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를 파고 거름을
에페 4,7-16; 루카 13,1-9 /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2024.10.26.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중에도 이스라엘에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한 식민통치로 인해 억압과 수탈이 구조적으로 자행되고 있었고, 이러한 공포정치에 저항하려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폭동 또한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총독 빌라도가 희생 제사를 드리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깔려 죽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열여덟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 당시 유다인들은 희생 당한 이들이 죄를 지어 받은 벌이라고들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갈릴래아 양민 학살 사건은 헤로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양민들을 학살한 날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그 날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자신을 비판하던 요한을 참수해 버렸는데, 이 일은 총독 빌라도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저질렀으므로 불법이었지만, 영주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헤로데를 대놓고 칠 수는 없어서 애꿎게 희생 제사를 드리려던 갈릴래아 양민들을 죽여 버림으로써 헤로데에게 경고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갈릴래아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요한을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재가를 받지 않고는 그 어떠한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으니, 마침 그럴듯한 빌미를 찾은 셈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헤로데와 빌라도는 사이가 나빠져서 원수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예수님은 그 당시의 두 권력자, 빌라도와 헤로데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요한을 참수한 일은 헤로데가 저지른 죄였고, 갈릴래아 양민을 학살한 일은 빌라도의 죄였습니다. 요한이나 갈릴래아 사람들의 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깔려 죽은 일도 그들의 죄 때문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실로암은 옛 예루살렘 도성의 남쪽과 동쪽 성벽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급수지였고, 히즈키야 임금이 만든 수로가 끝나는 지점이었습니다. 탑으로 만든 이 망대는 오래되어서 여러 가지로 파손된 곳이 많아서 무너지기 쉬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도성의 관리 책임자들은 위험해 보이는 그 탑을 보고서도 모른 척 해 버렸고, 급기야 그 탑이 무너지면서 열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탑에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종합해 보자면, 이민족인 로마의 지배 하에서 일어난 갈릴래아 양민 학살 사건이나, 로마의 타협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배하게 된 사두가이들이 도성 관리를 소홀히 하여 일어난 실로암 탑 붕괴 사고나 결국 하느님의 백성으로 간택된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즉, 나라의 주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식민통치 권력에 부역하다 보니 백성을 존중하고 섬기는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적 불의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이고, 이 두 사건은 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가려 한다면 얼마든지 재발될 수 있는 사건이요 사고였던 셈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루카 13,3)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에 담긴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불충실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다면 포도밭에 심겨진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기 마련이듯이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었어야 했는데, 제 철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처럼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는 예수님의 이스라엘 역사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라 버려도 마땅한 무화과나무를 한 해 더 그냥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포도 재배인은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가운데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받아들여 형성된 교회가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자라나고 있음을 에페소 편지에서 상세하게 피력합니다. ‘에페소서의 교회론’이라 할 수 있는 이 대목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충만해진 교회에서 사도와 예언자와 복음 선포자와 교사나 사목자로 은사를 각기 나누어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으나 보지 못하셨고, 사도 바오로가 그 싹을 겨우 보았던 것이 포도 열매가 맺힌 포도나무에 비견되는 교회를 우리가 이 시대에 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사도직은 온몸에 영양과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성장시키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의 우리 교회는 백 년의 박해를 견디어 낸 교우촌에 뿌리를 둔 교회입니다. 그 뿌리에서 줄기가 자라서 훌륭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자 하는 백성을 잔인하고도 혹독하게 박해한 죄과를 우리 민족은 20세기 백 년 동안 식민통치와 분단, 그리고 전쟁과 독재 그것도 민간 독재와 군부 독재를 번갈아가면서 겪고 있습니다만, 이제 그 고난을 졸업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우리 교회와 믿는 이들의 헌신과 희생에 달려 있다고 보입니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머지 않아 통일과 민족 복음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