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7시(현지시간) 베를린
오라니엔슈트라세에 위치한 한 갤러리에서 독일신사회미술협회(ngbk)의 ‘금지된 그림들-동아시아 민주주의에서의 통제와 검열’이라는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체제와 정치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풍자한 작품으로 본국에서 논란을 빚었던 한국과 일본, 대만 지역의
작가 6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였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 그림과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비판하는 작품이 걸린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이날 전시장은 150여명의 관객이 들어차 성황이었습니다. 갤러리 입구에
들어서자 박근혜 대통령이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등장한 ‘말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건너편에는
‘세월호’와 날개가 잘린 닭이 그려져 있는 대형그림이 보였습니다. 이른바 ‘박근혜 출산 그림’으로 알려졌던 그림도 미완성인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모두 홍성담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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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미술가 홍성담씨는 베를린 전시장 벽면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그림 '세월오월'을 직접 그려 전시했다./한경진 기자
이번 전시회에는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비판한 조형물로 ‘도쿄도미술관’에서 철거 요구를 받았던 나카가키
가쓰히사, 정치 권력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작품을 즐겨 그려온 대만의 첸칭야오, 김정은을 비판하는 작품을 중국 베이징에서 전시하려다
북한 대사관의 신고를 받고 철수했던 탈북작가 선무씨 등도 참여했지만 가장 관객의 주목을 끈 사람은 홍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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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작가 선무의 작품 '김일성 초상화-조선의 태양'. 아래 '김일성화'와 한 세트인 작품으로 꽃을 들여다보면 no라고 쓰여있어 '김일성은 조선의 태양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경진 기자
홍씨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세월호 사건을 풍자한 걸개그림 ‘세월오월’을 전시하려다 파행을
빚고 논란의 중심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작년 한국 미술계의 가장 큰 이슈였던 이 사건으로 인해 이용우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가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홍씨는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걸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보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간 복역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민중미술’ 분야에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현실 정치·사회 운동에 방점이
찍혀있는 홍씨의 작품은 정작 주류 미술계와 시장에서는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작품마다 유명세를 타게 된 시점은 지난
대선입니다. 홍씨는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의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대선 직전이던 2012년 11월 말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른바 ‘박근혜 출산 그림’이라고 불리는 홍씨의 작품 ‘골든타임’이 공직선거법상 후보자 비방에 해당할 수 있다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이듬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리기까지 홍씨의 그림은 여러 번 사회면 뉴스를 장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2014년에는 앞서 언급한 광주비엔날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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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홍성담 작가의 걸개그림‘세월오월’전시가 유보되자 지역 예술인들이 수정된 그림을 대형 천에 프린트해 광주광역시 광주시립미술관 앞에 펼치며 항의하는 모습./조선일보DB
올해 베를린 전시를 앞두고는 국내의 한 해운회사가 ‘내부 방침에 따라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예술품은 독일로 운송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홍씨가 또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작품을 실어올 수 없자, 베를린으로 건너와서 4일 간 갤러리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미완성’처럼 보이는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고 합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일본 NHK 방송국 기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 문구가 새겨진 작품을 살펴보다 “예술 작품을
금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예술과 정치 사이의 어렵고 복잡한 문제여서 아직 기사의 방향과 보도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독일 관객들은 일제히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작품이 얼마나 멋지거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인지보다는,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그리고 전시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나치에 견주거나, 신체부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풍자물이 등장해도 보고 넘길 뿐 일일이 대응하거나 규제할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런 독일 사람들의 태도를 유교 문화권인 한국의 상황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선관위가 수사 의뢰를 하고, 비엔날레 측이 그림 수정을 요구하고, 해운회사가 운송 거부를 하는 과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오히려 홍씨가 ‘억압에 저항하는 예술성’이라는 명분과 유명세를 동시에 획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홍씨의
작품은 수준에 넘치는 주목을 받는다는 비평이 있습니다. 이날 홍씨는 ‘유신의 망령’을 내쫓는다는 의미의 공연을 벌였고, 박수
갈채를 받으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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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베를린 '금지된 그림들' 전시회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 그림이 소개되고 있다./한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