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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조선범(虎)의 그 흔적을 찾아서
바위 추천 0 조회 443 18.07.29 03: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범의 그 흔적을 찾아서


 

 

 

호랑이 장개간다!

 

우리는 흔히 비 오다 그치고 햇살이 나면

호랑이 장개 가는 날이라고 표현하는데

전문 기상용어로 「천루」(天漏)라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범은 한반도 야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우리 민족에게는 호환이라는 공포의 대명사이자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로 우리의 삶과 정서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동물입니다.

 

또한 지배계층에서는 범 가죽을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

집안의 장식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범(호랭이) 장개가는 날”

 

음력 11월에 들어있는 24절기 중의 하나인 동지(冬至)를 달리 부르는

이 말은 범의 생태적 특성과 관련되어 유래되었다.

 

민간에서 범은 열이 많은 동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날씨가 춥고 밤이 긴 동짓날에 암수가 교미를 할 것이라고 여겨

이날을 ‘범(호랭이)장가가는날’이라 하였다.

한편 이날은 부부간의 방사(房事)를 금기시한다.

방사(房事) : 남녀가 육체적으로 관계함.

 

그 이유는 범이 동짓날 교미를 하여 평생 한 두마리의 새끼만 낳기 때문에

사람도 방사를 하면 자식이 적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이러한 세시풍속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그 의미는 다소 변하였다.

곧 호랭이의 생태적 특성에 대한 언급은 탈락되고

단순히 방사를 금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전승되고 있다.

 

 

 

호랑이라는 말은 중국식 표현이고

우리 고유의 명칭은 범입니다.

 

범이라고 하는 말도 실은

호랑이와 표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호랑이라는 말이 범을 대신하게 됩니다.

 

범을 현재의 국어사전을 보면

범虎=호랑이과의 총칭,

칡범(葛虎 갈호=줄무늬 호랑이)

표범(豹虎 표호=얼룩무늬 호랑이)

 

 

 

몸에 칡덩굴 같은 어룽어룽한 줄무늬가 있는 범.

칡 줄기처럼 무늬가 있는 범이 ===> 갈범 칡범이라는 호랑이고

동그란 무늬가 있는 범을 ===> 알락범 표범이라 불렸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초기의 자료인 ≪훈민정음≫이나 ≪용비어천가≫와

고려시대 우리말을 살필 수 있는 ≪계림유사≫에 나오는

'虎'를 '범'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말에서 적어도 고려 중엽이전부터 '범'과 '호랑이'를 혼동하여 써 온 것 같습니다.

 


 

 


'범' 곧 '표범'은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아니라,

칡잎과 같이 무늬가 둥글둥글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칡범'이라고도 일컫는다.

또는 '갈범'이라고 일컫는 것은 칡을 漢字로 '葛(갈)'이라고 쓰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자료를 들어 신빙성이 있는 자료는

오래된 우리 문헌자료인 후자에 그 무게를 둘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범'은 곧 '호랑이'라고 풀이한 사전도 있고,

'호랑이'는 범을 무섭게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한 사전도 있습니다.

 

그리고 “표범 무늬가 꼭 일본인들이 자신의 국화 매화문양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칡잎 형태라고 명시해 둔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범'과 '호랑이'의 뜻을 풀이 하자면 전연 다른 동물입니다.

'호랑이'라는 말은 '虎狼(호랑)'에 접미사 '이'를 더하여

마치 고유어처럼 변한 말이다.


호랑이란 글짜가 호(虎 : 범 호), 랑(狼:이리랑)인데

이리라는 동물은 따로 있습니다.


범은 고양이과 이리는 개과

그리고 중국,일본은 그냥 호(虎) 라고만 합니다.


범의(虎) 종주국에서 범이라는 순수 우리 말을 놔두고

호랑이란 단어를 쓰는것은  맞지 않으나 

외래어가 이젠 토착화하여 우리 말이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中國 고문헌에 의하면 '虎狼(호랑)'이라는 말이 '호랑이'와 '이리'라는

말의 복합어가 아니라, 단순히 '호랑이'라는 말로 이른 시대부터 쓰였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호랑이'는 漢字語의 '虎狼'에서 연원 되었음이 분명하다.

 

 

'범'은 '호랑이'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범'은 곧 '豹'(표)임을 알 수 있고

표범 곧 '豹(표)'를 일컫는 고유한 우리말이다.

다시 말해서 '표범'은 곧 우리말 중에 '속내의, 처가집, 역전앞' 등과 같은

형태의 겹말인 것이다.

 

 

 

'앞니 빠진 갈가지'의 '갈가지'는 곧 범의 새끼를 말한다.

'갈가지'는 '송아지'로 일컫는 것처럼

 

'갈범'에서 '범'이 생략되고,

'갈가지'로 변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랭이 새끼는 '개호주'라고 일컫는다. 라고 되어 있는데

 

 

 

 

 

 

다시 정리 하자면

'범이란'  칡범과 줄무늬 호랭이 둘 다  가르키므로


개오지 ‘개호주(범의 새끼)’의 방언(경남).

순우리말:개호주

 

범의 새끼(개호주) : 개오지(경상도 방언), 개호지, 갈가지(강원도 방언)로 명시함.

====================================================================

 

이상과 같이 명칭으로 고증하여 볼 때,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범(豹)'은 있었지만,

 

'호랭이'는 훨씬 후대에 타지역으로부터 이동하여 들어온 동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범(虎)은

그 예전 고구려(1~668년까지)무사같이

북방계를 휩쓸고 다녔던 것처럼


웬지 사라진 범들이 우리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져

한편으로 대견스럽고 앞으로 진행되는 글에서는

범과 호랭이는 같은 맥락으로 풀이 하겠습니다.

 

 

 

 

=======================================================================================================================

 

 

  범(虎)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호랑이라는 단어를 가진 동물은 없었으며.

호랑이라는 동물이 등장한 기원은 문헌에 확실히 기록돼 있다.


바로 1924년 침략주의자 일본이 이 땅을 식민지화하고

조선총독부가 이 땅을 지배할 때다.

 

일제 강점기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발표를 했다.

최근 2년간 명수들의 공격으로 35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각 명수들에 의한 사망자는

늑대 167명, 호랑이 12명, 표범 4명, 곰 1명이다.

