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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 삼각산 경국사 극락보전 주련 ③ 首尔 貞陵 三角山 慶國寺 極樂寶殿 柱聯 三
경국사 극락보전
上是天兮下是地 상시천혜하시지 六六元來三十六 육육원래삼십육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위로는 하늘이요 아래로는 땅이로다. 여섯에 여섯 곱은 원래로 서른여섯. 대 그림자 섬돌 쓸어도 티끌은 일지 않고 달빛이 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없네.
【解說】
경국사 극락보전은 정면과 좌우 양쪽에 주련이 걸려 있어 세 번에 걸쳐 나누 어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련은 대부분 《금강경오가해》에 나 오는 야보(冶父) 스님의 게송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주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게송도 온전히 사구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곳저곳에 있는 것을 짜깁기하는 식으로 조합하여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게송을 극락보전에 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극락세계는 아 무나 가는 곳이긴 하지만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일념처(一念處)에 도달한 사람만이 가는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금강경》의 공(空) 의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는 이를 수 없는 곳이니 마음을 닦아라 하는 의미에 서 걸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上是天兮下是地(상시천혜하시지)
이 글의 출처는 《금강경》『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중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자(如來者)는 즉제법여의(卽諸法如義)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여래라 함은 곧 모든 법의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하는 구절에 대한 《금강경오가해》의 야보(冶父) 스님의 송에 나옵니다. 야보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住住(○주주)하라 動着則三十棒(동착즉삼십방)하리라 ○ 머물고 머물러라. 동하면 삼십 방망이를 내리리라.
上是天兮下是地(상시천혜하시지) 위로는 하늘이고 아래로는 땅이며 男是男兮女是女(남시남혜여시여)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로다. 牧童撞着牧牛兒(목동당착목우아) 소치는 목동이 목동을 만나니 大家齊唱囉囉哩(대가제착라라리) 모두가 일제히 라라리를 부르도다. 是何曲調萬年歡(시하곡조만년환) 이 무슨 곡조인가? 만년환이로다.
야보 스님은 구경무아(究竟無我)의 구경처(究竟處)를 ○으로 표시하여 그 자 리는 원만하고 청정하여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으므로 ○를 그려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엔 망상이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망상이 쉬어진 자리입 니다. 여기서 한 생각 일어나면 삼십방입니다.
"여래(如來)란 곧 모든 법의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하고 부처님께서 수보 리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여(如如)란 진여(眞如)를 말합니다. 보는 그 대로가 진리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진여의 자리는 원만하고 청정하고 평등하므로 여(如)라 합니다.
이에 대한 《금강경오가해》의 설의(說誼)를 올리니 뜻을 생각해 보시기 바 랍니다.
「다만 진여의 평등한 도리를 무어라 말할 것인가. ○ 여기에는 중생과 부처 가 모두 없어지고 나와 남이 함께 없어짐이니, 하늘이 땅이며 땅이 하늘이니 하늘과 땅이 구름이요, 물이 산이고 산이 산이 물이니 물과 산이 공함이로다.
비록 이와 같으나 모든 법이 본래 제위치에 있으니 뉘라서 등롱(燈籠)을 불러 노주(露柱)라 하리오. 그러한즉 응당 동하지 말 것이니 동하면 삼십 방망이 를 내리겠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 어찌 일찍이 구르리오. 물은 물이고 산은 산 이니 각기 완연하도다. 백억이나 되는 살아 있는 석가모니가 취하여 봄바람 에 춤을 추니 곡조가 자연스러운데 누가 화답할 줄 알지 못하겠는가 .
'만년환(萬年歡)'의 곡조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사람마다 스스로 무생(無生)의 음악이 있기 때문이로다.」
진리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있는 그대로가 진리란 뜻입니다. 있는 그대 로를 여실히 보면 법성(法性)을 보는 것이요, 이것에 집착하여 망상을 더하여 바라보면 엉뚱하게 허상(虛相)을 보게 됩니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여기서 목동(牧童)은 소치는 아이지만 소를 기른다는 것은 자기의 본래면목 (本來面目) 즉 자성(自性)을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당착(撞着)이란 부딛침, 충돌, 우연히 만나는 것, 핵심을 파악하는 것, 또는 진실과 정확하게 합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목동이 목동을 만났다는 것은 목동이 본 모습을 만났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면목을 보았으니 얼마나 환희롭습니까? 그래서 모두가 일제히 '나나리 리라리'하고 환희곡(歡喜曲)을 부르는 것입니다.
六六元來三十六(육육원래삼십육)
우리님들과 엇그제 삼사순례 중 경국사 극락보전 우측면에 붙은 이 게송을 보며 많이 웃었습니다. 육육은 원래 삼십육이다. 6 × 6 = 36 "옛날에도 구구단이 있었는 모양입니다." "아, 그럼요. 있었지요." ^^
上是天兮下是地(상시천혜하시지)도 글자 풀이가 쉽지만 六六元來三十六 (육육원래삼십육)은 더 쉬워서 모두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금강경》『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에 이런 경문이 있습니다.
"다시,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무아(無我)ㆍ무인(無人)ㆍ무중생(無衆生)ㆍ무수자(無壽者)로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이 경문에 대하여 야보스님은 다음과 같이 송(頌)하셨습니다.
