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영 교수의 불교카페 www. buruna.org 에서 - 불교 인명사전
(온라인) 불교 인명사전 ( 약 190 명 )에 가면 쉽게 찿아 볼수 있음 ( buruna 검색에서 관계지한 스님의 내용 글이 인코딩 오류로 깨져 있어 아래 바로 잡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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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 (마하가섭, Mahakasyapa) 대음광(大飮光), 대구씨(大龜氏) 등으로 음역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 존재로 인도 왕사성(王舍城)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란만 미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비팔라 나무 밑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로 비야리성(城)의 가비리라는 바라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세속적인 욕망의 무상을 깨달아 아내와 함께 출가하였는데, 그 후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는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고 자기 옷을 벗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바친 후 주워온 헌옷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었다. 그는 욕심이 적고 늘 만족할 줄 알며 항상 엄격한 계율로 두타(頭陀: 금욕 22행)를 행하고, 교단(敎團)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부처님의 아낌을 받았다.
어느 날 사위국(舍衛國)의 고요한 숲 속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 헌옷을 입은 채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속으로 경멸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여러 비구(比丘)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왔다. 가섭이여, 여기 내 자리에 앉아라.” 하고는, 가섭존자가 얻은 훌륭한 공덕이 자기자신이 얻은 공덕과 다를 바 없다고 칭찬하면서, 석가는 모든 무상(無上)의 정법(正法)을 가섭에게 부촉(咐囑)하며 자신이 죽은 뒤 모든 수행자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그를 십대 제자 중‘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하였다.
한때 바사성(婆娑城)에 머물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부처님의 입멸 소식을 듣고 쿠시나가라의 天觀寺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한 후 茶毘儀式을 집전하였다. 이어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아난(阿難)과 우바리(優婆離)로 하여금 경(經)과 율(律)을 결집(結集)하도록 하였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가 되었는데, 선가(禪家)에서는 그를 부법장(付法藏) 제1조(祖)로 높이 받들고 있다. (佛本行集經45, 잡아함41, 증일아함20, 달마다라선경上, 付法藏因緣傳제1, 有部毘那耶雜事39 40, 大寶積經88, 胎藏界7集中)
------------------------------------------------- 頭陀第一. 대가섭 또는 그냥 가섭, 迦葉波라고도 하며 大飮光, 大龜라고 번역한다. 少欲知足하여 항상 頭陀行을 하였다. 가섭은 부인과 함께 출가하였다고 한다. 마하가섭은 多子神處에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8일 후 바른 지혜를 내어서 자기의 僧迦梨를 벗어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께서 주신 糞掃衣를 받아 입고 곧 아라한과를 증득 했다. 동 제자품에는 "十二頭陀 難得의 行은 대가섭이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의 心印을 전해 받은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오백명의 아라한을 데리 고 칠엽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편찬하는 제 1결집을 했다. 이때 가섭은 모든 대중들을 통솔하는 上首가 되어 결집을 지휘했다. 특히 가섭은 선종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가섭이 세 곳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전해 받았다는 '三處傳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가섭은 禪宗 법맥의 제 1조로 추 앙받고 있다.
가섭마등 [ 迦葉摩騰 ] 축섭마등(竺葉摩騰) ·섭마등(攝摩騰) ·마등이라고도 한다. 매우 총명하여 대소승(大小乘)의 경(經)과 율(律)을 통달하였고, 서인도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하여 이름을 떨쳤다. 중국 후한의 명제(明帝)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 법란(法蘭)과 함께 채음(蔡) 등을 인도에 보냈을 때, 중앙 아시아 대월지국(大月氏國)에서 가섭마등을 만났다. 그는 67년 불상과 경전을 백마에 싣고 뤄양[洛陽]에 이르러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등을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중국 역경의 시초이다. 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한 자로 알려져 있는데, 결국 뤄양에서 죽었다. -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각범혜홍(覺範惠洪,1071-1128) 각범혜홍(覺範惠洪,1071-1128) 송대 임제종황룡파, 瑞州(강서성) 高安縣사람 성은 彭씨, 이름은 惠洪 또는 德洪, 자는 각범. 14세에 출가하여 三峰觀선사의 侍者가 되고 다음으로 寶峰克文을 참예하여 7년을 지내다. 崇寧년간(1102-1106)에 州 경덕사에 있다가 瑞州 淸凉寺에 移住하다. 마침 奸僧의 讒訴를 만나 獄事를 당하고 政和원년(1111) 다시 국외로 쫒겨나고 뒤에 세번째 옥에 갇히었다. 湘西南臺에 明白庵을 짓고 살면서 [禪林僧寶傳 30권]을 짓다. 欽宗이 즉위하자 곧 칙명으로 다시 머리를 깎고 본이름을 다시 부르게 하였다. 金나라의 난을 만나 암자에 退居해 있다가 南宋 建炎2년 5월 입적. 세수 58세, 시호는 寶覺圓明.(속전등록22, 통재29, 日元17, 계고략4, 五燈嚴統17) 저서:[林間錄 2권] [고승전 제12권] [智證傳10권] [禪林僧寶傳 30권] [志林 10권] [令齋夜話 10권] [石門文字禪 30권]
각훈 [ 覺訓 ] 호 고양취곤(高陽醉). 각월(覺月)이라고도 한다. 일찍부터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와 교유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1215년(고종 2) 오관산 영통사(靈通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왕명으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저술,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으로서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시문(詩文)의 초집(草集)이 사림(士林)에 전한다.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감지승찬 감지승찬(鑑智僧璨, -606) 중국선종 제3조, 在家時에 風疾이 있었는데 2조 혜가와 問答往來로 풍질이 空不可得임을 깨닫다. 출가하여 二祖를 시봉하기 2년 뒤 慧可의 법을 받고, 舒州 司空山에 들어가다. 그즈음 北周武帝의 破佛(574)을 만나 同州 空山에 숨어서 10여년을 지내다. 隋開皇13년(593) 道信에게 衣鉢을 전하고 羅浮山에 들어가 隱居하기 3년, 그뒤 大業2년 제자들과 함께 大齋에 나아가 한 나뭇가지를 들어보이며 법문을 마치고 掩然히 示寂하다.(임종에 이르러 曰, 나는 본래 娑羅王如來로서 이 사바세계에 3번 다녀간다. 첫번째는 17조 僧伽難提존자요 두번째는 지금의 나이며 세번째는 趙州땅에 출현할 것이다.) 그는 항상 頭陀禪定을 닦았고, 獨孤及은 [碑銘]과 [塔銘]을 짓다. 唐玄宗이 鑑智(또는 鏡智)선사라 시호하다.(전당문390 비명,탑명, 능가사자기, 전법보기, 역대법보기, 보림전8, 조당집2, 송고승전25 法 傳, 隋書57, 唐書111, 전등록3) 저서:[신심명]
겸익 [ 謙益 ] 율종(律宗)의 시조. 526년(성왕 4) 인도로 건너가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계율(戒律)을 연구한 후, 530년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이라는 인도의 승려와 함께 산스크리트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여, 흥륜사(興輪寺)에서 국내의 명승 28인과 함께 72권을 번역하여 백제불교의 계율을 정립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경봉정석(鏡峰靖錫,1892-1982) 경봉정석(鏡峰靖錫,1892-1982) 통도사스님, 聖海南炬의 제자. 경봉은 호, 詩號는 圓光 본명은 金鏞國. 밀양사람. 1892년(고종29) 密陽郡 부내면 계수동에서 父 金榮奎 母 안동權씨 사이에서 태어나다. 7세에 밀양읍의 漢文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6세에 양산 통도사 聖海에게 출가하고 明新學校를 거쳐 1912년 海曇율사에게 具足戒를 수지하다. 통도사 강원을 나오고 巡廻布敎師로 전국을 다니며 포교하고, 1925년 통도사 念佛萬日會 회장이 되어 30여년간 主導하다. 이후 제방을 편력하며 當代의 善知識을 參訪하고 통도사 極樂庵에서 눕지않고 앉아서 參禪에 몰두, 마침내 36세인 1927년 11월 20일 三更에 見燭舞하고 대도를 성취하다.(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悟道頌) 그후 五臺山 漢巖, 直指寺 齊山, 大覺寺 龍城, 鄭田岡에게 깨달음을 확인하고 書信往來로 교분을 두터이하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하고 1935년 통도사 주지에 피선, 1941년 朝鮮佛敎禪理參求院(지금의 禪學院) 이사장을 거쳐 1949년 다시 통도사 주지에 再任되다. 1953년 11월 極樂護國禪院 祖室에 추대되어 이후 30여년간 주하며 후학과 불자들을 提接하다. 1967년 서울 탑골공원에 '卍海禪師記念碑'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27일) 입적하니 세수 91 법납 75였다.(三笑窟일지, 불교신문<1982.7.25>) 저서:[法海] [속法海] [圓光閒話集] [三笑窟日誌] [火中蓮華消息]등
고령신찬(古靈神贊, ): 고령신찬(古靈神贊, ) 百丈懷海의 法嗣. 受業師(득도사)는 戒賢. 緇門私記p.72 참조. 고봉원묘(高峯原妙,1238-1295):남악하 제21세 雪岩祖欽의 제자, 성은 徐씨 휘는 原妙, 蘇州吳江사람. 15세에 출가하고 18세에 天台敎를 공부하다가 20세에 淨慈寺에 들어가 '3년 死限'을 세워 斷橋화상에 묻고 北磵寺 설암을 처음으로 참방하였다. 1261년 三塔寺에서 깨달아 설암의 법을 잇다. 뒤에 天目山 西峰에 住하면서 선풍을 드날려 수백제자를 길렀다. '來不入死關 去不出死關 鐵蛇鑽入海 撞倒須彌山'이란 임종게를 남기고 坐亡하다.
고봉태수(高峰泰秀,1901-1969) 고봉태수(高峰泰秀,1901-1969): 근대 大講伯, 龍城震鐘의 제자, 본관은 晋州 성은 姜씨, 황해도 장연사람. 어려서 仙遊塾에서 한학을 배우고 13세에 5살위인 부인과 혼인하였으나 17세에 부인이 죽다. 그뒤 포목상으로 전전하다가 25세에 大覺寺 龍城에게 출가하다. 도봉산 望月寺 萬日結社道場, 양산 內院寺 등에서 정진하고 그후 金剛山 摩訶衍 釋王寺등 선원에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다. 후에 해인사, 통도사 전문강원에서 경전을 열람하다. 1943년 海印寺 講師에 취임하고 이어 銀海寺 강사로 초빙받아 그곳에서 滿空月面과 더불어 禪問答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취하는 법이 없었고 여자를 택하면서도 집착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酒高峰'이라 칭했으나, 언제나 새벽 3시에 일어나 禪定에 들고 경을 연구하였다. 또 학인들을 가르침에 매우 엄격하였고 평생동안 강의에 열중하였고 宗團의 행정직은 끝내 사양하였다. 1969년 靑巖寺 極樂殿에서 70세로 입적하시다. 제자로 雨龍, 山 등이 있다.(弘法院刊 [무상속에 영원을 산 사람들] 1969)
강승회(康僧會, -280): 강승회(康僧會, -280):康居國사람, 그의 先祖는 대대로 印度에 살았다. 아버지가 장사하면서 交趾에 와서 그를 낳았으나 10세때 兩親을 여의고 출가하여 三藏과 六典에 통하였다. 또 南陽의 韓林, 潁川의 皮業, 會稽의 陳慧 등에게 道를 배우다. 吳赤烏4년(241)에 建 에 오니 孫權이 建初寺를 짓고 머물게 하였다. 이곳에서 [六度集經]등 7部 20卷을 번역하여 吳나라에 불교포교의 모범이 되었다. 후세에 超代禪師라 칭하였으며 天紀4년 입적하다.(出三藏記集6 13강승회전, 安般守意經序, 廣弘明集1) 저서:[法鏡經註解] [道樹經주해] [安般守意經주해]
고산신안(鼓山神晏, ) 고산신안(鼓山神晏, ) 당말 五代스님, 大梁李氏의 아들. 13세에 靈夢을 꿈꾸고 白鹿山規에 의해 출가하여 嵩岳에서 受具하다. 곧 제방의 禪德을 歷參하고 雪峰義存(821-908)에 참예하여 契悟하고 법을 이었다. 뒤에 師王延彬이 法要를 묻더니 福州고산에 湧泉禪院을 짓고 師를 延住케 하여 宗旨를 선양하다. 天福年中(936-944)에 77세로 입적하니 興聖國師라 시호하다. (조당집10, 전등록18, 회원7) 저서:[鼓山先興聖國師和尙法堂玄要廣集 1권]
고산지원(孤山智圓,975-1022) 고산지원(孤山智圓,975-1022) 宋代 天台宗스님(山外派), 奉先靑原의 제자. 姓은 徐, 孤山은 號. 字는 無外 自號는 中庸子,病夫 법호는 智圓.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으나 學者에게 講義하고 撰述함을 쉬지않다. 杭州 孤山寺에 住할 때 학자가 많이 모여 총림을 이루다. 능엄 금강등의 疏를 지음. 宋眞宗 乾興元年 2월에 입적 나이는 48세. 저서:[病夫 ]
고안대우(高安大愚, ) 고안대우(高安大愚, ) 당대 南岳下, 歸宗智常의 제자. 臨濟義玄을 接化한 知識이라 알려지다.(大愚三拳 또는 臨濟大悟) 강서성 瑞州 高安에 주하다.(臨濟錄, 조당집19, 전등록12 임제장)
관계지한(灌谿志閑, -895): 관계지한(灌谿志閑, -895): 당대 남악하, 魏府(하북성) 館陶사람 성은 史씨. 어려서 栢巖선사를 따라 출가하고, 臨濟義玄에게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長沙(호남성)의 灌溪에 주하다. 唐建寧 2년 5월 29일에 問侍者曰,'坐死者誰' 曰,'僧伽' 立死者誰' 曰,'僧會' 乃行六七步 垂手而逝.(조당집20, 전등록12, 광등록13, 회요10, 회원11)
공자(孔子,552-479B.C) 공자(孔子,552-479B.C): 魯나라 철인, 昌平邑 邑사람, 자는 仲尼 이름은 丘, 부는 叔梁紇 모는 顔씨.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빈곤 속에서도 學問에 뜻을 두어, 周公을 추앙하다. 주공의 理想政治를 실현하려고 관리가 되지만 반대로 인해 國外로 망명, 諸國을 다니며 治國의 道를 설하다. 일정한 스승이 없었지만 禮를 老聃에게 묻고 音樂을 弘에게, 벼슬하는 도리를 子에게 물었으며, 거문고를 師襄에게 배웠다. 뒤에 노나라로 돌아와서 제자교육에 힘쓰다. 73세에 卒하였는데, [禮記 檀弓記]에, '돌아가기 7일전에 아침일찍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다가,"泰山이 장차 무너지리로다, 대들보가 장차 꺾어지리로다, 철인이 장차 이세상에서 꺼지리로다!"하고 노래 부르고는 병들어 누운지 7일만에 돌아갔다'한다. 문하에 顔回, 閔子騫, 伯牛, 仲弓, 宰我, 子貢, 有, 子路, 有, 子夏 등을 '孔門十哲'이라 한다.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송대 조동종, 州(산서성)사람 성은 李씨, 이름은 正覺. 11세에 淨明寺 本宗에게 剃髮하고 14세에 晋州 慈雲寺(산서성 臨汾) 智瓊에게 受具하다. 18세에 諸方을 遊歷하다가 丹霞山(하남성) 子淳의 법을 받고(1124), 建炎원년(1127)에 舒州 泰平寺에 주하고 江州 圓通, 長蘆로 移住하다. 뒤에 天童山(절강성 寧波부근)에 주하며 開法하니(1129) 따르는 제자가 항상 1,200인이 되었으며 이곳에 약 30년 住하면서 가람을 一新하고 學德을 베푸니 '天童中興의 祖'라 칭하다. 紹興27년 10월 나이 67세로 입적. 시호는 宏智禪師. 師는 임제종 大慧宗 (1088-1163)와 함께 당시 禪宗의 二大甘露門이라 稱하던 默照禪의 巨匠이었다. 그는 大慧가 '默照死禪'이라 痛駁하자 오히려 [默照銘]을 지어 反駁하였다.(속전등록17, 계고략4, 회요29, 회원14, 명고승전5) 저서:[굉지선사어록 4권] [宏智廣錄 9권(1157)]
교연청주(皎然淸晝,720-799?): 교연청주(皎然淸晝,720-799?): 唐代스님 별호는 詩僧, 謝康樂의 10세손. 辯才와 詩文에 능하였다.(姚壯의 "皎然年譜稿"참조) 저서:[內典類聚40권] [詩式5권] [詩議3권] [ 山集(교연집)10권] [儒釋交遊傳10권]
구겸지(寇謙之,365-448) 구겸지(寇謙之,365-448) 남북조대 北魏의 道士, 자는 輔眞. 太上老君으로부터 道敎의 經文과 仙術을 배워 스스로 道場을 세우고 新天師道의 이름으로 도교를 종교로 大成시키다. 또 재상 崔 浩(381-450)와 함께 太武帝의 廢佛을 주동하다.
구마라집(鳩摩羅什,343-413) 구마라집(鳩摩羅什,343-413): Kumarajiva 童壽라 번역. 父는 鳩摩羅炎, 龜玆國王의 누이동생 耆婆의 사이에서 태어남. 7세에 출가하여 母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고, 북인도 賓國에서 盤頭達多에게 소승교를 배우고 疏勒國의 須梨耶蘇摩에게 대승교를 배우다. 귀국하여 卑摩羅叉에게 律을 배우고 후에 주로 대승을 弘布하다. 383년 秦王 符堅이 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쳐서 羅什을 모셔오게 하였으나 부견이 패했으므로, 여광이 凉王이 되어 凉州에 머물다. 그뒤에 後秦 姚興이 凉을 쳐서 401년 師를 長安으로 모셔와 國賓으로 대우하고 西明閣과 逍遙園에서 여러 경전을 번역케 하다. 번역서로 [成實論] [十誦律] [大品般若經] [妙法蓮華經] [中論] [十住毘婆沙論] 등 총 98部 425卷에 달한다. 그는 三論宗의 조사이며 그의 三千여제자 가운데 道生,僧肇,道融,僧叡등을 什門四哲이라 하다.(出三藏記集12 14, 高僧傳2, 開元釋敎錄4, 晋書95)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唐代스님, 화엄종 제5조(선종으로는 하택종). 성은 何씨, 호는 규봉 順慶府 果州西充縣사람. 젊어서 儒敎를 배우고 28세(807)에 과거보러 가다가 遂州道圓에게 출가하여 禪을 배우다. 道圓의 지시로 淨衆寺 荊南張(신회의 제자)에 참예하다.그 뒤 어느날 信徒의 齋에 가서 圓覺經을 받게 되어 거기서 얼마 읽지 않고 깨친 바가 있었다. 후에 澄觀의 제자가 되어 華嚴經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고 華嚴五祖가 되었으나 항상 禪敎一致를 주장하다. 長慶원년(821) 圭峰의 草堂寺에 退居하여 저술에 힘썼으며, 재상 裵休의 귀의를 받다. 그는 [禪源諸詮集101권]을 지었는데 武宗의 會昌法難의 와중에 유실되어 [都序4권]만 전해지고 있다. 會昌元年 1월 興福塔院에서 62세로 입적. 唐宣宗이 定慧禪師라 시호하다.(*선종계보로는 神會-南印-道圓-宗密)(全唐文743, 규봉선사탑명, 송고승전6, 조당집6, 전등록13, 통기29, 통재16) 저서:[圓覺經大疏抄 13권] [原人論 1권] [金剛經纂要] [華嚴倫貫] [唯識論疏] [사분율소 3권]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 ] [禪源諸詮集都序 4권]등 200여권.
길장 [ 吉藏 ] 금릉(金陵) 출생. 속성 안(安). 안식국(安息國) 사람 안세고(安世高)의 후손으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한다. 13세에 출가하여 흥황사(興皇寺) 법랑(法郞)에게 《백론(百論)》을 배웠는데, 19세에는 이를 덮어 놓고 강연도 하였다. 그 뒤 진망산 가상사(嘉祥寺)에 있으면서 《중론(中論)》 《백론》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의 주석서를 내놓았다. 606년 양제(煬帝)의 청으로 양주 혜일도량(慧日道場)에 있다가 일엄사(日嚴寺)로 옮겨 교법(敎法)을 펴는 한편, 경전 편찬과 불상 만드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 뒤 병상에서도 《사불포론(死不佈論)》을 펴내고 75세에 죽었다. 평생동안 《삼론》을 100여 번 강설했는데, 삼론종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받는다. 그의 중심사상은 공(空)·가(假)·중(中)을 관련지은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에 의한 절대부정으로 요약된다. 저서에 《삼론현의(三論玄義)》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疏)》 《대승현론(大乘玄論)》 등 40여 부가 있다.
