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31(토요일. 2일차. 뭄바이) http://blog.daum.net/ubo4u
어제의 강행군에 몸이 좀 고단했던가보다. 일곱 시 까지 늦잠을 잤다. 뜨거운 샤워까지 하고나서야 다시 컨디션이 오른다. 오늘은 뭄바이 시내투어를 한 뒤 고아 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을 예정이다. 거추장스런 큰 짐들은 모두 큰 배낭에 챙겨 넣은 뒤 호텔 로비에 보관을 부탁하고서 작은 배낭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을 챙긴다. 세모(歲暮)라지만 이곳은 남부인도인지라 더위가 만만치 않으리니 큰 배낭이 부담스런 것이다. 아침식사는 대충 거른 채 호텔을 나선다. 인도의 북쪽지역과는 달리 사는 형편이 좀 나은 이곳에는 자전거릭샤가 눈에 띠지 않는다. 우선 오토릭샤를 잡아타고서 세계 최대의 빨래터인 ‘도비가트’를 향한다. ‘도비’라 함은 카스트제도상의 빨래하는 계급을 말하고 ‘가트’는 부두를 뜻하는데 빨래터는 당연히 물가에 있어야하기에 이런 지명을 갖게 된 것이다. 메일 오천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어 빨래를 두드려대는 모습이 어찌나 장관인지 ‘인디아게이트’와 더불어 뭄바이의 대표 관광 명소가 되었다.
아침나절의 번잡함을 뚫고서 릭샤가 달린다. 배기가스에 찌든 공기로 인해 허파가 좀 괴롭기는 하다마는 델리의 그것에 비한다면 훨씬 나은 셈이니 그런대로 견딜만하게 여기고 만다. 오래지 않아 릭샤는 우리를 강가의 다리 곁에 내려놓는다. 여느 인도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을 한다. 다리 모퉁이에서 내려다뵈는 빨래터가 역시나 장관이다. 저 건너 서있는 수 십 층 현대식 빌딩과 그 아래로 길게 늘어선 오래된 빨래터의 대비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벽돌로 이은 수많은 물탱크들이 서로 잇대어지고 사이사이 매어진 빨래 줄에는 이미 세탁을 마친 옷들이 하양 파랑으로 펄럭인다. 좁은 계단을 통하여 어깨를 부딪혀가며 내려선 길바닥이 많이 지저분하다. 얼마나 묵은 길인지 바닥의 흙빛이 온통 흑갈색으로 주변에 보이는 보통 인도인들의 피부색을 닮았다. 역시나 검은 빛의 깡마른 낯선 사람이 성큼 다가서더니 다짜고짜 도비가트의 내부를 관람하려면 각자 오십 루피씩 내란다. 더군다나 촬영에는 이십 루피 추가란다. 둘이 합하면 백이십 루피로 우리 돈으로 삼천원정도이지만 이곳의 물가를 생각해보면 도둑도 이런 날도둑이 없다. 결국 흥정 끝에 사진도 안 찍을 거라 하고 이십 루피만 내고서 내부로 들어섰다. 돈 받은 그 사람이 선뜻 앞장을 선다. 나름대로 우릴 이끌며 열심히 설명한다. 어쩌고저쩌고.... 인도인의 좀 다른 영어(R이나 T 등을 모두 강하게 발음한다. 예를 들어 MARKET ; 마르껫)를 잘 알아들을 순 없지만 주변의 상황을 살펴가며 이해하려드니 어려울 것이 없다. 모두들 웃통을 벗어부치고서 한편에서는 빨래를 휘둘러 때려대고 다른 쪽에서는 굵은 솔로 하얀 천을 문지르며 때를 빼는 ‘도비 왈라(꾼)’들, 너저분한 표백 통들과 크고 작은 탈수기들이 널려있고 빨래줄 마다에는 말라가는 옷들이 빼곡하다.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았다만 몰카모드로 모두 다 촬영해 두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참을 다니다보니 모두가 그게 그거다. 이쯤해서 구경을 마치고자하니 안내하던 녀석이 뭘 한 게 있다고 팁을 요구한다. 이 허접한 곳에서 비공식적인 입장료를 챙겼으면 되었지 팁까지 요구한단 말인가. 웃기는 녀석이다. 대략 그의 말을 무시해버리고서 갈 길을 나선다. 길 가 손수레 위에 열대과일들이 풍성하다. 이제껏 잊었던 시장기가 인다. 혹시나 익숙치 않은 과일에 탈이나 나지 않을까 염려하니 바나나가 가장 만만하다. 몽키바나나로 불리는 작은 크기의 바나나가 입에 달다. 금방 포만감이 든다. 파인애플과 포도 등속도 있지만 미뤄두기로 한다. 과일 행상 곁의 수레에서는 사만사(튀김민두)가 튀겨지고 있다. 끓는 기름 냄새가 입맛을 다시게 하건만 튀김 솥 안의 기름을 보고서는 그만 식욕을 거둔다. 대략 보아도 몇 날 며칠 수십 번은 사용했음직한 시컴한 갈색 빛이 주인 남자의 얼굴색에 다름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모든 것이 “노 프러프럼‘이라는데 아직 내가 현지화가 안 된 탓이리라.
