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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땅 그래서 '너나 가져라'고 했던 여의도(汝矣島)다.그저 왕실의 가축이나 기르던 곳에 지나지 않던 여의도였다.
이제는 그렇게 외면하고 구박을 받던 그 옛날의 여의도(汝矣島)가 아니다.대한민국의 정치 금융의 1번지로 문화의 심장부로
크게 변모한 곳 여의도다.서쪽에서 동쪽으로 운항하는 행주형(行舟形),섬의 모양을 하고 있다.목이 몹시 마른 용이 시원하게
물을 마시는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의 속성을 안고 있는 여의도다.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에서 이곳 역사탐방을 출발한다.
여의도는 운항하고 있는 배의 모양(行舟形)을 하고 있다고 한다.그 배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힘차게 운항하는 모양이다.
운항 중인 배의 모양에 맞는 도시의 배치를 하고 있다.보통 배의 앞 머리에는 돗대가 불쑥 솟았다.배의 앞 머리 여의도 동쪽이다.
그 동쪽에는 6.3빌딩 등 높은 건물이 돗대처럼 즐비하다.배 뒷쪽에는 시끄러운 기관실을 둔다.배의 후미 여의도 서쪽에는
아주 시끄러운 국회의사당이 들어섰다.풍수에서 물은 재물이라고 했다.그 옛날에는 샛강이 밤섬 앞의 강보다 더 넓고 물이
참으로 풍부했다.샛강 쪽 여의도에는 각종 금융기관이 밀집되었다.배의 중심부는 객실이다.여의도 중심부는 아파트가 소복하다.
목이 마른 용(渴龍)이 북쪽에서 내려와 여의도에서 머리를 대고 물을 마시고 있는(飮水) 모양의 여의도라고 풀이한다.
용의 꼬리 부문에 해당하는 곳의 지명이 파주의 용미리(龍尾里) 용의 배에 해당하는 곳이 서오능 근처의 용복동(龍腹洞)
그리고 그 앞 용의 머리 용두동(龍頭洞)이 그 용의 모양을 설명한다.용은 그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용이 아니다.
여의주를 물어야 그때 비로소 용이 되는 것이다.북쪽에서 내닫는 용은 남쪽 한강에 떠 있는 여의주(여의도)를 입에 물고
마침내 용으로 승천할 수 있다.난지도 하늘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의도는 바로 행주형의 모습이었다.
강이 흐르다 보면 자연히 꾸불꾸불한 뱀 모양으로 되고, 그러다가 모래톱이 쌓이고 돌이 모이며 식물이 자라고 육지가 만들어진다.
사방에 물이 휘두르면 섬으로 변한다. 한양도성 밖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그려내고 있는 경조오부도다.그 지도에 한강의 섬이 자세하게 나와있다.여의도(汝矣島)도 나온다.汝는 내가 아니고 너를 뜻한다.矣는 어조사 의다.문자 그대로 너의 섬 여의도다
‘너른 벌의 섬’, ‘너벌섬’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여(如)’는 ‘너’이고, ‘의(矣)'는 원래 옷 ‘의’(衣)자와 소리 값이 같다.
‘의(衣)'에는 '벌’의 뜻도 있다.‘너벌섬’, ‘너른 모래벌판 섬’이라고 했다.
이 여의도를 두고 ‘나의주(羅衣洲)’ '나의도(羅衣島)'라고도 불렀다.羅는 그물 나이고 衣는 옷 의이다.
또 잉화도(仍火島)라는 이름도 있었다.仍은 인할 잉이고 火는 불 화자이니 그 섬의 이름도 참 다양하다.
“나의주(羅衣洲):잉화도(仍火島)라고도 한다. 도성 서쪽 15리에 있다. 곧 서강 남쪽이다.밤섬과 서로 잇닿아 있다.
