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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ilton | |
Portrait of Milton c. 1629,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Unknown artist (detail) | |
Born | 9 December 1608 Bread Street, Cheapside, London, England |
Died | 8 November 1674 (aged 65) Bunhill, London, England |
Resting place | |
Occupation | |
Language | English, Latin, French, German, Greek, Hebrew, Italian, Spanish, Aramaic, Syriac |
Nationality | English |
Alma mater | Christ's College, Cambrid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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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ature |
“존 밀턴, 실락원”
오늘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별세한 날입니다. 1674년 11월 8일 주일 밤, 밀턴은 런던에서 통풍을 앓던 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공부한 그는 이탈리아 여행 중 귀국하여 공화정 기간 동안 외국어 담당비서관, 공화정 신문의 편집자 및 검열관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크롬웰이 죽고, 스튜어트 왕가가 복귀하자 밀턴의 정치인생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잠시 동안 옥고를 치른 그는 저술과 출판을 통해 위정자들의 타락을 우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합리주의 청교도 밀턴은 대표작 『실낙원』(Paradise Lost)을 비롯하여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 『복낙원』(Paradise Regained) 등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밀턴은 찰스 2세의 왕위 취임 며칠 전에 “자유 공화국을 세우는 적절하고 쉬운 길”(The Ready and Easy Way to Establish a Free Commonwealth)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밀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역사는 폭군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폭군을 축출하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영국민은 압제자인 폭군을 제거하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군을 더 선호하고 있다고 하면서 민중의 바른 역사관의 부재 내지는 결핍을 꼬집고 있다. 정직하고 참된 정치 지도자에 의해 헛된 망상, 전염병적 광기,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민중은 깨어나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황폐한 폐허나 절벽으로 떨어져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정준기, 『청교도 인물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86.]
인간의 가치를 높였고, 권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주장했던 밀턴은 출판의 자유(정부 검열의 폐지)와 이혼의 필수불가결함(사랑 없는 결혼에 있어서)을 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655년에 발도파가 잔인한 핍박을 받았을 때, 이를 애도하며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교의 확대를 막고,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유전되는 것을 부정하고, 일부다처제를 옹호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청교도 사상을 공유한 밀턴은 위대한 시인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눈이 먼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지혜롭게 저항한 사실은 조용히 타협하기를 좋아하는 내게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천국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위해 토론을 벌이는데, 당장에 공격을 개시하자는 자도 있고, 이를 말리는 자도 있다. 결국 사탄이 제안한 제3안이 채택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살고 있을 인간을 유혹하여 자기들 편에 가담하게 하고, 이로써 하나님께 복수하자는 것이다. 제3편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로부터 사탄의 모략을 내려다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타락한 인간들을 위한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자(聖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희생을 제안하고, 모든 천군 천사는 성자의 영광과 인간의 궁극적인 승리를 송축한다……제12편에서 밀턴은 인간의 최초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그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불확실한 미래와 새로운 시작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다시 ‘손에 손을 잡고’ 추방자로서의 순례길을 시작한다.[송광택, 『고전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서울: 평단문화사, 2010), 161, 165.]
실낙원
밀턴은 라틴어가 존숭되던 시기에 자신의 민족 언어인 영어를 소중하게 여겼다.
“ | 만일 제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저의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느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 섬나라에 사는 저의 동포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로운 일들을 모국어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 ” |
실낙원은 이러한 신념의 열매이다. 1660년에는 찰스 2세의 즉위로 영국 공화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에 따라 추방되어, 과로로 실명한 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1667년 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집필한 불후의 대작 《실낙원》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영문학 사상 유일한 세계적 서사시가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어 《투사 삼손》, 《복낙원》 등 청교도적 사상을 나타낸 대작을 계속 발표하여, 영문학 사상 최대의 시인이 되었다.
소네트[편집]
2012.11.01. 06:41
존 밀턴… 고난 속 꽃피운 ‘신앙의 대서사시’
존 밀턴(1608∼74)은 존 버니언과 더불어 17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청교도 작가다. 밀턴은 예술에 있어서 위대하기 이전에 인생에 있어서 위대했다. 밀턴은 1608년에 런던의 브레드가에서 태어난 위대한 서사시인이다.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후 런던으로 나와 공증인 노릇을 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유능한 장로교 목사 토머스 영을 가정교사로 두고 어린 밀턴에게 철저한 예능교육을 시켰다. 목사가 되길 원했던 밀턴은 1625년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지도교수였던 윌리엄 차펠과의 의견 충돌로 한 학기동안 정학당했다가 복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632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그는 목회의 꿈을 접고 곧장 은퇴한 아버지가 머무르던 해머스미스로 가 많은 고전을 읽고 즐기며 시인으로 살았다. 3년뒤 아버지와 함께 호튼으로 집을 옮겨 거기서 4년간 머물렀다. 이 시기를 흔히 호튼시대 또는 목가시대라고 한다.