또다시 차비 흥정을 마친 릭샤에 올라 ‘뭄바이 CST역’을 향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가장 우아한 건축물로 꼽히는 이곳은 인도 제 2도시인 뭄바이의 한 중심에 자리하여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시내 관광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오늘 저녁에 고아 행 야간열차를 타야만 되는 곳이어서 미리 확인해둘 필요도 있다. 어제 공항에 내려 이 곁을 지날 무렵의 밤거리는 거의 한산했었다. 이른 아침 도비가트를 향할 때만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극도로 많아진 사람과 차량의 홍수 속에서 정녕 인도 땅을 다시 밟았음을 실감한다. 인파(人波)라는 표현이 정말 명실상부하다. 거대한 물줄기가 수많은 갈래 길을 따라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듯, 인간 쓰나미에 다름이 아니다. 엄청나게 붐벼대는 역전 거리는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안 된다. 광장이 따로 없는데다가 연이어 도착되는 콩나물시루 버스에서 승객들은 꾸역꾸역 풀려나고 더운 날씨임에도 인도인들은 거의가 남녀 모두 긴팔에 긴 바지와 치렁치렁한 치마 차림을 했다. 해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햇볕은 더욱 강렬하다. 색안경 없이는 눈부심을 참아내기 어렵다. 준공 된지 125년 되었다는 역전의 외관이 참으로 우아하다. 모두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올려다 뵈는 중앙 돔 위에 진보의 횃불을 든 여신상이 우뚝하다. 그 아래에 세워진 여덟 개의 뾰족탑 장식이 전체적으로 왕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좀 더 아래쪽에 하얗게 박힌 시계는 이제 열 시를 가리킨다. 전통복장 차림의 점잖은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건네며 드물게 보는 동양인에게 반가움을 표한다. 확연히 다른 생김새가 저들에게는 큰 호기심의 대상이다.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노인은 디지털 카메라에 관심을 표하며 함께 기념촬영을 제안한다. 비록 주름진 얼굴이지만 조용한 말씨로 다정히 대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부드러운 연륜을 본다. 역전 안 부킹홀로 들어서니 우선 그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우선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건물의 규모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열차들의 모습이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네의 것보다 넓은 광폭 레일 위에 놓인 전동차들의 모습이 넓죽이를 연상케 한다. 더운 곳이니 따로 출입문을 치밀하게 만들지는 않아 사방이 트였다. 지붕은 부분적으로 채광창을 두어 자연광만으로도 어느 정도 조명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긴 의자마다 여행객들이 가득하다. 빈 곳을 찾아 다리쉬임을 하며 가이드북을 꺼내든다. 주어진 시간 안에 어디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닐 것인가. 