장마가 되면 끊어져 둘이 된다.옛날에는 축목장(畜牧場)이 있어 사축서(司蓄署) 전생서(典牲署)의 감목관(監牧官)을 보냈었다.“
-<동국여지비고>에서-
국회의사당은 물에 갇혀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배치가 풍수상 정석이다.
국회의사당은 그렇지 않다.배수임수(背水臨水)의 온통 물에 갇힌 배치의 국회의사당이다.이를 두고 배수진(背水陳)를 쳤다고
한다.배수진에는 통 여유가 없고 급하고 시끄럽기 마련이다.이런 땅의 기질은 그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요즈음 국회가 시끄럽고 그곳 사람들이 사뭇 거칠고 여유가 없는 게 모두 그 땅의 기질에 기인하지 않나,
그렇게 보는 이도 있다.
1975년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시대를 마감하고 여의도로 이사했다.여의도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에 자리했다.
국회의사당 앞 뒤 쪽에는 기둥을 각각 8개씩 두었다.전국 8도를 뜻한다.좌우 측면에는 각각 4개씩 기둥이 있다.
이는 4계절을 의미한다.국회건물 사방에는 모두 24개의 기둥을 두고있다.24절기를 의미하는 기둥의 배치다.
경복궁 경회루의 기둥배치에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찾았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국회본회의장은 중앙 천정에서 365개의 크나큰 전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이 모두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365일 사계절 일년내내 국민들을 위해 열심히 국정을 돌보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예로부터 중요한 건물에는 지킴이 상징물을 두었다.그때 많이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해치 해태다.
대표적으로 경복궁 정문 광화문 앞 좌우에서 두 마리의 해태가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지켜내고 있다.
해태는 불(火)를 막아주는 기능을 갖고있다.또 사특한 무리가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거뜬히 해낸다.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해서 설화(說禍)를 당하지 않게 예방하는 기능도 참으로 탁월하다고 한다.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해 의사당 건물을 준공할 무렵 월탄 박종화가 해태를 국회 정문 좌우에 배치할 것을 제안한다.
당시 국내 굴지의 기업 해태제과에서 나서 국회 정문 앞 좌우에 해태상을 건립한다.광화문 해태와는기능은 같다.
두 곳의 해태는 분명 차이가 있다.광화문의 해태는 앉아 있다.왕조시대 해태는 백성을 앉아서 맞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국회 해태는 서 있다.국민이 주인인 민주시대 그 국민을 서서 정중히 맞이하는 국회의 해태다.
광화문의 해태는 암수를 구별하지 않았다.국회 해태는 암과 수를 식별할 수 있다.
방문객 입장에서 왼쪽의 해태상이 숫놈이다.자세히 보면 배 아래쪽 숫컷의 상징이 조금 보인다.
오른쪽에서 국회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암컷 해태상이다.이 해태상에는 왼쪽 해태상에서 본 '상징물'이 없다.
"이렇게 큰 잔치를 하는데 어찌 술이 없을 수 없겠는가!" 당시 해태상 건립을 주선한 해태제과에서 포도주를 보낸다.
그 포도주를 해태상 밑에 타임캡슐로 묻는다.여의도 이전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 포도주로 거한 잔치를 벌인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영등포(永登浦)의 유래를 찾아보자.김정호의 지도에는 英登浦로 나온다.靈登浦로 표기한 곳도 있다.
한강성심병원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의 강이 영등포였다.물가의 평안과 무사고를 기원하는 굿 영등굿이다.
음력 2월에 물가 영등신에게 올리는 당굿으로 마을에서 행하는 당굿 영등굿이다.이 포구에서 영등굿을 하면 소원을 꼭
이뤘다고 전한다.기도 발이 잘 먹혔다는 말이다.그래서 이곳 포구를 영등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굿을 하자면 신(神)을 모셔야 하고 굿의 장비를 보관해야 한다.그 집이 당(堂)으로 불린다.당이 몰려있는 당산(堂山)이 이웃한다.