-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나가세나(nagasena), 나선(那先) BC 2세기 후반, 인도 북서부에서 활약했던 스님. 나가세나 비구는 인도 북부 산악지대의 가장가라 마을에서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브라만으로서 학습을 받고 베다에 정통했다. 그러나 이후 로하나(Rohana)의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감명을 받아 출가하여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에 두루 정통한 스님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불교사상을 주장했다. 나가세나 비구의 이름은 고대 인도어인 팔리어로 된 《미린다왕문경, Milinda-panha》과 한문으로 번역된 문헌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 등장한다. 이 경전은 BC 2세기 후반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인더스강(江) 유역과, 갠지스강 유역까지를 지배했던 그리스인(人) 왕 메난드로스(Menandros:팔리어로는 Milinda)왕과 불교의 교리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경은 동양적 정신을 대변하는 불교와 서구적 사고를 가진 왕과의 대담을 통해 철학적 주제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동서의 대화로 불려지고 있다.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고려대스님, 이름은 元惠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 또 江月軒이라 했고 성은 牙씨, 寧海사람. 태어나면서부터 骨相이 비범하고 영특하였다. 20세때에 이웃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어른들에게,'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功德山 妙寂庵(지금의 四佛山 潤筆庵)의 了然선사에게 가서 祝髮得度하다. 了然이 나옹에게,'네가 여기에 온 주인공 그것이 무었이냐?'라 물으니 나옹은,'능히 말하고 듣는 그것이 왔습니다. 그러나 보려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읍니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읍니까?' 하니 요연이,'나도 너와 같이 말도 하고 듣기도 하는 그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다른 곳에 가서 가르침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至正4년(1344)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坐禪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 때에 일본승려 石翁이 禪床을 치며,'大衆還聞 '하고 물으니 師가 게송으로,'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하였다. 1348년 3월 大都(北京) 法源寺에서 指空禪師를 뵙고 지공問曰,'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는가 神通으로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신통을 보여 보아라'하니, 師가 지공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손을 포개어 叉手하고 서 있었다. 뒤에 게송을 지어 指空선사에게 드렸으니,'山河大地眼前花 萬像森羅亦復然 自性方知元淸淨 塵塵刹刹法王身. 迷則山河爲所境 悟來塵塵是全身 迷悟兩頭俱打了 朝朝鷄向五更啼'. 1350년 8월 남쪽으로 내려가 淨慈寺 平山處林선사를 친견하였다. 平山問曰,'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師曰,'大都에서 왔습니다' '일찌기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 '西天 指空선사를 만났읍니다' '지공은 매일 무엇을 하는가' '지공은 매일 千劒을 씁니다' '지공의 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一劒을 내놓아라'하니 師가 坐具로 평산을 후려쳤다. 평산이 선상에 쓰러지면서 '이 도둑이 나를 죽인다'고 소리치자 師가 평산을 일으켜 세우며,'吾劒能殺人 亦能活人'이라 하니 山이 크게 웃고 손을 잡고 方丈으로 가서 차를 권하며 몇달을 묵어가게 하였다. 山이 어느날 信表로 法衣 한 벌, 拂子 하나를 주었다. 1358년 귀국하여 가는 곳마다 법을 설하다가 恭愍王이 청하여 내전에서 法門을 듣고 神光寺에 있게 하다. 그후 淸平寺에 주하다가 1370년 廣明寺에서 왕이 親臨한 가운데 '工夫禪大會'를 主宰하고 이듬해 王師가 되어 松廣에 주하였다. 1372년 우연히 지공선사의 '三山兩水之記'를 생각하고 檜巖寺를 重修하여 文殊會를 열어 낙성하였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賓天하고 1376년 우왕의 칙명으로 밀양 靈源寺로 가다가 驪州 神勒寺에서 입적하다. 師가 示寂할 적에 오색구름이 산위를 덮고 茶毘를 하니 頭骨 5片과 牙齒 40개는 타지 않았으며 舍利는 수없이 많았다 한다. 나이 57, 시호는 禪覺 또 普濟尊者. 李穡이 碑銘을 지어 碑와 浮屠가 회암사에 있다.(보제존자나옹화상行狀, 보제존자諡禪覺塔銘)
남악회양(南岳懷讓,677-744) 남악회양(南岳懷讓,677-744): 당대스님 육조의 嫡子, 金州安康(陝西省 漢陰縣治)사람 성은 杜씨, 휘는 회양 시호는 大慧 탑호는 最勝輪之塔. 15세에 荊州의 玉泉寺 弘景율사에게 중이 되고 同學인 坦然의 권고로 嵩山慧安을 만난 뒤 혜능에게 詣하여 六祖云,'從什 處來' 師云,'從嵩山安國師處來' 조운,'是什 物恁 來' 師罔措 於是執侍八年 方省前話 乃告師云,'懷讓會得當初來時 和尙接某甲 是什 物恁 來' 조운,' 作 生會' 사운,'說似一物卽不中' 조운,'還假修證否' 사운,'修證不無 染汚不得' 조운,'祗此不染汚 是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乃至西天諸祖亦復如是'(전등록5 南岳讓章) 心印을 깨닫고 법을 잇다. 713년 남악 般若寺 觀音臺에서 30년동안 있으면서 선풍을 선양하다. 唐天寶3년 8월 입적하다. 나이 68. 開元년간에 馬祖가 그의 법을 잇고 中國禪의 主流를 형성하다. 또 靑原行思와 함께 六祖의 二大弟子가 되다.(전등록5, 傳法正宗記7, 宗門統要속집4, 古尊宿語錄1)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唐代스님, 越州諸 사람, 성은 씨. 어려서 六祖慧能을 따라 배우고 그의 법을 잇다. 六祖寂後에 여러 산에 두루 住하였는데 五嶺 羅浮山, 四明 天目山을 거쳐서 南陽의 白崖山 黨子谷에 들어가 40여년을 山門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上元2년(761) 숙종이 그의 名聲을 듣고 詔勅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禮로 맞게 하다. 玄宗,肅宗,代宗의 두터운 歸依를 받았으나 항상 淡泊한 本性 그대로 天眞自然을 즐기었다. 항상 南岳慧思의 宗風을 사모하고, 朝廷에 奏請하여 均州 武當山에 太一 延昌寺를, 黨子谷에 香嚴 長壽寺를 창건하고 大藏經 一部를 모시었다. 혜충은 行思, 懷讓, 神會, 玄覺 등과 함께 慧能門下의 五大宗匠으로 그의 禪風은 특히 달랐는데 당시 敎界에 光彩를 발하여, 그는 神會와 함께 北方禪風을 이끌며 馬祖의 南方禪風을 비판하였다. 그의 선풍은 身心一如, 卽心卽佛을 宗旨로 하고 또 無情說法을 처음으로 主唱하였다. 더우기 南方의 禪者가 經典을 가벼이 여기고 隨意說法을 배척하였는데, 그는 三藏을 연구하고 敎學을 重視하고 스승의 설법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大曆10년에 示寂하니 조칙으로 당자곡 향엄사에 歸葬케 하다. 代宗이 大證國師라 시호하다.(조당집3, 송고승전9, 전등록5, 회요3, 회원2, 통재13)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4): 唐代 南岳下, 鄭州(하남성) 新鄭사람 성은 王씨. 至德2년(757) 大 山 大慧에게 출가하고, 大曆12년(777,30세) 嵩岳에 가서 受具하다. 처음에 性相, 三論 등을 공부하다가 玄機는 經論의 밖에 있다는 意旨를 생각하고, 馬祖門下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貞元11년(795) 池陽(안휘성)의 南泉山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王老師'라 칭하며 30년간 下山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주하니 學人이 항상 모여 성황을 이루다. 太和초년에 前太守 陸亘의 귀의를 받고, 문하에 趙州從 , 長沙景岑, 子湖利 등의 뛰어난 제자를 두다. 태화8년 12월 87세로 示寂. 師는 특히 학인을 接化하는 方便語가 뛰어나 '南泉斬猫, 南泉水 牛, 南泉牧丹'등의 공안이 있다.(송고승전11, 조당집16, 전등록8, 會要4, 회원3)
노자(老子) 노 자(老子, ):춘추시대 哲人, 道家의 시조. 성은 李 이름은 耳, 자는 伯陽 시호는 聃, 楚나라 苦縣(하남성) 鄕사람. 周나라 臧室의 柱史(臧書관리인)로 있을 때, 공자(30세)가 禮를 배웠다 한다.(孔子家語 觀周편) 뒤에 亂世를 피하여 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關令 尹喜가 道를 구하자 道 德 5千言을 전해주고([老子道德經]) 떠났다 한다. 그는 160여 세를 산 인물이라 하지만 임신후 80년을 母胎 속에서 사는 등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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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唐代 스님, 石頭希天의 法嗣. 그는 長安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馬祖에게 찾아가서 승려가 되다. 그 후 석두의 법을 잇다. 그가 洛陽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의 木佛을 꺼내 불을 지폈다.(丹霞燒佛) 그 때 院主왈,'그럴 수가 있느냐?'하니 師가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舍利를 얻으려고 하오' 원주,'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師왈,'사리가 안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하다. 末年에 그는 鄧州 丹霞山에 살다가 86세에 門人들에게 목욕하게 하고 갓쓰고 지팡이를 들고 나앉으며,'자 나는 간다. 신을 신켜다오'하고 신 한짝을 발에 걸친채 땅에 내려서는 순간 入寂하다.(宋傳燈錄11, 祖堂集4, 전등록14, 會要19, 會元5)
담징 [ 曇徵 ] 오경(五經)과 채화(彩畵)에 능했다. 610년(영양왕 21)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고행과 수도에 정진했다. 일본의 승려 호조[法定]와 함께 기거하면서 불법을 강론하고 채화 및 맷돌 ·종이 ·먹 등의 제조법을 가르쳤다.
그가 일본 호류사[法隆寺]에 그린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혔는데, 1948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사 5층탑 벽화의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대매법상(大梅法常,741-808,752-839) 대매법상(大梅法常,741-808,752-839): 唐代 南岳下, 襄陽(호북성)사람 성은 鄭씨, 幼年부터 荊州 玉泉寺에서 修學한 후 冠年에 受具하고 경론을 연구하다가 禪에 뜻을 두고는 馬祖下에서 깨달음을 얻다. 貞元12년(736) 四明남쪽 梅子眞의 은거처였던 大梅山에 주하다. 거주하기 40년 卽心卽佛, 非心非佛의 宗風을 선양하였으며 開城원년(836) 護聖寺를 짓고 6 700의 대중을 이끌다가 同四年 9월 88세로 示寂. 進士 江積이 비문을 짓다. 제자에 杭州天龍, 新羅迦智, 新羅忠彦 등이 있다.(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회요4, 회원3) 저서:[대매산상선사어록1권]
대주혜해(大珠慧海) 대주혜해(大珠慧海, ): 唐代 馬祖의 제자. 建州사람 성은 朱씨, 휘는 慧(또는 惠)海. 越州 大雲寺 道智에게 출가 受業하고 뒤에 마조의 법을 이었다.(일설에 馬祖의 首弟子) 一日有法師數人이 來謁曰,"擬伸一問이니다" 師曰,"大德이 經文分明한대 那得未是오" 僧無對라가 良久却問,"如何是大涅槃이닛고" 師曰,"不造生死業이니라" 曰,"如何是生死業이닛고" 師曰,"求大涅槃是生死業이며 捨垢取淨是生死業이며 有得有證是生死業이며 不脫對治門是生死業이니라" 曰,"云何則得解脫이닛고" 師曰,"本自無縛이니 不問求解오 直用直行是無等等이니라" 僧曰,"如禪師和尙者 實謂希有니다."하며 禮謝而去하니라.(전등록6, 대주혜해장) 이것으로 보아 百丈보다 夏臘이 많은 上首였으나 먼저 死去한 듯하다.(조당집14, 전등록6,28) 저서:[頓悟入道要門論 1권]
대지원조(大智元照,1048-1116) 대지원조(大智元照,1048-1116): 宋代 律宗스님, 餘杭錢唐(절강성 杭州府錢唐縣治)사람, 성은 唐씨. 자는 湛如, 湛然 별호는 安忍子 이름은 원조. 錢塘의 祥符寺 慧鑑律師에게 출가하여 律을 배우고, 또 神悟處謙을 따라 천태교학을 연구하다. 元豊원년(1078)에 雷峰의 慧才에게 受具하다. 항상 베옷을 입고 錫杖을 끌고 鉢盂를 들고 市街에서 걸식하며 禁戒를 嚴守하였다. 元符원년(1098) 개원사에 戒壇을 창립하고 만년에 西湖 靈芝의 崇福寺에서 30년을 주하다. 문하에 道俗이 항상 300인에 달하고 傳戒度僧이 60여회에 이른다. 일찌기 淨土敎를 가벼이 여겼는데 후에 重病을 얻어 천태의 [十疑論]을 읽고는 정토를 篤信하다. 宋政和 6년 9월 1일 제자에게 觀經과 普賢行願品을 외우게 하고 앉아서 入寂. 나이 69세.(樂邦文類2,3,5 통기29,46 통재29, 계고략4, 淨土聖賢錄3)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송대 임제종 양기파, 宣州(安徽省) 寧國縣사람, 성은 奚씨 자는 曇晦 호는 妙喜, 雲門. 12세에 鄕校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세간공부가 어찌 出世間法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16세에 東山 慧雲院에서 득도하고 自力으로 雲門, 睦州등의 說話를 熟讀하였다. 출가초기에 曹洞門下에서 禪旨參究하고 政和원년(1111) 徑山의 湛堂文準(眞淨克文의 法嗣)회하에서 공부하고 覺範慧洪(1071-1128), 張商英 등을 拜謁하다. 湛堂의 遺託으로 悟克勤에게 나아가 증오하다. 승상 呂舜徒의 주청으로 '佛日大師'의 호를 받고, 圓悟가 蜀땅으로 돌아간 후 金과의 전란을 피하여 海昏(강서성)의 雲門庵에 이주하다. 사는 특히 조동의 默照禪에 대하여 '公案禪'을 鼓吹하며 徑山의 能仁禪院에서 교화하니 학인이 항상 2천을 헤아려 '臨濟의 再興'이라 칭하다. 그러나 戰亂이 奸相 秦檜 등에 의해 和約으로 체결되자 주전론자인 張九成黨으로 몰려 衣牒을 빼앗기고 衡州(호남성)로 유배당하며 10여년을 고생하는 동안 [正法眼藏 6권]을 지었다. 그뒤 사면되어 阿育王寺에 주하며 天童山의 宏智와 道交하였다. 1158년 다시 경산에 주하면서 孝宗帝로부터 '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고, 남송 隆興원년 75세로 示寂하다.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남긴 臨終偈에,'生也只恁 死也只恁 有偈與無偈 是甚 熱大'라 하다. 시호는 普覺. 그는 특히 五祖演에서 비롯한 公案禪(看話禪)을 확립하여 천동정각과 當代 禪界의 雙璧을 이루었다.(大慧年譜, 회요17, 보등록15, 회원19, 통재20,속전등록27, 속선림승보전6, 명고승전5) 저서:[大慧語錄 12권] [대혜법어 3권] [대혜보설 5권][大慧宗門武庫] 등.
대홍보은(大洪報恩,1058-1111) 대홍보은(大洪報恩,1058-1111): 송대스님, 曹洞宗 投子義靑의 法嗣. 黎陽(안휘성)사람, 성은 劉씨, 대홍산에 오래 주하므로 호가 되다. 弱冠에 官界에 나아갔다가 세속을 싫어하여 조정에 청하여 출가하다. 舒州 투자산의 義靑에 참예하여 心要를 깨닫고,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찾은 후 丞相 公縝의 청으로 西京(하남성 洛陽) 少林寺에서 開法하다. 뒤에 隨州(호북성 德安府) 大洪山 崇寧保壽禪院으로 옮겨 주하다. 본래 律院이던 것을 禪院으로 고쳐서 曹洞家風을 擧揚하다. 無盡居士 張商英과 친하다가 政和원년 示寂하다. 세수 54, 승납 32.(湖北金石志10 수주대홍산시방숭녕은선사塔銘, 회요28, 회원14, 보등록3, 속전등록10) 저서:[曹洞宗派錄] [受菩提心戒文] [落髮受戒儀文](不傳)
덕산선감(德山宣鑑,780-865) 덕산선감(德山宣鑑,780-865): 당대 靑原下, 劍南(사천성)사람 성은 周씨. 律과 性相을 공부하고 [금강경]에 정통하여 '周金剛'이라 칭하다. 南方禪을 論破하다가 禪에 뜻을 두고 龍潭崇信(天皇道悟의 제자)을 참예하여(龍潭紙燭) 법을 잇다. 다시 山靈祐의 지시로 陽(호남성)에서 30년을 주하다가, 武宗의 破佛을 만나 獨浮山의 石室에서 難을 피하다. 大中初에 興佛時 武陵太守 薛延望의 청으로 德山에 주하며 宗風을 떨치다. 咸通6년 12월 86세로 示寂하다. 시호는 見性大師.(송고승전12, 조당집5, 전등록15, 속등록1, 회요20)
도선(道宣,596-667) 도 선(道宣,596-667): 중국 南山律宗의 始祖, 丹徒사람(혹은 長城人) 성은 錢씨. 16세에 출가하여 智首律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律典을 배우다. 武德7년(624)에 終南山 倣掌谷에 들어가 白泉寺를 짓고 계율을 嚴守하며 修禪하다. 貞觀19년(645)玄 이 귀국하여 弘福寺에서 譯經을 시작하자 勘文을 맡아 수백권의 律部와 傳記를 쓰다. 그가 西明寺에 住할 때에 밤길을 가다가 失足하였으나 다치지 않았는데 其實은 天童이 화상을 옹호한 것이라, '天童이 曰,"某非常人 卽毘沙門天王之子那 也 護法之故 擁護和尙 時之久矣"라 하다. 특히 四分律宗을 이루어 南山律宗을 세우다. 乾封2년(667) 10월에 72세로 입적하니 唐高宗이 澄照라 諡號하다.(宋高僧傳14) 저서:[속고승전30권] [廣弘明集] [大唐內典錄] [四分律行事抄]등 20여부.
도솔종열(兜率從悅,1044-1091) 도솔종열(兜率從悅,1044-1091): 宋代 임제종 황룡파, 虔州(강서성)사람 성은 熊씨. 15세에 普圓院 德崇上人에 의지하여 출가하고 이듬해에 受具하다. 처음 雲蓋守智의 지시를 받다가 다음에 眞淨克文을 참예하고 鹿苑寺에서 세상에 알려지다. 가끔 石霜楚圓에게 得法한 淸素의 提 함에 開發되어 그의 인가를 받고 그의 지시로 眞淨을 찾아가 법을 잇고, 隆興府의 兜率寺에 주하며 大法을 宣揚하다. 無盡居士 張商英이 그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元祐6년 11월 48세로 시적하다. 뒤에 徽宗 宣和3년(1121) 장상영의 주청에 의해 眞寂禪師라 시호하다.(속등록23, 회요15, 보등록7, 회원17, 통재19) 저서:[兜率悅禪師語要 1권]
동진도안(釋道安,314-385) 동진도안(釋道安,314-385): 중국스님 常山扶柳人, 성은 衛씨. 儒學을 숭상하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2세에 출가하다. 용모가 검고 못생겨서 田舍에 驅役하기 3년만에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하니 師가 辯意經을 주자 밭에서 일하며 쉬는 여가에 책을 보더니 저녁에 모두 暗誦하거늘, 다시 成具光明經을 주니 모두외우자 스승이 크게 놀라 剃髮을 허락하다. 구족계를 받고 遊學에 나서 城中寺의 佛圖澄을 스승으로 모시고 諸方을 다니면서 經律을 구하여 法濟,支曇에게 배우다. 또 同學인 法汰, 僧先, 道護와 교류하다. 東晋永和 5년(349) 華林園에 들어가고 후에 慧遠등 5백여인을 이끌고 襄陽에 이르러 불법을 홍포하니 白馬寺가 좁아서 檀溪寺를 새로 짓다. 師가 양양에 住하는 15년동안 매년 放光般若經을 강의하다. 379년 前秦 堅이 공격하자 師는 習鑿齒와 함께 長安으로 돌아오다. 城內의 五重寺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 강론하다.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1.經典을 序分,正宗分,流通分의 3과목으로 해석하여 바른 義解에 힘쓰고, 2.승려의 성을 釋씨로 통일한 것, 3.승려의 생활규범을 제정한 것 등이다. 秦建元 21년 72세로 入寂하다.(出三藏記集15, 名僧傳抄, 高僧傳5, 大智度論24, 晋書列傳52, 續高僧傳9 29, 法苑珠林13) 저서:[般若折疑略] [大十二門註] [陰持入註] [綜理衆經錄] [西域志20권]
도안(北周道安, -600) 도안(北周道安, -600): 北周代 스님, 성은 姚씨 馮翊胡城사람. 일정한 스승이 없이 大德이 계시단 말만 들으면 찾아가서 배우다. 천자가 勅命으로 불렀으나 安答曰, '陛下爲民故出 貧道爲法不出'이라 하니 帝가 듣고 '彈指嘆善久之'하더라. 獨子이므로 母를 大中興寺에 모시고 진지를 손수 지어드리고 난 뒤에 講하였다 한다. 隋文帝 開皇말년에 入寂.(속고승전23)
도연명(陶淵明,365-427) 도연명(陶淵明,365-427):진대 시인, 陽사람 이름은 潛, 자는 淵明 호는 五柳先生. 405년 彭澤의 令이 되었으나 80여일 후에 [歸去來辭]를 남겨두고 歸鄕하다. 그의 詩는 自然味를 노래한 것이 많으며, 敍景詩가 이 때부터 형성됨. 저서:[陶彭澤集]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 唐代스님 筠州會稽사람, 성은 兪씨. 靑原下 4세 雲巖曇晟의 法嗣, 동산은 호 휘는 良价(혹은 介), 曹洞宗의 開祖.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般若心經을 외우다가 '無眼耳鼻舌身意'에 이르러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이상히 생각하였다. 五洩山의 靈默에게 중이 되고 21세에 嵩山에 가서 受具하다. 여러 곳을 다니다가 南泉普願을 찾아 공부하고 山靈祐에게 가서 '無情說法話'를 참구하여 契合하다. 위산의 指示로 雲巖曇晟에게 가서 前의 因緣을 들어 더욱 정진하다가 흐르는 물 뒤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豁然히 깨달아 雲巖의 법을 잇다. 大中(847-859)末에 新豊山에 있다가 筠州 洞山菩提院(혹 普利院)으로 옮겨 가풍을 드날렸다. 咸通10년 3월 朔旦에 剃髮披衣를 명하고 鳴鐘하고 奄然히 示寂하니, 때에 제자들이 悲痛해하자 師가 홀연히 눈을 열어 이르대,'夫出家之人 心不依物 是眞修行 勞生息死 於悲何有 淪喪於情 太 着乎'라 하고는 愚癡齋를 지내게 하고 재가 끝나는 날(3월 8일) 입적하였다. 나이 63, 시호는 悟本大師. 門下에 雲居道膺, 曹山本寂, 소산광인, 華嚴休靜 등이 있다.(송고승전12, 전등록15, 회요20, 통기42, 통재17) 저서:[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 [寶鏡三昧歌] [玄中銘] [新豊吟] 등.
두순(杜順,557-640) 두 순(杜順,557-640):당대 화엄종初祖. 雍州萬年사람, 속성은 杜씨 휘는 法順. 당태종이 귀의하여 帝心尊者라 賜號함. 항상 '아미타불'을 念하라고 권하고 후세인이 '文殊의 化身'이라 稱함 저서:[華嚴法界觀門] [五敎止觀]
라후라(Rahula)
密行第一. 라훌라 존자는 부처님의 친아들이다. 그는 15세 때 부처님이 카필라국으로 설법하러 가셨을 때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다. 라후라 존자는 사리불을 화상으로 목건련을 아사리로 삼아 출가함으로써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동 제자품에는 "禁戒를 깨뜨리지 않 고 誦讀을 나태하게 하지 않음은 라후라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마라난타(摩羅難陀)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인도의 승려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84년(침류왕 1) 동진(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왔다. 왕이 궁궐 안에 머무르게 하고 그의 말에 따라 불사(佛事)를 봉행하였다. 이듬해에 한산(漢山)에 백제 최초의 절을 짓고 10명을 출가시켜 득도(得度)하게 하였다. 송나라 초에 찬영이 저술한 선종사서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난타(難陀)라는 승려에 대한 기록이 있어 그가 마라난타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고려 때 승려 각훈(覺訓)이 한국 고승들의 전기를 모아 기록한 선종사서인 《해동고승전》에는 활동한 연대가 달라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마명(馬鳴,아슈바고샤, Asvaghoa) 마명(馬鳴 ): 梵 Asvaghosa의 음역, 性宗의 始祖. 불멸후 600년경(2세기경)의 大乘論師. 脇尊者의 제자. 釋摩訶衍論에는 6인의 마명이 있었다 함. 저서:[대승기신론 1권] [佛所行讚 5권].