안내 책자의 도움이 아니라면 무망한 노릇이다. 약간의 군것질로 원기를 돋우고서 다시 길을 나선다. 안내서에 의하니 주요 볼거리가 이 부근에 다 모여 있다. 모두 다리품을 팔아야할 곳들이다. 시내를 다니려면 인도 돈이 있어야만 된다. 역을 나와 큰 차로를 무단으로 횡단한 뒤 주변을 살핀다. 왼편으로 중앙 우체국이 자리했고 그 곁의 골목에 환전소 간판이 붙었다. 푸른 복장을 갖춘 경비원이 표정이 엄중하다. 삼백 딸라 정도면 둘이 우선 쓰기에는 적당하리라. 아우를 들여보내 환전을 시킨 뒤 건물 밖 야자수 그늘에 쉬었노라니 돋았던 땀방울이 금방 잦아든다. 경비원은 이방인에 관심을 보이며 혹 일본 사람 아니냔다. “오우 노우, 위 프럼 코리아!"에 다시 남북한을 물어온다.
환전소 앞의 ‘성 세인트 조지 로드’를 따라서 ‘성 토마스 성당’을 목표 삼아 걷는다. 딱히 교회에 무슨 인연이 있어 찾아가는 게 아니고 순전히 가이드북 지도에 크게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는 그저 선험자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남부 인도는 종교적 분위기가 여느 인도와 달리 기독교문화가 많이 자리 잡은 곳인지라 도처에서 교회를 만날 수 있다. 여러 번 지도를 확인하고 길 가는 이들에게 물어가며 천천히 걷는다. 나그네가 바쁠 게 뭐가 있으랴. 길가의 장사꾼 손수레에 야자열매가 가득하다. 주인남자가 내려치는 정글도 칼날 아래 야자의 과즙이 흘러넘친다. 빨대 끝에 올라오는 달콤한 야자주스가 시원하다. 거리 전체가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다. 온 사방에 뾰족탑으로 솟구친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야자수의 푸른빛과 어울려 아름답다. 모퉁이를 돌아드니 하얀색으로 칠해진 교회당이 섰다. 성 토마스 성당이다. 이곳은 뭄바이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식 건물로 무려 100년의 공사 끝에 1718년에 준공된 유서 깊은 곳인데 건물이 어찌나 정갈한지 삼백년의 오랜 세월을 느껴지지 않는다. 정문의 경비원이 무심한 눈빛을 보낸다. 토요일 오전 미사를 마친 텅 빈 성당 안이 조용하고 시원하다. 내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만 집 주인에 대한 예의는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늘 짙은 의자 끝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본다. 이번 여행길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한다.
곁에 앉은 아우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환전이 잘못된 것 같단다. 분명히 삼백 딸러를 바꿨는데 이제 루피화를 세어보니 그 따블이란다. 환율이 1US 딸러 당 53루피니 대략 15,000루피가 맞는데 몇 번을 세어 봐도 30,000루피가 넘는단다. 어인 영문인지 추정을 해본 결과 환전소 직원의 착각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설환전소의 좁은 공간이 갑작스레 붐벼댄 상황이었다. 오십 딸러 지폐로 여섯 장을 주며 환전을 요청했는데 그만 그 직원이 백 딸러 짜리 여섯 장으로 착각을 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여기서 삼백 딸러라면 어지간한 인도인들의 월급보다 많은 금액이니 그 환전소는 오늘 헛장사를 한 것이다. 이국 만리타국에 와서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다. 교회 안에서 이교도의 기도가 통했나보다. 오 성모마리아여! 아멘! 할렐루야! 하지만 나의 행운은 그 누구의 불행을 업고서 얻어진 것이니 이걸 드러내놓고 좋아해야하나 말아야 되나? 그렇다고 돌아가 다시 셈하고서 돌려준다는 것은 아예 머릿속에 있지도 않다. 그저 굴러 들어온 복에 감사할 따름이다.