일제 강점기 1916년 일제는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영등포에 군수공장을 짓는다.
그리고 이웃에 군용비행장을 건설한다.목장이나 자리한 쓸모없는 섬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변모한다.
일제는 난지도 상암동 수색쪽에 대륙침략의 병참기지 경성사단을 둔다.난지도와 여의도는 일제의 대륙침략 기지였다.
여의도공항은 개장당시 활주로와 격납고만 있었으며, 개항부터 여의도비행장이라 불리지않았다.
점점 항공수요가 늘어나자자 1928년 비행장을 확장하면서 여의도공항이라 불렀다.
1917년에는 세계적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여의도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처음으로 항공기다운 항공기가 이착륙했던 것은 1920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일본과의
우호 친선을 목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의주 비행장에서만 한 번 착륙할 계획으로, 서울 상공에서는
선회비행만 몇 번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항공기를 하늘에서도 보기 힘든 1920년대라, 서울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결국 여의도 비행장에도 착륙, 항공기 이착륙을 선보이게 된다.
처음으로 조선 상공을 비행한 첫번째 조종사인 안창남도 이곳에서 이착륙과 선회비행을 선보였다.
"떴다 떴다 비행기안창남"이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할 만큼 이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이착륙한지 불과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이착륙에서,
안창남이 몰고온 애기(愛機)에는 조선반도가 새겨져 있어 감동을 더했다.
안창남은 대대적인 환영 속에 12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12월 10일 안창남은 영국제 뉴포트 단발쌍엽 1인승 비행기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여의도 하늘에서 고공비행의 묘기를 보인 뒤
착륙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운 비행이었다. 안창남은 1923년 7월 1등 비행사 자격을 획득했다.
중국의 중칭(重慶)에서 김구 주석은 "일본 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김구로서는 특공대가 서울에 도착해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이 패망을 선언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웠으리라.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을 통합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임시정부는 사령관에 지청천 부사령관에
김원봉을 임명하고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한다.김구 주석은 한국인 특공대를 태운 수송기 C-47기를 한국으로 보낸다.
1945년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현 여의도공원)에 착륙한 C-47 수송기다.
한국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는 오른쪽 겨느랑이 밑에 토미건을 낀 채 C-47 수송기에서 뛰어내렸다.
햇살이 따가웠다. 품에는 리볼버 권총이 들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수류탄을 차고 있었다. 광복군 이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도착한 네 명이었다. 김구의 임시정부가 고국 땅을 처음 밟은 순간이다. 감동은 벅찼다.
“이윽고 (수송기의) 문이 열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장준하 수기 『돌베개』에서
장준하 기록 오후 2시18분, 미 전략정보국(OSS) 쪽 증언 오전 11시56분이었다.
제2경성비행장(여의도비행장)에는 제로센 20대를 포함해서 50여대의 비행기가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지 사흘이 지난 오후였지만 여전히 일본군은 건재했다.
8·15 이후 조선 민중의 봉기를 우려해 도리어 치안권을 강화한 상황이었다.
격납고(윤중중학교 근처) 앞에 내려선 이들 22명을 향해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비행기에 동승한 한국계 미군은 대위 함용준, 소위 정운수, 이등병 서상복이었다.
미군은 한국에 상륙하기 위해 한국계 OSS 대원을 운용중이었다.(1946년까지 80여명)
조국해방을 위해 1944년 말에 자원한 함용준 박사는 예일대를 졸업한 마흔이 넘은 중년이었다.
프린스턴대학원을 나온 서상복 또한 1906년생이었다. 실제 여의도에 도착한 한국인은 이들 셋을 포함해 7인이었다.
비행기가 중국을 벗어났을 때 조국의 바다 짙푸른 서해 물결에 이미 목숨 따위 흩어버리고 온 일곱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승전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계획하고 귀국한 것이다.
일왕의 항복 이후에도 한반도의 일본군은 "아직 무장해제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버텼다.
