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에페 3,14-21; 루카 12,49-53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24.10.24.
에페소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치명한 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유언을 담아 스승의 이름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바오로의 삶과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또 영적으로 더 깊이 숙고한 바를 정리해 놓은 것이라서, 당시 에페소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쇄신에 기여했고 그 결과로 신앙을 박해하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신앙적 이론무장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에[페소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교회론적 회심의 태도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자신의 혈통과 전통에 자부심이 강했던 사도 바오로가(필리 3,5 참조) 편협한 자기중심적 선민의식의 전통을 과감하게 버리고 보편적이고 개방적이면서도 복음적인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고자 했던 교회론적 회심의 태도를 그의 제자들이 이 에페소서에서 매우 세련된 논리로 전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박해를 가하고 있는 로마인들과 다신교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그리스인들까지도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는다는 보편적 현실을 비로소 자각하고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교회는 유다교의 품에서 떠나야 하고 오히려 유다교가 보여준 역사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대로 살아야 한다는 독립선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의 가톨릭교회가 받고 있는 복음화의 사명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각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뿌리가 모두 하느님께 닿아 있음을 알려야 하기 때문에 더 무겁습니다. 그 방법이란 결국 예수님께서 하셨던 방식을 철저하게 계승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로마제국의 박해를 종식시킨 이래로 서구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 서방 가톨릭교회가 모든 민족들을 복음적으로 감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백인우월주의적 사고방식과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힘의 논리로 대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식민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중세와 근세의 역사적 시행착오에 대한 성찰 위에서 사도 바오로의 교회론적 회심의 영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신학자들과 주교들에게도 미쳐서,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진리를 증언하러 세상에 오시고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뿐”(사목헌장, 3항)이라고 선언하면서, 공의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사목헌장, 27항)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만민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라는 보편적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 잡혔던 역사적 시행착오는 그리스도교의 정통 적자임을 자부하는 가톨릭교회에게도 반면교사가 됩니다. 성직주의 경향과 영적 세속성 현상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향과 현상에 맞서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동합의성을 교회 구조에서 관철하려 하고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앙 감각이 주어져 있음을 진지하게 인정하려 합니다. 최근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를 통해 발표된 이에 관한 두 건의 문서,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2014)과 「교회생활에서의 신앙 감각」(2018)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쇄신 의지를 보여줍니다.
교황은 사도 바오로처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교회 구조에서 성직자들이 수도자 및 평신도들과 공동합의적 구조를 관철하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카리스마가 내려지고 있는 수도자와 평신도 역시 믿음에 관한 일을 명확히 식별하며, 참된 지혜를 촉진하고,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신앙 감각이 있음을 인정하려 합니다. 이러한 교회 쇄신의 의지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성직주의와 영적 세속성 그리고 공동합의성과 신앙감각에 관한 교회 내부의 논쟁을 촉발시켜 진정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정성 있는 자세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설득하려 하는 교회론적 회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한 지 반세기를 넘기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본받는 쇄신을 통해서 가톨릭교회를 현대화시키고자 했던 이 공의회는 복음이 알려주는 ‘예수의 교회’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교회 쇄신의 시작의 시작’(칼 라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교회에 비교해 볼 때 외형적인 성장은 번듯하게 서구화를 이룩했고 또한 교세 신장이나 신앙 열기에 있어서 유럽교회를 추월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교회론적 회심에 있어서는 시작의 시작의 시작도 하지 못한 셈입니다. 전형적인 외화내빈의 상태이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세상에 불을 지르기 이전에 먼저 우리 교회에 불을 지르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행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