 

 

 

그때 개과 동물인 늑대, 이리, 승냥이 등 맹수가 민가에 출몰해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물어 죽이는 등 피해가 심각해지자 일본 총독부의 지휘 아래

군경과 포수들을 모집해 맹수 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의 속셈은 앞에서 말한 맹수 사냥이 그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 섬나라에는 없는 ‘백수의 제왕’이라 불리던 ‘범사냥’이 목적이었다.

 

 

 

 

범사냥은 그들의 축제였고, 그렇게 잡은 범은 가죽을 벗겨 말렸다.

범가죽은 고가품이고 희귀품이었다.

그들에게는 범가죽이야말로 상전에 바치는 최고의 충성 선물이었다.

 

그 중에 표범은 나무를 타고 날렵 하여 잡기가 어려워

호랑이 가죽보다 더 비싼게 바로 표범가죽이였다.

 

 

 

한번 재미를 본 그들은 연중행사처럼,

우리나라 백두대간을 타고 오르며

천적이 없던 범의 씨를 말리듯 포획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범의 존재는 단순한 맹수가 아니라 영험하고

신성한 동물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사찰에 들러보면 산신각이 있고,

 

그 산신각 탱화에는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구름 위에 앉아 계신다.

그분이 우리 민족 민간 신앙의 한 대상인 범이다.

 

그뿐 아니다.

조상이 돌아가시어 산에서 장례를 치를 때 또는 묘제를 모실 때 반드시

제일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범은 두려우면서도 친밀감을 지닌 동물이었다.

 

 

 

그런 범을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그들 뜻대로 범(虎)에 이리(狼)를 붙여 호랑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호랑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 또한 해괴하다.

어떻게 고양이과 동물인 범에다 개과 동물인 이리를 붙여

고양이과와 개과가 혼혈된 듯 비합리적이고 자연 과학으로도

인정되지 못할 이름을 붙였을까?

 

 

 

 예로부터 일본은

호랑이 서식에 절대 필요한 은신할만한 밀림이나

가파른 암석 능선이나 동굴 계곡등이 없기 때문에 범이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천황의 명예를 기려[?] Felis tigris Mikado로 명명한

한국 호랑이다.

 

범(호랑이)이 한 마리도 살지 않았던 일본 나라의 왕 칭호가

다른 나라 민족이 정신적인 국민 동물로 사랑하는 호랑이의 학명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줏대없는 나라임의 표석이며

 

한편 식민지 약소민족이었던 우리의 슬픔이었다.

 

 

 

 

한국표범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이후 신식화기로 무장한 일본의 경찰과 헌병들이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났다는 제보가 있으면 조직적으로 인원을 동원하여

이를 포획하였습니다.


명목은 해수구제 였으나

일제는 호랑이와 표범을 한반도와 대륙을 대표하는 대형동물로 여겨

이를 포획하는 것에 한반도와 대륙을 정복하고 굴복시킨다는

상징성을 부여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일제의 고위 관리들은

호랑이나 표범 모피를 탐내 어떻게던 구하려고 하였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마치 전리품처럼 가져가 자랑하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 해수구제 명목의 남획이 한국 표범의 감소에

가장 치명적인 작용을 하여 자연적으로 회복되기 힘든 수준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일부 남아있던 한국표범들도

산촌 주민들이 배고품을 달래려

멧돼지나 노루 등을 잡기 위해 놓아둔 올무나 덫에 대부분 희생되면서

현재 상황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범(虎)

 

한국호랑이와 시베리아 호랑이는 같은 종아라고 학계에서 보고 있는데

다른 개체임을 시베리아 호랑이가 털이 훨씬 더 긴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한국 호랑이의 얼룩 가죽은 대조되는 색깔의

두 줄 무늬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대단히 아름답다.

 

엷으면서도 깊은 색감이 도는 황색 바탕에

선명한 들어 나는 검은 줄무늬가 전신을 아름다운 얼룩으로 치장해 놓았다.

 

 

 

 

한국이 호환의 나라라는 사실은

19세기 부터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시베리아(아무르, 우수리)호랑이와 한국 호랑이 두 종은 외모뿐만 아니라

다시 말하면 내부적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다.

한국 호랑이가 더 사납고 잔인하다.


 

 현재 우리나라 남한에 한국호랑이(범)가  사라진 지금

사진 상으로나 시베리아 호랑이와 한국호랑이가

다른 아종임을 윗 사진상으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00년전 한반도는 ‘표범의 땅’이었다.

한반도 대형 맹수라고 하면 흔히 호랑이를 떠올리지만,

사실 호랑이 보다 더 많은 수의 동물이 한반도에 서식했다.

바로 표범이다.

 

호랑이 보다 더욱 사납고 나무를 잘 타는 민첩성으로 잡기가 더 어려워

표범 가죽은 호랑이 보다 더욱 고가에 팔렸다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는 황국식민의 안전에 해가 되는 동물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한반도의 대형동물을 해수라는 이름을 붙여 이들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잡았습니다.

 

이른바 해수 구제의 명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동물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 표범이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중 통계기록이 확인되는 19년 동안 포획된 표범수는 총 646마리로

조선 전기약 200년 동안 포획된 수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이 수치가 조선 총독부 및 관련 기록에 나타난 공식적인 자료라는 것을 감안할 때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포획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통계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 년도를 포함해 일제감점기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5년부터 18년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로 97마리가 잡힌 호랑이 수의 6배가 넘는다.

범은 일제시대까지 상당수 서식하였으나

역시 남획으로 점차 멸종으로 내몰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15-1916, 1919-1924, 1933-1942년 동안

표범의 공식포획수가 각각 136, 385, 103마리(총 624마리)라는 통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잡힌 수는 몇 배에 달했을 것이다.

해방 후에도 보호받지 못하고 적법하게 표범은 계속 포획되었다.

 

 

그 후 표범도 아직 생존했다고 하더라도

올무 등에 의한 우발적 포획, 각종 서식지파괴와 근친번식 등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보아야 한다.

 

 

 

적응력이 강하고 인명피해의 가능성이 적은 표범은

오늘날 시급한 고비만 넘기고 적절한 보호대책이 취해진다면

백두대간을 따라 상당수가 서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실재로 한국의 범을 자연에 복원하면

많은 문제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할수도 있고

야생동물의 먹이 사슬을 고루고

멧돼지등 유해동물들로부터 농산물을 지키는 잇점도 있겠지만

 

복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야기시길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범(虎) 의 나라

 

우리나라 284개 마을 이름에 범(호랑이)이 있는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다.

