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평창 오대산 산행 및 사찰순례 ④ 江原 平昌 五臺山 山行 及 寺刹巡禮 四
-오대산 상원사 (五臺山 上院寺) ①-
중대사자암에서 오후 3시 5분 출발하여 저 혼자 빠른 걸음으로 상원사로 향했습니다. 얼른 가서 주련을 찍으려고 한 것이지요. 주련 찍는 것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 다. 주련을 찍다 보면 일행을 놓치기 쉽상입니다. 10분정도 걸렸을까 상원사에 도착했습 니다. 십여년 전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불사는 있었 습니다. 이제 와 보니 옛 모습은 가물가물합니다.
우선 상원사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의 말사인 오대산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번지에 소재해 있습니 다.
창건 연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史)>의 전문을 옮겨 봅니다.
「신라 정신왕(신문왕) 아들 보천태자(寶川太子)가 동생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 부 세현 각간의 집에 이르러 하루를 잤다. 다음날 대관령을 넘어 각각 1,000 명씩 데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다다라 여러 날 놀았다. 대화 원년 8월 5일, 형제는 함께 오대산으로 숨어버렸다. 무리들과 호위하던 사람들이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경주) 로 돌아갔다.
형이 중대(中臺)의 남쪽 아래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 터에 나타나자, 산 끄트머리 에 푸른 연꽃이 곧장 피어나는 것이었다.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 동생 효명이 북대(北臺)의 남쪽에 나타나자, 산 끄트머리에 연꽃이 피어나 또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형제는 예를 다해 수행하며 오대(五臺)에 나아가 경건히 예배를 드렸다.
푸른색 방향은 동대(東臺)의 만월산(滿月山)인데 관음진신(觀音眞身) 1만 분이 늘 계시고, 붉은색 방향은 남대(南臺) 기린산(麒麟山)인데 8대 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어 1만의 지장보 살(地藏菩薩)이 늘 계시고, 흰색 방향은 서대(西臺)의 장령산(長嶺山)인데 무량수여래(無 量壽如來 아미타불)가 우두머리가 되어 1만 분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늘어서 계시 고, 검은색 방향은 북대(北臺)의 상왕산(象王山)인데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우두머리가 되 어 5백 아라한(阿羅漢)이 늘 계시고, 노란색 방향은 중대(中臺)의 풍로산(風爐山) 또는 지 로산(地爐山)인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우두머리가 되어 1만 분의 문수보살(文殊菩 薩)이 늘 계셨다.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의 문수대성은 매일 아침 인시(寅時)에 서른 여섯 가지 모습 으로 나타나, 두 태자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1만 진신과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정신태자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의 왕위를 놓고 다툼을 벌이다 죽게 되었다. 나라 사람 들이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 오대산 효명태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불렀다. 곧바로 다섯 색깔의 구름이 오대산부터 신라까지 덮혀 일곱 날 일곱 밤 빛을 뿜었다. 나라 사람들이 빛을 따라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려 했다. 보천태자가 울면 서 돌아가려 하지 않자,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에 올렸다.
20여 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신룡 원년(705) 3월 8일에 처음 진여원(眞如院 상원사)을 열 었다고 한다.
보천태자는 늘 골짜기의 신령스런 물을 길어다 마셨으므로, 몸이 하늘로 떠올라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국의 장천굴로 들어갔다. 여기서 도를 닦다 오대산의 신성굴로 돌아와 50년 을 수도했다 한다.
오대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진신이 늘 계셨다고 한다.」
그뒤 보천은 여러 가지 신이한 행적을 보이다가 임종 전 오대산에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 (信行結社)를 만들 것을 유언했다고 합니다.
"이 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는 진신(眞身)이 상주하는 곳이다. 청(靑)은 동대의 북각(北角) 아래와 북대의 남쪽에 있으니, 그곳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원상관 음(圓像觀音)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福田) 5원(員)을 두어 낮에 는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와 천수주(千手呪)를 읽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觀 音禮懺)을 염하게 하여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이름하라. 적(赤)은 남대의 남쪽에 있으 니 그곳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이렇게 시작되는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般若經)과 화엄경(華嚴經)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였습니다. 또 결 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기도를 올리는 복전승(福田僧) 7명을 두게 하였 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오대산은 새로운 신앙세계가 펼쳐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상원사에서는 음력 4월 1일부터 말일까지 봉찬기도를 봉행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려 말 경 이 상원사가 폐허가 되었는데 나옹 스님의 제자인 영령암(英靈庵) 스님 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이 터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는데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부인이 재물을 희사하여 우왕 2년(1376) 착공하여 이듬해 낙성을 보았습니 다. 그 후 선객을 모아 좌선을 시작했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 법회 때 승당의 불상이 방광(放光)하여 모두 환희했는데 중창주 김씨부인은 더욱 신심이 돈독해져 더욱 많은 재물을 보시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책에 의해 전국의 사찰들이 황폐화 되었는데 그 선봉에 선 사람이 태종(太宗)이었는데 그런 태종이 상원사 만은 예외를 두어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와 목요소까지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조(世祖)와 상원사와는 깊은 관계가 있어 상원사하면 세조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세 조의 피부병을 문수동자가 낫게 하고, 세조가 상원사를 찾았을 때 고양이가 자객의 피습 을 막게한 일화가 있어 불은을 많이 입은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었습니다. 세조는 신미 (信眉)와 학열(學悅) 스님의 권유로 상원사의 중창하게 되는데 세조 11년(1465) 학열스님 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이듬해 낙성식을 가졌는데, 많은 전각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이기에 왕실 의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혜택을 받아 억불숭유의 정책 속에서도 스님들이 안심하고 수행하는 수행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 세조와 문수동자 이야기 <불교이야기>방 63번을 참조 하세요
광무 8년(1904)년 선원을 개설하고, 융희 3년(1907) 수월(水月)화상이 주석하며 선풍을 드 날렸고, 1951년 입적하신 한암(漢巖) 스님이 30년간 주석하며 탄허(呑虛) 스님 등 많은 고 덕(高德) 스님들을 길러 낸 바 있습니다.
1946년, 영산전(영산전. 당시 주 법당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실화(失火)로 전소되었다 고 합니다. 이에 당시 월정사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 스님이 1947년 금강산 마하연사 (摩訶衍寺)의 건물을 본따서 정면 8칸 측면 4칸의 T자형 건물을 중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6.25 때인 1951년, 오대산 내의 모든 건물을 소각하였을 때 상원사는 방한암(方漢 巖) 스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키어 오늘날 성보들이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스님 이 아니었다면 상원사의 성보들은 잿더미로 화했을 것입니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 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불교이야기>방 65번을 참조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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