산고해심(山高海深)이요 일생월락(日生月落)이로다. 산이 높으면 바다가 깊고, 해가 뜨면 달이 진다.
僧是僧兮俗是俗(승시승혜속시속) 스님은 스님이고 속인은 속인이며 喜則笑兮悲則哭(희즉소혜비즉곡) 기쁘면 하하 웃고 슬프면 엉엉운다. 若能於此善參詳(약능어차선참상) 만일에 여기에서 참상(參詳)을 잘 하면 六六從來三十六(육육종래삼십육) 육육은 종래로 삼십육임 알리라.
주련은 원래(元來)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종래(從來)로 되어 있습니다. 글자 하나만 다를 뿐 뜻은 같습니다. 보통은 원래(元來)를 많이 씁니다. 야보송에 대한 설의(說誼)를 옮겨 봅니다.
「평등이라 함은 어찌 높은 산을 깎아 낮은 못을 메워야 하며 학의 긴 다리 를 끊어 오리의 짧은 다리를 이어진 뒤에야 그렇게 되겠는가. 긴 것은 긴대 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높은 것은 높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 평등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스님을 불러 속인이라 하리오. 기쁜 것을 통곡한다고 할 필요 가 없다. 다만 흐름을 따르면서도 본 성품을 알면 이것과 저것이 평등한 것 이다.」
산이 높으면 바다가 깊은 것 이것이 평등입니다. 해가 뜨면 달이 지는 것 이 것이 그대로 평등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 覺)입니다. 궁극의 구경처를 얻은 깨달음을 말합니다. '위없는 바르고 평등 한 바른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 을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 보면 있는 그대로 평등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 은 말했습니다. "육육은 원래로 삼십육이요, 구구는 본시 팔십일."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이 게송은 무척 유명해서 명나라 말기의 학자 홍자성(洪自誠)이 엮은 채근담 (菜根譚)에도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는 둘째 구가 글자는 약간 다르지만 뜻 은 같은 月輪穿沼水無痕(월륜소천수무흔)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금강경오가해》야보 스님의 글에 나옵니다. 이는 《금강경》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중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다음과 같 이 말씀한 대목에 송을 붙이신 것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리라」하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이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 보살이라고 이름한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체법이란 무아ㆍ무인ㆍ무중생ㆍ무수자」라고 설하느니라."
이에 대하여《금강경오가해》중 야보 스님은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喚牛卽牛(환우즉우)요 呼馬卽馬(호마즉마)니라. 소라고 부르면 곧 소요,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니라.
借婆衫子拜婆門(차파삼자배파문) 노파 적삼 빌려 입고 노파에게 절을 하니 禮數周旋已十分(예수주선이십분) 예의 법도 맞음이 이미 충분하도다. 竹影掃階塵不動(죽영소계진부동) 대그림자 섬돌 쓸어도 티끌은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월천담저수무흔) 달빛이 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없네.
'소'라고 부르면 곧 '소'요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듯 법(法)은 본래 일정 한 법이 없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보면 모든 것은 잠시의 인연에 불과하기 때문에 '있다-없다'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본체는 텅 비어 있습니다.
노파의 적삼을 빌려 입고 노파의 문전에서 절을 하니 예의와 법도는 그것으 로 충분합니다.
보살이 만일 "나의 설법으로 인하여 저 사람의 번뇌를 제거한 사람이다."라 고 말한다면 이것은 법아(法我)입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능히 중생들을 도탈(度脫)케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나'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더라도 그의 마음에 '나'라는 생각과 '너' 라는 것이 있어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 는 것입니다. 이 아상ㆍ인상을 떠나야 진정한 보살인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가 뜰에 비추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도 물결이 일지 않습니다. 아무런 집 착이 없습니다. 행하되 행했다는 상을 떠나 있습니다. 이는 항상 바깥 경계대상에 흔들림 없이 마음을 고요히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법은 무아(無我)로 텅 비어 있는데 집착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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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이 높으면 바다가 깊은 것 이것이 평등' 이라고 하신 말씀 평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_()_
억지로 하는 것은 평등이 아닙니다. 유위법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불평등의 세계입니다. 무위법의 세계야말로 평등의 세계입니다. _()_
백우님께서 설명을 잘 하신 까닭인가요 주련 내용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느낌입니다. 바깥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주련을 통하여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선시를 해석하는 것은 저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다만 언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깊이 상량해야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댓바람은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고 합니다. _()_
주련으로 금강경 한편을 공부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_()_
금강경은 공부가 최고에 이르렀을 때 점검하는 최고의 경전이라 합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소의경전으로고 있지요. 여기 있는 게송이 모두 금강경을 노래한 게송입니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_()_
좋은글 감사합니다. _()_
우리는 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늘 염상(染相)으로 바라봅니다. 그 염상에 번뇌가 묻어 있지요. _()_
주련 설명을 되풀이 해서 듣게되니 말씀은 귓가에 감도는데....머리에 쏙쏙 입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당ㅎㅎ._()_
되풀이 해서 읽고 또 생각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한 번 읽고 쏙속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절하면서 108참회문 전문을 외워보려고 노력하는데 수없이 반복해야 겨우 한 구절 입력되네요. _()_
마음자리 내려놓고 가는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
내려놓으면 만사가 편안하지요. 댓그림자가 계단을 쓸 듯... _()_
주련풀이 잘 봤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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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