바닷가의 인디아게이트를 향하는 도중에 웨일즈왕자 박물관이 있다. 영국의 왕세자였던 훗날의 조지 5세의 뭄바이 방문을 기념하기위해 지어진 곳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은 이곳의 웅장한 외관이 참으로 아름답다. 매표소 주변에서 와글거리는 인디언들의 옷차림이 원색으로 화려하다. 무굴제국시대의 세밀화와 티벳의 탱화들이 전시된 것으로 유명하단다. 맨발로만 입장이 가능하다니 우선 따로 마련된 보관소에 신발을 맡긴다. 그 다음 표를 살 차례다. 외국인 창구가 따로 있다. 기가 막히다. 인디안 30루피 하는 것이 우리는 그 열배인 300루피를 내란다. 더군다나 카메라 한 대 당 30루피 추가라니. 정말 어이없다. 에이! 거리가 온통 박물관인데 그깟 그림 몇 장 안본다고 뭐 여행에 흠이 될까보냐.
박물관 앞에 즐비한 좌판에는 각종 기념품이 널렸다. 갖은 모양으로 울긋불긋한 장신구들과 청동제품들이 손님을 기다는 한편에 무명 화가들의 그림은 담장에 널렸다. 거리의 미술관인 것이다. 나뭇잎을 오브제로한 소품들이 눈에 든다. 여행을 마쳐가는 시기라면 하나쯤 구입하고도 싶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저 촬영 정도만 해두자. 셔터를 두어 번 누르던 중에 젊은 작가 녀석이 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손을 벌린다. 작가들의 살림이 어려우니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서 자기들을 도와야만 된단다. 너무도 당당하다. 외국인 여행자들은 무조건 돈이 많을 걸로 생각한다. 에이! “씨 유 어게인!” 한 낯 바닷가 광장의 뙤약볕이 무섭다. 바로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다. 눈은 또한 얼마나 부시던지 썬 그라스 없이는 잠시도 시린 눈을 견뎌내기 힘들다. 박물관에서 이십 여 분을 걸어 당도한 인디아게이트는 ‘아라비아 해’를 향해 활짝 열렸고 드넓은 광장은 관광객들로 초만원이다. 과연 뭄바이 제일의 볼거리라 하겠다. 더군다나 오늘은 한 한해의 마지막 날로서 ‘코끼리 섬’의 석굴사원을 향한 순례객들의 행렬까지 뒤섞여 바늘 꽂을 틈이 없다. 인파에 휩쓸리던 중에 그만 아우를 잃어버리고 말았을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뭄바이의 상징물이 되어버린 ‘인디아게이트’의 위용이 대단하다. 아찔하게 올려다 뵈는 장방형의 석조 구조물 가운데에 아치형의 높다란 문을 뚫어 낸 시원한 모습에서 잠시 뙤약볕을 잊는다. ‘팔십일 간의 세계일주’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던 눈에 익은 곳이다. 이제 이곳에 서니 마치 역사 속으로 들어 온듯하다. 약 구십년 전, 영국의 조지 5세가 인도를 방문함을 기념하여 세운 이 건물은 당시 유럽에서 인도에 발을 들이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이기에 인도 전체의 상징이기도하였다. 게이트 뒤편에는 광장을 넓게 비워두었다. 한 무리 장난기 많은 젊은이들로 인해 주변이 온통 어수선하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은 거두지 못하는지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며 자꾸 함께 사진 찍기를 청하는 순박한 녀석들이다.