 

방방곡곡 호랑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다.

 

호랑이 얘기 안 듣고 자란 사람 없고,

호랑이 꿈 한번 안 꾼 사람 드물다.

 

숱한 신화·전설·속담·격언과 지명, 상징물, 사람 이름에 이르기까지,

나고 살고 죽는 인생사

이곳저곳에 호랑이 얘기 한자락 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우리에게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산의 주인인 산신령이요,

악을 응징하는 구원의 신이며, 친근한 이웃이고,

한없이 어리석은 바보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치명적인 야수이자,

부모를 해친 원수이면서, 포획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사냥감이기도 했다.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는 속담은

신앙 대상으로서의 호랑이와 사냥감으로서의 호랑이, 두 속성을 함께 드러낸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우리나라 전설·민담은 600여종을 웃돈다.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랑이 이야기의 나라’(호담국·虎談國)에 비유했다.

 

호랑이에게 주목한 최남선은

일제의 야욕이 극으로 치닫던 1908년 창간한 잡지 <소년>에 호랑이를 등장시켰다.

이 부분은 다시 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가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데 반해,

대륙을 향해 앞발을 들고 일어서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한반도를 그렸다.

 

땅 모습뿐 아니라 우리나라 구석구석엔 호랑이 상징물이 깔려 있다.

마을 이름, 지형지물 등에서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349곳(전체 지명의 0.4%)에 이른다.

(국토지리정보원 자료) 지명 중엔 마을 이름이 가장 많아 284개를 차지한다.

 

 

호랑이 꼬리의 뜻을 담은 포항 호미곶,

호랑이가 엎드린 형상을 한 안성 금광면 복거리(복호리),

호랑이가 나타나 효자를 도왔다는 전설이 전하는 거제도 호곡마을,

영천의 효지미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영월 주천면 신일리의 의호총처럼, 효자를 도와주고

죽은 호랑이를 장사 지낸 호랑이 무덤도 여러 곳에 있다.

 

나쁜 호랑이든 착한 호랑이든 호랑이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민족과 진하게 어우러져 대대로 살아온 셈이다.

 

 

 

호랑이 문화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으로 여기기도

 

호환으로 한 마을이 풍비박산 난 곳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자 호랑이를 추격해 때려잡은 뒤 뱃속에서

살과 뼈를 수습해 장사 지낸 효자도 있다.

 

용맹함의 상징으로 그리고 악귀를 쫓는 힘을 가진 신성한 동물로 여겨,

그림 그리고 수놓고, 심지어 글로 써서 붙이기도 했다.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도 강력한 힘을 가진 호랑이를 잡아

그 머리를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무관의 관복 흉배에 그려넣어 용맹성을 강조했고,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내걸어 잡귀를 쫓는 부적으로도 썼다.

 

 

 

무속인들은 산신령과 동급(또는 대리인)으로 여겨 호랑이를 모시기도 한다.

무섭기만 한 호랑이지만,

민담이나 민화 등에선 대부분 착하거나 어리석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려운 존재인 맹수를 일상생활 속에 녹여넣어 마을과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호신으로 여기고 친숙한 동물로 묘사한다.

 

화등잔만한 불을 켜고, 밤길 가는 나그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던 호랑이도,

효자를 등에 태우고 강물을 헤엄치던 호랑이도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췄다.

남한 땅에 야생 호랑이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호랑이나 그 발자국을 봤다는 허다한 목격담은 진행형이다.

끊이지 않는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후

남한에선 호랑이가 발견됐다는 구체적 기록(포획 기록, 사진 촬영 등)이 없다고 한다.

 

 

 

 

 

 

범(虎) - 호랑이는 민족 문화의 기상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호랑이를 하나의 평범한 짐승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인격을 부여하거나 때로는 신격화해서 존숭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한편으로는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삿된 것을 물리쳐 주는 수호신이나 보은의 영물로 받들어 온 것이다.

 

이런 다양한 시각이 말해 주듯 이름도 여럿이었다.

가장 흔한 호랑이, 범 외에도 산령(山靈), 산군(山君), 산신(山神), 산군자(山君子),

영수(靈獸), 대충(大蟲), 산정(山精), 신수(神獸) 그리고 산중호걸(山中豪傑),

백수지왕(百獸之王) 등 수많은 별칭으로 불렸다.


범의 용맹한 기상은 더러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헤쳐 나가는 정신적 에너지로 강조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육당 최남선이 잡지 《소년》(1908. 12) 창간호 표지에

<근역강산 맹호기상도(槿域江山 猛虎氣像圖)>를 그려

조선의 소년들에게 웅혼한 기질을 일깨워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의 모습을 네 발톱을 곤두세운 채 대륙을 호령하는 호랑이로 표현했다.

 

 

육당은 1926년 《동아일보》에

<조선역사 및 민속사상의 호랑이; 건국 초두 이래 영원조선의 표상>이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

즉 전 세계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제일 많은 나라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호랑이는 깊은 산속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 하나의 정서(情緖)로 깃들어 온 영험한 동물이다.

 

조형으로 표현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호랑이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岩刻畵)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선사예술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인 이 바위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의 주요 식량원이었던 산짐승과 바다 동물을

다소 과장된 양감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호랑이는 사뭇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호랑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서 만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자료로는 경주 김유신묘의 호석 역할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부조 가운데 하나인 호랑이신상(寅神像)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거치면서 호랑이 자료는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

호랑이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인의 정신과 생활문화 속에서 예술적으로 승화되어

화려하게 꽃핀 시기는 역시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 민중미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민화 속에서 호랑이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이전 시대의 호랑이가 고분벽화나 왕릉 등의 호석에서 주로 죽은 자의 안식처를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다분히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면


18~19세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생활에서 직접 만나고 부딪치고

관계를 맺는 ‘현실적인 동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승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호랑이는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벗어나 익살스럽고

개성이 돋보이는 형태와 소재로 다양하게 변모되기 시작한다.