----------이하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범명(梵名) 아슈바고샤(Asvaghoa). 쿠샨 왕조 제3대 카니시카제(帝)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북인도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초기 대승불교 학자로, 불교를 소재로 한 산스크리트의 미문체 문학을 창작하여 인도 문학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carita》과 《손타리난타시(孫陀利難陀詩) Saundarnanda Kvya》는 그의 풍부한 시재를 가장 잘 나타낸 걸작이다. 《불소행찬》은 불타의 생애와 교의를 격조 높게 읊은 불타 서사시이며, 《손타리난타시》는 아난다(阿難陀)가 아름다운 아내 순다리(Sundar)에의 애집(愛執)을 버리고 성자의 경계에 들어 대승불교적인 사도가 되기까지의 경위를 유려한 시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 《대장엄논경(大莊嚴論經) Strlakra》은 경건한 전설을 집록(集錄)하여 이를 운문 및 산문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밖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Mahynaraddhotpda》 《금강침론(金剛針論) Vajrasc》 《건추범찬(椎梵讚) Gastotragth》도 그의 저작으로 전하여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야부인(摩耶夫人)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 말리어나 산스크리트로는 'Maya' 또는 'Mahamaya'로 쓴다. 마하마야(摩訶摩耶)는 큰〔大〕마야라는 뜻으로 마야에 대한 존칭이다. 마야부인은 젊어서 자매인 마하파자파티(Maha Pajapati)와 함께 가비라바소도〔迦毘羅婆蘇都〕의 정반왕(淨飯王)과 결혼하여 싯달타 태자를 낳았다. 마야부인은 싯달타 태자의 어머니다운 덕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5계(五戒)를 범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회임했을 때 흰코끼리로 변한 보살이 흰 연꽃을 가지고 왕비의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또 회임 중에는 4수호신이 돌보아주는 가운데 지냈는데, 태내의 아이가 밖에서도 투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10개월 후 출산 때가 되어 친정 콜리성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보리수 나뭇가지를 잡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낳았다. 마야부인은 싯달타 태자를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셔서 도솔천(兜率天)에 남자로 환생하였다고 한다.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 당대스님 남악회양의 제자(一說에 신라승 無相의 제자라 함), 성은 馬씨, 자는 江西, 휘는 도일 호는 마조. 漢州(四川省)什 사람. 용모가 기이하여 牛行虎視며 혀가 길고 발에 二輪文이 있었다 함. 어려서 九流六學을 연구하고 근처의 羅漢寺 資州處寂에게 출가하다. 뒤에 南岳에서 六祖의 제자 懷讓이 수도한다는 말을 듣고 相見하여 "南岳磨 "의 話에 의해 心印을 얻었다. 天寶원년(742) 建陽 佛蹟巖에서 開法한 후 大曆4년(769)에는 鍾陵(江西省) 開元寺에 주하며 宗風을 宣揚하다. 만년에 潭(靖安縣) 石門山 寶峰寺에 住하다가 貞元4년 2월 입적하다. 세수 80세. 문인 權德輿가 '塔銘幷序'를 짓고 石門山에 建塔하다. 시호는 大寂선사(헌종), 祖印(宋휘종)이라 하다. 그의 가풍은 '平常心是道''卽心是佛'을 표방하는 大機大用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江西馬祖와 湖南石頭를 禪界의 쌍벽이라 함. 문하에 百丈懷海, 西堂智藏, 南泉普願, 官齊安, 大梅法常등이 뛰어남.(全唐文501, 조당집14, 송고승전10, 전등록6, 계고략3)
마하가전연(Mahakatyana) 論議第一. 迦 延子라고도 한다. 서인도 아반티국의 왕족계급 출신으로 국왕의 명을 받 아 부처님을 영접하러 갔다가 불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그는 불법에 귀의한 뒤 뛰어난 언 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음으로써 논의제일이라고 칭송받았다. 부처님 당시는 수많은 종교 사상이 군웅할거 하던 시대였으므로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논리 정연한 설법을 통해서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음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경 전 곳곳에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다른 종교인들과 토론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 다. 가전연 존자는 바로 이들 외도와의 교리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었으며 뛰어난 말솜씨 로 널리 불법을 폈다고 전한다.
마하목건련(Mahamaudgalyayana) 神通第一. 마가다국 왕사성 밖의 콜리타촌 사람으로 바라문족 출신이다. 사리불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죽림원에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가장 뛰어났던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였다. 어느날 목건련 존자가 천안통으로 지옥을 보니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고통받고 있 는 모습을 발견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목건련 존자는 바로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어머니 를 구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서 어머니를 천도했다고 한다. 同 제자품에는 "神足 이 輕擧하여 十方에 飛到함은 대목건련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사리불과 대목건련은 10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上道의 제자였지만 부처님보다 먼저 입 멸하였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의 교단사는 자연 그 다음 서열의 가섭에게 돌아갔다.
만해 한용운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 ·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만화원오(萬化圓悟,1850-1919) 만화원오(萬化圓悟,1850-1919): 조선말기스님 법명은 원오 또 寬俊, 만화는 호.본명은 鄭雙龍, 강원도 간성 용포리사람(또는 경북 봉화). 13세에 금강산 乾鳳寺 錦玹長老에게 출가하여 太虛에게 受具하다. 고종9년(1872) 釋王寺 奉香官으로 국태민안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다. 한 때 계룡산 東鶴寺에 있으면서 鏡虛에게 경전을 가르치다가 1874년 僧統이 되고 1878년 그가 전등사에 주할 때 건봉사에 화재로 3,183칸의 건물이 全燒되자 중창불사의 都化主가 되어 불사에 전념하며 華嚴法會를 열어 후학을 지도하다. 1901년 조정에서 '扶宗樹敎 傳佛心印 大覺登階尊者'의 호를 내려 五臺山 寂滅寶宮을 수호하게 하다. 또 八道僧風糾正院長에 임명하고, 뒤에 '念佛萬日會'를 열었으며 명성황후의 신임이 두터워 弑害당한 후 皇后의 冥福을 빌었다. 1910년 합방이 되자 名山을 순례하면서 한때 頭輪山 大屯寺에 주하다가 1919년 건봉사에 돌아와 이 해 9월 세수 70세로 입적하다. 石顚漢永이 碑文을 짓고 尹喜求가 글을 써서 건봉사에 세우다.(건봉사 본말사지)
맹자(孟子,孟軻,372B.C.-289B.C) 맹 자(孟子,孟軻,372B.C.-289B.C): 戰國時代 哲人, 산동성 雛縣 출신 자는 子輿,子車. 어려서 어머니의 三遷之敎, 斷機之訓으로 성장하여 孔子의 仁의 사상을 발전시켜 '仁 義 禮 智'의 四德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性善說'을 주장하다. 齊, 梁 등의 諸侯에게 王道를 설파하고 仁義의 정치를 권하였다. 공자와 더불어 유학의 정통으로 추앙됨. 周 王 26년 11월에 84세로 卒.(대백과사전2 p.814- ) 저서:[맹자 7편]
명교계숭(明敎契嵩,1007-1072) 명교계숭(明敎契嵩,1007-1072): 宋代 雲門宗스님, 성은 李씨 藤州 津縣사람 자는 仲靈, 자호는 潛子. 7세에 출가하여 13세에 중이 되고 이듬해에 受具하다. 뒤에 筠州 洞山曉聰에게 禪法을 받다. 문장에 능하여 [原敎孝論]을 지어 儒佛이 一貫하다는 뜻을 밝혀 韓愈의 排佛을 반박하였다. [禪宗定祖圖] [傳法正宗記] [傳法正宗論]을 지어 선종 28조가 別傳한 계통을 論定하다. 그리하여 宋仁宗의 命으로 대장경에 入藏하고, 嘉祐4년 紫袈裟와 '明敎大師'라는 호를 받다. 熙寧5년 6월 杭州靈隱寺에서 66세로 입적.(전법정종기1, 속등록5, 통재28, 계교략4) 저서:[선종정조도] [전법정종기] [전법정종론] [輔敎篇3권] [ 津文集19권] [治平集] 등.
모자(牟子) 모자(牟子): 후한대 桓帝(147-166)때 安丘사람, 성은 牟 이름은 融, 자는 子優. 交州에서 儒 老學을 연구, 蒼梧의 太守를 지내다. 뒤에 불교를 연구하여 [理惑論 37편]과 [牟子]란 책을 지어 불교를 推美하다.(釋門正統4)
묘봉지선(妙峰之善,1152-1235) 묘봉지선(妙峰之善,1152-1235): 南宋代 임제종 大慧派, 吳興(절강성)사람 성은 劉씨. 13세에 출가하여 德淸의 齊政院에서 受業하다. 처음 敎學을 하다가 뒤에 諸方의 선지식을 참예하여 佛照德光(1121-1203)의 法을 잇다. 康廬에 돌아가 妙高峰의 山麓에서 面壁10년을 하니 時人이 妙峰禪師라 존칭하다. 뒤에 蘇州 萬壽寺, 常州 華藏寺, 杭州 靈隱寺에 주하다. 端平2년 9월 세수 84세로 示寂하니 鄭淸之가 塔銘을 짓다.(속전등록35, 五燈嚴統20, 선학사전 p.441b- )
무착(無着,Asanga,310-390?) 무착(無着,Asanga,310-390?): 불멸후 1000년경 사람, 世親의 형, 師子覺은 아우. 처음 소승化地部에 출가하여 빈두라를 따라 小乘空觀을 닦다가 뒤에 대승에 몰입. 아유사 교상미에서 法相의 교리를 선양, 法相宗의 시조가 되다. 75세에 왕사성에서 입적. 저서:[顯揚聖敎論 20권] [攝大乘論 3권] [瑜伽師地論 100권]등.
바사익(波斯匿, 범Prasenajit) 바사익(波斯匿, 범Prasenajit): 和光, 月光 또 신역에서는 勝軍이라 번역. 梵授王의 아들이며 佛誕日에 태어나다. 왕비는 末利, 딸은 승만.
반두달다(槃頭達多) 반두달다(槃頭達多, ): 賓國스님, 說一切有部의 제48조, 계빈국왕의 從弟. 羅什에게 소승을 가르쳐준 스승. 날마다 千個의 偈頌을 외웠다 함.(出三藏記集12 薩婆多部記, 同卷14)
반산보적(盤山寶積) 반산보적(盤山寶積, ): 마조도일의 제자, 시호 凝寂.(전등록 권10 p.186)
방온(龐蘊, -808?) 방 온(龐蘊, -808?): 唐代 거사, 마조의 제자 자는 道玄, '龐居士'라 호칭한다. 衡陽(호남성)사람. 대대로 儒業을 해오다가 塵勞를 싫어하여 襄陽(호북성)으로 移住하여 竹籠을 팔아 생계를 꾸리다. 貞元初에 石頭希遷(700-790)을 참예하여 如來禪을 깨닫고(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神通 妙用 運水及搬柴), 후에 마조를 參하고 祖師禪을 깨닫고는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라 하다. 그뒤 당시의 丹霞天然, 大梅, 藥山, 仰山 등과 問答을 주고 받았다. 그는 일생을 거사로 지냈지만 獨自의 悟境을 熟成하여 震丹의 維摩居士라 칭한다.(有男不婚 有女不嫁 大家團欒頭 共說無生話) 그가 죽으려 할 때에 딸 靈照에게 午時가 되거든 말하라 일렀으나, 영조 '지금 오시인데 日食을 합니다'하니, 거사가 문밖에 나가보니 그 사이에 딸이 평상에 올라앉아 먼저 죽어버렸다. 이를 보고 거사가 웃으며,'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하고 7일 후에 죽다. 臨終때에 양주목사 于 이 와서 문안하고 法要를 물음에 居士曰,'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 好住世間 猶如影響' 이라는 말을 마치고 公의 무릎을 베고 입적. 于 은 [龐居士語錄 3권]을 편집하다.(조당집15, 전등록8, 釋氏通鑑9, 佛祖綱目32, 방거사어록, 居士分燈錄上
배휴(裵休,797-870) 배휴(裵休,797-870): 唐代 관리 거사, 河東(산서성) 聞喜사람, 자는 美 또는 公美, 河東大士라 칭하다. 당의 관리인데 居士로 圭峰에게 華嚴을 배우고, 또 黃檗希運을 任地의 龍興寺, 開元寺에 勸住케 하고 조석으로 법을 물어 禪敎에 밝았다. [勸發菩提心]을 짓고 황벽의 語錄인 [傳心法要]를 集錄하다. 또 圭峰의 [禪源諸詮集都序] 등 모든 저술에 序文을 쓰다. 벼슬이 兵部侍郞, 中書門下章事, 宣武軍節度使 등을 역임하다. 咸通1년 74세로 歸寂하다.(전등록12, 회원4, 唐書182, 唐書177, 琅 代醉編30)
백거이(白居易,772-846) 백거이(白居易,772-846): 唐代시인, 太原사람 자는 樂天, 호는 香山거사. 벼슬이 刑部尙書에 이름. 그의 文章은 大衆的이며 精切하고 平易하여 元 (779-831)과 함께 '元白體'의 독특한 詩風을 이루다. 대표적 작품으로 [長恨歌] [琵琶行] 등은 文士, 서민들간에 널리 愛誦되었다. 중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高僧을 親近하고 香山 佛光如滿선사(馬祖의 제자)에게 法을 받다. 뒤에 東都念佛結社에 참예하여 西方往生을 염원하다. 唐會昌6년 나이 75세로 卒, 시호는 文. 저서:[白氏長慶集 75권] [六帖 30권]
백암성총(栢庵性聰,1631-1700) 백암성총(栢庵性聰,1631-1700): 조선중엽스님, 성은 李씨 南原사람. 翠微守初의 法嗣. 13세에 淳昌鷲岩에게 중이 되고 18세에 翠微에게 法을 받다. 30세 때부터 松廣寺, 河東 雙磎寺에 住하면서 詩를 잘하였다 한다. 숙종7년(1681)에 큰배가 荏子島에 와 닿으매 사람은 없고 책만 가득했다. 明의 平林葉거사가 校刊한 [華嚴經疏 ] [大明法數] [會玄記] [金剛經刊定記] [起信論筆削記]등 190권을 발견,15년 동안에 5千板을 새겨서 雙磎寺에 珍藏. 숙종26년 쌍계사 神興庵에서 72세로 入寂. 저서:[註解緇門警訓 3권] [大乘起信論疏筆削記 4권] [栢庵淨土讚 1권] [四經持驗記 4권] [栢庵集 2권]
백양법순(白楊法順,1061-1128) 백양법순(白楊法順,1061-1128): 宋代, 錦州사람 성은 文씨, 이름은法順. 佛眼淸遠(임제종양기파,1067-1120)이 법문할 때 傅大士의 心王銘에 있는,"水中 味 色裡膠靑 決定是有 不見其形"에서 깨닫다.
백용성 본관 수원(水原). 법명(法名) 진종(辰鍾). 속명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전북 남원(南原) 출생. 16세 때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名刹)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3 ·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저서로 《수심론(修心論)》 《귀원정종(歸源正宗)》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등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백장도상(百丈道常 또는 道恒,?-991 백장도상(百丈道常 또는 道恒,?-991): 송대스님 法眼宗. 처음에 洪州 百丈山으로 출가하다. 照明에게 중이 되고 淸凉文益(885-958)을 참예하고 법을 잇다. 후에 청에 의하여 백장산에 주하며 크게 學人을 接化하다. 淳化2년 示寂.(전등록25, 회요27, 회원10)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혹은 720-814)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 혹은 720-814): 당대스님 馬祖의 法嗣, 福州長樂人 성은 王씨, 諡號는 大智(821), 覺照(1108), 弘宗妙行(1335). 20세에 西山慧照에게 출가하여 南岳의 法朝律師에게 受具하고 廬江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 馬祖道一에게 참예하여 印可받고 師에 귀의하는 道俗들이 힘을 합쳐 洪州 新吳縣의 大雄山에 절을 짓다. 뒤에 百丈山 大智壽聖禪寺라고 칭하고 회해를 開祖로 하여 禪風을 大振하다. 그의 [백장청규]는 禪林淸規의 효시로 이후로 禪을 더욱 中國的인 風土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게 하여 그를 '叢林의 開闢祖'라 하다. 唐元和 9년 1월 입적하니 세수 66(송고승전,전등록에서는 95세라 하다). 제자로 山靈祐, 黃檗希運, 長慶大安등이 뛰어났다.(全唐文446, 백장탑명, 조당집14, 송고승전10, 전등록6, 전법정종기7) 저서:[百丈淸規1권] [백장회해선사語要2권] [어록1권] [百丈廣錄1권]등.
범촉공(范蜀公, -1088) 범촉공(范蜀公, -1088): 宋代관리 학자, 華陽사람 자는 景仁, 이름은 鎭. 仁宗代(1023-1063)에 知諫院, 翰林學士를 지내다.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뒤에 철종이 端明殿學士로 불렀으나 굳이 나가지 않다. 元祐5년 卒하니 蜀郡公에 封하다. 시호는 忠文, 저서에 [文集] [東齋記事] 등이 있다.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唐末 五大 法眼宗 開祖, 餘杭사람 성은 魯씨. 7세에 智通院 全偉를 따라 출가하여 弱齡에 受具하다. 뒤에 長慶慧稜에게 참예하고 다시 地藏院 羅漢桂琛(현사사비의 제자,867-928)에게 참배하여 법을 잇다. 처음 臨川州 崇壽院에 주하다가 南唐主 徐璟의 請으로 金陵 報恩禪院에 들어가다. 淨慧선사의 호를 받고 후에 淸凉寺로 옮겨 禪風을 드날리다. 後周 顯德5년 윤7월 앉아서 示寂하다. 그의 제자에 德韶, 文遂, 道恒 등 63인이 있다.(송고승전13, 전등록24, 선림승보전4, 종문통요속집20, 회원10, 통재25) 저서:[宗門十規論 1권] [어록 1권]
법현(法顯,) 법현(法顯,): 중국스님, 平陽武陽人, 성은 씨. 3살때에 승려가 되어 경전을 연구하다가 경율이 具備하지 못한 점을 느끼고, 東晋隆安3년(399)에 同學인 慧景, 道整, 慧應, 慧위 등과 함께 장안을 출발 서역으로 향했다가 弗樓沙에서 同行과 헤어져 홀로 펀잡을 지나 佛蹟을 巡禮하면서 경 율을 쓰기에 盡力하다. 마갈타국에 3년간 머물며 [摩訶僧祗律] [有部律] [泥洹經] [雜阿毘曇心論] 등을 구하여 연구하고, 나란타대학에서 2년간 修學하고 錫蘭島(Ceylon,실론)에 건너가 2년간 [五分律] [長 雜阿含經]등을 얻어 가지고 歸還하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海路로 師子國을 거쳐 東晋義熙9년(413) 靑州에 돌아오다. 그 뒤부터 西域巡禮僧이 많아지면서 경전의 傳譯에 많은 공헌을 하다. 귀국후 道場寺에서 [마하승지율] [方等經] [니원경] [잡아비담심론] 등을 역출하고 뒤에 荊州의 辛寺에서 86세로 입적하다.(고승전3, 고승법현전) 저서:[天竺行記 1권(佛國記,또는 법현전)]
보령인용(保寧仁勇) 보령인용(保寧仁勇, ): 宋代스님, 임제종 楊岐派. 성은 竺씨, 浙江省 四明사람. 처음에 天台宗을 연구하다가 설두중현을 參謁하여 禪을 묻다. 楊岐方會가 雲蓋山에서 법을 宣揚함을 듣고 찾아가서 바로 禪旨를 밝히고 法嗣가 되다. 方會寂後에 白雲守端과 함께 사방을 遊歷하다가 金陵 保寧寺에 주하면서 禪風을 진작하였다. [佛祖統紀]권45에,'神宗元豊7년(1084)에 荊公 王安石(1021-1086)이 請以江寧府圍廬爲僧寺 賜額普(혹保)寧禪院'이라 하다. 제자로 壽聖智淵,壽聖楚文,寶積宗映,景福日余 등이 있다.(속등록14, 會要15, 普燈錄4, 회원19) 저서:[保寧勇禪師語錄1권]
보리달마(菩提達磨, ?-536) 보리달마(菩提達磨,?-528, ?-495, 346-495, ?-536): 중국선종의 초조, 서천제28조 남인도 향지국왕의 제3자, 본명은 菩提多羅. 대개 학자들은 역사상의 인물로는 達摩로, 조사로는 達磨로 표기한다. 처음 般若多羅를 40년동안 섬기다가 법을 잇고 法化를 떨쳐 당시 성행하던 小乘六種禪觀을 굴복시키다. 뒤에 조카 異見王을 교화하고 배를 타고 중국에 梁普通1년(520) 廣州 南海郡에 이르다. 그 해 10월에 金陵에서 梁武帝와 問答하고는 낙양의 嵩山少林寺에 주하며 9년을 面壁하다. 뒤에 伊落에 있던 神光이 달마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斷臂求法하자 시봉을 허락하다. 북위 永安1년 10월 天聖寺에서 입적. 熊耳山에 매장하였는데 東魏의 사신 宋雲이 嶺에서 隻履를 들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나고는 귀국하여 관을 열어보니 隻履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무제가 친히 碑銘을 짓고 唐代宗은 '圓覺大師'라 시호하다. 또 昭明太子祭文에는 聖胄大師라고 하다. * 달마의 전기는 從來로 [傳燈錄 보리달마장]을 근거로 하였으나 近年의 연구는 그 이전의 자료를 중심으로 傳記를 구성하는 경향이다. 그 자료로는 [洛陽伽藍記(547)] [曇林序二種入(600년경)] [續고승전(645)] [傳法寶紀(712경)] [楞伽師資記(713-716년경)] [歷代法寶記(774경)] [寶林傳(801)] [祖堂集(952)] 등이 있다. 또 양무제가 達摩傳에 등장한 것은 神會의 [南宗定是非論]이 처음이며, 無功德의 문답도 [조당집]에 처음 기술되다. 또 혜가가 스스로 雪中斷臂한 故事도 [능가사자기]에 처음 보인다. [낙양가람기]에서는 달마가 150세 경에 洛陽 永寧寺의 가람이 華美함을 讚歎하고 終日 '南無'라고 부르며 合掌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 遷化한 해에 대해서 [보림전]은 後魏 孝明帝 丙辰(536) 12월로 쓰고 있다. 달마의 저술과 사상은 [二種入]에 보이는 '四如是와 二入四行'이 대표적이며 二入은 理入,行入 四行이란 行入을 四分한 것이다. 四如是는 '如是安心 如是發行 如是順物 如是方便'을 말한다. 그의 禪法의 心要는 [四券楞伽]에 의하는데 당시의 경론연구태도를 배척하고 '空無所得의 실천적인 선사상'을 鼓吹하고 있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등의 熟語들은 육조의 제자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며, 그 사상의 萌芽는 대개 달마의 시대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公案으로 達摩安心(무문관41, 전등록3), 達摩廓然無聖(또는 達摩不識:종용록2, 벽암록1)(낙양가람기, 보림전8, 능가사자기, 역대법보기, 전법보기, 神會語錄, 속고승전16, 조당집2, 전등록3, 全唐文998, 神會傳4) 저서:[二種入] [心經頌] [破相論,또는 관심론] [血脈論] [少室六門], 또 돈황출토본으로 [이입사행론] [雜錄] [絶觀論]등.{선학대사전 p.831 c- }
보우[普愚 ] 일명 보허(普虛). 본관 홍주(洪州). 호 태고(太古). 시호 원증(圓證). 탑호(塔號) 보월승공(寶月昇空). 속성 홍(洪). 13세에 출가, 양주군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에게서 불경을 배우고 가지산(迦智山) 하총림(下叢林)에서 도를 닦았다.