눈길을 주변으로 돌려본다. 저 멀리 바다 위, 박힌 듯 점점이 떠있는 작은 배들 사이로 거대한 군함이 떠있다. 퇴역 항공모함 ‘비클란트’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으로만 쓰이고 있다는데 항공모함의 얼개와 함께 전시된 몇 대의 함재기가 관심을 갖게 한다. 뒤편의 해변도로 곁에는 ‘타지마할호텔’이 웅자를 자랑한다. 백년 넘어 동안 바다 쪽을 향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인도인들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한 낯의 높아진 태양은 더욱 뜨거운데 다리는 아프지요 배도 고프다. 이미 점심 시간을 한참 넘긴 것이다. 여행자의 거리로 불리는 ‘꼴라바’가 지척이란다. 그늘 짙은 타지호텔 뒷골목 그늘길이 시원하다. 골목을 순례하듯 누비며 ‘꼴라바’ 거리에 도착하니 과연 듣던 대로 사방에 다국적 식당들이다. 잠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인도음식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아우를 생각하여 차이니스레스토랑을 선택한다. 우선 콜라부터 한잔 시켜놓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이건 뭐 말만 중국집이지 거의가 현지화 된 메뉴 뿐 이다. 그냥 인도 대표음식인 ‘탄두리치킨’과 국수를 시킬 수 뿐이 없다. 카레와 칠리를 발라 화덕에 구워낸 닭고기를 보니 시원한 맥주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특별히 지정된 장소가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아무데서나 술을 살 수도 마실 수도 없다. 한국에서 담아온 팩소주마저도 챙겨 나오질 못했다. 그저 만만하니 콜라를 피로회복제로 삼을 따름이다. 이어 내온 전통 빵 짜파티와 볶음국수에도 카레향이 짙다. 아우의 표정이 심상찮다. 하지만 난 그런대로 입에 맞아 결국 아우가 남김 음식까지 내가 다 해치우고야 말았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거리에 나서니 역시나 뜨거운 날씨에 식곤증까지 인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푹 쉬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맞춤한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최고급호텔인 타지마할의 로비만이 그 답이 되리라. 예의 그 골목길을 되짚어 호텔 정문에 이르니 허리에 권총까지 찬 경비원의 표정이 엄중하다. 회전문을 밀치고서 들어선 로비의 풍경이 아름답다. 바닥에는 붉은 빛 대리석이 깔렸고 황금빛 천장, 보석 장식이 널린 듯 하고 아래로 가득 매달린 샹들리에는 우아함을 보탠다. 프런트의 종업원들이 한 결 같이 미인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모습에다가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을 안내하는 모습이 여럿의 ‘안젤리나 졸리’가 동시에 움직이는듯하다. 신관과 후관 사이의 중앙 정원에 마련된 풀장 잔디 위에는 비키니차림의 서양여자들이 히멀겋게 비대한 몸매를 드러내고 일광욕에 한창이다. 도대체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쏘파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심신이 편안하다. 눈부신 햇살이란 것이 사실 얼마나 부담스러웠던가. 슬며시 졸린다.
타지호텔을 뒤로하고 거리에 나서니 해가 좀 기울었다. 지도를 보니 시내 한 중심에 남북으로 길게 공원녹지가 마련되었고 연도에 봄베이대학과 대법원 등 구경할 만한 곳들이 모였다. 공원 그늘 숲길을 따라 걷는다. 막상 공원에 도착하니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운동장으로 쓰인다. 왼편으로 끝없이 넓게 잇대어진 공간마다에서 크리켓경기가 한창이다.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진행되는 경기를 보니 전문 선수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동네 청년들이나 직장단위로 친목을 도모하는 일상적인 일로 보인다. 이렇게 뜨거운 날에도 그 많은 운동장들에서 거의 크리켓 일색의 경기가 이루어지고 그늘의 구경꾼들 또한 시선을 떼지 않는 걸로 미루어 인도인들이 크리켓 사랑을 알겠다. 작은 의자를 차지하고 한참을 구경한다. 선수들이나 구경꾼이 모두가 남자들이요 여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도에서는 스포츠가 아직은 여자들의 영역이 아니다.
