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희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시인, 문학평론가.
1963년에 간행된 시집 〈적막강산〉에 수록된 시 〈낙화〉로 유명한 시인이다. 존재의 무상함과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주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왔다.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 및 〈대한일보〉 문화부장, 〈국제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고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때 언론계를 떠났다. 1981년 부산산업대학 교수를 거쳐 1987년부터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 〈월간문학〉 주간을 지냈고 1994년부터 2년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1949년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등단했다. 초기 이형기의 시 세계는 자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맑고 고운 현대적 서정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며 조락과 소멸의 운명을 수긍하는 전통 서정의 계보에 속했다. 시집 〈적막강산〉(1963)에서 그는 생의 근원적 고독과 세계의 공허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펼쳐 보인다. 1970년대 이후에는 투명하고 절제된 서정에서 벗어나 상투성과 모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과 시적 방법론의 갱신을 추구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인간 내면을 탐구해가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사물을 관념화하여 우회적으로 서정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썼다. 뇌졸중으로 투병 중이던 1998년 〈절벽〉에서는 소멸의 운명과 맞서 있는 단독자의 고독과 결의를 노래했다. 여기서 그는 소멸이라는 존재의 소실점과 생명의 궁극성에 대한 질문에, 삶이란 허무와 충만이라는 양가적 시간이 지속적으로 순환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평론으로도 주목받은 그는 1963년 이어령과의 문학논쟁에서 평론 표절과 모방문학론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당시의 예술가의 현실참여 논쟁에서는 예술가의 개성적 자유를 옹호하고 순수문학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강조했으며 이 같은 문학세계는 이후 줄곧 견지되었다.
시집에 〈적막강산〉·〈돌베개의 시〉·〈풍선심장〉·〈그해 겨울의 눈〉·〈심야의 일기예보〉·〈보물섬의 지도〉·〈죽지않는 도시〉·〈절벽〉·〈꿈꾸는 한발〉·〈존재하지 않는 나무〉 등이 있고, 평론집에 〈시와 언어〉·〈감성의 논리〉·〈한국문학의 반성〉·〈시와 언어〉·〈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수필집에 〈자하산의 청노루〉·〈서서 흐르는 강물〉·〈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등 저서 20여 권이 있다.
한국문학가협회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형기의 시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초기에는 전통적이고 서정적이며 모더니즘 경향이 강한 시를 주로 썼으나,
후기에는 즉물적이고 날카로운 감각으로 개성적인 표현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초기시는 전통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을 주된 소재로 하면서
거기에 화자의 감정을 담아 노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담겨져 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 내부 심적 상황으로 만들어 가고
우리와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실재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자연속에 드러나는 것은 관념적인 고독과 닫힌 자아,
독자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엘리트 의식이 나타난다.
초기의 서정적인 시 경향은 세 번째 시집인 ≪꿈꾸는한발≫에서부터 소멸이나 파괴에 대한 애호,
위악적인 포즈를 담게 되며,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문명의 폐해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그는 여러 시집을 발간하면서 특히 “절벽”에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보여준다.
뇌졸중 이후에 쓰여진 이 시들은 그동안 추구해온 위악성을 벗고 자연스러운 서정성으로 회귀하고 있다.
내면적인 고뇌의 표현은 관념적이지만 결국 서정성에서 시작해서 서정성으로 귀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정성의 변화는 초기시의 서정성이 관습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었음에 비해,
후기시의 서정성은 생과 사의 경계를 실제 생활을 체험한 바탕에서 작가의 삶을 노래하므로써
깊이는 더 심오해 지고 인생에 대한 관조와 편안함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주요 저서-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 <시집> 현대문학사 1955
적막강산(寂寞江山) <시집> 모음출판사 1963
돌베개의 시(詩) <시집> 문예사 1971
꿈구는 한발(旱魃) <시집> 창원사 1976
풍선심장 <시집> 문학예술사 1981
보물섬의 지도(地圖) <시집> 서문당 1985
그 해 겨울의 눈 <시집> 고려원 1985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수필집> 어문각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