1325년(충숙왕 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용문산(龍門山) 상원암(上院庵)과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한 끝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의 동쪽에 절을 짓고 태고사(太古寺)라고 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계승, 임제종(臨濟宗)을 열어 그 시조가 되었다.
1348년에 귀국, 용문산의 소설사(小雪寺)에서 불도를 닦았다. 공민왕이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짓자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에 머물다가 신돈(辛旽)의 횡포가 심해지자 소설사로 돌아갔다. 신돈이 죽은 뒤 국사(國師)가 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영원사(瑩源寺)에 있다가 소설사에 가서 입적하였다. 북한산에 보월승공의 탑비가 있다.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태고유음(太古遺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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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운의통(寶雲義通,927-988) 보운의통(寶雲義通,927-988): 高麗代 天台宗스님, 자는 惟遠 성은 尹씨. 얼굴이 특이하여 정수리에 肉 가 있고 眉毫宛轉하여 5-6寸이나 되다. 어려서 龜山院 宗爲에게 출가, 受具하고 華嚴經과 起信論을 배워 이름이 나다. 乾祐(948-950)년간에 漢土에 來遊하여 天台山 雲居寺에 가서 德韶국사를 배알하고 螺溪義寂(천태종 중흥조,919-987)에게 一心三觀의 法을 받고 천태종 第12祖가 되다.(山家派) 一日에 同學에 작별을 고하고 本國에 돌아오려고 四明을 거쳐 海舶에 오르려 하니, 군수 錢惟治가 예를 갖추어 法門을 청하며 挽留하니 그에게 菩薩戒를 주고 머무르다. 968년 漕使 顧承徽가 집을 내놓아 傳敎院을 만들어 師를 주하게 하다. 太平興國7년(982) 宋太宗이 寶雲寺라 하고 寶雲尊者라 賜號하다. 그는 항상 사람을 대할 때마다 " 고향사람"이라 하였는데,'盖以淨土是故鄕 諸人皆其鄕中歸'라고 답하였다. 많은 제자중에 法智, 知禮, 遵式 등이 뛰어나다. 端拱1년 62세로 입적.(高麗國興國寺塔記, 四明敎行錄9, 통기8 13, 계고략4) 저서:[觀經疏記] [光明玄贊釋]등
보윤법운(普潤法雲,1088-1158) 보윤법운(普潤法雲,1088-1158): 宋代스님, 南屛淸辯의 제자 長州 彩雲里사람. 성은 戈씨 자는 天瑞 自號는 無機子. 5세에 慈行彷을 스승으로 섬기고 다음해에 [法華經7권]을 외우다. 9세에 得度하고 10세에 구족계를 받다. 그후 諸方을 다니다가 通照에게 천태학을, 천축사 敏法師에게 화엄을 배우다. 南屛의 청변의 법을 잇고 1117년 松江의 大覺寺에 있으면서 [법화경] [금광명경] [열반경] [유마경]등을 8년간 강의하다. 1145년 蓮社會를 열어 천여대중에게 [十六觀經]을 강의하며 本性唯心의 佛을 念하다. 시호는 普潤大師.(소주경덕사보윤대사行業記) 저서에 [飜譯名義集 7권] [金剛經注] [心經疏抄註]등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고려대 보조國師, 휘는 知訥 불일은 諡號, 아호는 牧牛子. 황해도 서흥사람 성은 鄭씨. 어려서 身病이 잦아 결국 아버지가 出家시킬 것을 發願祈禱하니 병이 낫다. 16세에 宗暉에 출가하고 1182년 禪科에 합격하고 동료 수십인과 '定慧結社'를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혼자 창평 淸源寺에서 [육조단경]을 보고 기쁨을 얻고 대장경을 열람, 특히 1185년 하가산보문사(경북예천)에서 李通玄의 華嚴論을 보고 圓頓의 이치를 깨닫다. 1198년 도반 몇과 함께 智異山 上無住에서 수도하던 어느날 [대혜어록]에서 크게 깨달아 보살행을 지향하다. 1200년 松廣山 吉祥寺에 머무니 緇白이 운집 叢林을 이루다. 항상 金剛經, 六祖壇經, 大慧語錄에 의지하고 '惺寂等持門, 圓頓信解門, 單傳徑截門'을 말씀하시다. 1210년 法床에 올라 설법하다가 주장자를 잡은채 입적하니 세수 51, 법납 36이었다. 왕이 金君緩(金富軾의 손자)에게 碑文을 짓게 하고 비를 세웠으나 龜趺만 남았는데, 1678년 백암성총이 다시 세워 송광사와 화순 萬淵寺에 있다.(고려사, 동문선, 보조법어, 조선불교통사, 조선금석총람, 보조<박성배:한국의 인간상3>) 저서:[誡初心學人文] [定慧結社文] [修心訣 1권] [眞心直說 1권] [華嚴論節要 3권] [念佛要文 1권]등
복례(釋復禮 ) 복례(釋復禮, ):唐代스님, 京兆人 성은 皇甫씨. 어려서 출가하여 興善寺에 머무는데 성품이 虛靜하고 욕심이 적으며 內典에 遊心하고 겸하여 玄儒에도 박학하였다. 唐高宗 永隆2년(681)에 太子文學인 權無二가 [釋典稽疑 10條]를 지어 禮에게 물으니 복례가 [十門辯惑論]을 지어 答하다. 그가 지은 '眞妄頌'이 유통됨에 天下學士에게 물으니 擊和者 몇사람 가운데에 宗密선사(780-841)의 臻極에 당하여는 오직 淸凉觀(738-838)만이 그 旨趣를 얻었는지라 마치 '盧郞의 米粒'과 같더라. 나머지는 복례의 견해를 체달하지 못한 고로 당나라의 譯務는 복례가 宗匠이 되는 까닭에 惠立이 譯主라 부르니 '譯主'라는 명칭이 그로부터 쓰이기 시작하다.(송고승전17 복례전, 釋敎目錄12) 저서:[十門辯惑論 3권]
부루나(Purnamaitrayani) 說法第一.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의 약칭이며 滿願子, 滿慈子 등으로 번역 한다. 바라문족 출신으로 생년월일이 부처님과 같다고 한다. 동 제자품에는 "능히 법을 廣說하여 의리를 분별하는 것은 만원자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수로나국 의 사람들이 포악하다는 말을 듣고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 그곳에 가서 오 백명의 우바새 들에게 설법해서 그들을 교화 했다고 한다. 가장 난폭한 수로나국 사람들 마저도 교화할 만큼 부루나 존자의 언변과 설법은 감동적이고 훌륭했다고 한다. 부루나 존자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귀의한 수로나국 사람들은 오 백개의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부직유(富直柔) 부직유(富直柔, ):송대 관리, 名相 富弼의 손자, 자는 季申 하남사람. 어려서부터 天才라는 소리를 듣다. 靖康원년(1126) 진사에 급제하고 高宗朝(1127-1162)에 端明殿 學士, 樞密院 知事가 되었으나 呂 浩, 秦檜의 모함으로 파면당하여 狂 으로 山澤에서 吟詠으로 여생을 마침.(宋史375)
부용도해(芙蓉道楷,1043-1118) 부용도해(芙蓉道楷,1043-1118):宋代 曹洞宗, 沂州(산동성)沂水사람 성은 崔씨, 부용은 호 投子義靑의 法嗣. 어렸을 때 伊陽山에서 穀學道하다가 術台山에 가서 중이 되다. 宋 政和8년 5월에,'吾年七十六 世緣今已盡 生不愛天堂 死不 地獄'라는 臨終偈를 남기고 입적.(오등회원14, 계고략4)
불광덕조(佛光德照,1121-1203) 불광덕조(佛光德照,1121-1203):南宋代 임제종 大慧派, 拙庵,東庵이라 칭하다. 臨江新喩사람, 성은 彭씨. 15세에 東山光化寺로 출가하고, 뒤에 育王山 大慧 를 찾아가 법을 잇다. 처음에는 光孝寺에 住하였고 다음으로 1180년 靈隱寺, 徑山등에 住하다. 南宋 孝宗帝의 귀의를 받고 佛照禪師라는 호를 받다. 嘉泰3년 82세로 示寂. 法嗣로 浙翁如琰,無際了派,北磵居簡 등.(會要18, 會元20, 通載20, 續燈錄32) 저서:[佛照禪師奏對錄1권] [佛照光和尙語要1권]
불도징(竺佛圖澄,232-348) 불도징(竺佛圖澄,232-348):인도 龜滋國스님, 성은 帛씨. 어려서 출가하여 經文 수백만자를 외우고 文理에 통달하다. 310년 중국 洛陽에 와서 大法을 펴기 위하여 여러가지 神異한 일을 나타내어 교화하다. 그 때 後趙의 石勒이 귀의하여 大和尙이라 일컬으며 아들을 보내어 養育케 하다. 석륵이 죽고 石虎가 왕이 되자 스승으로 섬기며 大殿에 올라 政事에 참여케 하다. 建武14년 12월에 業宮寺에서 입적하다. 나이 117세, 문하에 僧郞,道安이 특히 뛰어나다.(晋書列傳, 고승전9)
불안청원(佛眼淸遠,1067-1120) 불안청원(佛眼淸遠,1067-1120):宋代 임제종양기파, 蜀땅(사천성) 臨 縣사람 성은 李씨. 출가하여 14세에 受具하고는 律과 法華經을 공부하고 곧 禪에 몰두하다. 舒州 太平寺 五祖法演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처음 天寧 萬壽寺(서주)에서 開堂하고 드디어 龍門寺, 和州(안휘성) 褒山寺에 주하였다. 鄧洵武가 주청하여 紫衣와 함께 佛眼禪師의 호를 받다. 佛鑑慧懃, 佛果克懃과 함께 '東山의 三佛' 또는 '동산의 二懃一遠'이라 칭하다. 宣和2년 冬至前日에 54세로 示寂. 제자 善悟가 [불안선사어록 8권]을 편집하다.(語錄附 塔銘, 회요16, 보등록11, 속등록25, 오등엄통19)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359-429)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359-429):梵 Buddhabhadra, 覺賢,佛賢이라 번역. 인도 가비라국사람, 迦維羅衛城 甘露飯王의 苗裔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誦習하더니 스승이 讚曰,'賢一日 敵三十夫也'라 하다. 인도에 求法갔던 秦沙門 智嚴의 청으로 중국에 오다. 장안에서 羅什과 法相을 의논하고 慧遠을 위하여 처음으로 禪經을 강의하다. 그뒤 譯經에 종사하여 東晋義熙 14년(418)에 [晋華嚴 60권]을 비롯 15부 117권을 번역하다. 宋文帝 元嘉6년에 71세로 입적.(出三藏記集2 3, 고승전2 3智嚴傳, 佛祖統紀26)
사리불(Sariputra) 智慧第一. 舍利弗多, 舍利子라고 하며 영 취로자(鷲鷺子), 身子 등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족 출신으로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를 섬기어 7일만에 그의 敎旨를 통달할 만큽 뛰어났다. 그래서 사리불은 산자야의 신뢰를 받았으며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 250 인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苦를 끊지 못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하 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스승이 죽자 불제자 阿設示를 만나 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닫 고 목건련과 함께 제자들을 데리고 佛門에 들어왔다.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는 "지혜 가 무궁하여 모든 의혹을 푸는 데에는 바로 사리불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 처님이 입멸하기 전 목건련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사리불도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자 기 고향인 나알라다 촌으로 가서 바로 입멸하였다고 한다.
사마광(司馬光,1019-1086) 사마광(司馬光,1019-1086):宋代 학자, 정치가. 山西省출생 자는 君實, 호는 迂夫, 또 迂 司馬溫國公을 贈職받았으므로 '司馬溫公'이라 통칭한다. 神宗초년에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다가 失脚하고, 哲宗代에 政丞이 되어 신법을 모두 폐지하였다. 그가 지은 [資治通鑑]은 대표적인 編年體의 歷史書로 治道와 爲政者의 鑑이 된다는 뜻이다. 저서:[資治通鑑 294권] [通鑑考異] [獨樂園集] [司馬文正公集]
사명대사(임이환) 속성 임(任). 본관 풍천(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유정은 법명. 경남 밀양(密陽) 출생.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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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운(謝靈運,385-433) 사영운(謝靈運,385-433):劉宋代 시인, 晋代 名將 謝玄의 孫, 康樂公의 작위를 얻다. 文帝때에 侍中에 이르렀으나 讒言에 의해 죽음. 그의 淸新한 詩風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다. [대반열반경] 36권의 번역을 완성하다. 元嘉 10년에 죽다.
서산휴정(西山休靜,1520-1604) 서산휴정(西山休靜,1520-1604):휴정은 법명, 성은 崔씨 完山사람. 자는 玄應 호는 淸虛, 西山. 9,10세에 兩親을 잃고 과거에 落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고는 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靈觀에게 인가를 받고 萬行하다가, 1589년 정여립의 獄事에 無業의 誣告로 체포되었으나 宣祖가 오히려 상을 내리다. 1592년 義州에서 宣祖의 명으로 都總攝이 되어 義僧 5천을 인솔하여 倭亂에 대처하다. 후에 金剛 妙香 頭輪山에서 가풍을 선양하다. 묘향산 圓寂庵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 뒤에 입적하다. 저서:[禪家龜鑑] [三家龜鑑] [淸虛堂集 8권] [禪敎釋] [禪敎訣]등.
석가모니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 ·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 ·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시대적 배경 BC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안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BC 9세기 무렵까지 베다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이 약화되고 새로운 사고가 양성되어 BC 6세기 무렵에는 새 계급이 출현했다. 비옥한 갠지스 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농산물 등의 물자가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가 성립하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의 발전은 화폐의 유통을 성행하게 했으며, 상공업자들은 각기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沙門: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들은 보통 6사외도(六師外道)로 분류되는데, 그중에도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푸타, 유물론자인 아지타,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 산자야, 도덕부정론자인 푸라나, 결정론자인 마칼리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uddhodna:淨飯王)와 마야(My: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 ·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 ·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pavasa》 《대사(大史) Mahva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 ·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jag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 ·集 ·滅 ·道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a)이라고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ad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 ·諸行無常 ·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사제 ·팔정도(八正道: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 ·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 ·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의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 ·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 ·耳 ·鼻 ·舌 ·身 ·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 ·聲 ·香 ·味 ·觸 ·法의 객체, 즉 6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6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 ·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 ·열반 ·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入滅)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 ·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ar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 ·보신(報身:보살의 願 ·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 ·응신(應身: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 ·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 ·성도 ·입멸의 월 ·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 ·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 ·성도 ·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kha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 ·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兜率來儀相 ·毘藍降生相 ·四門遊觀相 ·踰城出家相 ·雪山修道相 ·樹下降魔相 ·鹿苑轉法相 ·雙林涅槃相)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 자료: 두산, 브리테리카 -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청원행사의 제자, 端州高要人 성은 陳씨. 육조스님에 득도하고 육조가 입적하므로 行思에게 師事함. 저서에 [參同契 1권] [草庵歌 1권]
석망명(釋亡名,515?-) 석망명(釋亡名,515?- ):北周代스님, 성은 宋씨 본명은 闕殆. 梁나라 竟陵王과 깊이 사귀며 일찌기 혼인하지 않더니 梁이 패망하자 출가하여(37세?) 호를 亡名이라 하다. 北周武帝 天和2년(567) 5월에 大 宰 宇文護가 글을 보내었으나 答曰,'--- 貧道 稟質醜陋 恒 疾惱 因 成恭 惟道是務 不曾棲息五十二年 自捨俗緣十有五載 萬人歸國 ---'라 하며 사양하였다. 뒤에 난리가 나서 冠邑이 淪沒하고 知識이 零落하게 되자 '대장부가 生當降魔하고 絶學箴文을 짓겠다'하고 息心讚을 짓다. 저서:[至道論] [去是非論] [僧崖菩薩傳] [大唐內典錄제5]등 12권
석상경제(石霜慶諸,807-888) 석상경제(石霜慶諸,807-888):唐代스님 廬陵(강서성 吉安府) 新金玉 鄕 사람, 성은 陳씨. 13세에 洪井西山의 紹 禪翁에게서 중이 되고 23세에 嵩山에 가서 受具하다. 뒤에 道吾圓智(청원하,약산유엄의 자:769-835)의 法을 받고 石霜山에서 그를 執侍하고 圓智寂後 學徒가 운집 500이 넘었다고 한다. 僖宗 이 紫衣를 내리니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光啓4년 2월 82세로 입적하다.(송고승전12, 전등록155, 선림승보전5, 宗門統要속집14, 會元5, 계고략3)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宋代스님, 雲門宗 智門光祚의 제자. 明覺은 시호 휘는 중현, 자는 隱之 성은 李씨 遂州사람. 어려서 출가하여 대자사 元瑩, 석문의 蘊聰에게 교리를 배우고 智門光祚를 參謁하고 법을 잇다. 후에 明州 雪竇山資聖寺에 住하며 禪風을 드날리다. 30년을 주하면서 70여제자를 기르니 號하기를 '雲門의 中興祖라 하였다. 또 傳燈錄을 중심으로 古則 100則을 가려서 [雪竇頌古]라 하다.(廣燈錄23, 續燈錄3, 禪林僧寶傳11, 會要27, 會元15) 저서로 [洞庭語錄] [瀑泉集] [祖英集] [頌古集]
설봉의존(雪峰義存,821-908) 설봉의존(雪峰義存,821-908):唐代스님 靑原下 德山宣鑑의 제자, 泉州南安(福建省)사람, 성은 曾씨. 12살에 父를 따라 蒲田 玉潤寺 慶玄에게 출가하고 17세에 중이 되다. 芙蓉山 恒照에게 배우고 뒤에 德山에게 참예하여 법을 잇다. 咸通11년(870) 行實의 請에 의해 福府 서쪽 象骨山에 암자를 짓고 주하다. 이 산은 겨울에 눈이 제일 먼저 내리므로 雪峰이라 하였는데, 후에 희종이 眞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紫袈裟를 주었다. 뒤에 (복건성)에 돌아가서 王의 厚意를 입었으며 梁開平2년 5월 87세로 입적하다. 그의 제자 雲門이 雲門宗을 열다.(송고승전12, 전등록16, 통기42, 통재25, 禪宗正脈7)
설총 [ 薛聰 ] 자 총지(聰智). 호 빙월당(氷月堂). 경주설씨(慶州薛氏) 시조.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 한림(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儒學)과 문학(文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찍이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학문 섭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즉 ‘은 ·는’은 자를 썼는데 이는 ‘隱’자의 왼쪽을 딴 것이며, ‘니’는 ‘匕’자를 썼는데 이는 ‘尼’자의 아래쪽에서 딴 것이다. 또 이두(吏讀)도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 선덕여왕 때의 《풍요(風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神文王)을 충고한 일화가 있으며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성철 [ 性澈 ] 속명 이영주(李英柱). 경남 산청(山淸) 출생. 진주중학(晋州中學)을 졸업하고 출가하여 해인사(海印寺)에서 하동산(河東山) 대종사(大宗師) 밑에서 득도하였다. 속세와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하는 승려로 알려졌으며 파계사(把溪寺)에서 행한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은 유명하다.
종단(宗團)의 분규가 아물지 않은 가운데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여전히 합천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서 구도를 계속하였다. 그 후 전두환정권 때 종정으로 조계종을 이끌었으며,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세친(世親,또 天親: 세친(世親,또 天親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사람, 4-5세기경의 학승, 바라문족 출신. 父는 교시가, 형은 無着(Asanga). 그는 소승에서 500부 대승에서 500부의 論을 지어 千部論師라 불린다.
수보리(Subhuti) 解空第一. 須淨提, 須扶提라고도 하며 善, 善實 등으로 번역한다. 사위국 바라문족 출신 이다. 수보리 존자는 지혜가 총명하여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에는 성품이 악하여 모든 것에 성을 잘 냈다고 한다. 수보리는 부모친족이 자신을 싫어하 자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고 여기서 선인을 만나 부처님께 인도되어 불법에 귀의 했 다. 동 제자품에는 " 항상 空定을 즐기고 空의 이치를 분별하는 것은 수보리 비구가 제일 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공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반야부 경전에는 항상 수보 리가 등장한다.
수원(修圓,770-834) 수원(修圓,770-834):日本 仁明王代 스님, 北谷사람, 성은 小谷씨. 어려서 賢憬에게 法相을 배우고 794년(25세) 最澄의 一乘止觀院 '供養會'에 勤操, 賢算등과 함께 초청되어 比叡山에 오르다. 802년 和氣, 弘世 등의 請에 응하여 高雄山寺에서 天台法文을 講하다. 827년 最澄에게 나아가 密權을 받은 후 顯敎를 배우고 傳法院을 열어 크게 講說에 힘쓰다. 承和원년(834) 65세로 입적.(南都高僧傳, )
순지 [ 順之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성은 박씨(朴氏). 패강(浿江) 출신. 서운사화상(瑞雲寺和尙)이라고도 한다. 20세 무렵에 오관산(五冠山) 오관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속리산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859년(헌안왕 3)에 당나라로 가서 장시[江西]에 있는 원주앙산(袁州仰山)의 혜적(慧寂)에게 배우고 그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헌강왕 초년에 돌아와 오관산 용엄사(龍嚴寺)에 기거하면서 선종을 전파하는데 힘썼다.
그는 선사상 체계를 일원화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교선융합을 이루었다. 자주 헌강왕과 경문왕, 진성여왕 등의 부름을 받아 경주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65세에 입적하였다. 독립된 저술은 아니지만 《조당집(祖堂集)》에 그의 법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현법상표(現法相表)’ 1편과 ‘삼편성불편(三遍成佛篇)’ 1편이 그것으로 2편 모두 글의 구성과 내용의 전개가 뛰어나다. 시호는 요오선사(了悟禪師), 탑호는 진원(眞原)이다.