 

 

 

 

 이후 민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호방하고 점잖은 인간의 얼굴이나 익살스러운 모습을 띠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 민화에 그려진 호랑이는 세계 어느 문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학과 익살, 재치가 물씬 풍기는 독창적인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해학과 유머, 여유. 호랑이 그림

민화는 서민의 실생활에서 폭넓게 사용되던 ‘생활미술품’에 속하는 그림이다.

이러한 민화에서 호랑이는 특히 사랑받는 소재였다.

 



 

 

 

호작도(虎鵲圖), 호렵도(虎獵圖),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 영수도 등이

호랑이가 들어가는 대표적인 그림들이다.


이 중 호작도, 즉 ‘까치호랑’이 그림은 많은 이가 민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 만큼 대표적인 그림이다.

 

 

 

민화 속의 호랑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전혀 무섭지 않고

약간은 바보스럽기까지 한 친숙한 호랑이가 있는가 하면

위풍당당한 용맹과 위엄, 신의와 덕성을 갖추어 신격화한 호랑이도있다.


그렇지만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호랑이를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다정한 친구, 혹은 동네 어르신처럼 인자한 ‘인격체’로 바라보기를 즐겨했다.


가장 힘이 약한 동물인 토끼가 힘센 호랑이에게 굽실거리며 담뱃대를 물려 주고,

호랑이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담배를 피우는 그림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느껴진다.

 

그 그림 속의 호랑이는 체통을 중시하는 조선의 양반이나 선비의 위풍을 연상케 한다.

그야말로 한국적인 유머를 대표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원들이 그린 호랑이그림은 많지 않다.

그 당시에는 호랑이가 많았지만 인간과 별로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호환마마(虎患媽媽)라는 말처럼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못되고 포악한 동물로 취급받았다.

호환으로 인한 피해는 역사가 깊다.

호랑이로 인한 백성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조선은 세종 때부터 호랑이 사냥만을 담당하는 군사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설치하였고 호랑이 퇴치를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국왕의 사전 재가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이런 점을 역이용하여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조건에서 호랑이에게 좋은 상징을 부여해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호랑이의 탁월한 용맹성,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강력한 권위는

매력적인 그림의 소재였다.

 


 

 화원들은 호랑이의 상징을

학문적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선비의 강력한 지조와 절개로 수용하고자 했다.

지배세력인 선비들의 인문학적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호랑이는 한낱

포악한 맹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숙종, 영조 때 궁중화원을 지낸 정홍래는 호랑이를 산군(山君)에 비유하여 그렸다.

산에 사는 군자란 뜻이다. 여기서 군자란 이상적인 선비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선비인 군자는 호랑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는 그야말로 선비의 기개와 절개를

용맹한 호랑이의 모습에 담은 그림이다.

 

김홍도가 표현한 호랑이는 결코 포악하지 않다.

강력한 이빨을 감추고 두 발을 모운 단정한 모습이다.

학문적 양심과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는

선비의 용맹함을 호랑이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다.

 

 

 

민속신앙 속 호랑이, 산신령의 使者(사자)

 

호랑이에 대한 존숭의 관념은 대표적인 우리 전통 민간신앙 중 하나인

산신당 신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신앙(堂神仰)은 온갖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먼 옛날부터 민간에서 절대적으로 신봉되어 온 신앙이다.

 

​신을 모신 신당은 보통 산신당(山神堂)으로 불리지만,

형태나 지방에 따라 서낭당, 국사당(國師堂), 부군당(府君堂), 노고당(老姑堂)

또는 할미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신 신앙은 당굿을 수반하는 신성한 행사인 ‘당제(堂祭)’를 통하여

민간 최대의 행사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바로 이 산신당 신앙에 호랑이에 대한 신앙이 곁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산신당에는 신앙의 표적으로 산신을 그린 산신도가 모셔지고 있는데,

산신은 대개 깊은 산중을 배경으로

수염이 허연 노인 또는 법복을 입은 승려로 표현된다.

중요한 것은 이 신선과 함께 반드시 호랑이가 그려진다는 점이다.

 

 

 

당집이 생기면 안에 위패나 산신도가 모셔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도는 대개 범을 곁들인 노인상이 된다.

 

한국의 산신은 옛날부터 범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산악숭배와 범의 인격화가 산신령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산신도의 호랑이는 무섭게 포효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뭇 인자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호랑이가 인간을 해치는 악한 짐승이 아니라

인간을 도와주는 착한 짐승이라고 생각한 우리 민족의 호랑이에 대한

인식 내지 관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순수한 민간신앙으로서의 산신당이나 산신도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사찰의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도가 많이 남아 있는데,

 

사찰 신선도의 신선이 대개 남성인 데 비해

민화 형식을 띤 무속이나 당집의 산신도는 종종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모계사회였던 아득한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무속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점만은 분명 하다.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신라 2 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무당의 기록이 보인다.

 

한국 무속의 샤머니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긍정·부정으로 학설이 나뉘며,

또한 북부의 강신무(신병)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계통이고

남부의 세습무(직능을 물려받아 된 무당)는 남방계의 주술사 계통이라는 설도 있으나,

무속은 그 전체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념이다.

 

 

 

토테미즘(totemism)

 

범은 과거부터 아시아 토테미즘 신앙의 중심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는 맹수로,

웬만한 아시아 국가라면 호랑이에 대한 공포와 경외가 반드시 존재한다.

 

토템 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토템이라는 말은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물류(독수리·수달·곰·메기·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의례·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 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 있는 의식을 행 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② 집단 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 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④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다.

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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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토템과 단군신화의 해석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웅(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모습이)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忌)] 하였는데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기하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가지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고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신화의 해석에 따르면 웅녀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해석된다.

 

 

 

 한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는 일반적으로 창시자의 부계 혈통을 천신(天神)으로,

모계 혈통을 지신(地神)으로 설정한다. 이에 따라서 웅녀는 단군의 모계 혈통으로 지신으로

신격화된 토템의 일종으로 본다.


곰을 토템으로 하는

토착 부족과 하늘에서 내려온(천강天降) 지배 부족의 결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곧 곰을 토템으로하는 곰족(웅족, 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호랑이족(호족, 虎族)이 경쟁하여 곰족의 승리로 부족간 결합(혹은 연합)이

이루워졌다는 해석이다.

 

 

 

홍산문명(황제헌원=환웅)의 형성의 주역

곰 토템족,호랑이 토템족


환웅신화(=황제헌원신화)가 그려진 한나라 때의 산동 무씨사 화상석

산동 무씨사 화상석은 호랑이 토템족이 홍산문명에서 밀려나 서남쪽으로 갔다고 말하며

호랑이 토템족이 '치우'라 말한다.


