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설악산에 단풍 든다 하더니 어느새 남녘까지 온산이 붉은 단풍으로 물들어 간다네. 간간이 가을비 처연하덛니 엊그제엔 11월 하고도 겨우 보름인데 눈까지 내리더만 그러면서 이윽고는 올 한 해도 기울어 가겠거니...
깊어가는 가을이면 으레 찾아갔던 선암사의 이맘 풍경도 발등까지 덮이는 낙엽들 밟으매 그들의 사각사각 속삭임 역시 예나 다름 없을 터...맑은 냇물에 가로놓인 홍예(虹蜺) 모양의 승선교(昇仙橋)를 건너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낙엽, 낙엽들...
40년 전 무렵 우리 가족이 선암사를 찾았을 땐 단청(丹靑)의 흔적조차 없는 퇴락한 절이었다. 사하촌(寺下村)이라기엔 몇 가구가 없는 한적한 그곳 어느 식당을 찾았을 때 내 주는 음식의 가짓수는 끝도 없었던 걸 기억한다. 식당을 나설 때 주인이 한 "아마도 이 절이 조계종 소속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사찰 중의 하나였을 것"이란 말씀 역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선암사는 고려시대 때부터 대처승(帶妻僧) 중심의 태고종(太古宗) 소속이었기 때문에 일반 불교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데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더해 조계산 일대의 공산주의자들과의 빨치산 전쟁으로 명목만 겨우 유지하는 퇴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리라...지금에야 전국 최고의 낙엽 밝는 소리로 유명한 사찰인데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길 순례지로 알려져 있으니, 옛날의 쇠락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터.
이제는 멀리 떨어져 사는 데다 나이마저 이울었으니 낙엽 밟는 이 계절 그리운 선암사를 다시 찾기 어려움에 가슴이 아린다. 어느 시인은 그대 눈물 날 일 있음 선암사로 가라더만, 하릴없이 눈물 나는 이 나이에 아무 때고 그곳 찾을 수 없음에 또 눈물 나려 하는구나. 정호승 시인의 시 '선암사'(『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비평사, 1999)를 감상하며 가만히 귀 기울여 혹여 선암사 낙엽들의 속삭임 들리려나 기대해 본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