습착치(習鑿齒) 습착치(習鑿齒, ):중국 晋代學者, 襄陽사람 자는 彦威. 博學하고 能文, 史才가 있었다. 영양태수를 지낸일이 있고, [漢晋春秋]를 지어 蜀의 正統性을 주장하였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승광(僧光,혹은 僧先) 승 광(僧光,혹은 僧先):六朝시대 道安과 같은 년배의 승려. 常山淵公(康僧淵?)의 제자. 冀州人. 성품이 소박하고 志操가 굳었다. 경론에 밝았으며 '石氏의 亂'을 피해 飛龍山에 숨어 지내면서 도안,축법태,道護등과 交遊하다. 뒤에 襄陽에서 병으로 죽다.(고승전5)
승우(僧祐,445-518) 승 우(僧祐,445-518):南北朝代 스님, 建業(강소성강녕부)사람, 성은 兪씨. 어려서 建初寺에 가서 禮拜하고 踊躍하여 집에 돌아오니, 부모가 그의 뜻을 憐愍히 여겨 출가를 허락하다. 건초사 僧範에게 출가하고, 14세에 定林寺 法獻을 의지하여 律部에 정통하였다. 受戒의 을 說하는 한편 定林, 建初 등의 修理를 돕고, 또 無遮大會, 捨身齋등을 주관하다. 師는 또한 畵像의 規矩에 밝아서 光宅 攝山의 大像을 造成할 때에 그의 지시를 받다. 梁武帝의 禮遇가 두터웠으며 僧事에 관한 모든 것을 師에게 一任하였다. 晩年에 다리가 쇠약해지자 內殿까지 가마타고 들어옴을 허락하다. 師는 특히 十誦律에 정통하여 일찌기 [十誦義記10권]을 지었으며 門徒가 특히 많아 智藏, 慧廓, 寶唱, 臨川王宏, 南平王偉 등 僧俗 1만1천여에 달하였다. 天監17년 5월에 건초사에서 74세로 입적하니, 제자 正度가 碑를 세우고 東莞劉 이 글을 짓다.(출삼장기집9 12, 고승전8 僧柔傳, 제11, 제12 超辯전, 제13法獻전, 僧護전, 法悅전, 歷代三寶紀11, 속고승전1 寶唱전, 제5智藏전, 제6明徹전) 저서:[釋迦譜 5권] [출삼장기집 15권] [弘明集 14권] [菩薩善戒地持二經記] [大集虛空藏無盡意經記] [賢愚經記](현존), [世界記 5권] [薩婆多部相承傳 5권] [法苑集 10권] [法集雜記傳銘 7권](散佚)
승예(僧叡,355-439) 승 예(僧叡,355-439):東晋 南北朝代 스님, 什門四哲의 한사람. 魏郡(冀州)長樂사람. 어려서 출가하여 18세에 僧賢法師의 제자가 되다. 22세에 이르러 경론에 널리 통하게 되어 僧朗이 放光經을 강의할 때 종종 질문을 하곤 하여 僧朗이 僧賢에게 승예를 칭찬하였다. 24살이 되자 諸國을 다니며 강의하니 선비들이 곳곳에서 모였지만 僧叡는 항상,'經法은 적게 배워도 因果를 알기에 충분하다. 禪法이 아직 전래되어 있지 않으니 마음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羅什이 장안에 오자 제자가 되어 먼저 禪經번역을 원하였다. 27세 쯤에 遊歷生活을 끝내고 長安의 道安에게 師事하였으며, 385년 道安이 示寂하자 난을 피해 廬山으로 가서 慧遠門下에서 念佛을 배우다. 뒤에 羅什에게 [三論]을 배우고 [成實論]을 강의하여 칭찬을 받다. 또한 姚興과 姚嵩의 尊崇을 받았으며, 409년 羅什寂後 점차 西方往生에 관심을 가지고 416년 建康의 烏衣寺에 머물렀다. 梵語에 정통했던 師는 경전을 강의하다가 謝靈運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十四音訓敍]를 지어 梵漢의 음과 의미의 차이를 밝혔다. 또 羅什이 일찌기 梵漢의 同異를 師와 의논하면서 曰,"天竺의 풍속에서는 文章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宮商體韻의 五音이 絃에 꼭 들어맞게 詩의 文體와 韻律은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대할 때는 讚德의 頌文이 있고 부처님을 대하는 儀式에도 讚佛의 頌文이 있다. 그러므로 梵文을 漢語로 번역하면 문장의 멋진 修飾을 잃어버리게 된다. 飜譯은 大義는 얻을 수 있지만 문체가 변해 버리기 때문에 음식을 씹어 나누어 주듯이, 단지 원래의 맛만 없어질 뿐 아니라 맛이 없어 吐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臨終에 이르러 제자를 불러놓고,"평생동안 西方에 태어나기를 誓願하였다. 영원히 法侶를 위해 往生西方을 원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방을 향하여 합장한 채 입적하다. 때는 元嘉16년 85세 였다.(고승전6, 출삼장기집5 喩疑) 저서:大智度論, 十二門論, 中論, 大品 小品經, 法華經, 維摩經, 思益經 등의 序文을 짓다.
승조(僧肇) 승 조(僧肇, ):羅什門下 4哲의 한사람, 처음에 老莊을 공부하다가,'歎曰 美則美矣 未盡善也 後讀 譯之維摩經 歡喜頂受 始知所歸 自此出家 ---'(고승전6 ) 저서:[肇論- 物不遷論,般若無知論,涅槃無名論]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 )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 ):스리랑카의 거사, 본명은 데이비드 헤와비타르네. 父는 무달리야르 다르마팔라이며 母는 말리카.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속에 태어나 6세에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서를 공부하면서도 항상 5계를 지켜나갔다. 1878년 콜롬보북부의 성공회부설 '성토마스 학교'에 입학했다. 매년 '베사크 祭日'마다 학교에서 도망나와 봉축행사에 참석하다. 그는 논쟁에 탁월한 재주를 가져서 독선에 찬 기독교도와 논쟁하기를 즐겼다. 더우기 코타헤나 사원의 '메게투바테 구나난다'스님에게 토론과 웅변을 배웠다. 그뒤 1875년 뉴욕에서 설립된 신지학회(러시아인 H.P.Blavatsky女史와 미국인 변호사 Henrys,Olcott대령, 변호사 W.Q.Judge가 창립한 과학과 종교, 철학을 통합한 세계관의 제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에 관심을 가지다가, 1880년 5월 스리랑카에 온 두 設立者가 불교로 改宗하면서 인연맺게 된다. 1884년부터는 일생을 집을 떠나 佛法의 守護와 繁榮을 위해 노력하는 Brahmachari가 되었다. 1899년 다르마팔라는 日本을 방문하는 등 세계불교의 흐름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1891년 인도불교성지순례를 결심하고 일본인 승려 코젠구나 라트나와 함께 바라나시, 사르나트에 도착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일기에,'애석하도다. 이 聖地에 사는 불교인 누구도 파괴자들의 손으로부터 사리탑과 조각품들을 보존하는 사람이 없다니---'라고 쓰고 있다. 부다가야에서 그는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고 마하보디 大塔 앞에서 誓願하고는 Mahant(힌두교 고위성직자)의 소유가 된 大覺寺를 찾는 일에 착수하였다. 1891년 3월 콜롬보에서 '부다가야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마하보디저널'을 창간하여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대회'가 열렸을 때 議長인 버로우博士의 초청으로 명연설을 하여 불교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편견없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확신을 주저없이 말하고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의 길을 神學과 敎理가 막는다면 얼른 치워버리십시오. --- " 그는 이 연설을 통하여 많은 후원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도 뉴욕의 스트라우스(미국 최초의 불교도)와 메어리 포스터부인(하와이 카메하메하大王의 직계후손)을 만나게 된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다시 마한트와 협상과 소송을 번갈아가며 한 결과 부다가야의 사원이 힌두교의 소유가 아니라는 판결에 힘을 얻어 1896년 5월 26일 켈커타에서 '베사크 祝祭'를 개최하였다. 그는 가끔 에드윈 아놀드('아시아의 빛'의 저자), 막스밀러박사(옥스퍼드대학의 동양학교수)와 교류하며, 또 대중설법에서 항상 '신성하고 청정한 생활'을 권하였다. 그의 일상은 항상 요가수행과 [염처경] [청정도론]의 연구와 규칙적인 禪修行, 계율생활이 기본이 되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활동의 信條는,'죽음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나는 이미 백만번도 더 죽었고 앞으로도 백만번은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無知와 利己心,激情의 惡으로부터 건져내리라'라고 하였다. 올코트 대령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신지학회에서 벗어나 1899년 다시 인도에 가서는,'신의 섭리가 그대들을 돌보리라 생각하지 말라. 全能者는 천년세월이 한시간에 불과할 뿐이다. 합장하고 기다린들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깨어나라 나의 형제들이여 ---' 1906년 부다가야 소송은 敗訴로 끝났으나 힌두교와 불교 공동관리하에 두는 成果는 있었다. 1913년 49세의 다르마팔라가 8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宗務院長 金錦潭스님에게 '석존사리 1과'를 전하였다. 그는 영국에도 불법전파활동을 벌여 1925년 가을 런던에서부터 講演과 座談을 벌이고 'The British Buddhist'지를 창간하였다. 1931년 모든 財産을 정리하고 7월 出家戒를 受持하고, 캘커타에 '물다간다쿠티 寺院'의 開院式을 열다. "8백년동안의 流配 끝에 불교도는 이제 神聖한 鹿野苑으로 돌아왔습니다. ---" 1932년 1월 실론에서 具足戒를 받았으나 건강이 워낙 악화되어 갔다. "나의 죽음을 막으려 애쓰지 말라. 藥이나 注射로 나의 고통을 더이상 연장시키지 말라. 나는 죽어 베나레스의 브라흐만 집안에 還生하여 佛陀의 法을 전파하고 부다가야 聖地를 되찾으리라" 1933년 4월 29일 승려와 제자들의 涅槃經 독경 속에 70세로 入寂하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성실한 열정과 護法佛事, [인도불교의 復興]를 위한 끝없는 정진'이었다.
아나율, 아니루타, Aniruddha 아나율 외에 아루타(阿樓陀) ·아누타(阿馱) ·아누루타(阿樓馱) ·아니루타(阿尼樓陀) ·아니율타(阿泥律陀) 등으로 음역하며, 무멸(無滅) ·여의(如意) ·무탐(無貪) ·무장(無障) ·선의(善意) ·수순의인(隨順義人) ·부쟁유무(不爭有無)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여러 경(經)들에 의하면 석가족(族) 출신으로 석가가 성도(成道)한 뒤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난다(석가의 이복동생) ·아난다(석가의 사촌동생)와 함께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석가 앞에 앉아서 졸다가 책망을 듣고, 서원(誓願)을 세워 조금도 자지 않았는데, 그 결과 안질(眼疾)을 얻어, 마침내는 두 눈을 못 보게 되었다. 육안을 못쓰는 대신, 심안(心眼) 즉 천안(天眼)이 열려 ‘천안제일’이라고 불렸다. 심원한 통찰력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석가가 입적하던 해 경전을 결집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여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 이상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아난(阿難,범 Ananda) 아 난(阿難,범 Ananda):십대제자중 多聞第一, 意譯하면 無染,慶喜,歡喜. 불의 從弟, 제바달다의 친동생(父는 斛飯王이라 하나 異說이 있다). 부처님 成道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다고 한다. 8세에 출가하여 수행하는데 美男인지라 女子의 유혹을 많이 받게 되지만 수행을 완성하다. 불멸후 가섭으로부터 '阿難五罪'와 未離欲의 꾸짖음을 받고 용맹정진하여 확연히 깨닫고 나서 結集大衆에 동참하여 暗誦者가 되다. 그의 업적으로는 1.부처님의 成道 20년후부터 親近侍者가 되다. 2.다문제일로 佛滅度後 경전결집의 중추가 되다. 3.세존의 姨母 曇彌(대애도)비구니의 出家를 위해 노력한 것 등을 든다.(장아함2 遊行經, 중아함33 侍者經, 잡아함44, 증일아함1 序品, 사분율54, 摩訶僧地律32, 毘尼母經3, 有部毘那耶雜事39 40, 대비바사론16, 經律異相15, 태장계七集上)
아난다(Ananda) 多聞第一. 阿難이라고도 하며 歡喜, 無染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의 종제이기도 한 아 난 존자는 늘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설 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아난 존자는 제 1회 결집 때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외워 냄으로써 경전을 결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경전에는 "내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뜻으로 "如是我聞"이란 문 구가 붙게 된 것이다. 이밖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간청하 여 허락을 얻어냈다. 이것은 여성의 출가를 가능토록 한 일이었다.
아쇼카 재위기간은 BC 268~232년까지이나 BC 264년 또는 BC 270년부터 재위하였다는 설도 있다. 성격이 광폭하여 부왕 빈두사라가 죽자 99명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뒤 10년간은 바라문교의 습관을 따르고, 특히 시바신을 신봉하였으나 BC 251년 인도 동남부 칼링가국을 평정할 때 10만명의 부하를 잃고 무고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는 것을 목격한 뒤 깊이 뉘우쳐 불교에 귀의하였다. 이후 무력을 쓰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정법에 맞는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또한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석주(石柱)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아쇼카왕의 법칙(法則)이다.
이 법칙의 중심사상은 법(法)에 있었으며 동물을 죽이지 말 것, 부모에게 순종할 것, 주변 사람에게 아낌없이 보시할 것, 하인이나 노예에게도 친절할 것 등은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법칙이었다.
왕은 법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도록 하기 위해 관리를 동원하여 선전하고, 포교사를 각지에 파견하였다. 외국에도 포교사절을 보내 시리아와 이집트·마케도니아까지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하여 국왕과 4만명의 신하를 불교에 귀의시킨 일은 교세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치세중 불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모두 발전하였으나 동시에 분파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이를 막기 위해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세차례의 결집을 하고 규율과 성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왕래하는 사람과 가축을 위해 길가에 나무를 심어 그늘과 과일을 제공하였으며, 우물을 파고 휴식처를 만들며 약초를 보급하여 사람과 가축의 병을 고치는 등 사회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아육왕(阿育王,범 Asoka, B.C321- ) 아육왕(阿育王,범 Asoka, B.C321- ):구역은 阿恕伽, 신역은 阿輸伽, 無憂라 번역.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왕(B.C 268-B.C 232在位). 全印度를 통일시키고 불교를 보호한 왕. B.C321년경 공작왕조를 개창한 '찬드라 굽타'대왕의 손자 빈두사라왕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부왕이 죽은 후 배다른 형 수사마를 죽이고 즉위하다. 어떤 사문의 설법을 듣고, 즉위 8년에 칼링가를 정복하여 많은 인명을 殺傷하고는 불교에 귀의하다. 이후로는 법(Dharma)에 의한 정치를 행하고 8만4천개의 寺院과 寶塔을 건축하고 石柱를 세웠으며, 즉위 17년에 華氏城에서 제3결집을 행하고 희랍5국에 전도승을 파견하다.(아육왕전, ) -> 본 사전 아쇼카왕 조 참조
안자=안영(晏子,晏 -500B.C) 안 자=안영(晏子,晏 -500B.C):춘추시대 齊나라 大夫, 夷維사람 자는 平中. 靈公 莊公을 섬기고 景公의 재상이 됨. 節儉力行한 그의 언행은 孔子에까지 영향을 미쳤음. 후인이 그의 言行을 서술하여 [晏子春秋]를 짓다.
암두전활(巖頭全豁,828-887) 암두전활(巖頭全豁,828-887):당대스님 청원하 德山宣鑑의 제자, 泉州(복건성) 南安縣 사람, 성은 柯씨 휘는 全豁 시호는 淸儼大師. 靈泉寺 義公會下에 출가하여 長安 西明寺에서 受具하다. 처음에 敎宗에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 雪峰義存, 欽山文邃와 사귀고 仰山慧寂을 拜謁하고 德山에게 참예하여 법을 잇다. 會昌沙汰(845)를 만나 西湖江邊에서 뱃사공으로 난을 피하다. 후에 洞庭湖畔의 臥龍山 巖頭에서 종풍을 선양하다. 光啓3년(祖堂集에는 中和5년 곧 885년) 4월 8일, 中原에 도적이 창궐했을 때, 도량을 守護하려 端居하다가 도적의 칼에도 神色自若하며 大叫一聲으로 꾸짖으며 示寂하다. 세수 60세.(송고승전23, 조당집7, 전등록16, 회요21, 회원7)
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 앙산혜적(仰山慧寂,803-887):南岳下 第4世인 위산영우의 제자. 韶州懷化사람, 성은 葉씨 휘는 慧寂. 江西省 仰山의 觀音院에 住. 그는 특히 위앙종을 열어 종풍선양.
약산유엄(藥山惟儼,745-828,또 775-834) 약산유엄(藥山惟儼,745-828,또 775-834):唐代 靑原下, 絳州(산서성)사람 성은 韓씨, 石頭希遷의 제자. 17세에 潮陽(광동성) 西山의 慧照에게 출가하여 大曆 8년(773) 29세에 受具하다. 후에 石頭에 참예하여 大悟하고 嗣法하다. 석두를 侍奉하기 13년 뒤 州(호남성) 芍藥山에 주하다. 이 때 낭주자사 李 가 법문을 들으려 방문하여도 讀經不顧하거늘 가 '見面不如聞名이로다' 時에 師가 '太守야 何得貴耳賤目고'하니, 問曰 '如何是道닛고' 師가 以手指上下曰 '會 아' 曰 '不會니다'하니 師曰 '雲在靑天水在甁이니라' 乃欣 하여 作禮而偈曰 '練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我來問道無餘說 雲在靑天水在甁'이라 하였다. 太和2년 84세로 示寂하다. 시호는 弘道大師. 제자에 雲巖曇晟, 華亭德誠, 道吾圓智, 李 등이 있다. 經論을 통하고 戒律을 嚴守하며 一切都莫思量하고 一句를 悟得함에 있다.(全唐文336 州藥山故惟儼大師碑銘幷序, 조당집4, 송고승전17, 전등록14)
양광(楊廣,隋煬帝,569-618;在位604-618) 양광(楊廣,隋煬帝,569-618;在位604-618):隋 第二代 皇帝(文帝 楊 堅의 제2자). 이름은 廣 또는 英, 소자는 阿摩. 604년 7월에 父王 文帝를 살해하고 즉위하였고, 本性이 호화로와서 土木을 크게 일으켜 運河를 파고 長城을 쌓았다. 특히 大軍을 일으켜 高句麗에 침입하였다가 乙支文德에 대패한 뒤 諸雄의 蜂起로 陣中에서 宇文化及에게 살해됨. 晋王에 있을 때, 智者大師에 귀의하고 千僧齋를 베풀었으며 많은 佛像과 經典을 만들고 승려를 출가시킴. 또 大業3년(607) 승려 가운데 無德者를 還俗시키고 사원을 정리하였고, 613년 寺名을'道場'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양억(楊億,973-1020) 양억(楊億,973-1020):宋代 학자, 거사. 자는 大年, 浦城사람.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서 11세때 太宗이 入面試로 불러 神童이라 찬탄하고 秘書省 正字가 되다. 진종 때에 翰林學士, 修撰, 侍郞을 역임하다. 처음에는 불교를 모르다가 학사 李維勉의 策發에 의해 발심하고 후에 汝州 廣慧禪師를 拜謁하고 득법하다. 항상 불교를 옹호하고 王欽若과 함께 [冊符元龜1천권]을 짓는 등 당대의 領袖가 되다. 더우기 조칙을 받들어 [대장목록] [전등록]을 편집,校刊하여 불법외호의 공로가 컸다. 天禧4년 병이 들어 게송을 써서 李遵 에게 주고는 逝하다. 나이 47세 시호는 文, 문집이 있다.(속등록4, 萬姓統譜41) 明復編 [중국불학인명사전]참조.
양웅(楊雄,B.C53-A.D18) 양웅(楊雄,B.C53-A.D18):前漢代 사상가, 蜀땅(泗川城) 成都에서 출생. 子雲은 자, 이름은 雄. 말을 더듬어 이야기를 잘 못하였는데 司馬相如의 賦에 감탄하여 항상 이를 본받아 賦를 지었다. 또 離騷를 읽을 때마다 감격하여 反離騷를 지어 이것을 岷山에서 강물에 던져 屈原을 弔喪하였다. 成帝때 서울에 들어왔다가 부름을 받아 賦를 바치고 朗이 되다. 哀帝,平帝를 거쳐 王莽 때에는 大夫가 되었기 때문에 節操에 관해 비난을 받다. 周易을 본따 [太玄經]을, 論語를 본따 [法言]을, 爾雅를 본따 [方言]을 지었다. 뒤에 왕망에게 의심을 받고는 治罪를 두려워하여 校書閣에서 몸을 던져 상처입고 그로 인하여 죽다.
연담유일(蓮潭有一) 연담유일(蓮潭有一, ):조선스님, [도서과목병입사기 1권] [절요과목병입사기 1권] [林下錄 4권] [釋典類解 1권] 등.