링쟈탄 문화가 바로 홍산문명에서 밀려나 양자강(장강) 유역으로 이동한

치우족(호랑이 토템족)링쟈탄 문화가 이동하여

세운 량주 문명은 치우천황(도철 신)의 구려국(삼묘)

 


량주문명의 도철 신(치우천황)을 숭배하는 량주인들이 북벌하여 천하를 두렵게하다.

즉 곰 토템족,호랑이 토템족은 모두 북방 시베리아 퉁구스 계열이나 혹은

그 혈연 비슷한 종족이거나

북방 문화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족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대표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곰,호랑이 숭배고

시베리아 문화권의 곰,호랑이 숭배에는

항상 빗살무늬토기가 같이 들어간다.

 

홍산문명도 빗살무늬토기를 쓰는 문명이란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시 종교는 애니미즘이 토테미즘같이

모든 물질이 생명, 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연관적 物活論(물활론)이나, 뱀 곰 등 동물 숭배 사상이 있었으나

 

점점 인지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을 숭배하다가

산을 숭배하고, 나아가서 하늘을 숭배하게 되었는데,

인간 숭배는 조상 숭배로 이어지고,

궁극에는 하늘의 하느님을 숭배하게 되었다.



  "물활론 "
 '만물은 살아 있다는 견해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본질상 생명력 내지는 영혼을 갖고 있으며

  그 생명력에 의해 스스로 성장 변화한다고 보는 견해.




한국인이라면 삼척동자까지도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 하나 정도는 알고 있을 만큼

우리나라에는 호랑이를 소재로 한 신화와 전설이 많다.

호랑이와 인간, 인간과 호랑이의 구별이 없을 만큼 사대부 계층은 물론,

기층 문화 속에서도 민중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여왔다.


그런데 가끔 전혀 우리나라 호랑이가 아닌 호랑이 그림이 버젓이

한국 호랑이 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시중에 제법 나도는 일본 호랑이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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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호랑이가 생육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넓이는 한반도의 세 배 크기인데도 어쩐 일인지

‘백수의 왕’이라 불리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고분벽화, 불교회화 등의 예술이 대륙에서 전래되었으나

호랑이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대륙과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지면서

용과 같이 위용과 용맹을 갖춘 신령스러운 동물에 점차 호감을 갖게 되었어

호랑이 그림도 그리게 되었다.


 


일본의 호랑이 그림 모양 자체는

조선과 중국 그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중국 호랑이인지 한국 호랑이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표정이라든가 분위기는 호랑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진짜 살아 있는 호랑이와 마주한 적이 없는 일본 화가들은

호랑이에 대해 매우 피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호랑이를 바람이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용처럼 신비한 기백이 서린 동물로 여겨

반드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대나무 숲이나 파도를 배경으로 그렸다.

그런 시도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853년경부터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국가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신,

덴노에 대한 절대 충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나타난 일본의 호랑이 그림이 이른바

‘죽림출호도(竹林出虎圖)’이다.




즉 대나무 숲에서 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에 그려진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상대를 잡아먹을

기세를 보여주는 사납고 도전적인 호랑이이다.

 

 

 

‘표범의 땅’

 

100년전 한반도는 ‘표범의 땅’이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년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로

97마리가 잡힌 호랑이 수의 6배가 넘는다.

 

해방이후 표범 개체의 수는 1970년 3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산에서는 다 큰 수컷 표범이 포획돼

한 일간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포획된 1921년보다 훨씬 가까운 과거이다.

또한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남한지역에서 표범이 잡힌 기록만 해도

18건에 이른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반도 곳곳에서 한국표범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목격자들의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표범이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반도 곳곳에서 생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호랑이와 한국표범과 관련한

일제강점기 초기의 희귀 서적인 ‘정호기’의 원본을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으로부터 제공받아 전시하며

러시아 연해주에서 촬영된 한국표범의 생생한 실제 모습도 영상으로 상영한다.

 

 

 

※ 정호기 :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 펴낸 책으로

 

1917년 겨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위해 사재로 조직한 사냥팀을

‘정호군’이라 칭하고 활동사항을 기록함

 

이와 함께 한국표범과 호랑이와 관련한 일제강점기 초기의 희귀서적인

‘정호기(征虎記)’의 원본도 공개했다.


정호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가 펴낸 책으로,

1917년 겨울 한 달 동안 호랑이 사냥을 위해 조직한 사냥팀을 ‘정호군’이라 칭하고

그들의 활동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서울대 도서관과 남산 국립도서관의 자료를 뒤져 일제 강점기인 1919~1942년 사이

호랑이 97마리와 표범 624마리가 ‘해로운 동물 제거’ 명목으로 포획됐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호랑이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제의 해수 구제 정책이 결정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조선시대 동안 저습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을 펴는 바람에 호랑이는 격감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공식적인 ‘마지막 호랑이, 표범’ 이후에도 호랑이와 표범이 명맥을 이어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대덕산 호랑이가 죽은 뒤에도 1924년 전남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잡혔고

해마다 2~3명이 호랑이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호랑이는 모두 북한 지역에서만 잡힌다.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공식적인 표범의 수도 624마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공식적인 수까지 합할 경우 전문가들은

1천여마리 이상의 표범들이 30년간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표범은 이 시기에 멸종하진 않았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1999년, 북한 개마고원일대에서 촬영된 한국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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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월 11일 합천 오도산에서

올무에 걸린 1년생 어린 수컷 표범이 생포되었고

이 표범은 그 당시 동물원이였던 창경원으로 옮겨서 한국표범이라는 뜻으로

한표 이름을 지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뒤 1963년 지리산에서 다자란 암것표범 1개체가 생포되어

이 표범은 전라북도 어떤 종교단체에서 덫에 걸려 한쪽 앞발이 잘린 표범을 소유하고 있어

이를 인수할려 하였으나


단체측에서 너무 무리한 요구하여 인수 못했다는 설과

앞발이 잘려 동물원측에서 인수치 않았다는 두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한쪽발이 없어도 번식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바

무리한 요구를 하여 인수 못하고

결국 그 표범은 보신용으로 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하여 동물원에 남아 있던 한표는 끝내 순수한 한국표범의 명맥을 잇지 못하고

1973년 죽고 말았으며,

죽을 당시 가족 손상이 심하여 박제표본으로도 남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도 1970년에도 경남 함안군 여항산에서 다 큰 수컷 표범이 잡혔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표범이였습니다.