붉은 벽돌과 뾰족탑으로 이루어진 연도의 건물들이 대체로 얼마나 묵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일일이 체크해 볼 필요도 없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역사박물관 안에 선 듯 두 눈이 호강한다. 고색창연한 ‘라자바이의 시계탑’을 지나 ‘후따트마 촉’을 지나니 다시 ‘CST 역’이다.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서 흘러 다닌다. 다들 뭔가 자신만의 특별한 일이 있겠지만 아직은 짐작하기 어렵다. 역전의 왼편 골목에 자리한 재래시장에 들어서니 더군다나 사람들이 미어터져 서로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인파를 헤쳐 나가기가 힘들다. 한적한 여행길을 염두에 두고서 여정에 오른 것인데 고역도 보통 고역이 아니다. 어서 뭄바이를 벗어나야만 한다. 원래 이 시장 통에 들어 선 목적은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 올 때 준비한 버너에 사용할 부탄가스를 구하는 일이다. 나름 큰 시장이기에 혹시나 구할 수 있을까했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곳은 우리처럼 작은 통의 가스 렌지를 쓰는 문화가 아예 없다. 그러니 혹여 가스통이 있다 해도 최하 일 킬로그램 이상의 큰 통 들 뿐이요 작은 부탄가스통은 아예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결국 포기하고서 시장을 나선다. 시장 통 보다는 좀 덜 하다지만 길거리 역시 혼잡하다. 어디 들어가 쉴 만한 카페가 없을까하여 두리번거려본다. 하지만 우리식의 쉼터는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이다. 릭샤를 타고 움직여볼까 하던 중에 건너편에 베스킨라벤스 간판이 눈에 띤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본 듯하다. 네 평 남짓 작은 공간에 테이블 세 개. 그래도 작은 가게 안이 에어콘이 돌아 시원하다. 이곳의 소득수준으로는 보통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이 둘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이는 젊은 부부의 눈매가 선하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내려놓던 종업원 녀석이 다소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공책을 내려놓으며 방명록이니 싸인과 함께 이메일 주소를 적어달란다. 드물게 보는 동양인의 모습이 신기한가보다. 그의 눈 가에 잔뜩 호기심이 묻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짐을 맡겨둔 호텔 근처로 오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엇하다. 철길 위로 놓인 육교를 건너 ‘차니 로드’를 따라 잠깐 걸으니 바로 아라비아해변 백사장이 나온다. 이른바 ‘빽 베이(Back Bay)’로서 우리로 말하면 해운대와 같은 곳이다. 하얀 모래밭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늘은 12월 31일. 2011년의 마지막 해넘이를 보려는 사람들이 운집한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온 하늘이 붉은데 반 뼘 쯤 남은 태양은 이제 힘을 잃었다. 온 종일 눈 시리던 사나움은 사위었고 그저 편안히 아름다운 태양이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마지막이 저러하리라. 해넘이가 끝나자마자 금 새 어두워진다.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 도시는 아까와는 딴판이다. 해변도로가의 많은 빌딩들이 사후 보수 관리가 안 되어 낡고 꾀죄죄한 모습이 흉측스러웠는데 그 건물마다에 달아둔 많은 전구 장식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니 온 사방에 궁전인 듯 화려하다.
