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학고재에서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 그림전’이 열리고 있있다. 나는 제주 4․3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있는 여러 그림들 중에서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동안 몇 차례 강 화백의 그림을 보고 제주에도 갔었는데, 그때마다 제주도민의 아픔과 한을 내 마음 에 깊이 간직했기에 그 그림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맨 처음 제주도를 찾은 것은 십오 년 전 가을이다. 민족의 영산이라 일컫는 한라산 등반을 할 때였다. 산길에는 돌이 무척 많았는데, 나는 가벼운 운동화에 얇은 양말을 신어 발바닥이 아프고 물집까지 생겨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아픔을 참으며 산을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억새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동행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 골짜기마다 4․3의 아픈 역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순간 내 발의 아픔 따위는 금방 가시고 아름다운 풍광을 음미할 여유마저 잃고 말았다. 나는 분단이 가져다 준 아픈 상처를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그 뒤 두 번째로 제주도를 찾아갔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종려나무와 유도화가 가로수를 이루고 유채꽃이 곳곳에 아름답게 피어 경치가 그만이었다. 황토라기보다는 화산 흑토인 제주도의 밭담 길이 우줄우줄 기어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오름’이라고 부르는 풍만한 곡선의 봉우리들이 여기저기에 둥실둥실 솟아 있었다.
오름에는 땅굴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4․3때 폭동 가담자로 몰려 산(山)사람이 된 이들이 풀뿌리를 캐 먹으며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어갔다고 안내원이 설명을 한다. 그는 마치 전설이라도 들려주듯이 조심스런 말투로, 제주 사람들은 이런 진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말꼬리를 내린다. 나는 그 안내원의 설명에서 제주 사람들의 아픈 상처가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상흔의 진실조차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현실에 더욱 안타깝기만 했다.
그 후 연초에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에 갔었다. 참석자들은 문화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동문들이었다. 마침 그날이 4월 2일이어서 주제는 자연, 반세기 넘는 동안 ,완전히 해원(解寃)을 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와 4․3 의미’였다. 발표자는 제주도 4․3연구소 소장이었는데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분단의 해방공간에서 단독정부 반대자들을 좌익으로 몰면서 제주도민 중, 수 만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어린이와 노인들도 수천 명이 있었다니 이런 분별없는 가혹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 백 년이 훨씬 지난 ,이 섬에서 무고하게 숨져간 이들의 진실을 육지 사람들이 얼마나 알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단순히 제주도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양민들이 가혹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새삼 전율을 느끼며 비분강개하기도 했다.
반세기가 넘은 그때 그 비극이 어떻게 그런 인간 이하의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도민들이 4․3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그동안 꾸준히 노력해 왔기에 어느 정도 그 진상이 밝혀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제주도민은 올해를 완전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의 해로 정하고, 서울과 제주도에서 학술 발표는 물론 문화행사를 다양하게 펼치고 처음으로 도지사가 참석하는 위령제도 지냈다고 한다.
그들이 매년 끈질긴 4․3의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국회에서 입법이 되고 시행령이 마련되어 사실 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때는 가해자의 편에 선 세력들의 저항도 컸었지만 역사의 진실을 묻어둘 수는 없었다. 법이 제정된 지 2년 만에 대통령은 제주도민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고 미진하나마 상당수 진상 규명과 명예가 회복되고 있었다.
이렇게 제주 4․3은 반 백 년이 훨씬 지난 세월에야 그 진상이 밝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어디 4․3뿐인가! 이 나라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원혼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안식을 얻게 해주는 일이 급선무고 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아닐까? 진실을 밝혀 진정한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져야 이 땅에 민주화와 평화다. 그리고 분단조국이 통일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분단으로 얼룩진 많은 동포들의 진정한 바람이지 않겠는가.
이튿날은 전날의 무거운 마음을 풀기 위해 세미나 장소를 제주민속촌이 있는 바닷가로 옮겼다. 바다는 끊임없이 다른 빛깔 다른 모양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마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제주 사람들의 속 깊은 한과 서러움을, 때로는 격렬한 파도로 때로는 잔잔한 물결로 삭이며 세월 저편으로 흘려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동안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다가 정원으로 발길을 옮겨 인고의 풍상을 이겨 낸 백년도 더된 동백나무 앞에 섰다. 그런데 그 나무 아래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야 할 동백꽃이 봉오리 째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왜 저렇게 떨어졌을까? 이상하게 생각해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름답게 만발해야 할 꽃이 어이해서 봉오리가 져야 만 했을까. 끝없이 상상을 하고 있었다.
기억에 생생한 어젯밤 폭풍에 강한 바람이 일어 유리창이 흔들리던 소리가 생각났다. 그렇다, 어제의 그 폭풍이 이 동백나무에도 몰아쳤을 터이다. 60년 전 4월 3일에도 폭풍과 같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의 안보를 위해 양민들을 짓눌렀기에 그들은 연약한 꽃망울처럼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동백꽃이 지듯이 세상에 제일 고귀하고 소중한 목숨이 하나 둘씩 숨져 갔음을 생각하니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이 솟구쳐 올라 한동안 정신이 멍멍했었다.
그때 그 슬픔을 나는 오늘 ‘동백꽃 지다’라는 그림 앞에서 다시 한 번 느낀다. 제주도민의 한과 아픔이 가시고 명예가 회복되는 날, 동백꽃은 다시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꽃이 핀 그 날은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영령들의 진실규명이 되고 명예가 회복되는 날일 것이다.
첫댓글 윤영전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권력과 숭고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선진영령님들의 명예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암님! 오래만에 대하는 구암님의 글에 숙연해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유독 더 깊은 상흔을 느끼는 것은 우리 집사람 정타원이 제주출신입니다.
아직도 그 4.3의 원혼을 달래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백꽃 지다> 감사합니다.
원심님, 졸필 글안에 아품을 위로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덕산회장님이 제주와 인연의 아픔이 있으셨군요. 사모님께 위로드립니다. 매군자님, 사진까지 올려주시어 동백꽃 지다의 모습이군요. 모두 감사합니다. 사실 그 작품을 쓰고 그 후로도 제주4.3의 원혼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곤 했지요. 1948년 10월 중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제주 4.3 항쟁 소탕명령을 내린 국군14연대 지휘부에 오히려 박정희를 비롯한 많은 저항세력들이 "왜 우리 민족을 죽이라고 명령하느냐?"며 일어난 여순국군14연대 반란사건이죠. 박정희는 주모자로 사형 무기 10년 그리고 군복을 벗었지요. 그리고 군속으로 있다 복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