 

 


호환(虎患)

 

범에 대한 여러 전설도 있지만 사실상 그 당시 민생고에 시달리며

의복도 여의치 않았고 난방을 나무 땔감으로 하던 시절이라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 산림에 의존하던 터라

산속의 생활은 더욱이 위험했을 것으로 봅니다.

 

범에게 화를 당하는(호환)등 산에 접한 민가에서는 많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 범에게 기묘한 습성이 있습니다.

범(호랑이)들이 가끔 주막집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주막집이란 밥과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라서 큰 방에 사람들이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같이 어울려 잤었다.

 

 

 

더운 여름날 사람들은 더위를 참지 못해 문을 열어놓고 자면 범(호랑이)은

슬그머니 들어와서 사람을 물고 도망쳤는데

이때 이상한 습성을 보였다.

 

사람을 물어가되 방문 맨 앞의 한두 사람은 그냥 건너뛰고

꼭 방 중앙의 사람을 물어갔다고 한다.

 

 

 

호식총

 

우리나라 태백산에 가면 조선시대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시신들을 매장한

호식총이 무려 200개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간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호환(虎患)이 무수히 일어 났으며,

호랑이는 사람의 몸 중에서 특정한 부위(호랑이마다 다름) 뼈를 남기며,

호환을 당한 자의 시신과 뼈를 수습하여 돌무덤식으로 만든 것을

호식총[虎食塚]이라고 부르는데,

 

태백산에 있는 것이 유명하나, 북한산, 도봉산의 비법정탐방로들에도 40여개 있음.

얼핏 보면 돌이 쌓여 있는 것 처럼 보여 지나친다.

 

 

1909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코리아의 호환도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다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옛날 옛적의 한 옛날에 ------”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꺼리로나 나올 소재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전설 속에나 나올 실제 주인공을

중국 연길의 한 식당에서 만났었다.

 

배고픈 호랑이가 만찬의 첫 손질로 오른쪽 턱에서 목에 걸쳐 붙여준

끔찍한 흉터가 생생히 보이는 중국 동포 조종원 씨는 50이

훨씬 넘은 전직 공무원 은퇴 생활자로 부인은 서울로

돈 벌이 나갔고 자녀들은 외지로 출가한 빈집에서 홀아비로

혼자 외롭게 사는 처지였다.


 

처음에는 자기는 남들에게 내세우기 싫은 호랑이에게

죽다 살은 이야기를 한마디 듣자고

서울서 날아온 나에게 당혹과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경계를 하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았었다.

 

그러나 불고기 한판에 중국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말문을 열고 보니 상당한 친화력도 있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도 가을,

연길에 가까운 광진 촌[지금은 신광 촌으로 개명]에서

가을걷이가 시작되었지만 날씨는 아직 별로 춥지가 않아

동네의 어린이들은 빈터에 모여 밤늦게까지 놀이를 하곤 했었다

 

해가 거의 다 내려 앉은 시간이었다.

마을 산자락에 가까운 공터에서 여자 어린이들이

“제기 뿌리기” 놀이를 벌리고 있었다.

 

 

 

두 어린이가 콩이나 쌀을 넣은 주머니를 서로 주고받으며

가운데 네모 칸의 안에서 이리저리 피하는 여러 명의

어린이들을 맞추는 놀이였다.

 

옛날에 한국에서도 많이 하던 놀이로서 오자미 놀이라고 불렀었다.

어린이들은 그 작은 오자미에 맞으면 맞는 대로 피하면 피하는 대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여자 어린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본 여섯 살짜리

종원은 심술이 났다.

종원이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그는 다짜고짜 놀이판에 뛰어들어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화가 난 어린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종원을 나가라고 하면서도

즐거운 놀이는 계속했다.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터 옆 민가 모서리를 누런 구름 같은 것이 소리 없이

돌아 나타나서 어린이들을 덮쳤다.

 

처음 그것을 본 어린이는 공포로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누런 구름은 공터 언저리의 어린이들을 손도 안대고 앞으로

5,6미터를 더 전진해서 놀이판 중앙에 있는 종원을 덥석 물고서

또 다시 바람처럼 마을 밖으로 사라졌다.

 

 

 

공포로 얼어붙었던 어린이들은 그제야 째지는 비명을 지르고

각자 집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놀랜 어른들이 뛰쳐나와서 살펴볼 때는 그 누런 뭉치는 유유히

논둑을 타고 산으로 향하고 있는 참이었다.

 

호랑이였다.

 

호랑이가 그 인근에서 사람을 물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연변 지방에서 거의 보이지 않던 호랑이들이 한국 전쟁이 격화되자

두만강 이북 그 쪽 땅에도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이 호랑이들은 북한에서 건너온 호랑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영물(靈物)이라서 자신들이 사는 땅이 전쟁터가

됐음을 알고 두만강을 건너 피난을 왔다는 이야기였다.

 

사람에 대한 공격도 가끔 일어났었다.

 

사흘 전에도 10리 떨어진 마을에서 남순이라는

여자 아이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행방불명이 된 뒤

시체를 찾지 못한 터였다.

 

호랑이가 중국으로 대거 몰려 온 이유에 대한

연변 어른들 말씀은 일리가 있다.

 

북한의 호랑이들을 대거 중국으로 피난가게 만든 가해자들은

미국 공군과 해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일 것이다.

 

남쪽에 사는 우리들은 잘 모르지만 침략자를 수령으로 둔

덕택에 북한 주민들이 전쟁 삼 년간 폭격으로 당한 피해는

상상을 못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건물이나 다리 등은 온전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었고

죄 없이 죽은 주민들은 수십만 명이었다.

 

심할 때는 전 마을 주민이 멀쩡한 집들을 놔두고 산속의

솔밭에서 한 달여씩 숨어 지내기도 했었다.

 

북한 전역 하늘에는 항상 미군기 들이 끊임없이 날아 다녔고

전투지역에서는 전투기들의 숫자가 마치 가을날의 고추잠자리

떼를 연상하리만치 많았다고 한다.

