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고분이 많다. 최근에 무덤이 하나 더 생겼다. 여론조사의 무덤.
“천년고도(千年古都) 아입니까.”
4·29 재·보선을 앞둔 주말, 한 친박계 인사가 빙글거리며 기자에게 말했다.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 정종복 후보가 친박 성향의 무소속 정수성 후보를 많게는 15%포인트 이상 앞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유만만이었다.
“경주는 원래 그런 데라요.”
수십 세대를 내려오면서 학연과 혈연으로 얽히고설킨 유서 깊은 소도시. 앞집은 중학교 선배, 옆집은 고등학교 후배, 뒷집은 고모댁 사돈…. 서로 뻔히 아는데 누가 여론조사에 제대로 답을 해주겠느냐는 얘기였다. 결과는 정수성 후보의 1만563표(9.4%포인트)차 당선. 정종복 후보가 20%포인트 이상 앞선다던 여론조사 기관들이 머쓱해질 만한 득표 차였다. “그것 보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긴 지난해 총선 때도 그랬다. 심지어 선거 당일 출구조사도 틀렸다. 당시 한 방송사 조사 결과 정종복 후보가 14.6%포인트 차이로 앞섰지만 개표 결과 친박연대 김일윤 후보가 5.2%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꼭 경주만은 아니다. 박빙 지역이라던 인천 부평을도, 전주 완산갑도 여론조사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부평에선 민주당 홍영표 후보가 10.4%포인트 차로, 완산갑에선 무소속 신건 후보가 18.1%포인트 차로 이겼다.
앞으로 여의도의 고민은 깊어지게 됐다. 현대 정치에서 여론조사 결과는 선거 전략을 짜는 참고자료에 그치지 않고 후보 선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의 울산 북구 단일화를 결정지은 것도 여론조사였다. 진보신당 조승수 후보와 민주노동당 김창현 후보의 차이는 1.4%에 불과했다.
애초에 정종복 후보의 공천을 결정지은 것도 여론조사 결과였다. 공천심사 당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조사는 25%포인트 이상 정수성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안경률 사무총장은 “ARS 조사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며 외부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정종복 후보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친박계의 한 재선 의원은 “2002년 이회창 후보의 대선 패배까지도 맞힌 우리 당 연구소를 사무총장이 못 믿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친이계 핵심 의원은 기자에게 “친박 인사가 많이 포진해 있는 여의도연구소 조사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선후보 경선 때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승패를 가른 것도 여론조사였다. 이 대통령이 대선에서 큰 표 차이로 당선됐지만 경선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말이 많았다.
선거는 끝났다. 새 국회의원 당선자를 낸 5개 지역 민심도 선명히 드러났다. 지금 여의도는 이를 바탕으로 ‘전국 민심’을 읽고 있다. 5개 지역구가 민심 조사의 샘플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남 둘, 호남 둘, 수도권 하나가 고루 섞여 얼핏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245개 중 5개 지역구, 2%에 불과한 샘플로 제대로 된 ‘민심 조사’를 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잘못된 여론조사는 아닐까. 승자에게 더 약이 되는 의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