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바다가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폐병장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
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 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마치 꿈꾸는 것처럼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
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오후 두시경
영상 15도
바람은 서북, 구름
아침에 잠깐 안개구름이 지나가고 난 뒤
맑은 하늘
오후 두시경
문 앞에 하얀 병원차가 서고 들것을 들고
하얀 남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배달한 음식의 빈 식기를 가져나오듯 무념한 얼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미줄, 정원, 그림 같은 꽃, 구두 한짝, 그리고 반쯤 열린 문
먹고 싶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둘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초자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
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달 빛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량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
한 것이 화정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
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
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입맞춤
그 양반 생각만 하모 지금도 오만간장이 다 오그라붙제 무정한 양반 아니여
유정한 시절 꽃 분분 가슴살에 꽂힌 바람 된통부를 꽃물 듣는 아린 날 눈뜨면
멀어질새 눈감으면 흩어질새 부러 감은 듯 마는 듯 다소곳 숨죽인 듯 화들짝
불에 데인 듯 떨며 떨며 천지간에 둘도 없이 초승달 떼구름 흰 옷고름 개켜
넣으며 설핏허니 굴참남게로 넘어가면 이년 눈이 뒤집혀 병든 애비 버려두고
꺼짐부리 살림 접어두고 고만 밤도망질 치고 말았제 무정한 양반 대처살이
모질새 애먼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간 뒤 그 밤만 생각하모 불쌍한 울 아버지
쿵쿵 가래 기침에 엎어지며 끓여 먹을 냄비밥 간장종지가 더 애닯데이 더 목매인데이
스승의 구두
구두는 쉴새없이 낡아가고
장대동 중앙시장에는 새 상가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어오는 오늘의 피곤이
이십 년은 족히 넘은 스승의 서재에서
먼지로 앉고
스승은 넥타이를 푼다
새로 산 책을 넘긴다
스승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도시를 다스리는 정
의론과
인권론과 형평론을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눈을 부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승은 낡아가고
구두는 현관에서 낡아가지만
내일도 장대동 중앙시장
새로 선 상가를 지나
하룻밤새 또 건물을 지은
도시의 길을 밟을 것이다
스승은 낡은 구두처럼
새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스승이 낡아가는 것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휠씬은 더 먼저 낡아갈 것인가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봄날은 간다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우연한 나의
내 마을은 우연한 나의 자연
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
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
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 안
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
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구든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강
강은 꿈이었다
너무 먼 저편
탯줄은 강에 띄워 보내고
간간이 강풍에 진저리치며
나는 자랐다
내가 자라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강 저편보다 더 먼 나를
건너온 쪽에 남겨두었다
어느 하구 모래톱에 묻힌 나의
배냇기억처럼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
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
고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물 재우며
저 山水가
저 山水가 날 기댈 데 없이 만드네 저 유정한 山水가
저 혼자 무정한 시절을 거느리려고 하는가
나 돌아갈 곳 저곳뿐 저곳뿐 생각나면 언제나,
비린 찬 올라오는 아침 밥상처럼 아늑한가
저건 처녀의 무릎, 저건 지옥
그야 뭐 다 놓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수채의 지옥, 그러나 저곳마저 기대지지 못한다
면 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야 하나
죽어 발목에 명찰을 달고 저 山水 속에 버려져야 하는
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생각하며 가버려야 하는가
맑은 전등
바다 마을
집 한 채
다리를 오므리고 실파를 다듬는 계집아이
튼 손등에 오그리고 앉은 실파 냄새
아이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먼 검바다 뜬 배
닻에 붉은 오징어 다리가 감겼다
힘찬 오징어 다리
파뿌리처럼 오그리고 있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절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우리들의 저녁식사
토끼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었네
아둔한 내가 마련한 찬을 토끼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요리는 토끼고기
토끼도 토끼를 먹고 나도 토끼를 먹는다
이건 토끼가 아니야, 토끼고기라니까!
토끼고기를 먹고 있는 토끼는 나와 수준이 똑같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식사가 그렇지 않을까요
풀을 불러놓고 풀을 먹고
추억을 불러놓고 추억을 같이 먹고
미움을 불러놓고 미움을 같이 먹었더랬지요
우리는 언제나 그랬지요
이 세계에 있는 공허한 모든 식사가 그랬지요
사랑의 不善
너는 왜 胃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
로 들어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두께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몽골리안 텐트
숨 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不醉不歸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늙은 가수
"뽕짝의 꿈"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젖이 꽃잎 열 듯 발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흰
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
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
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
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
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
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
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
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
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이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
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
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
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
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
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
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
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
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 빛이거나 누런 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 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200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사)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경상대 국문과 졸업
『실천문학』에 [땡볕]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8년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간행.
1992년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간행.
2001년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