 

낮에는 제트 전투기가 폭음을 내며 하늘을 갈고 다니고 밤에는

B 26같은 폭격기가 야간 폭격을 하러 요란하게 돌아다니니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호랑이가 불안해서

그런 소리가 없는 두만강 건너로 대거 이주한 것이 맞는 사실이리라.

 

 

종원이가 호랑이에게 물려 간 뒤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마을 어른들도 뛰어나와 즉시 구조에 착수했다.

 

민병대를 소집해서 무장하기 시작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담한 마을 주민 서너 명은 즉시 논길로 달려가 호랑이를

쫓기 시작했다.

 

한편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훼방 놓던 종원은 뭔가 엄청난

힘이 자신을 덮치고 머리를 뭐로 맞은 것같이 심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지만 다시 짧은 동안 의식이 돌아왔다.

 

무슨 짐승이 자기의 머리를 물고 마을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종원이 그 짐승이 호랑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고 건너 마을

황 씨라는 중국 사람의 집에서 키우는 커다란 개가 자신을

물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원은 울면서 외쳤다

 

“ 놔! 이 황가 놈의 개야 ! 빨리 놔!” 그렇게 울면서 악을 몇 번

써보았지만 금새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다시 정신이 들었다.

 

보니 호랑이가 논길 중간에 서서 꼬리로 논고랑의

물을 찍어 종원의 얼굴과 목에 끼얹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원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 용감하게 뒤쫓아 온 동네 어른들이 따라 붙었다.

논 뜰을 다 벗어난 산자락에서 이었다.

어른들은 마구 고함을 치고 호랑이에게 겁을 주었다.

한 사람은 성냥으로 여기저기서 급히 긁어모은 낙엽과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위협적으로 흔들어 댔다.

 

 

 

사람들이 불까지 흔들며 겁을 주자 호랑이도 긴장을 한 것 같았다.

호랑이는 종원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몇 보 뒤로 물러나서 사람들을

쏘아 봤다.

 

사람들은 더욱 소리를 크게 지르며 몇 보 접근하니까 호랑이도

몇 보 후퇴했지만 힘들게 마련한 저녁꺼리를 쉽게 포기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그때 일행 중 담력이 센 남씨라는 분이 주먹만한 돌 두 개를

양손으로 마주치며 땅에 쓰러진 종원에게 접근했다.

 

“ 딱! 딱!”

 

조용한 산자락에 돌의 파열음이 날카롭게 퍼져나갔다.

 

호랑이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틈을 노려서 남씨는 얼른 종원을 들쳐 엎고 산 아래로 내리 뛰었다.

 

남은 사람들이 계속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돌을 마주치며

겁을 주는 데에다가 마을에서 수십 명의 민병대가 달려오는 것을 본

호랑이는 단념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종원은 급히 연길의 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다음날 아침에야

정신이 들었지만 혼이 나가서 그저 멍한 상태에 있었다.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아버지는

종원을 껴안고 “ 하느님이 도와서 네가 살았구나.” 라고

목이 메어 이야기 할 때야 종원은 자기가 살아난 것이

큰 기적이었다는 사실에 실감이 나서 눈물을 터뜨렸다.

 

 

 

 

 

여기서 누구나 품에 안겨, 안고 한번은 들어 봄직한 얘기를 들어보자.

 

이 호랑이가 사람을 습격한 사건에서

우리나라에서 그저 구전 동화처럼 오랫동안 호랑이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놀랄 만큼 정확한 호랑이의 생태학적 정보를 전해 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옛날에 아기들이 울면 엄마는 “울지 마! 밖에 호랑이 왔다!”하며

달래던 것이 자장가처럼 거의 관습화 되어 온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아기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호랑이를 들먹인 것이 아니다.

아기가 울면 진짜로 호랑이가 찾아 왔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을 이 사건이 보여준다.

 

호랑이는 야행성이라 대개 어두워진 밤에 출동 하는데 이번에는

초저녁도 되기 전에 종원의 마을을 습격 하는 무리수를 두었었다.

 

이유는?

바로 여자 어린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소프라노로 질러댔던 즐거운

비명들이 근처 산에서 휴식을 취하던 호랑이의 식욕을 한없이

간질여 댔기 때문이다.


육식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이 지르는 비명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곤란한 지경에 처해서 도주를 하기가

힘든 상태의 먹잇감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소리가 들리면 작게는 들 고양이에서 크게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야수들은 즉시 소리의 진원지로 달려든다.

그래서 야수들은 어지간한 고통에도 비명을 잘 지르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 예를 들자면

집에서 기르는 개는 어쩌다가 주인에게 발길로 채 이기라도

한다면 죽을 듯이 요란한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개의 사촌격인 이리들은 총에 맞아서 내장이 밖으로 노출이

되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옛날 한반도에 호랑이들이 시글시글했을 때

산촌의 야간에 아기의 울음소리는 멀리까지 들렸었고

이 울음소리는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들으면 짐승들의 비명 소리로 오해하기 좋다.

 

그러니 아기 울음소리는 호랑이들에게 여기에 잡아먹기 좋은

먹잇감이 있다고 알려주는 음성 메시지와 다를 바 없었다.

호랑이는 당연히 마을로 내려가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집 근처를

어슬렁 거렸을 것이고 아기 엄마는 이를 눈치 챈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기를 달래느라고 애를 썼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옛 전설을  조종원 씨의 사건이 진실임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물려갈 팔자가 따로 있다고 했었다.

호랑이가 그런 사람만 귀신같이 알고 찍어서 잡아 갔다는 것이다.


옛 사주 책에 자주 나타나는 호환(虎患)이라는 운세는 이와 같이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
요새는 그 운세가 교통사고로 바뀌었다.

 

종원을 습격한 호랑이도 주변의 여자 아이들은 그냥 건너뛰고

중앙에 있었던 종원을 물어갔었다.

조종원 씨는 나에게 자신의 수난을 들려주면서 그것이 참 이상했다고

강조해서 말했었다.

그의 경험은 위의 속설이 정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하나, 호랑이가 꼬리로 물을 적셔서 종원에게 뿌렸다는 것,

이것도 증명해주는 사실이 있다.

호랑이는 아마 죽은 것보다 산 것을 좋아 하는 듯하다.