이 목가시대에 쓴 대표적 작품들은 청교도적인 이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랄레그로’(쾌활한 사람)와 ‘일펜세로소’(사색적인 사람),청교도적인 에토스를 가장 잘 표명한 ‘아카디스’와 ‘코머스’,그리고 케임브리지 시대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드워드 킹의 죽음을 애도한 ‘리시다스’가 있다. 밀턴은 1638년부터 1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 호튼시대가 작시(作詩) 능력을 길러준 때라면 이탈리아 여행은 자신감과 함께 조국의 문화와 국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때였다.
여행 중에 주교전쟁이 일어나 그리스까지 여행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귀국했지만 전쟁은 끝난 뒤였다. 밀턴은 런던으로 나와 사설 기숙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우선 밀턴은 그 당시 8세와 9세였던 누님의 아들 존과 에드워드 필립스를 가르쳤다. 세인트폴 학교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배웠던 것을 토대로 아주 엄격하게 교육했다.
포리스트 힐의 보안판사이며 유명한 왕당파 정치지도자였던 리처드 파월의 장녀 메리 파월과 결혼한 것이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이 무력 대결로 치닫던 시기로 밀턴의 나이 32세,메리는 17세였다. 하지만 집안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메리는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친정으로 돌아가고 만다. 메리는 약 1개월 정도 친정에 머물다가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내란이 일어나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밀턴은 사람을 보내어 메리에게 돌아올 것을 독촉하였지만 파월가는 경멸적인 말로 그 사람을 쫓아버렸다.
그 사이에 밀턴은 4편의 이혼에 관한 팸플릿을 썼다. 밀턴은 불감증이나 간통 같은 육체적인 결함은 물론 부부간의 부조화와 불일치 같은 정신적인 이유도 심각한 이혼 사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논지를 편 논문이 4편 있는데 그것이 ‘이혼론’‘마틴 부셔의 견해’‘테트라코던’‘콜라스테리온’이다. 이 팸플릿들을 쓸 때 밀턴은 메리와의 이혼을 굳혔던 것 같다.
그러나 밀턴은 메리와 3년만에 화해하고 재결합한다. 밀턴과 메리 사이에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이 태어났다. 장남의 이름은 존이고 세 딸의 이름은 앤, 메리, 데보라였다. 1652년 5월에 메리가 사망했고 이어서 같은 해 6월에 아들 존도 죽었다. 이 무렵에 쓴 산문이 그의 교육관을 잘 보여주는 ‘교육론’과 언론 출판의 자유를 표방한 ‘아레오파지티카’다.또한 종교적 자유를 위하여 ‘주교제에 관하여’‘스멕팀누스를 위한 반박’‘교회치리론’‘스멕팀누스 변호’ 등 5편의 시사논문을 썼고 정치적 자유를 위해서 ‘국왕과 관료들의 재직조건’‘우상타파론’‘영국민을 위한 변호’‘영국민을 위한 두번째 변호’‘자신을 위한 변호’ 등 5편의 정치 논문을 발표했다.
1652년에 메리가 죽은 후 홀몸으로 있던 눈먼 밀턴은 1656년 11월12일에 재혼했다. 이 시기는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던 공화정에서 외국어장관직(1649∼60)을 말고 있던 때였다. 재혼의 상대는 20년 연하의 캐더린 우드콕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한지 1년여만에 사망하고 이어 1657년에 출생한 그녀의 딸 캐서린도 죽고 만다.
밀턴이 그리던 정치적 이상국가였던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그는 11년간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외국어장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밀턴의 나이는 54세였고 완전히 두 눈의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공직에서 물러난 밀턴은 별달리 수입도 없었다. 그야말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세 딸이 있었으나 그녀들은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알지 못했다. 이때 밀턴의 의사 친구 파젯이 그의 처지를 동정하여 자기 사촌 누이동생 엘리자베스 민셜을 소개했고 그는 당시 24세였던 그녀와 세번째 결혼을 한다. 민셜은 밀턴 일가를 위하여 힘썼지만 늘 세 딸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밀턴은 1674년 11월8일 ‘실낙원’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6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실로 밀턴의 일생은 고뇌와 고통으로 점철된 패배의 연속이었다. 그 패배는 가정에서의 실패와 공화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실패,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육체적 실패인 실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패와 고난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신앙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였다. 이 신앙을 발판으로 해서 그는 그 심연을 딛고 일어서서 그의 일생을 위대한 승리로 역전시켰다. 이러한 생의 역전을 계기로 그는 그가 겪은 쓰라린 경험을 담아 최대의 걸작품들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실락원’‘복락원’‘투사 삼손’ 같은 웅장한 서사시들이다.