이제는 저녁식사를 해두어야만 한다. 숙소 인근의 네거리 모퉁이에 선 식당이 좀 깔끔하다. 벽에 걸린 메뉴판에는 ‘노 비프(NO BEEF)'가 대서특필되었다. 이곳의 종교 관습상 쇠고기 요리는 사절이란다. 음식은 크게 두 가지, 닭고기와 양고기 요리다. 뭐 거창한 것이 아니고 이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해서 국수나 밥, 또는 밀떡 위에 커리를 올려주는 것이다. 나는 ’양고기 접시볶음밥‘ 아우는 ’닭고기 접시볶음밥‘을 시키고 다시 함께 계란 후라이를 주문했다. 음식 향이 비록 익숙하지 않다만 콜라를 곁들여 시장기를 때우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숙소에 들러 아침에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는다. 등에 얹힌 묵직한 배낭이 헤어진 형제들 만난 듯 반갑다. 릭샤에 올라 밤거리를 달린다. 뜨거운 낯 시간과는 달리 불 밝힌 거리에서 볼에 스치는 바람이 다소 낭만적이다. 몇 번 왕래를 해서 길에 좀 익숙해진 것인지 잠깐 새에 기차역에 도착한다. 고아행 열차의 출발 시간은 열시 이십오분.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다만 휴대용 간이 의자를 펴고서 현지인들 틈에 섞여 그저 쉴 따름이다. 원래 예정되었던 십이 번 플레트 홈이 십오 번으로 바꿨단다. 옮겨 앉은 곳은 아까와 달리 실외의 철길 옆이다. 밤공기가 약간 선뜻하여 긴팔 옷을 걸친다. 철길 옆 여기저기를 어정대는 개새끼들은 한눈에도 주인 없는 떠돌이요 또한 건강상태가 형편없어 다가가기만 해도 벼룩이 옮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도 게의 치 않는다. 모든 것이 “노 프러브럼!”이다. 인도이니까.
정시에 도착한 열차에 오르며 한시름 덜었다. 이년 전에 중부 인도를 다닐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장시간을 연착하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아예 열 시간 이상을 기다려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삼층으로 되어있는 침대의 아래 칸에 배낭을 얹고 나니 고향집에 들어온 듯 마음이 편하다. 우선 취침에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놓고 피로회복제인 팩소주를 챙긴다. 세모(歲暮)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밤이 지니면 또 다시 새해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내일인 정월 초하루는 음력으로 헤아려 나의 생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늘 어릴 것 같은 아우도 어언 오십대에 들어서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여러 가지로 축하할 일이 많은데 어찌 파티를 거를까보냐.
달빛도 없는 섣달 그믐날 밤. 별 빛 만을 벗하고서 아라비아해의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하염없는 이국의 철길이다. 그저 육포 한 점 안주삼아 소주잔을 나누는 망년회가 소박하다만 여러모로 의미 있는 날이 아니던가. 오늘 새벽에 정말 우연히 만나 여정을 함께하게 된 몇몇 지인들과도 합세가 되니 제법 판이 커진다. 다들 얼큰해지니 다소 소란하여 주위 승객들에게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도리어 이런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갖으면서 함께 어울리기를 원한다. 잠깐 새에 너 댓 명의 인도인들이 합세한다. 코리아 와인인 소주가 건네지고 인도 위스키가 건네 오고. 두 나라의 확실한 교류다. 흥이 절로 인다. 평소 내가 애창하는 단가 ‘홍문연(鴻門宴)’에 화답하여 인도 노래가 이어진다. 마침 그 자리에 있는 한 친구는 이곳의 프로가수란다. 술이 얼큰한 그의 입에서 오리지날 인도 창가가 기분 좋게 이어진다. 갑자기 일행 중 한 명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오, 사, 삼, 이, 일, 제로! 드디어 새 해다. 빈 잔에 다시 한 잔 씩 채우고서 2012년과 함께 내 생일을 축하한다. 참 특별한 경험이다. 놀다보니 금방 한 시가 되는데도 인도인들은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빠져 지칠 줄을 모른다. 이제는 내일을 위하여 쉬어야 된다하고 그들을 달래어 보내야만 되는 상황이다. 더 이상 바랄게 없는 망년회와 신년회가 되었다. |
출처: 우보조아 원문보기 글쓴이: 牛步 yyun bird
첫댓글 인생을 정말로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고 향기롭게 잘 운영하시네요. 멋진 여행길 잘 운영하시길 염원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요, 즐 감 했습니다,
만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