염관제안(鹽官齊安, -842) 염관제안(鹽官齊安, -842):唐代 南岳下 마조의 제자. 海門郡사람, 성은 李씨. 해문군의 雲琮에 의지해 출가하고 南岳智嚴에게 受具하다. 江西馬祖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元和말년경 절강성 越州蕭山 法樂寺에 주하다. 후에 杭州 鹽官鎭國 海昌院에 주하다가, 會昌2년 12월 示寂하다. 宣宗이 悟空大師, 捿心之塔의 이름을 追諡하고 追悼詩를 지었다. 후에 盧簡求는 [항주염관현 海昌院禪門大師塔銘]을 짓다.(全唐文733 탑명, 文苑英華866, 조당집15, 송고승전11, 전등록7)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 영가현각(永嘉玄覺,665-713):당대스님, 육조혜능의 法嗣, 溫州府永嘉縣사람. 성은 戴씨 이름은 현각, 영가는 호, 별호는 一宿覺. 8세에 출가하여 藏經을 널리 보고 특히 天台止觀에 정통하다. 뒤에 [維摩經]을 보다가 깨친 바가 있었고, 조계에 가서 육조를 뵙고 깨달아 印可받고는 하룻밤을 자고 떠나니 時人이 '一宿覺'이라 부르다. 곧 돌아가서 고향의 龍興寺에 주하니 학자가 날로 늘어나다. 唐先天2년 10월 앉아서 입적하니 나이 49세. 당예종이 無相大師라 시호하다.(전등록5, 송고승전8, 회원2, 통기10, 통재16) 저서:[禪宗永嘉集 1권] [證道歌] [觀心十門] 등.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北宋代 스님, 法眼宗 제3조. 臨安府(절강성) 餘杭縣사람, 성은 王씨. 28세에 翠岩令參(雪峰의 법사)에게 중이 되고 천태산 德韶국사를 뵙고 玄旨를 받다. 廣順2년(952) 雪竇山 資聖寺에 들어갔다가 吳越의 忠懿王의 청으로 靈隱寺에 주하다. 智者禪院에서 법화경을 많이 외웠고, 建隆2년(961)에 杭州 永明寺(또는 淨慈寺)에서 대중을 크게 提接하며 '禪淨兼修'의 법을 宣揚하다. [永明延壽自行錄]에, 항상 108事를 日課로 하였는데 특히 阿彌陀佛의 명호를 10만번씩(行道念佛)이나 불렀다. 그리하여 石芝宗曉는 蓮社七祖로 받들고, 時人이 師를 '慈氏의 下生'이라 崇仰하다. 고려(光宗代)스님들이 그의 문하에서 印可받은 이 圓空등 36인이 있었다 한다. 따라서 法眼宗風이 高麗에서 淨土宗으로 드날림을 보게 되다.시호는 智覺禪師.(송고승전28, 전등록26, 선림승보전9, 통기26, 雪竇寺誌3, 靈隱寺誌5, 영명연수자행록) 저서:[宗鏡錄 100권] [萬善同歸集 6권] [唯心訣] 등 60여부 수백권의 저술.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宋代 임제종 양기파, 綿州(호남성)사람, 성은 鄧씨. 35세에 出家受具하여 成都에 가서 唯識을 배우다. 뒤에 남방으로 遊行하여 圓照宗本(1014-1099)을 참예하고 浮山法遠에 의지해 공부하다가, 후에 白雲守端의 提 를 받고 깨달음을 얻어 법을 잇다. 처음에는 安慶(안휘성) 四面山에 주하다가 晩年에 州(호북성) 五祖山에서 크게 종풍을 드날렸다. 제자에 圓悟克勤, 太平慧懃, 佛眼淸遠(三佛), 開福道寧, 大隨元靜 등의 뛰어난 제자를 배출하다. 宋崇寧3년 80여세로 示寂하다.(속등록20, 선림승보전30, 회요16, 보등록8, 회원19) 저서:[오조법연선사어록 4권]
옥천신수(玉泉神秀, -706) 옥천신수(玉泉神秀, -706):唐代 五祖弘忍의 제자, 開封(하남성) 尉氏縣사람 성은 李씨. 身長八尺 尨眉秀目하여 威風이 있었다. 張說의 碑文에 의하면 幼時에 經史를 배워 博綜多聞하였고 老莊과 三藏에 두루 밝았다 한다. 武德8년(625) 洛陽 天宮寺로 출가하고 州 東山寺의 弘忍에게 참예하여 隨侍하였다. 師의 나이 50세에 五祖會下의 700여대중의 上座가 되어 五祖의 인정을 받았다. 上元2년(675) 10월 五祖가 入寂하자 荊州 江陵(호북성)의 當陽山으로 移住하다. 久視年中에 則天武后와 中宗 睿宗의 禮遇를 받아 三帝의 國師가 되었고, 中書令 張說은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則天武后는 당양산에 度門寺를 세워 師로 하여금 불법을 선양하게 하다. 그의 家風은 離念, 五方便을 중시하여 南宗神會의 공격을 받았으며 慧能의 南宗禪에 대하여 北宗禪이라 칭하다. 그의 禪法은 華北, 長安,洛陽과 江南에 까지 미쳤으며 南宗禪은 華南, 江西지역에 유행하게 되다. 神龍2년 2월 洛陽 天寶寺에서 示寂하다. 시호는 大通선사. 岐王範, 燕國公 張說, 徵士 盧鴻 등이 각각 碑銘을 지었다. 法嗣者로 嵩山普寂, 京兆義福이 배출되다.(全唐文231 唐玉泉大通禪師碑銘幷序, 舊唐書191, 楞伽師資記, 傳法寶記, 조당집2, 송고승전8, 전등록4) 저서:[觀心論 1권] [大乘無生方便門 1권] [華嚴經疏 30권] [妙理圓成觀 3권]
요세 [ 了世 ] 본관 신번(新繁:宜寧). 속성 서(徐). 자 안빈(安貧). 시호 원묘(圓妙), 탑호(塔號) 중진(中眞). 12세 때 강양(江陽)의 천락사(天樂寺) 균정(均定)의 제자가 되어 천태 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그 후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교의(敎義)연구에 전념하면서 산수(山水)를 유력(遊歷)하다가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개당(開堂) 설법하고, 공산(公山) 회불갑(會佛岬)에 있는 조계종의 지눌(知訥)을 찾아가 참선하여 법우(法友)가 되었다. 1208년(희종 4) 일생산(日生山) 약사사(藥師寺)에서 정관(靜觀)하고 탐진(耽津:康津)의 법도 최표(崔彪) 등의 청원으로 만덕사(萬德寺) 옛터에 절을 짓고, 남원(南原) 백련사(白蓮寺)에 몇 년 머물다가 탐진으로 돌아갔다. 국사(國師)가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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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龍樹) 용수(龍樹 ):범 Nagarjuna의 음역. 남인도사람, 마명제자인 迦毘摩羅존자의 제자. 空宗의 시조 후세에 8종의 조사라 함. 저서:[大智度論 100권] [中論] [十住毘婆沙論 17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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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름 나가르주나(나가:용, 아가르주나:나무 이름). 남인도 출생. 북인도로 가서 당시 인도의 사상(思想)을 공부하고, 불교 특히 신흥 대승불교(大乘佛敎)사상을 연구, 그 기초를 확립하였다. 때문에 제21의 서가(書家), 8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중론(中論)》에서 전개한 공(空)의 사상은 그 이후의 모든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즉, 실체(實體:自性)를 세우고, 실체적인 원리를 상정(想定)하기 위한 바람직한 자세를,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하면서, 일체의 것이 다른 것[他]과의 의존 ·상대 ·상관 ·상의(相依)의 관계[緣起]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관관계는 긍정적 ·부정적 ·모순적 상태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반면, 구극(究極)의 절대적 입장[眞諦 ·第一義諦]은 우리의 일상적 진리[俗諦 즉, 世俗諦]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를 초월해서는 논의의 대상이나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학파를 가리켜 중관파(中觀派)라고 불렀다.
주요 저서에 《중론》(4권) 외에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등이 있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은 그의 저작설에 의문점이 있다.
용정원정(龍井元淨,1011-1091) 용정원정(龍井元淨,1011-1091):宋代 천태종, 龍井 聖壽院 원정스님. 於潛사람 자는 無象, 성은 徐씨. 18세에 受具하고 慈雲(山家派 遵式,964-1032)을 따라 天台를 배우다. 諸經에 밝았고 특히 止觀에 정통하여 杭州 天竺寺에 住하매 學人이 항상 만명을 헤아렸다. 宋神宗이 辯才大師라 시호하다.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 우두법융(牛頭法融,594-657):隋唐代 牛頭禪 開祖, 潤州(강소성) 延陵사람 성은 韋씨. 처음에 儒敎를 배우고 群書를 연구하면서 [大品般若經]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뒤에 茅山(강소성)의 炅法師에게 중이 되어 수학하다. 林中에서 端坐하기 20년 貞觀 17년(643) 建康 牛頭山 幽棲寺 북쪽에 禪室을 짓고 지내다가 一日에 道信이 와서 일러줌을 받고 心要를 깨닫다. 647년 [法華經]을 강의하여 奇瑞를 얻고, 永徽3년(652) 建業 建初寺에서 [대품반야경]을 강의하고 다시 奇瑞가 있었다. 고을 원인 蕭元善의 請으로 건업 건초사에서 法輪을 굴리다가 顯慶2년 윤정월 示寂하다. 세수 64세. 師는 절에 양식이 모자라자 80여리 떨어진 丹陽에서 매일 一石八斗를 져다가 300대중을 供養하다. 게송에,'山田脫粟飯과 野菜淡黃 에 喫則從君喫하고 不喫任東西하노라' *또 四祖道信과의 관계는 [續高僧傳 26]에는 보이지 않지만 劉禹錫이 지은 [우두산 --新塔記](829)와 李華의 [潤州鶴林寺--碑銘] 등을 비롯한 후세의 자료는 道信의 일러줌을 인하여 심요를 깨달았다고 전한다.(속고승전26, 塔銘, 弘贊法華傳3, 조당집3, 전등록4, 통재12) 저서:[絶觀論 1권]
우파리(Upali) 持戒第一. 優婆離, 優婆梨라고도 하는데 近取 또는 近執이라 번역한다. 수타라족 출신으 로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는 싯달타 태자의 이발사였다. 아난, 난타 등 석가족 출신의 남자들이 출가했을 때 그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으나 천민이라는 이유로 함께 출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의 출가를 허락하시고 세속에 있을 때에는 지위의 고하와 종성의 차별이 있지만 일단 불문에 들어오면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들은 대부분이 바라문족이거나 왕족계급이었는데 우파리 존자만 유 일하게 노예계급 출신이다. 그러나 우파리 존자는 바로 부처님의 교단이 계급과 종성에 평등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노예계급 출신이 종교지도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교단에서 계급 평등을 실현하셨다. 우파리 존자가 바고 그 증거인 것이다. 우파리 존자는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존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불멸후 제 1회 결집 때에 우파리 존자가 律을 외워 냄으로써 律藏을 결집하게 됐다.
우전왕(優塡王,범Udayana;B.C.600년경) 우전왕(優塡王,범Udayana;B.C.600년경):구역에서는 于 , 優 이라 하고 出愛라 번역, 拘 彌國의 왕. B.C 6세기경 印度 반사국의 푸라판타왕의 왕자. 母后가 滿朔 때에 매가 채어가 히말라야의 나무 위에서 탄생. 신심이 깊었으며 世尊이 33천에 올라 生母를 위하여 설법하실 때, 그는 佛을 예배하지 못하는 괴로움으로 병이 들자 臣下들이 牛頭 檀 즉 우두산의 향나무로 佛像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불상이다.(대당서역기5, )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唐末期 雲門宗 開祖, 嘉興(절강성)사람 성은 張씨.어려서부터 出家하기를 바라다가 鄕里의 空王寺 志澄律師에 의탁하여 17세에 得度하고 20세에 受具하다. 志澄에게 四分律 등을 배우고, 뒤에 睦州道종(黃檗의 법사)에 詣하더니, 이어서 雪峰義存에게 참예하여 법을 이었다. 諸方을 遊歷하다가 많은 禪客들과 交流하고, 乾化원년(911) 曹溪六祖의 塔을 참배하다. 靈樹如敏(長慶大安:793-883;백장의 손제자)의 會下에 있다가 靈樹가 遷化하자(918) 廣主劉엄의 청에 의해 法席을 이었다. 同光원년(923) 韶州 雲門山에 가람을 짓고 항상 천명대중을 지도하였다. 天成2년(927) 後唐明宗이 '光泰禪院'이라 賜額하고, 天福3년(938) 後晋劉晟은 匡眞大師의 호를 내리다. 운문산에서 30여년을 주하며 宗風을 떨치다가 乾和7년 4월에 86세로 示寂하다. 雷岳은 [운문산광태선원匡眞大師行錄] [--實性碑]를 撰하다. 遺誡에 의해 塔을 건립하고도 遺體를 方丈에 安置하니 沒後 17년을 奇瑞가 있었다. 그는 '雲門胡餠, 體露金風, 須彌山, 雲門十五日(日日是好日)' 등의 公案을 남겼다.(語錄附 行錄, 南漢金石志1 2 實性碑, 全唐文892 碑銘, 조당집11, 전등록17, 계고략3) 저서:[운문산광진선사廣錄 3권]
운봉문열(雲峰文悅,998-1062) 운봉문열(雲峰文悅,998-1062):宋代 임제종, 南昌(강서성)사람, 성은 徐씨. 7세에 龍興寺로 출가하고 19세에 遊行하다. 筠州 大愚守芝(汾陽善昭의 제자)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守芝를 모시기 8년, 守芝寂後 다시 洪州 同安元 慧南을 찾아뵙고 지내다가 翠巖寺에서 開法하다. 뒤에 南岳(호남성) 雲峰에 주하다. 嘉祐7년 65세로 示寂.(속등록8, 선림승보전22, 회요14, 회원12, 통재18)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근대 대강백, 대장경 한글화의 主役. 平北定州사람, 성은 李씨 속명은 學洙, 春園의 再從弟. 어려서 향리에서 漢學과 현대학문을 수업하고, 1912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강원도 희양군 鳳逸寺로 피신하였다가 慶松(월초:1858-1934,의 제자)에게 득도하다. 그뒤 범어사, 개운사 등지에서 8년간 교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다. 1932년 다시 귀국, 봉선사 弘法講院에서 36년부터 講席에 앉다. 1946년 廣東學校를 개설하고 事變이후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講主를 역임하다. 1960년부터 봉선사 復元佛事에 진력, 63년 東國譯經院을 설립하여 고려대장경 번역사업을 主導하다. 63년 정부로부터 '獨立有功褒賞'을 비롯 각종 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89세로 입적하다. 부도와 행장비(81년 靈岩스님이 글을 지어 모심)는 奉先寺 어귀에 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宋代 임제종, 彭州崇寧(사천성成都府)사람, 성은 駱씨 이름은 극근, 자는 無着. 어려서 妙寂院 自省에게 출가하여 文熙敏行을 따라 經論을 연구하다가 뒤에 五祖法演의 법을 잇다. 佛眼, 佛鑑과 함께 '오조門下三佛'이라 稱하다. 成都 昭覺寺에 있다가 남쪽으로 가서 張無盡거사를 만나고 夾山 碧巖에서 지내다. 學徒를 위하여 雪竇의 [頌古百則]을 提唱, 이를 엮어 [벽암록]을 만들다. 뒤에 安沙府 道林寺에서 佛果선사의 호를 받고, 金陵 蔣山에서 圓悟선사라는 호를 받다. 晩年에 昭覺寺에 돌아가 紹興5년 73세로 입적. 遺偈에 '已徹無功 不必留頌 聊爾應祿 珍重珍重'이라 하다.(僧寶正統傳4, 普燈錄11, 회원19, 통기46, 통재30, 계고략4, 속전등록25)
원조종본(圓照宗本,1014-1099) 원조종본(圓照宗本,1014-1099):宋代스님, 常州無錫사람 성은 管씨, 이름은 宗本 또는 大本, 호는 慧林, 원조는 神宗의 시호. 19세에 蘇州 永安道昇에게 중이 되다. 10년을 시봉하고 受具하고는 선지식을 歷訪하다. 뒤에 天衣義懷를 拜謁하고 법을 잇다. 후에 淨慈寺에 머물면서 衲子를 提接하고 만년에 平江靈巖에서 가풍을 드날리다가 元符 2년 12월 28일 85세로 입적.(稽古略4)
원측(圓測,613-696) 원측(圓測,613-696):신라의 학승,본래 왕족 명은 文雅. 일찌기 중국에 들어가 玄 삼장에게 唯識을 배우다. 그의 五十二位說은 窺其의 四十一位說과 함께 당대쌍벽을 이룸. 전해지는 저술에 [解深密經疏]가 유명 ----------------------------------
圓測 613(진평왕 35)~696(효소왕 5). 중국에서 활약한 신라 출신의 유식학(唯識學) 승려. 이름은 문아(文雅). 신라왕족으로서 경주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다. 3세에 출가했으며,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15세에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에게 유식학을 배웠다. 당나라 태종이 그 명성을 듣고 직접 도첩(度牒)을 내려 출가를 허락하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게 했다.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成實)·구사(俱舍)·파사(婆娑) 등의 학문을 폭넓게 연구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서 중국어·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나중에 불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645년 현장(玄)이 인도 구법여행에서 돌아오자 원측은 그에게서 새로운 유식학을 배웠다. 658년 서명사(西明寺)가 낙성되자 대덕(大德)이 되어 신유식학 관계의 저술에 힘쓰는 한편, 현장을 도와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머무르다가, 다시 그곳에서 30여 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 그후 서명사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서명사로 돌아가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강의했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 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 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 당시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 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國)에서 가져온 〈화엄경〉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사리를 용문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다. 그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중국 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 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있다.
그의 불교사상은 유식학이 중심이다. 당시 현장은 인도에서 호법(護法) 계통의 신유식(新唯識:有相唯識)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재래의 진제(眞諦) 계통의 구유식(舊唯識:無相唯識)을 비판했다. 현장은 나아가 유식사상과 나란히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고 있던 중관(中觀) 사상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현장을 계승한 자은사(慈恩寺)의 기(基)는 이러한 입장에서 호법의 학설을 정통으로서 강조했는데, 기 일파는 법상종(法相宗)에서 정통파로서 장안(長安)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원측은 유식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심식설(心識說)과 삼성·삼무성설(三性三無性說)의 해석을 둘러싸고 진제 계통의 구유식을 비판하면서도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기의 학설과는 경향을 달리했다. 중관 사상에 대하여도 대립을 화합시키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관과 유식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확한 이해에 힘쓰는 한편 양자의 사상적 대립을 지양하고자 했고 법상종이면서도 성종(性宗)적인 색채를 뚜렷이 띠었다. 인간관에 있어서 기 일파가 주장하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반대하고 화엄학이나 천태학에서 주장하는 일성개성설(一性皆成說)에 따랐다. 그결과 원측의 이러한 사상은 법상종 정통파를 자처하는 기 일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원측의 사상은 계속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신라 출신의 승려들이 주로 참여했다.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또한 원측의 후계자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를 둔황[敦煌] 지방으로 가지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법성(法成)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심밀경소〉 10권, 〈성유식론소 成唯識論疏〉 20권, 〈주별장 周別章〉 3권, 〈유식이십론소 唯識二十論疏〉 2권, 〈관소연연론소 觀所緣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 因明正理門論本疏〉 2권, 〈반야심경찬 般若心經贊〉 1권, 〈인왕경소 仁王經疏〉 6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인물사상사 : 오형근 외, 민족사, 1990 한국고대불교사상사 : 고익진,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한국의 인간상 3 : 조명기 외, 신구문화사, 1965 원측의 입당과 귀국문제 〈한국사학논총 - 박영석화갑〉 상 : 권덕영,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2 신라 원측법사의 유식사상 연구 〈불교학보〉 25 : 오형근,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8 원측의 불교적 인식론 〈철학사상의 제문제〉 : 신현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원측의 반야신경찬 연구 〈한국학보〉 9 : 정병조, 일지사, 1977 원측의 유식학설 연구 : 황성기,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76 원측법사의 심식설에 대하여 〈불교학보〉 13 : 오형근, 동국대학교 불교문화 연구원, 1976 원측의 유식사상 〈한국불교사상사 - 숭산 박길진 박사 화갑기념〉 : 원의범, 원광대학교 출판부, 1975 - 자료 : 브리테니카
원통법수(圓通法秀,1027-1090) 원통법수(圓通法秀,1027-1090):宋代 雲門宗, 秦州(감숙성) 城사람 성은 辛씨. 19세에 출가하여 受具하고 처음에 圓覺經, 華嚴經 등을 공부하다가 天衣義懷(설두중현의 제자,993-1064)의 法席에 참예하여 一大事를 요달, 법을 잇다. 후에 廬山 棲賢寺에 주하다가 王安石의 청에 의해 鍾山寺(강소성)에 居하다. 蔣山 長蘆寺에 住함에 會下大衆이 千名을 넘었다 한다. 元豊7년(1084) 東京(하남성) 法雲寺에 들어가 주하니 神宗이 圓通禪師라 賜號하다. 元祐5년 8월 64세로 입적.(속등록8, 선림승보전26, 회요28, 회원16)
원효(元曉,617-686) 원효(元曉,617-686):신라代 和諍국사,성은 薛씨 仍皮公의 손자 휘는 誓幢 별호는 小性, 卜性, 栗谷沙彌, 無碍人, 久龍. 압량군 佛地村(지금의 경산 자인면)사람. 25세에 皇龍寺로 출가하고 자기 집을 初開寺라 하고 출생지에 절을 지어 沙羅寺라 하다. 일찌기 芬皇寺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어 40권까지 저술하였으나 10廻向品에 이르러 그만두다. 또 [금강삼매경소 5권]을 지었으나 잃어버리고 다시 略疏 3권을 저술하니 이것이 [금강삼매경론]이다. 650년 義湘과 함께 入唐求法을 시도하다가 당항성(지금의 인천 南陽灣)에 이르러 水를 먹고 '一切唯心'의 도리를 깨닫고 遊學을 포기 독자적인 길을 걷다(元曉宗,芬皇宗,海東宗). 686년 경주부근 穴寺에서 세수 70으로 入寂. 1101년 고려 숙종이 '大聖和諍國師'라 追諡하고, 785년 薛聰의 아들 仲宗이 '誓幢和尙塔碑'를 세웠는데 지금도 碑片이 서울 景福宮에 있다. 저서:[金剛三昧經論 3권] [大乘起信論疏 2권] [遊心安樂道 1권] [法華經宗要 1권] [大慧度經宗要 1권] [涅槃經宗要 1권]등 총99부 240여권의 저술.
-------------------------- 元曉 617~686(진평왕 39~신문왕 6) 신라 중기 승려.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속성은 설씨(薛氏). 압량(押梁;지금의 慶山市) 불지촌(佛地村) 출신. 나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며,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그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율곡(栗谷)을 지나다 갑작스런 산기로 밤나무 밑에서 낳았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29세 때 출가를 결심, 집을 헐어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648년(진덕여왕 2) 황룡사(皇龍寺)로 들어가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했다. 34세 때 구법(求法)을 위해 의상(義湘)과 당(唐)나라로 떠났으나 중도에 귀환, 10년 뒤 다시 떠났다. 가는 도중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이튿날 <모든 사물과 법은 마음에서 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장안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네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노래해 무열왕이 이를 듣고 홀로 된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짝을 지어 주어 설총을 낳았다. 실계(失戒)한 그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 하며 속인 행세를 했다. 광대 복장으로 지내며 《화엄경(華嚴經)》의 이치를 쉬운 내용으로 담은 《무애가(無애歌)》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퍼뜨렸다. 그는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썼으나 총 100여 부 240권 중 20부 22권만이 현존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중국 고승들이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로서 분파된 불교이론을 하나의 진리로 종합, 정리하여 세운 화쟁사상(和諍思想)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과 함께 가장 독자적인 사상체계이다. 혈사(穴寺)에서 죽었고,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諡號)를 주었다. 주요저서로는 《화엄경소》 《해심밀경소》 《발심수행장》 《삼론종요》 《십문화쟁론》 《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 《미륵상생경종요》 등이 있다. ▣
월굴혜청(月窟慧淸) 월굴혜청(月窟慧淸, ):송대스님(대개 1130-1200때의 고승), 월굴은 호 이름은 慧淸, 福州福淸사람. 어려서 洞里사람이 불에 타죽는 것을 보고 말하대,'나는 부처가 되어 猛火에 태움을 받지 않겠다'하니 그의 부모가 이상히 여겼다. 14세에 출가하여 湖州何山에 가서 復庵에게 중이 되고 뒤에 遯庵(華藏守演,大慧 의 法嗣)의 법을 잇다.(增續傳燈錄1, 枯崖和尙漫錄下, 월굴집)
월초거연(月初巨淵,1858-1934) 월초거연(月初巨淵,1858-1934):근대 스님, 교육가. 서울태생 성은 洪씨. 15세에 송릉리 부도암 幻翁에게 득도하고, 32세까지 제방 강원, 선원에서 수행하다. 1900년 고양군 은평면에 守國寺를 창건하고, 高宗의 동궁이 아플 때 雲門寺 舍利窟에 백일기도로 쾌차케 한 공덕으로 불사를 완성하다. 1906년 동대문 밖 元興 寺에 明進學校를 열어 승려교육에 힘쓰니 東國大學의 효시이다. 1913년 奉先寺 주지에 추대되고, 1927년 사재를 들여 開運寺 講院의 설립을 도우고, 1934년 봉선사에 弘法講院을 설립 耘虛스님을 강사로 승려교육에 힘쓰다가 그해 4월 봉선사에서 입적하다. 行狀碑가 봉선사와 수국사에 있다.