밀턴이 1656년에 쓴 성서적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교리’를 근간으로 한 ‘실낙원’과 ‘복낙원’이야말로 밀턴이 겪은 고난의 열매요 십자가를 짊어진 뒤에 따라온 면류관이었다.
‘실낙원’은 그 웅대한 구상과 전 우주를 거머쥐는 상상력이 경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러한 구상과 상상세계를 예술적으로 처리한 그의 기교이다. 밀턴은 이 구상을 처리하기 위하여 지옥 천국 지상의 세 초점에 그의 상상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신과 죄와 인간에 대한 생각을 각각 세 지역으로 구상화하기 위해 매우 교묘한 대조 수법을 썼다.
밀턴은 원죄(原罪)로 인하여 어두워진 인간, 그 자신이 지복(至福)의 세계인 하늘나라의 빛을 찾아 나아가는 천국의 순례자였다. 그것이 그의 생의 일대기요 그 과정에서 체험한 영전(靈戰)의 모습을 구상화한 것이 그의 작품 세계다. 이 세계를 묘사하기 위하여 성서에서 주제와 재료를 취하였고 또한 성서적인 수사와 인유로 묘사하였다. 밀턴은 영전의 과정을 내면화한 대서사시인이었고 또한 성서의 말씀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로고스 시인이었다.
<글. 조신권 / 정리. J>
*. 조신권 교수 - △연세대 대학원 영문학 박사 △미국 예일대 객원교수 △연세대 영문과 교수 정년퇴직 △총신대 초빙교수 △저서 ‘청교도 애국시인 존 밀턴의 문학과 사상’
실낙원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나무 열매 맛보아 그 치명적인 맛으로 인하여/
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와/
에덴을 잃었더니, 한층 위대한 한 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낙원을 회복하게 되었나니,/
하늘의 시신(詩神)이여 노래하소서.
(실낙원 제1부의 서시(序詩) 중에서)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은 단테의 신곡과 함께 불후의 종교 서사시로 평가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낙원 추방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중심 소재로 신과 인간과의 기본 과제 즉, 인간의 자유 의지와 죄 지음,그리스도에 의한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룬 대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지옥 천국 지상을 무대로 성경 속의 낙원 상실 모티프를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표현하였다.
존 버니언과 더불어 17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청교도 작가인 밀턴은 1640년께부터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능가하는 기독교 서사시를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실낙원의 이야기는 사탄 및 인간의 반역과 몰락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아담과 이브, 천사와 사탄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성격을 공상 세계 속에서 창조하여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킨 사탄에 대한 복수, 창세기에 묘사된 혼돈과 창조의 서사시, 인류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소망이 지옥 천국 지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 시의 중심 주제는 인류의 타락이다. 밀턴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이어지는 질서를 인간이 자유의사에 따라 파괴했기 때문에 육체적․정신적 죽음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에덴에서의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의 원흉은 악의 화신인 사탄인데 결국에는 메시아가 나타나 악마를 쳐부수고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밀턴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적 주제가 이교 시인의 주제를 능가한다고 천명했다. 또한 그의 작품이 경건한 기도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종수 교수는 그의 저서 기독교문학 고전의 이해에서 실락원은 사탄의 세력을 격멸하는 신의 섭리의 정당성을 찬양하고 원죄로부터 구원으로 나아가는 인간 고뇌의 역정을 장엄한 필치로 노래한 청교도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 말했다.
장중한 서사시적 문체와 격조 높은 비유로 표현된 실낙원은 당시 뿐 아니라 오늘의 현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금을 울려주는 고전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한 시인이 개인적인 불운과 실명이라는 신체적 장애를 불굴의 용기로 극복하며 완성한 결실이라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失樂園<Paradise Lost>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의 장편 서사시(1667).
초판은 10권이었으나 제2판(1674)부터는 12권으로 구성된 대규모 작품이며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소재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한다.
1·2권에서는 불굴의 투지와 영웅적인 기개를 보이기조차 하는 사탄과 그 무리들,
4~6권은 낙원의 축복과 천지창조에 대한 천사 라파엘의 묘사,
9·10권은 타락 후에 사탄과 아담 및 이브에게 찾아온 저주와 고통,
11·12권은 인류 역사와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밀턴은 1640년경부터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능가할 만한 그리스도교 서사시를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혁명으로 인해 이 계획을 20년 정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서사시라는 고전문학의 형식에 인간의 원죄와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그리스도교적 내용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락원〉의 주제가 사탄의 유혹에 패배한 아담과 이브의 낙원 상실이라면,
〈복락원 Paradise Regained〉은 제2의 아담으로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인류에게 상실한 낙원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락원〉을 읽은 한 청년의 '낙원 발견'을 주제로 한 속편을 써달라는 요청에 의해 1665~66년경에 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