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썸니아]는 흔한 스릴러물이 아니다. 이미 [메멘토]를 통해 우리가 확인한 바 있던 이 독특한 감성의 감독은, 살인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는 고참 형사와 지능적인 살인범 사이의 긴장관계를 통해 전혀 예기치 못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인썸니아(insomnia)라는 몽롱한 상태의 불면증은, 영화 속에서 고참 형사 도머(알 파치노 분)가 겪고 있는 증세이지만 어느덧 관객들에게도 전염이 되어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몽롱한 상태로 변하게 된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백야(Midnight sun) 상태로 접어든 알래스카 마을. 쓰레기 하치장에서 17살 소녀가 전라 상태의 시체로 발견되고 이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 LA 경찰국의 베테랑 형사 도머는, 그의 오랜 파트너 햅(마틴 도노반 분)과 알래스카 지역의 초보 경찰인 엘리(힐러리 스웽크 분)와 호흡을 맞춰 사건을 수사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사람은 죽은 소녀와 연인관계였던 한 고등학생. 그러나 도머는 사건 현장에 여고생의 가방을 미끼로 던져 놓고 진짜 범인을 기다린다. 짙은 안개가 끼어서 눈앞에 있는 사물의 식별도 곤란한 상황. 이 짙은 안개 속에서 범인을 추적하던 도중 도머는 눈 앞에 있는 물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쓰러진 사람은 쫒고 있던 범인이 아니라 자신의 파트너인 햅이었다.
안개 속의 또 다른 살인사건 이후 지능적인 살인범 핀치(로빈 윌리암스 분)는 곧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인썸니아]의 구조적 특징은, 누가 범인인가라는 살인사건의 고전적 스릴러 공식을 피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 앞에 범인의 신상을 노출시킨 후, 오히려 도머의 약점을 이용해 집요하게 도머와 심리적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핀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도머의 약점은, 자신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범인이 저지른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유는 있다. 도머는 경찰국 내사과로부터 예전의 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다.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햅은 그 경위를 소상하게 알고 있다. 비록 짙은 안개 속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실수지만, 만약 도머가 햅을 쏜 것으로 밝혀지면 사건은 더욱 복잡해지리라는 것을 도머는 생각한 것이다. 아마도 경찰국에서는 도머가 내사를 피하고 결정적 증인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햅을 살해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도머는 순식간에 범행 현장의 증거를 은폐하고 햅의 죽음을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이 저지른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안개 속에서 범인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머의 수사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인 핀치는 도머와 흥정을 시작한다. 이제 두 사람은 공범이다. 각각 다른 살인사건의 범인이지만,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은밀한 거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썸니아]는 도머와 핀치 사이의 심리적 긴장관계를 극대화하면서 세심하게 그들의 심리 변화를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영화를 의심할 바 없는 걸작으로 추천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낮과 밤이 따로 없는 백야 상태의 알래스카 지방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도머의 고통을 그의 심리적 죄의식과 결부시켜 뛰어나게 형상화한다. 호텔 방 창문을 커튼으로 굳게 닫아 조그만 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그의 행위 뒤에는, 오랜 동료를 살해했다는 죄의식이 깔려 있다. 그것이 우발적 실수인지 아니면 내사과의 조사를 피하기 위한 무의식적 점행인지 본인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도머의 이런 심리적 불안감까지 핀치는 꿰뚫고 있는 것이다.
도머와 핀치는 서로를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 두뇌싸움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관객들을 방관자로 만들지 않는다. 이제 관객은 범행 현장의 또 다른 목격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배우 중의 한 사람인 알 파치노는 사실 불운의 배우이다. [대부]의 명연기를 기억하고 있는 팬이라고 해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걸작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여인의 향기]는 오히려 범작에 그친다. 그의 노고에 대한 아카데미의 사은품이라고 해야 옳다. [스카페이스]와 [칼리토] 정도가 알 파치노의 명성을 유지시켜 주는 작품 목록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연기 대결을 벌였던 [히트]에서도 사실 알 파치노는 드니로에게 밀리는 형세였다. 그러나 [인썸니아]로 알 파치노는 왜 알 파치노인가를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오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인썸니아]라는 걸작에서 알 파치노와 만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로빈 윌리암스는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그의 표정연기는 단순히 안면근육을 일그러뜨리는 짐 캐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굿모닝 베트남]의 히어로 이후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명 코미디 연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인썸니아]를 보기 전에 로빈 윌리암스의 연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이 영화에서 로빈은 이전의 다른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을 완전히 백지상태로 지워버리고 차갑고 지능적인 살인범의 연기를 섬뜩하고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경의를 표한다.
삼각편대의 또 다른 주인공인 힐러리 스웽크는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소년은 울지 않는다] 이후 별다른 작품이 없었지만, [인썸니아]에서는 사건의 중심에 서서 고참 형사와 살인범 사이에서 차분하게 사건을 해결해가는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감독은 힐러리를 통해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가능케 한다. 형사와 살인범이 벌이는 고난도의 두뇌싸움에 관객들을 참여시키기고 그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힐러리를 이용한다. 힐러리는 기꺼이 그 불안하고 중간적인 어려운 연기를 뛰어나게 수행해간다.
[인썸니아]는 고전적 스릴러물의 공식을 뛰어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 앞에 제공한다. 좋은 영화는 상투적 시선을 극복하고 낯익은 세계와 결별하게 하며 삶과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시선을 확보하게 한다. [인썸니아]가 그런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