위산영우(山靈祐,771-853) 위산영우( 山靈祐,771-853):백장회해의 제자, 福州長鷄사람 성은 趙씨. 大圓은 唐代宗의 시호. 15세에 출가하여 建善寺 法常에게 중이 되고 23세에 百丈의 제자가 됨. 元和말년 長沙로 가던 도중 大 山에 머물러 禪敎를 40여년 베풀고 大中7년에 입적, 나이 83세. 뒤에 제자 慧寂이 위앙종을 열다.(傳燈9, 會元3)(송고승전11, 조당집18, 전등록9, 傳唐文820, 會元3)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달마선법의 제6대 조사, 黃梅弘忍의 嫡子. 영남薪州사람(父는 南海新興사람) 호는 曹溪, 시호는 大鑑 성은 盧씨. 3살에 父를 여의고 뗄나무를 팔아 母를 봉양하다가, 어느날 장터에서 어떤 스님이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心眼이 열리다. 咸亨年間에 無盡藏비구니가 [열반경]독송함을 듣고 그뜻을 알았으며, 676년 南方으로 가서 敎化하다가 조계산에 들어가 大法宣揚. 그의 門下로부터 五宗七家 즉 禪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다. 43인의 전법제자 가운데 南岳讓, 靑原思, 荷澤會, 南陽忠등이 뛰어남.(송고승전8, 傳燈錄5, 傳法正宗記6, 宗門統要續集제2)
------------------- 慧能 638∼713 중국 당나라 승려. 광둥성〔廣東省〕 출생. 속성은 노(廬)씨. 선종(禪宗)의 제 6 조로 남종(南宗)을 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느날 장터에서 《금강경(金剛經)》 읽는 것을 듣고 출가할 뜻을 세워 선종 제 5 조 홍인(弘忍)의 문하에 들어갔다. 8개월 동안 행자노릇을 한 뒤 <보리가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 또한 거울이 아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서 티끌이 생긴단 말인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게송을 지어 불교의 이치를 터득했음을 보이자 홍인이 그에게 선법(禪法)을 전수하고 법의를 주었다. 676년 남방으로 가서 교화를 펴다가 광둥〔廣東〕지방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정혜불이(定慧不二)를 설하고, 좌선보다 돈오법문(頓悟法門;한꺼번에 깨닫는 가르침)을 크게 열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선양하였다. 동문수학한 신수(神秀)가 펴는 북종선(北宗禪)에 맞서 남종선을 열었는데, 후세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서 신회(神會)·혜충(慧忠)·현각(玄覺)·행사(行思)·회양(懷讓) 등이 남종선을 더욱 발전시켰다. 제자 법해(法海) 등에 의해 편찬된 그의 어록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오늘날까지 선·교를 막론하고 귀중한 책으로 평가된다. - 한메백과
응암담화(應庵曇華,1102-1163) 응암담화(應庵曇華,1102-1163):南宋代스님 州사람, 성은 汪씨 응암은 호 이름은 曇華. 17세에 출가하고 18세에 受具하다. 후에 선지식을 참방하다가 東禪에게 圓悟禪師가 雲居山에 계신단 말을 듣고 華가 가서 시봉하였으나 悟가 밀쳐서 虎口隆에게 지시하니 紹隆을 1년 시봉하고는 頓明大事하다. 그의 開堂時 示衆法語를 大慧 가 보고는 극구칭찬하였는데 偈曰,"坐斷金輪第一峰 千妖百怪盡潛踪 年來又得眞消息 報道楊岐正脈通"이라 하다. 宋隆興원년 6월 13일 入寂, 나이 61세.(대명고승전6, 계고략4)
의상(義湘,625-702) 의상(義湘,625-702):海東華嚴初祖, 성은 金씨. 20세에 皇福寺로 출가하여 650년 원효와 함께 入唐求法을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661년 당나라 사신의 배편으로 건너가 終南山 至相寺 智儼門下에서 화엄을 연구하여 [法界圖]로 인가를 받고, 문무왕10년(670) 귀국하여 太白山에 浮石寺를 창건 화엄을 講說하다. 692년 勝詮법사 귀국시에 賢首의 저술(華嚴經探玄記)에 대한 問法質疑書인 서신을 전해받고 화답하다. 78세로 입적하니 고려숙종이 圓敎國師라 시호하다. 그의 문하에 悟眞 智通 表訓 眞定등의 十大德이 있다. 저서:[華嚴一乘法界圖] [白花道場發願文]
---------------- 義湘 625∼702(진평왕 47∼성덕왕 1)
신라시대 고승(高僧). 속성은 김씨(金氏).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다. 19살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왕 4) 원효(元曉)와 함께 구법(求法)을 위해 당(唐)나라로 가던 중 난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가,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가 양주(揚州)에 머물렀다. 그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지엄(智儼)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구도(求道)에 정진하여 화엄의 이치를 깨달았다. 670년 귀국하여 낙산사(洛山寺) 관음굴(觀音窟)에서 신라에 화엄대교가 퍼지기를 기원하며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어 관세음보살에게 바쳤다. 676년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熊州)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비슬산(琵瑟山) 옥천사(玉泉寺), 전주 국신사(國神寺) 등의 화엄10찰(華嚴十刹)을 짓고 강술과 전교에 힘썼다. 그에게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을 사람들은 10대덕(十大德)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항상 의상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한메백과▣
이광수(李光洙,1892- ) 이광수(李光洙,1892- ):근대문인, 平北定州사람 耘虛스님의 6촌형이다. 1902년 日進會의 후원으로 일본유학,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뒤에 '皇國臣民化 운동'에 앞장서다가 해방후 反民特委에 회부되었다가 6.25사변통에 拉北되다. 그는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초년에는 基督敎를 믿었으나 중년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圓覺經]을 즐겨 독송하고 金剛山 普光庵의 月河老師의 영향으로[法華經]에 심취하며 耘虛스님과 교분이 잦았다. 1975년 朱耀翰등 동지들의 주선으로 奉先寺에 기념비를 세웠다(1975). ----------------------- 李光洙 1892∼1950
소설가·평론가·언론인.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3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905년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가 학비곤란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편입, 이 무렵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시·소설·문학론·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0년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5년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 이듬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으며,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上海〕로 탈출, 안창호(安昌浩)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고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21년 귀국한 뒤 《개벽》에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고, 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 <허생전(1924)> <재생(1924)>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흙(1932)>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사랑》 《무명》을 발표하였다. 39년 조선문인협회장이 되었고, 이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본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중 병보석되었다가, 50년 납북되어 자강도 만포시(滿浦市)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을 보여 친일문학가로 보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 한메백과▣
이사(李斯, -208B.C) 이사(李斯, -208B.C):秦代 楚나라 上蔡사람. 秦의 客卿이 되어 始皇帝를 도와 천하를 통일, 후에 丞相이 되어 郡縣制를 실시하다. 焚書坑儒로 사상통일을 강행하고 小篆을 창작하는 등 공이 컸으나, 시황제 逝後 趙 高와 함께 長子 扶蘇를 弑害하고 二世皇帝 胡亥를 擁立하고서 조고의 참소로 처형당하다.
일연(一然,1206-1289) 일연(一然,1206-1289):고려스님, 普覺國尊. 휘는 見明(혹 景明), 성은 金씨 章山郡(지금의 경산)사람. 9살에 해양 무량사에 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陣田大雄에게 출가하여 22세에 僧科에서 上上科에 뽑히고, 그 후부터 '生界不滅 佛界不增'의 話頭를 참구하여 大悟하다. 72세에 雲門寺에서 禪風을 드날리는 한편 三國遺事를 집필하기 시작하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麟角寺에 옮겨 있으면서 遺事를 완성하다. 84세에 禪床에 앉아 問答垂示하고는 金剛印을 結하고 입적. 저서:[삼국유사 5권] [重編曹洞五位 2권] [祖庭事苑 30권] [語錄 2권] [선문염송사원 30권]등. 행적비가 운문사 東岡에 있고, 인각사에 塔碑가 碑片으로 남아 있다.
------------------------------ 一然 1206∼1289(희종 2∼충렬왕 15)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해양(*陽;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수행하였고, 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현풍(玄風)의 보당암(寶幢庵)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하였다.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고, 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와 이 절을 주재하며 대장경을 주조하던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었고,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영일(迎日)에 있는 오어사(吾魚社), 달성(達城) 인홍사(仁弘社;뒤에 仁興寺)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고, 77년(충렬왕 3)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 왕을 따라 경주(慶州)에 머무르며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으며, 89년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를 지었는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로는 《화록(話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 이상 한메백과 ▣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임제의현(臨濟義玄, -867):唐代 南岳下, 臨濟宗 開祖, 曹州(하남성) 南華人 성은 邢씨. 어려서는 재주있다고 말을 듣더니 커서는 孝子라 칭찬받다. 불교를 좋아하여 出家, 受具하고는 諸方의 高僧에게 배우고 三藏을 공부하는 가운데 律과 華嚴을 연구하다. 나중에 불교의 진수를 찾고자 遊方하여 黃檗希運에게 참예하여 非凡한 기틀을 인정받고 禪旨를 참구하다가 悟境에 이르러 황벽의 指示로 高安大愚(불상, 歸宗智常의 제자)에 참예하고(大愚三拳), 山을 배알하고 黃檗에게 돌아오다. 때에 희운은 證表로 百丈의 禪板과 案을 주고 印可하였다. 그 뒤 제방의 尊宿을 歷訪하다가 大中 8년(854) 鎭州(하북성) 동남쪽 강변 근처의 작은 절에 주하였다. 그후 太尉 默君和는 자신의 居宅을 절로 만들어 師를 모시고 臨濟院이라 불렀다. 師의 禪風을 흠모하는 이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끊이지 않으니 師叔인 普化와 克符도 師의 敎化를 도왔다. 그 뒤 戰亂을 피해 河南府로 오니 府主 王常侍는 스승의 예로 영접하다. 그 뒤 大名府(하북성)의 興化寺 東堂에 주하였다. 師는 아무런 병없이 지내다가 어느날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三聖과 問答하고는 고요히 입적하니 때는 咸通 8년 정월 10일이었다. 제자들이 師의 全身으로 大名府 서쪽에 탑을 세우니, 시호는 慧照선사, 탑호는 澄靈이라 하다. 門下 上足으로 三聖慧然, 興化存奬, 灌谿志閑, 幽州譚空, 寶壽沼, 魏府大覺 등 22인이 있다. 삼성은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을 편록하다. 그의 禪風은 大自由와 活潑潑地의 殺活自在로운 가풍이며, 禪門大宗匠의 면목을 躍如하게 전하고 있다. 그의 法系는 宋代에 크게 興하더니 淸代에는 一代主流를 형성하였다. 그의 法語 方便에 '三玄三要, 臨濟四喝, 四料揀' 등이 있다.(全唐文920 塔記, 臨濟錄 碑銘, 조당집19, 송고승전12, 전등록12, 전법정종기7, 통기42, 廣燈錄10, 속등록1, 회요9, 회원11)
자각종색(慈覺宗 ,1009-1092) 자각종색(慈覺宗 ,1009-1092):宋代 雲門宗스님, 성은 孫씨 洛州人, 長蘆應夫의 法嗣. 장로는 산이름인데 사의 호가 됨. 어려서부터 儒家에 널리 통하고 문장에도 능하다. 29세에 圓通法秀에게 출가하고 長蘆應夫의 법을 잇다. 그는 또 어머니를 方丈의 東室에 모시고 奉養하며 부지런히 念佛에 精進했고, 晩年에는 緣社를 맺어 淨法을 닦았다. 저서:[坐禪儀] [禪苑淸規 10권]등
자운준식(慈雲遵式,964-1032) 자운준식(慈雲遵式,964-1032):송대 天台宗(山外派) 스님 天台寧海 사람 성은 葉씨 자는 知白, 慈雲懺主. 자운은 宋眞宗이 내린 시호, 이름은 遵式. 처음 禪을 배우면서 戒律도 겸하여 닦았다. 뒤에 천태산 國淸寺의 普賢菩薩像 앞에서 한 손가락을 태워 천태교학 연구를 맹서하고 1001년 큰 가뭄을 당하여 비를 빌자 영험을 얻다. 四明山 寶雲義通(고려스님,927-988)에게 천태교를 배우고 知禮와 가까이하다. 28세에 義通의 講席을 전해받아 法華, 維摩, 涅槃, 金光明經 등을 강하다. 그 뒤에 천태산 서쪽에 암자를 짓고 대중과 함께 念佛三昧를 닦고, 1024년 조정에 奏請하여 天台의 敎文을 대장경 속에 넣게 하였다. 宋仁宗 明道원년 10월 8일 입적 세수는 69.(天竺別集下, 津文集12) 저서:[十不二門詳解 2권] [往生淨土決疑行願二門] [法門淨土略釋] [敎藏隨函目錄]등.
자은규기(慈恩窺基,632-682) 자은규기(慈恩窺基,632-682):당대스님, 法相宗의 시조. 京兆長安사람, 성은 尉遲씨(近衛將軍 尉遲敬宗의 子) 자은은 호, 자는 洪道 이름은 규기(별호는 三車法師). 17세에 출가하여 玄 의 제자가 되어 廣福寺에 머물다가 23세에 勅選에 뽑혀 大僧이 되고 大慈恩寺에서 현장에게 五天竺의 말을 배우고 25세에 經論번역에 참여하여 [成唯識論] 등을 번역하다. 뒤에 현장에게 唯識,因明學을 배우고 天台山, 泰恒山 등에 住하다가 唐高宗 永淳원년 11월 13일 자은사 譯經院에서 51세로 입적하다. 그의 성품이 豪俊하여 출입시에 항상 三車에 經書와 음식을 준비하는지라 '三車法師' 또 '百本疏主'라 칭하고, 그의 敎를 慈恩敎라 하였다.(대자은사삼장법사전10, 開元釋敎錄8, 송고승전4, 통기29, 통재15, 계고략3, 神僧傳6, 東域傳燈目錄) 저서:[成唯識論述記] [大乘法苑義林章] [攝大乘論 ]등 50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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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 속성 위츠[尉遲]. 자 홍도(洪道). 중국 경조(京兆) 장안 출신. 대개 규기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기(基)라 해야 하며, 자은대사(慈恩大師)라고도 한다. 17세에 출가, 현장(玄)의 제자가 되었으며, 28세 때 스승을 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하였다. 이때 인도의 많은 논사(論師)들 중에서 호법(護法)의 학설을 가장 올바른 것이라 보고 번역하였으므로 후세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성유식론》을 계속 연구,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장중추요(掌中樞要)》 등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유가론약찬(瑜伽論略纂)》 《법화현찬(法華玄贊)》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 등 50부(部)를 저술하자 사람들이 그를 ‘백본소주(百本疏主)’ ‘백본론사(百本論師)’라고 하였다. 그의 저술 중 《대승법원의림장》과 《성유식론술기》에 의거, 법상종을 일으켰으며, 이는 그가 자은사(慈恩寺)에 오래 머무른 까닭에 자은교(慈恩敎)라고도 한다.
자장율사 속성 김(金). 이름 선종(善宗). 진골(眞骨) 출신인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아들. 일찍 부모를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선덕여왕이 대보(臺輔)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636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을 만나보고 가사(袈裟)와 사리를 받았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華嚴宗)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 장경(藏經) 1 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芬皇寺)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皇龍寺)에서 대승론(大乘論)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설한 후,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니(僧尼)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였다. 황룡사 9층탑 창건을 건의, 645년에 완성한 데 이어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이듬해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제경계소(諸經戒疏)》(10권)와 《출관행법(出觀行法)》을 지어 율부(律部)를 넓혔다. 649년에는 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했으며, 당나라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서울을 떠나 강릉(江陵)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 정암사(石南院, 현 淨巖寺)를 세워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후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로 받들어졌다.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磨私記)》 《십송율목차기(十誦律目次記)》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등의 저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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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조온총(慈照蘊聰,965-1032) 자조온총(慈照蘊聰,965-1032):송대스님 임제종, 남해(광동성)사람 성은 張, 首山省念의 法嗣. 출가한 후 百丈道常에 詣하고 다음으로 수산성념(926-993)에게서 大悟徹底하였다. 그뒤 襄州 洞山守初, 州 大陽警玄, 隨州 智門師戒 등을 歷 한 후 景德3년(1006) 양주 石門山에 주하다. 天禧4년(1020) 谷隱山 太平興國禪寺에 옮겨 주하니 兩山에 모인 대중이 千을 헤아리다. 그는 또 翰林 楊文億, 中山劉筠 등과 方外의 親交를 맺고 지내었다. 天聖10년 3월에 示寂하니 세수 68세, 慈照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李遵 이 碑文을 짓다. 어록으로 [石門山慈照禪師鳳巖集1권]이 있다.(광등록17, 회요12, 보등록1, 회원11, 계고략4)
자하(子夏,507- ?B.C) 자하(子夏,507- ?B.C):춘추시대 孔門十哲의 한사람, 본명은 卜商 자는 자하, 위나라 文侯의 스승. 공자의 제자 가운데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 文學 禮樂에 뛰어났으며, 일설에 詩序와 易傳은 그의 저술이라 하다.
작소도림(鵲巢道林,741-824) 작소도림(鵲巢道林,741-824):당대 徑山道欽의 法嗣, 작소는 호(鳥 라고도 씀) 도림은 字, 성은 藩씨 杭州富陽人. 어머니가 '日光이 입으로 드는' 胎夢을 꾸고 뒤에 태어남에 방에 향기와 빛이 가득하여 이름을 香光이라 하다. 9세에 출가하고 21세에 荊州 果願寺에서 受具하다. 長安 西明寺 復禮에게 [華嚴經][起信論]을 배우면서 禪을 닦고, 뒤에 경산의 道欽을 찾아가 心要를 깨닫다. 후에 남쪽 錢塘孤山의 永福寺에 가는 도중, 西湖의 秦望山에 나뭇가지가 茂盛하여 日傘과 같이 된 長松을 보고 항상 그 위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鳥 또는 鵲巢禪師라 불리웠다. 元和년간에 白居易가 太守로 와서 師를 찾아와서는 '계신 곳이 심히 위험합니다' 하니, 師曰,'太守가 위험한 것이 더욱 심하오. 번뇌의 불이 서로 교차하고 識性이 멈추지 않으니 위험할 수 밖에'라 하니, 白이 又問曰,'如何是佛法大義' 師曰,'諸惡莫作 衆善奉行' 白曰,'三歲孩兒也解恁 道' 師曰,'三歲孩兒雖得道 八十老人行不得'라 하다. 唐 長慶4년 2월 84세로 入寂. 시호는 圓修禪師(전등4, 稽古略3)
장경호(張敬浩:1899-1975) 장경호(張敬浩:1899-1975)거사 실업가, 불교 대중화 운동의 선구자. 자호는 大圓, 본관은 仁同. 1899년 9월 7일 부산 동래구 사중면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張允植, 어머니는 文念伊.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를 따라 7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14세에 普城高普에 진학했으며 18세에 秋命順(법명은 積善華)과 결혼하였다. 1919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 뒤 日警을 피해 친구 許 政(정치인)과 함께 숨어 다니다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듬해 귀국, 신앙이 더욱 깊어져 1925년 通度寺의 동안거에 동참하여 九河天輔(1872-1965)로부터 법문을 듣고 禪을 배웠다. 안거 해제일에 '商業에 종사하여 돈을 크게 벌어 불교에 바치겠다'고 맹서하고, 근검절약하며 사업을 폈다. 사업을 하는 중에도 죽을 때까지 1년중 동안거만은 절에서 수행에 몰두했으며 집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하루 4시간씩 참선에 몰두했다. 때로는 曉峰元明, 香谷蕙林, 鏡峰靖錫 등과 함께 정진했다. 손을 댄 사업마다 성공하여 마침내 1954년 동국제강주식회사를 설립, 모두 18개 회사를 거느리는 국내 5대기업의 하나로 성장했다. 불교의 大衆化를 위해 1967년 불서보급사를 세워 불교서적의 출판과 보급에 힘을 쓰며, 1970년 재단법인 '大圓精舍'를 세워 장학사업을 펴고, 수십 군데의 군부대와 사찰에 법당을 건립해 주는 등 각종불사를 지원했다. 1973년 5월 南山에 大圓佛敎會館을 건립하여 신행단체로서 대원회를 육성하였다. 또한 누차 불교방송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성취하지는 못했다. 1975년 7월 당시 朴正熙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모든 私財 30억 6천만원을 내놓으니 불교중흥을 위해 써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이 해 9월 9일 죽었다. 이를 기본자산으로 하여 1975년 8월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회'가 설립되었으며 1990년 5월 1일 개국한 불교방송(BBS)의 설립기반이 되었다.[월간 대원 제31호]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唐代 南岳下, 泉州(복건성) 同安縣 사람, 성은 謝씨. 貞元初에 洪州 馬祖를 拜謁하고 心要를 얻은 후, 濟州(산동성) 靈巖寺에 寓居하다가 定州(하북성) 百巖寺에 주하며 禪法을 폈다. 元和3년(808) 勅令에 의해 京兆府(장안) 章敬寺의 毘盧遮那院에 주하다가 元和10년 12월 62세로 示寂. 시호는 大覺禪師, 賈島가 碑文을 權德輿가 碑銘을 지었다.(全唐文501 唐故章敬寺百巖大師碑銘幷序, 조당집14, 송고승전10, 전등록7)
징관 [ 澄觀 ] 화엄종(華嚴宗) 제4대조. 청량대사(淸凉大師) ·화엄보살(華嚴菩薩)로 호칭된다. 월주(越州:浙江省)에서 태어나 체진(體眞)에게 사사하고 11세에 출가하였다. 담일(曇一)에게서 남산율(南山律), 상조(常照)에게서 보살계(菩薩戒), 무명(無名) ·혜충(慧忠) ·법흠(法欽)에게서 선(禪), 법선(法詵)에게서 화엄(華嚴) ·기신(起信), 담연(湛然)에게서 천태(天台)의 가르침을 각각 받고, 불공(不空:西域 출신)의 역장(譯場)에 참여하였다.
