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성화되십시오!”
“성인이되십시오!”
성화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가 성인이 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하듯 삶을 사랑하세요. 찬미를 사랑하세요. 경청을 사랑하세요. 순종을 사랑하세요. 저도 수도생활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기에 기쁘고 행복하게 수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사랑하세요. 하와로 말미암아 닫혀진 낙원문이 동정 마리아를 통해 열렸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두 교황님의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참빛을,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주셨나이다.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시어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선의 샘이 되셨나이다.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
(2005.12.25. 예수성탄 대축일 교황 베네딕도 16세)
다음은 2022.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바친 봉헌기도중 끝부분입니다.
“오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저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어머니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지고 감미로운 평화가 저희의 일상에서 약동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임하신 날 “예”하고 응답하신 성모님, 저희에게 하느님의 화합을 주소서. ‘희망의 샘’이신 어머니, 저희의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소서.
당신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엮어내셨으니, 저희를 친교의 장인으로 만드소서.
당신께서는 저희의 길을 걸으셨으니 저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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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엄마의 마음!>
어제는 아들 예수 마음, 오늘은 엄마 마음을 묵상합니다. 아들 예수의 마음은 모두의 살림(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펠리칸 사랑의 마음이라면, 엄마의 마음은 온전히 아들과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아들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루카2,41-51)은 '예수님의 유년사화'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살 때의 모습이 전해지는 '예수님 사생활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는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하는 축제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매년 큰 명절 때 고향을 찾는 축제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큰 축제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많은 인파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찾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2,48)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2,49)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 예수의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삶의 자리인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고, 엄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엄마의 마음!'
엄마의 마음은 성가(248번) 가사처럼 한 생을 아들 예수와 함께 하시면서 아들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마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기쁨과 아픈 일들을 드러내지 않고 온 몸과 마음으로 간직하면서, 항상 아들 곁을 떠나지 않았던 마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음이고, 티 없이 깨끗하신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겸손하게 엄마의 마음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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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fpYAAVZ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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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무엇을
애타게
찾는지요.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우리의
깨끗한
본마음을
찾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언제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이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삶이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입니다.
사랑은 제 마음을
깎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어머니도 계십니다.
마음 속을 비추는
믿음의 빛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애타게 다시
부릅니다.
잃어버린 것을
너무나 기쁘게
찾게 됩니다.
애절하게
부를 한 사람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람입니다.
마음 속에
애절한
그 이름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프지만
행복합니다.
담아야 할 마음과
놓아야 할 마음이
분명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마음의
꽃밭이 되고
믿음의 꽃밭이
됩니다.
찾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이 마음이
우리 마음밭을
향기롭게 합니다.
우리 깨달음의
전부는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어디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찾아야 할지를
성모 성심은
잘 보여주십니다.
절실한 마음
애절한 마음
간절한 마음
우리의 마음입니다.
일상의
단순한 것에서
마음을 나누는
성모 성심의
기도와 실천입니다.
성모 성심이여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빈자리를
마련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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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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