이들과 대치하던 광복군은 미국 OSS 부대(미 CIA의 전신)의 만류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도착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19일 새벽이었다.
이들은 광복군 이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도착한 네 명이 됐다.
중경의 임시정부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훈련 상태와 작전시기를 검토했다.
8월 5일. 김구 주석이 서안으로 향했다. OSS훈련을 수료한 광복군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찰이었다.
이틀 뒤 한국과 미국의 책임자는 작전개시를 선언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 된다."
- 백범일지에서-
침투할 지역이 하달됐다. 김준엽에게는 강원지구에 잠입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경우 게릴라전을 벌여야 하는 목숨을 건 임부였다.
"준비는 완료되었고 출발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숨 막힐 듯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독립전쟁 수십 년에 조국을 탈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온 것이다.
이때의 긴장감은 내가 일본 군대를 탈출 할 적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김준엽의 ‘장정(長征)’ 중에서-
작전개시를 앞둔 시점. 일본의 항복이 결정됐다.
"그 순간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기쁨의 환성을 울리며 박차고 일어나 춤이라도 춰야 할 터이지만 그럴 심정이 아니었다.
왜놈들을 우리 힘으로 몰아내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허탈감 때문이었다." -김준엽의 ‘장정(長征)’ 에서-
광복군의 첫 귀환 석 달 뒤인 1945년 11월 23일 C-47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을 통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원 15명이
조국에 돌아온다. 이때 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당시 10살의 소년 이종찬은 작은 할아버지 이시영을
따라 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다.
"10살 소년이던 1945년, 대단한 감격 속에 해방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조국 귀환을 위해 충칭에서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이시영을 비행장에서 맞아 꽃다발을 드렸다.
여의도공원의 C-47기를 볼 때마다 새로운 감격을 느낀다."-이종찬 3·1 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위원장
해방 후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남았다.1965년 맹호부대를 월남에 파병할 때 대대적인 환송식을 여의도 벌판에서 거행했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해서 거기서 돌과 자갈 모래 등으로 여의도 둘레둑을 쌓아 확장했다.그때 생긴 여의도벌판 가운데는 광장으로
조성했다.그 광장은 처음 '5.16광장으로 명명했다.각종 군사퍼레이드 종교집회 문화행사 정치집회를 벌이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1978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여의도광장에서 벌어진 군사퍼레이드이다.
1973년 6월 3일 빌리 그라함 선교사가 설교한 여의도광장집회에 100만인파가 몰렸다.이때 통역을 맡은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의 통역이 빌리 그라함의 설교보다 더 유명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된 한국인 성인 103위 시성식 모습이다.이때도 100만이상의 인파가 몰렸다.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자 103위를 성인에 올리는 역사적인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제단 자리이다.
그 제단이 있던 여의도공원 잔디마당에 그날을 기념하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터' 표석을 세웠다.
그날 성인에 오른 한국 순교자 103위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며, 온 민족과 누리에 그들의 신앙이
이 민족의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하였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 전면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라는 제목 아래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시성선언문 일부를 새겨 넣었습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터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충격으로 세상을 떠난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를 찾을 때 이용한 지하공간이다.
'여의도 벙커'로 알려진 이 공간은 1975년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주도로 조성되었다.박대통령이 여의도행사를 참여하고
그 휴식공간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하벙커의 큰 공간은 회의실 등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그 옆 작은 방에는 박대통령이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쇼파가
가운데 놓여있고 그 옆에는 화장실과 샤워실도 마련되어있다.
'5.16광장'으로 출발한 이 공간은 1970년대 여의도광장으로 이름을 변경한다.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97년 조순시장 때부터 여의도광장을 공원으로 조성한다.1999년 1월에 여의도공원으로 개장하였다. 공원 안에는 한국 전통의 숲,
잔디마당, 문화의 마당, 자연생태의 숲 등 4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섬의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마포구 와 영등포구를 연결하는 도로축이 형성되었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 큰임금이 서울 여의도공원에 거둥하였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해 겨레의 역사를 뒤바꾼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꼽힌다.