옛날이야기에 술을 마시고 가다가 너무 취해서 길가에 쓰러져 자던

농부를 호랑이가 꼬리에 물을 적셔서 위와 같이 깨웠다는

동화속의 이야기 같은 기록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종원의 일화가 사실일수 있다고 증명해준다.

 

그리고 더 하나. 종원을 구한 남씨라는 주민이 돌을 맞부딪히며 호랑이를

견제했다는데 이분은 뭔가 아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호랑이들은 물론 동물들은 이런 파열음을 아주 싫어한다.


 

 

옛날 깊은 산속을 오고가는 스님들은 긴 지팡이 위 끝에 너덧 개의

쇠고리를 달아서 걸을 때마다 철커덕 철커덕하는 쇳소리가 나게

했었는데 이는 호랑이가 이런 금속성 소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튼 종원 소년은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소학교에 다닐 때는 반의 친구들이 그를 ‘범 밑바시’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별로 흉터에 구애 받지 않고 씩씩하게 자랐다.

[밑바시란 함경도 방언으로 음식 찌꺼기를 가리킨다.]


그는 성장해서 공무원직에 투신하여

향장(鄕長-우리나라의 면장)으로 정년퇴직 할 때까지

삼십년의 세월을 국가에 봉사했다.

 

조종원씨는 거나하게 취하자 첫 번의 경계하던 모습을 다 버리고

자기가 당했던 호환(虎患)의 경험을 구수하게 이야기 했다.

이야기는 호랑이를 뛰어 넘어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이야기들로 옮겨갔다.

 

그는 자기가 가진 흉터가 앞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뒤쪽에 길게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10센티 이상 길게 찢어진 상처였다.

무슨 긴 몽둥이로 맞은 상처 같았다.


앞쪽의 흉터는 호랑이가 선사 한 것이었지만 뒤쪽 흉터는

다른 맹수가 선사한 것이었다.

60년대에 그는 호랑이보다 더 고약하고 지독한 동물들을 만나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모택동이 잘못 만들어 낸 소위 홍위병이라고 하는 붉은 동물들이었다.

이름이야 그럴듯했지만 그들이 해댄 행적을 보니

홍위병들은 국가가 공인해준 조직 폭력배들이었다.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들에게 끌려가서 심하게 구타당하고

고깔 모자를 쓰고 군중들 앞에서 조리 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봉변을 ‘투쟁 당했다’고 한다.]

 

조종원씨는 호랑이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담담하게 말하면서 한 마디도 호랑이를 원망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위병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노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여러 번이나 홍위병들의 행패를 성토했다.

“그 것들, 짐승보다도 못한 것들이었소.”

나는 흥분한 조종원씨를 보다가 또 다시 문득 느꼈다.

 

호랑이에 관한 옛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머리에 떠오른 관련 이야기는

성인 공자님의 일화였다.

 

 

 

부패한 정권이나 관리의 횡포에 대해서 말할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태산의 한적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한 여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가 하도 슬퍼서 공자는 수레 앞에 몸을 기대고 듣다가,

자로에게 여인에게 가서 사연을 알아보라고 했다.

 

"부인의 울음소릴 들어보니, 마치 슬픈 일을 몇 번이나

당한듯한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부인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일대는 아주 무서운 곳이죠.

옛날 저의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는데,

얼마 전에는 제 남편이 호랑이에게 죽었고,

이번에는 제 자식이 또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아니, 그럼 이 무서운 곳에서 왜 떠나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면 무거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가슴에 잘 새겨두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유명한 공자님의 가르침인 -苛政猛於虎-의 일화이다.

종원을 물어 가다가 흉터만 남겨 주고

실패했던 호랑이는 또한 공자님의 가르침이

백번 옳다는 가르침도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 외 우리 민족도  당시 지배층에서 백성을 핍박하고

부폐한 벼슬아치에게 던졌던 멧세지도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얼굴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며,

코를 감싸 쥐고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말하길 ‘(배웠다는 놈이) 더럽구나. …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마라. …


너희가 밤낮으로 싸다니며 팔 걷어붙이고 눈 부릅뜨고, 노략질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심한 놈은 금전을 형님으로 모신다. …

그 잔인하고 박한 행실이 너희보다 심한 것이 무엇이 있더냐.”(박지원 <호질>)

 


인용한 글은 백수의 제왕 호랑이가, 점잖은 척 더러운 짓을 일삼는

도덕군자(유학자)를 향해 던지는 준엄한 꾸짖음(호질·虎叱)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 ‘호시탐탐’ 남의 재물을 노리고,

권력에 빌붙어 ‘호가호위’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이 넘치면

백성들은 밤낮으로 이런 속담을 되뇌게 된다.

 

 

 

해태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는 ‘해치’라고도 불리는데,

해치는 순우리말 고어로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이상 우리민족의 문화의 한 부분인 범(虎)

 

   많은 문헌들을 참고하여 긴 시간동안 정리하여 기록해 둡니다.


   그 옛날 곶감이 익어가는  밤

   싸리문 사이로 우리 어머님들께서

   우는 아기를 보듬고 달래는 실루엣이 보인다.


   얼른 거치거라 호랭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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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우리 범(虎)의 흔적을 찾아서 >>


 


 

 

 

 

 

 


 합천 가야산

합천 가야산


 

 

  정족산












 표범이 다니던 길



 범이 마을 동향을 실피며 내려다 보던 곳을

 이제는 다른 동물이 이용하고 있네요.



함안 여항산




 아래는 산행하며 발견한 조선 표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굴입니다.

 2층식 계단이 있는 굴이며 2층은 서늘하여 고깃간으로 충분한 공간과

새끼 표범들이 장난을 칠수 있는 아주 큰 굴이였습니다.

 

 

 


범이 사라진 지금

그곳에는 방목에서 야생화된  염소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다자란 수표범이 잡힌 함안군 여항산

  경남 함안 여항산 인근 내곡리 뒤 정상부에서 본 범(虎)의 굴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범(虎)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카페를 통하거나 저에게 연락 방문해 주셔도 같이  범의 굴까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아득한 그 예전

  우리 선조님들의 속에 늘 살아 숨 쉬던  범(虎)
  그 범을 만나려 밤잠을 설쳐가며 기록해둡니다.


  곶감이 익어가는 까마득한 밤하늘

  적막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으흥!

  

  많은 글과 사진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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