《화엄경소(華嚴經疏)》(60권) 《수소연의초(隨疏演義)》(90권) 《사십화엄소(四十華嚴疏)》 《행원품소(行願品疏)》 《법계현경(法界玄鏡)》등 많은 저서를 지었으며, 혜원(慧苑)의 학설을 꺾고 법장(法藏)을 조술(祖述)하였으므로 화엄종의 제4조로 일컬어졌다. 《교판론(敎判論)》에서 화엄을 돈돈(頓頓), 법화(法華)를 점돈(漸頓)이라 하고 선종을 돈교(頓敎)로 정의하였으며, 법상종(法相宗)을 삼론종(三論宗)의 아래에 두는 등 법장이 융화적인 데 비해 그는 비판적이었다.
한편 교(敎)와 선(禪)의 통로를 제시하기도 하였고, 실천을 중히 여겨 《오온관(五蘊觀)》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등을 저술하였다.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제자로는 종밀(宗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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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성(張九成, -1155?) 장구성(張九成, -1155?):宋代 관리및 학자, 開封(하남성)사람 자는 子韶, 無垢居士, 橫浦居士. 紹興2년(1132) 進士에 급제하고 禮部侍郞, 鎭東軍簽判, 太常博士를 지내다. 재상 秦檜의 배척으로 流配당하였으나 소흥25년(1155) 진회의 死去로 인해 溫州자사에 복귀되었지만 병으로 수개월만에 죽다. 大慧宗 (1089-1163)에 참예하여 신임이 두터웠으며, 兩者間의 사상적 교유는 當代에 큰 영향을 미쳤다.(宋史374)
장사경잠(長沙景岑) 장사경잠(長沙景岑, ):당대 남악하, 어려서 출가하여 南泉普願(748-834)을 참예하여 법을 잇다. 처음 長沙(호남성)의 鹿苑寺에 주하다. 長沙山에 오래 주하며 법을 폈으므로 長沙和尙이라 칭하였으며, 그의 機鋒이 峻 하여 仰山(803-887)은 '岑大蟲(虎)'이라 불렀다 한다. 시호는 招賢大師.(조당집17, 전등록10, 회요6, 회원4, 통재17)
장상영(張商英,1043-1122) 장상영(張商英,1043-1122):송대 정치가, 無盡居士 상영은 이름, 자는 天覺 蜀中新津人. 19세에 급제하고 神宗때에 荊公(왕안석)과 함께 '新法'에 대해 共議하다. 처음에는 불교를 싫어하여 '무불론'을 써서 배척하려 하였으나 뒤에 우연히 [維摩經]을 읽고 正信을 일으켰다. 元祐년간에 오대산에 文殊像을 塑成하고 發願文을 지었다. 東林總선사에게 禪을 묻고, 다시 兜率悅을 參謁하여 비로소 깨치다. 뒤에 眞淨文화상에 나아가 言下에 大悟하다. 大觀4년(1110)에 丞相이 되고(中書侍郞) 宋宣和4년 11월에 逝하다. 시호는 文忠. 저서로 [護法論]등.
장안관정(章安灌頂,561-632) 장안관정(章安灌頂,561-632):천태종 제4조, 이름은 관정 章安은 호, 자는 法雲 성은 吳씨, 臨海章安 사람. 7세에 출가하여 23살에 천태산 智 를 뵙고 항상 곁에 있으면서 智者의 설법을 기록하다. 지자입적후 그의 유언에 따라 國淸寺에서 강설에 힘쓰고 뒤에는 주로 많은 책을 짓다. 唐貞觀 6년 8월 국청사에서 입적하다. 나이 72.(속고승전19, 淨土往生傳12, 통기7 25) 저서:[觀心論疏 5권] [國淸百錄 4권]등.
정중무상(淨衆無相,684-762) 정중무상(淨衆無相,684-762):신라스님, 益州金和尙(입당구법歸化僧), 성은 金씨(신라국왕의 제3자). 本國 群南寺로 출가수계한 후 開元16년(728, 성덕왕27년) 入唐하여 玄宗을 拜謁하고, 蜀땅에 들어가 資州(사천성) 德純寺 處寂(648-732 또는 665-732;智詵의 제자)에게 師事하여 摩納袈裟를 받고 법을 잇다. 항상 頭陀行을 하고 깊은 계곡의 바위아래에서 선정을 익혔으며, 후에 成都府 淨衆寺에 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0년간 독자적인 '引聲念佛과 無憶 無念 莫忘의 三句說法'을 선양하였고, 益州節度使 章仇兼瓊의 귀의를 받아 淨衆派를 형성하였다. 그는 깊은 계곡 바위아래에서 참선하곤 하다가 裸身으로 猛獸에게 布施하려 하면 두마리의 맹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만 맡고 떠나며, 城中에서 낮에는 무덤에서 밤에는 樹下에서 좌선하는 두타행을 계속하니 사람들이 무덤앞에 精舍를 지어주는 등 중국인에게 그는 神異를 자주 보이는 '感通의 高僧'이었다(송고승전 19). 寶應원년 5월 79세로 示寂하니 益州刺史 韓 이 碑文을 짓고 '東海大師塔'이라 하였다. 최근의 學說에 의하여 티벳의 古史書 [바세]에 의하면 티벳불교의 初傳인 '라사의 宗論' 이전에 이미 익주김화상의 淨衆禪法이 티벳트에 소개된 史實이 밝혀졌다.(山口瑞鳳씨의 "티벳불교와 新羅金和尙" 등) 제자로 保唐無住, 馬祖道一, 淨衆神會, 王頭陀 등.(曆代法寶記, 송고승전19 무상전, 圓覺經大疏抄3 下, 北山錄6, 전당문780 四證堂碑銘)
조계(曹溪) 조계(曹溪):육조혜능의 別號. 원래 중국 廣東省 소주부의 동남쪽 30리 雙峰山 아래 있는 땅이름. 667년 曺叔良으로부터 이 땅을 喜捨받아 寶林寺를 짓고 禪風을 大振하다. 입적한 뒤에 全身을 이곳에 묻었으므로 육조의 별호가 되다.
조산본적(曹山本寂,839-901) 조산본적(曹山本寂,839-901):동산양개의 제자. 泉州 田人 성은 黃씨. 처음에 동산양개에게 宗旨를 받고 撫州 曹山 崇壽院에 있다가 다시 荷玉山으로 옮겨 이 두 곳에서 法席을 융성시킴. 號는 曹山 시호는 元證선사.
조영긍(趙令矜 혹은 衿) 조영긍(趙令矜 혹은 衿, ):宋代宰官, 송태조의 5대손, 博學能文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秦檜를 거스르다가 곧 죽게 되었는데 마침 秦檜가 먼저 卒함에 사면되다. 일찌기 圓悟勤을 참예하여 법을 깨닫고는 제자가 되다. 자는 表之, 超然居士는 법호. 丞相 張商英과 함께 당시 거사불교를 이끌다.
조주종심(趙州從 ,778-897) 조주종심(趙州從 ,778-897):南泉普願의 제자. 唐代 曹州人, 성은 씨. 어려서 曹州의 扈通院으로 출가하고 南泉에게 가니 남전이 마침 누워 있다가, '어느 곳에서 왔는가' '瑞像院에서 왔읍니다' '瑞像을 보았는가' '瑞像은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부처를 보았읍니다' '네가 有主沙彌냐 무주사미냐' '유주사미입니다' '主가 어디 있느냐' 조주,'동짓달이 매우 춥사온데 體候 萬福하시나이까'하니 入室을 허락하다. 또 黃檗, 寶壽, 官, 夾山 등을 歷 하다. 대중의 청에 의해 趙州(광동성) 觀音院에 주하고, 40여년을 독자적인 선풍을 드날리다. 그는 학인을 提接하는 方便이 뛰어나 많은 공안이 있다. 唐建寧4년 11월 120세로 입적. 시호는 眞際大師(송고승전11, 조당집18, 전등록10, 회요6, 회원4) 저서:[趙州錄] [진제대사어록 3권]
좌계현랑(左溪玄朗,673-754) 좌계현랑(左溪玄朗,673-754):唐代 天台宗스님, 慧威의 제자. 자는 慧明 성은 傅씨(傅大士 6代孫), 州 烏傷縣 사람. 7세에 출가하고 20세에 東陽의 淸泰寺에서 律儀를 배우고 淸宮寺 慧威에게 법화, 유마, 지도론, 止觀을 배우다. 天性이 山林을 좋아하고 世俗을 싫어하며 止觀을 닦다. 州 左溪山에 숨어 한 방에 앉아 있기를 30여년동안 하였다. 특히 涅槃經에 精通. 세수 82세 시호는 明覺尊者.(宋高僧傳26, 統紀7, 通載17, 古略 3, 釋門正統2) 저서:[法華經科文 2권]
주공(周公) 주공(周公):周나라 政治家, 文王의 아들이며 武王의 동생, 이름은 旦. 형 무왕을 도와 殷을 멸함. 무왕이 죽고 成王이 즉위하자 攝政이 되어 周王室의 기초를 튼튼케 하다. 周代 禮樂制度의 대부분은 그의 經綸에 의한 것이며, [周禮]의 저자로 전해진다. 孔子가 가장 欽慕하였고 道德政治의 실천자이다.
주자(朱子,1130-1200) 주자(朱子,1130-1200):南宋代 性理學을 대성한 大儒. 안휘 源사람, 이름은 熹 자는 元晦, 호는 晦庵,晦翁등. 저서:[詩集傳] [四書集註] [資治通鑑綱目] [小學]
증자(曾子,506- ) 증자(曾子,506- ):춘추시대 魯나라 사상가, 이름은 參 자는 子輿, 공자의 제자. 孝道를 역설하였고, 공자의 사상을 祖述하여 공자의 손자인 子思에게 전함.
지승(智昇) 지승(智昇, ):唐代스님, 출신성명 및 生沒年 未詳. 일찌기 출가하여 大敎를 弘布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經論을 공부하다. 특히 律에 밝았으며 史學에 博識하였다. 일찌기 道眞, 道安, 道宣에 이르는 諸經錄을 보고 그 잘못을 고치려 하였다. 開元18년(730) 長安 崇福寺 東塔院에서 [개원석교록]을 撰述하다. 이 저술은 當代까지 중국에서 傳譯된 大小乘三藏과 失譯缺本된 것을 모두 기록한 名著로 이후로는이 책을 의거하게 되다. 저서:[開元釋敎錄 20권] [개원석교록略出 4권] [續大唐內典錄1권] [續集古今佛道論衡 1권] [集諸經禮懺儀 2권]
지엄(智儼,600-668 일설에 590-668) 지엄(智儼,600-668 일설에 590-668):당대 화엄2조 天水사람, 杜順의 제자. 성은 趙씨 호는 雲華,至相尊者. 法常에게 [攝大乘論]을 배우고 智正에게 [華嚴經]을 배우다가 '別敎一乘'의 奧義를 깨닫다. 저서:[화엄경搜玄記] [화엄五十要問答] [一乘十玄門] [화엄孔目章]
지장(開善智藏,458-522) 지장(開善智藏,458-522):南北朝代 학승, 吳郡(江蘇省蘇州府 吳縣治)사람, 성은 顧씨, 처음이름은 淨藏 호는 開善. 어려서부터 聰明하였고 16세에 출가하여 詔勅으로 興皇寺에 머무르며 上定林寺의 僧遠, 僧祐와 함께 天安寺 弘宗에게 師事하였다. 당시 僧柔, 慧次의 名聲을 듣고 受學하다. 齊나라 太武帝가 20여명의 高僧을 초청한 法會에 어린나이로 末席에 참여하여 [淨名經] 강의로 명성을 얻다. 粱武帝가크게 불법을 일으킴에 鐘山保誌의 墓앞에 開善寺를 창건하여 師를 머물게 하다. 그 때에 占相者가 師를 보고는,'스님의 聰辯은 一世를 덥고 名聲이 天下에 알려지지만 31세에 입적한다'하니 師의 時年이 29세라 강의를 문득 쉬고 大誓願을 발하여 山門밖을 나가지 않으며 誦般若經 晝夜不輟하니 문득 空中聲曰,'汝以般若功力 得倍報年'이라 하다. 이후로 道俗이 다투어 般若經을 持誦하여 靈驗을 얻다. 師가 어느 때에 "佛法大海는 俗人이 알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後에 彭成寺에서 [成實論]을 강하고 慧輪殿에서 [반야경]을 강의하였다. 그는 光定寺 法雲, 莊嚴寺 僧旻과 함께 梁나라 '三大法師'라 칭하다. 普通3년 9월에 65세로 입적.(속고승전5, 釋氏六帖10, 통재9, 계고략2, 三國佛法傳通緣起上) 저서:[大小品般若, 涅槃, 法華, 十地, 金光明經 등의 義疏] [成實, 百論, 阿毘曇心論 등의 義疏]
지효룡(支孝龍) 지효룡(支孝龍, ):중국 東晋代 스님, 淮陽人(河南省淮陽縣) 孝龍은 이름 또는 法龍. 고승전권4에, '풍자見重 神彩卓 高論適時'라 하다
진정극문(眞淨克文,1025-1102) 진정극문(眞淨克文,1025-1102):임제종 황룡혜남의 제자, 陜府 鄕사람 성은 鄭씨. 호는 雲庵,眞淨, 潭,寶峰등. 어려서부터 傑出하여 繼母슬하에 지내다가 아버지가 遊學하라 하자 復州(湖北省)의 北塔에 있던 廣公의 설법을 듣고 師事하면서 克文이란 이름을 받다. 25세에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에 經論을 공부하다가 治平2년(1065) 大 山에서 안거하다. 어떤 중이 雲門文偃의 法語를 외우는 것을 듣고 깨달아 積翠의 黃龍慧南을 뵙고 법을 잇다. 熙寧7년(1074) 金陵에 이르러 舒王의 귀의를 받고 報寧寺에서 開山하다. 뒤에 張商英의 청을 받고 潭에 주하다가 雲庵에 물러나 閑居하다가 崇寧원년 10월에 示寂하다. 세수 78. 晦堂祖心, 東林常 과 함께 황룡파의 발전에 힘쓰다. 제자로 兜率從悅, 壽寧善資, 洞山至乾, 潭文準, 覺範慧洪 등이 있다.(石門文字禪30 行狀, 속등록13, 선림승보전23, 회요14, 회원17) 저서:[雲庵眞淨禪師語錄 6권] [운암진정화상行狀(覺範慧洪撰)]
진존숙(陳尊宿,) 진존숙(陳尊宿, ):黃檗希運의 제자, 휘는 도명 호는 睦州, 진존숙은 別號, 성은 陳씨. 후에 목주 龍興寺에서 교화함.
진표 [ 眞表 ] 율사 금산(金山) 출생. 12세 때 숭제(崇濟)에게서 《사미계법 전교공양차제비법(沙彌戒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받고 명산으로 다니다가 740년(효성왕 4) 보안현(保安縣:扶安縣) 불사의암(不思議庵:來蘇寺)에 들어가 고행 끝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현신(現身)을 맞아 정계(淨戒)를 받았다. 그 후 영산사(靈山寺)에 가서 각고한 결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현신을 맞아 752년(경덕왕 11)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았다.
766년(혜공왕 2)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였으며,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주성(鑄成)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사(鉢淵寺)를 지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풀고 7년을 지냈다.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에게 교를 전하고, 가사(袈裟) ·발우(鉢盂) 및 《공양차제비법》 《점찰선악업보경》 등을 전해주고, 속리산에 길상사(吉祥寺)를 짓게 했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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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秦檜,) 진회(秦檜, ):남송 高宗代의 宰相, 자는 會之. 主戰派 岳飛를 誣告하여 죽이고 주전파를 탄압하여 金나라에 굴욕적인 和約을 체결하다
찬영(贊寧,918-999) 찬영(贊寧,918-999):宋代 南山律宗, 성은 高씨 浙江省湖州 德淸사람. 그의 선조는 渤海人이다. 어려서 後唐 天成年間에 杭州 祥符寺에 출가하여 三藏을 博涉하였는데 특히 남산율에 정통하고 談論에 능하였다. 時人이 律虎라 칭하였고 儒老에도 밝으며 文辭를 잘하였다. 忠懿王이 明義宗文大師라 號하다. 송 太平興國 7년(982, 66歲時)에 칙명에 의해 浙東에 들어가 [송고승전]을 編修하여 端拱원년(988)에 완성하다. 또 [鷲靈聖賢錄] 100권을 짓다. 咸平원년(998)에 右街僧錄에 다음해에 左街僧錄이 되다. 함평2년에 82세로 입적.(僧史略序, 통기44, 통재26, 계고략4, 석문정통8) 저서:[宋高僧傳 30권] [大宋僧史略 3권] [內典集 152권] [外學集 49권]등
척발도(拓跋燾,408-452) 척발도(拓跋燾,408-452):北魏(또는 後魏)의 제3대 太武帝. 성은 척발, 明元帝의 아들. 宋文帝 때 柔然을 무찌르고 北梁을 정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움. 聰明하고 淸廉, 儉素하였다. 424-452년간 在位하면서 3년에 걸친 毁佛禁壓은 중국법난의 처음에 해당한다
청허 휴정(서산대사)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현장 현장
속성(俗姓)은 진(陳), 이름은 위(褘). 경(經)·율(律)·논(論)의 모든 불교 경전에 정통해 삼장(三藏)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인도에서는 목샤데바(Mok-adev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인도에 유학했으며, 산스크리트로 된 막대한 양의 불교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돌아와 자국어로 번역했고, 중국에 유식학(唯識學)을 기반으로 한 법상종(法相宗)이라는 종파를 세웠다. 그가 번역한 불교 경전은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매우 다양하며, 그가 중앙 아시아와 인도 각지를 여행하면서 남긴 풍부하고 정확한 기록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여러 대에 걸쳐 학자들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난 현장은 어렸을 때 정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형의 영향을 받아 불교 경전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곧 불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현장은 그 형을 따라 장안(長安)까지 갔으나, 당시 중국 전체를 뒤흔들던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자 다시 쓰촨[四川]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쓰촨 지방에 머물면서 불교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곧 불교 경전들에서 수많은 모순과 상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의 스승들로부터는 아무런 해결책도 얻지 못하자 현장은 불교의 근원지 인도로 유학하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인 여행 허가를 얻지 못해 629년 비밀리에 쓰촨 지방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지나 투루판·카라샤르·쿠차·타슈켄트·사마르칸트 등의 오아시스 중심지를 거쳐 철문(鐵門 Iron Gates)을 넘어 박트리아로 들어갔으며,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서북 인도의 카피사·간다라·카슈미르 등지를 통과했다. 카슈미르에서 배에 오른 현장은 갠지스 강을 따라 내려가 마투라를 지나서, 633년에는 갠지스 강 동북유역의 불교 성지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현장은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 있는 성지를 순례했으며,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해안선을 따라 여행했다. 그러나 현장이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당시 인도 불교교육의 중심지였던 날란다 사원이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산스크리트·불교철학·인도사상 등을 습득했다. 인도에 있는 동안 현장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드높아져서 북인도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하르샤 대왕마저 그를 만나서 경배하기를 원했다. 643년 귀국 여행을 시작한 현장은 하르샤 대왕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매우 순조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현장은 645년 다시 당의 수도 장안에 16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며칠 뒤에는 황제로부터 공식적인 영접을 받았다. 황제는 낯설은 나라들에 대한 현장의 이야기에 매우 큰 매력을 느껴 그에게 대신의 직위까지 수여하고자 했으나, 현장은 승려로서의 길을 택해 황제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현장은 인도에서 520질 657부(部)에 달하는 불교 경전들을 가져왔으며, 그 경전들을 번역하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그는 결과적으로 그 엄청난 분량 가운데 매우 적은 부분만을 번역하는 데 그쳤으나, 그가 번역한 76부 1,347권에 이르는 문헌 속에는 매우 중요한 대승불교 경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현장은 주로 유가행파의 유식(唯識) 철학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와 그의 제자 규기(窺基:632~682)는 중국의 유식학파 곧 법상종(法相宗)을 형성시키기에 이르렀다. 호법(護法 Dharmapala:530~561)이 찬술하고 현장이 편역한 〈성유식론(成唯識論) Vijnapti matratasiddhisastra〉과 그 주석서로 규기가 저술한 〈성유식론술기 成唯識論述記〉에는 그 교리가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법상종의 중심적인 가르침은 세계 전체가 마음의 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상종은 현장과 규기가 활약할 당시에는 상당한 명성과 함께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으나, 그 두 스승 이후에는 급격히 쇠락했다. 법상종의 난해한 철학, 어려운 전문용어, 머리카락을 쪼개는 것같이 세밀한 마음과 감각의 분석 등은 중국 전통에 매우 낯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쇠락이 일어나기 전인 653년 일본의 승려 도쇼[道昭]가 중국에 들어와 현장 밑에서 배우고, 660년경 배움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가 유식학파의 가르침을 전했다. 7~8세기에 법상종은 일본의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로 성장했다. 현장은 번역 작업 외에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를 저술해 자신이 인도로 여행하던 중에 거쳐간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현장이 입적했을 때 당의 황제는 그 대담하고 독실했던 구법승을 추모하기 위해 3일 동안 국사를 살피는 것을 중지했다. 현장에 대해서는 서양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아서 웨일리는 〈실제의 삼장 The Real Tripitaka〉(1952)의 앞부분에서 생동감 넘치고 흥미로운 필체로 그의 생애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르네 그루세는 〈부처의 발자취를 따라 Sur les traces du Bouddha〉(1929)에서 당의 역사와 불교 철학을 배경으로 중국의 구법승 현장의 생애를 보다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당서역기 : 현장, 권덕주 역, 일월서각, 1983 印度哲學硏究 5 : 宇井伯壽, 岩波書店, 1965 唯識三十頌釋論 : 宇井伯壽, 岩波書店, 1952 大唐西域記の硏究 全2卷 : 足立喜六, 法藏館, 1942-43 玄とその學派の成立 〈東洋文化硏究所紀要〉 : 結城令聞, 1956
- 자료: 브리테니카
혜원 [ 慧遠 ] 염불의 결사(結社)인 ‘백련사(白蓮社)’의 개조. 속성 가(賈). 시호 변각(辨覺) ·원오(圓悟). 산시성[山西省] 닝우[寧武] 출생. 루산산[廬山]에 살았기 때문에 여산(廬山) 혜원이라고 불러 수대(隋代) 지론종(地論宗)의 학장(學匠)인 정영사(淨影寺)의 혜원과 구별하고 있다.
장안(長安)에 온 구마라습(鳩摩羅什)과 불교 교의에 대하여 문답하고, 불자는 제왕을 예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 국가권력에도 저항하였다. 또 승가바제(僧伽婆提)에게 청하여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삼법도론(三法度論)을 재번역케 하고, 담마류지(曇摩流支)로 하여금 《십송률(十誦律)》을 완역하게 하는 등 중국 불교를 학문적으로 확립한 사람이다.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혜초 [ 慧(惠)超 ]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廣州]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를 거쳐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의 도량(道場)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으나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三藏)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에서 발견되어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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