그 세종큰임금이 머물고 있는 주변에는 문화군주 성군(聖君)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다양한 기록물이 전시되고 있다.
세종 이도(李祹)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의 치적 등을 그 기록물을 통해 정리하여 아래에 싣는다.
세종은 이 나라의 큰 임금 대왕(大王)이다.
문화군주로 우리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 나라의 유일한 성군(聖君)이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을 '겨레의 영원한 스승'으로 기린다.
1397년, 태조 6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초 여름날,
서울 준수방(지금의 종로구 통인동) 정안군 이방원(후일 태종)의 저택에서
민씨 부인(후일 원경왕후)이 세째아들 도(祹)를 순산했다.
기이한 꿈을 꾼 지 열 달만이었다. 꿈은 상서로움을 극하고 있었다.
어느 날 민씨가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 황소가 구름을 타고 북악산 위에 나타났다.
한데 소가 봉우리를 헛디디는 바람에
뿔 사이에 끼어 있던 불덩이 같던 태양이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민씨를 덮쳐 왔다.
민씨가 놀라 자지러지는 순간 어디 선가 붉은 옷을 입은 꼬마가 나타나더니
태양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민씨 품으로 뛰어들었다.
권력쟁취의 피로 얼룩진 어수선한 세월을 훌쩍 지나 1418년 8월 10일,
충녕은 스물둘 패기만만한 나이에 즉위, 국가경영의 대권을 잡았다.
위의 두 형님대신 그가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운명이었을 것이다.
청년 세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진다.
그가 즉위하고 7년 동안의 대기근(七年大旱)이 찾아온 것이다.
모든 백성이 굶어야 했다.길거리에서 굶어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젊은 세종에게 크나 큰 고통이었다.
국가적으로도 오래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건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재위 3년째인 1421년 5월 7일에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한 때이다.
-광화문 앞에 큰 솥을 내걸고 죽을 쑤어 굶고 있는 백성들이 먹도록 하여라!
"전하, 조정에는 그렇게 백성들에게 죽을 쑤여 먹일 쌀이 없습니다."
-그럼 내탕미(內帑米)로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먹여주도록 하라!"
광화문 앞 육조관아에 큰 가마솥이 걸렸다. 왕실에서 쓸 내탕미(內帑米)로 죽을 끓였다.
허기 진 백성들이 줄 지어 죽으로 허기를 메우고 있었다.
20대의 청년 세종은 육조관아에 차일을 치고 나와 앉았다.
죽을 받아먹는 백성들의 몰골은 참담했다.
뼈다귀에다 가죽만 씌워놓은 참혹할 몰골을 한 백성들이다.
그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죽을 받아서 먹고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갔다.
"내가 정치를 얼마나 잘못하면 저렇게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나"
세종은 이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경복궁으로 돌아온 세종이 경회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어명을 내렸다.
“경회루 옆에다 띠집(草家) 하나 지으세요.”
신하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경복궁의 모든 건물이 기와집인데, 거기에 초가집 지었다가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 젊은 지성, 세종은 한 술 더 뜬다.
"짓기는 짓되 새 재목으로 짓지 말고 경복궁 어딘가에 낡은 재목이 있을 것이니, 그 낡은 재목으로 초가삼간을 지으라."
그야말로 왕명이니 거약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조를 동원하여 두 칸짜리 초가 한 채를 지었다
세종은 그 초가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신하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초가에서 30미터 거리에 정무를 살피는 사정전이 있고, 사정전 뒤에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전하, 초가에 자고 먹고, 정무를 살피면 어떻게 됩니까. "
마침내 신료들은 초가 마당에 꿇어앉아 정전에서 집무하기를 눈물로 호소한다.
"초가에서 거처하시다가 환후라도 얻으면 저희들은 대죄를 짓게 된다고 말입니다. 어디 신하들 뿐이겠습니까."
어질고 착하신 왕비 소헌왕후까지도 초가집 마당에 꿇어앉아 애원을 한다.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데도 젊은 세종은 끄떡도 하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임금이 어찌 기와집 구둘장을 지고 편한 잠을 잘 수 있더냐.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단호한 비답을 내리고 무려 2년 4개월동안 이 초가에서 집무를 했다고 그의 실록은 적고 있다.
세종은 강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뜻밖에도 경회루 동편의 초라한 띠집을 짓고 그 곳에서 생활한 것이다.
당시 계속되는 가뭄과 역병 때문에 고통 받는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기록을 보면, 왕은 경복궁으로 옮기기 전에 버려 둔 재목을 이용해 경회루 동편 별실(別室) 두 칸을 짓게 하였다.
그 띠집은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띠[茅草]를 덮어 만들었다[不用柱礎 覆以茅草].”
어느 날 띠집에 들어가려던 세종은 그 아래에 짚자리[藁席]가 있음을 발견했다.
왕의 잠자리가 너무 열악하다고 생각한 신료들이 왕 몰래 바닥에 짚을 넣었던 것이다.
세종은 집 바깥[戶外]에 서서 좌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自今非予所命 雖少物勿納于內]”(세종실록 3/5/7). (그로부터 5일 뒤에 비가 내렸다.)
실록을 보면 당시 세종은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그는 왕비 가문이 파탄이 나도 발언 한마디 못했다.
밤늦게까지 부왕을 따라 연회에 참석해 춤을 추어야 하는 무기력한 남편이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제주도로 곡식을 실어 보낸 배가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무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들려왔다.
연이어 터지는 고위 관리들의 뇌물사건이며 성 추문 사건으로 조정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급기야 왕을 비난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이따위가 무슨 대체(大體)를 아는 임금이라 할 수 있겠는가”
부왕 태종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사냥터로 따라다니는 세종을 향해 역관 임군례는 떠들었다.
“고려말 우왕이 여기저기 놀러 다닌 것과 다를 바가 뭐냐”고도 말했다(세종실록 3/2/18).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취한 조처가 경복궁 띠집 기거였다.
가정에서도, 조정에서도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느낀 그이다.
세종은 모든 기대가 다 무너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을 묵묵히 내려놓고 백성들의 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세종은 경복궁의 화려한 집무실이 아닌 왕실에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의 한 쪽 귀퉁이에 초가를 짓도록 한다.
그 곳에서 2년여를 거하며 국정의 모든 업무를 검토하고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백성들과 맞추고 온 마음을 백성들을 위하여 쓰고 모든 방법을 통해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했다.
그 세종은 두 칸 짜리 초가 살이를 통해 늘 백성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는 왕으로써 편안히 누릴 수도 있었다.
백성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마음 아파했던 그 세종의 애민(愛民)정신이다.
그 애민정신이 후세에 세종대왕을 유일한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깊은 뿌리가 아닐까 한다.
나무를 싶고 꽃을 가꾸고 연못을 조성했다고 해서 그 공간을 정원이라고 하지 않는다.나무는 나무고 꽃은 그저 꽃이다.
물도 물이고 인간도 그저 인간이다.그 공간에 정자를 배치하면 비로소 그 공간은 정원이 된다.그 정자는 나무와 꽃 꽃과 물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정자가 들면서 그 공간은 마침내 인문화공간으로 달라진다.그게 바로 한국인의
정원관이다.여의도에는 나무와 꽃 괴석(怪石) 연못 등을 심고 문화군주 세종을 거둥시켰어도 정원은 없는 것이다.이 공간 곳곳에
정자를 설치하였을 때 여의도는 정원이 되는 것이다.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었을 때 진정한 정원은 한국인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