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國海洋大學과 靑島大學
청도해양대학은 市南區의 大學路, 魚山路, 紅島路와 八關山 사이에 있다. 이 학교는 靑島市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 지명도가 높은 대학이며, 청도시에서 유일한 교육부 직속의 국가종점학교이다.
해양대학의 옛터는 원래 청군의 병영이었다. 1891년 청정부는 청도(당시에는 교오라 불렀다)에 방위군을 주둔하기로 결정했다. 1892년 등주진의 總兵 章高元이 4개 營의 병력을 이끌고 청도에 주둔하여 포대, 병영, 무기창고, 전보국, 잔교 등을 수축하고, 靑島山 서남쪽 자락에 廣武中營과 崇武中營을 설치했다. 1897년 독일군이 청도를 점령한 다음에는 이 2개의 병영을 점거하여 그 자리에 독일군의 병영을 다시 수축하여 모두 4개의 건물을 세웠다. 이것은 독일군이 청도에 수축한 3개의 병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지금 청도해양대학 地質樓가 있는 곳은 대형 연병장이었으며, 연병장 북쪽의 암벽에 2개의 문을 뚫고 그것을 병영의 주건물과 통하게 했다. 이 통로는 지하실로 통하는 비밀통로였으며, 독일의 교오총독관저와 포대 그리고 前海로 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독일군사령부는 바로 이 병영에 설치되었다.
일본이 독일을 대신하여 청도를 점령한 다음에 이 병영은 ‘萬年兵營’이라 하여 일본군이 주둔했다. 1922년 12월 10일, 중국정부가 청도를 수복한 다음에는 중국육군의 제5사단 제10여단이 이곳을 병영으로 사용했으며, 청도산의 이름을 따서 ‘靑島兵營’이라 불렀다.
청도가 중국으로 돌아오자 실업계와 교육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세우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우선 청도중학과 교오중학을 설립했지만, 청도 각계의 가장 절박한 요구사항은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1923년 康有爲는 청도에 왔을 때 아름다운 환경에 반해서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품을 팔아서 수천원을 마련하여 학교 설립자금에 쓰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이 사실이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이유로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康有爲와 청도의 대학설립에 관한 내용은 필자가 쓴 ‘康有爲와 청도’라는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24년 4월, 북양정부에서 교육총장과 교통총장을 맡고 있던 高恩洪이 직계군벌이었던 동향인(산동의 蓬萊) 吳佩孚의 지지를 얻어 교오총독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청도의 재계와 교육계 인사들 가운데 劉子山, 孫廣欽 등이 高恩洪에게 청도에 대학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교오독판공서의 지지를 얻은 청도의 재계는, 사립 청도대학을 설립할 자금을 모으고, 학교부지로 독일이 사용했던 병영을 선택했다. 그러자 高恩洪은 “청도의 상업부두는 개방을 하지만 군대의 주둔은 금지한다.”라는 이유를 들어서 주둔군 여단장 王翰章을 위협하여 청도에서 물러나게 하고 병영을 학교부지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 해 8월, 사립 청도대학이 정식으로 개교를 했다. 高恩洪은 초대 학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청도대학은 공과와 상과 등의 2개 학과로 시작되었으며, 학생들은 주로 북경, 남경, 제남, 청도 등지에서 불러 모았다. 국내의 학생들 외에도 조선에 거주했던 화교의 자제들이 입학을 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원수였던 羅榮桓은 이 때 청도대학의 예과 학생이었다. 1924년 제2차 直奉戰爭이 발발하여 직계군벌이 패배하였고, 高恩洪은 王翰章에게 체포되어 사직하게 되었다. 1928년 5월 張宗昌이 제남에서 탈출하여, 일본군과 ‘濟南慘案’을 맺고, 청도와 제남을 점령했다. 張宗昌이 학교에 지원하던 경비를 없애자 학생들은 흩어지고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1929년 5월 일본군이 산동에서 물러난 후 산동성 교육청장 何思源이 남경정부 교육부의 비준을 받아, 1928년에 성립된 국립산동대학주비위원회를 청도대학주비위원회로 개칭했다. 1930년 9월 사립청도대학과 제남의 성립산동대학교 설립계획안이 접수되었고, 국립청도대학은 楊振聲을 학교장으로 초빙했다. 설립 당시에는 문과와 이과 등의 2개 학원으로 나누어, 그 산하에 중국문학, 외국문학,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교육 등의 7개 학과를 두었다.
청도대학이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918사변이 발생하자, 많은 학생들이 전투에 참가했다. 1932년 남경의 국민정부 교육부는 국립청도대학을 국립산동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고 趙畸를 국립산동대학장으로 초입했다.
1930년대에 산동대학은 전공제도를 설치하고 敎學科硏을 두어 교사로서의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또 工學校와 제남의 農學院을 증설하고, 저명한 학자들과 전문가를 초빙하여 교수로 임용했다. 이 때 초빙된 학자로는 聞一多, 王統照, 老舍, 梁賣秋, 童第周 등이 있다. 이로서 산동대학은 중국에서 이름난 학교로 등장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산동대학은 四川으로 옮기고 휴교를 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산동대학교우회가 교육부의 동의를 얻어 청도에서 복교를 하고 조기를 학교장으로 임명했다. 이 때 산동대학은 이미 문과, 이과, 공과, 농과 의과 등의 5개 단과대학과 16개 학과를 두었으며, 학생수 1천여명에 교직원만 300명이 넘었다. 산동대학의 옛터를 미군이 점령하자 선생과 학생들은 魚山路에 있던 일본중학교 교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산동대학의 선생과 학생들은 하교를 점령한 미군의 폭행에 항의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48년 미군이 산동대학에서 철수했다.
1949년 여름 산동대학의 학생들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反內戰, 反飢餓, 反迫害 運動’에 참여하는 한편, 중공군의 해방구를 지원하여 군사투쟁이 나서기 시작했다. 1949년 산동대학의 선생과 학생들은, 국민당정부가 산동대학을 남쪽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거절하고, 오히려 중국공산당에 지지를 보냈다. 그 결과 그들은 학교를 지키는 한 편, 중공군이 청도를 점령할 때 크게 기여를 했다. 1951년 산동대학과 화동대학이 합병을 하여 학교명을 ‘산동대학’으로 정하는 한 편 유명한 학자 華崗出을 산동대학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서 산동대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고, 규모뿐만 아니라 교수진과 교육과목에서도 전국에서 유명한 학교로 도약하게 되었다.
1958년 중국공산당 산동성위와 성정부의 결의로, 산동대학의 대부분이 제남으로 이주하고, 청도에는 해양, 수산, 지질 등의 학과만 남았다. 1959년 청도에 남은 해양학과와 수산학과로 산동해양대학을 설립했고, 지질학과는 산동지질대학으로 분리되었다. 1960년 산동지질대학이 산동해양대학으로 합병되면서 중국에서 유일한 해양과학교육대학이 설립되었다.
1988년 산동해양대학이라는 교명을 청도해양대학으로 국가교육위원회 직속의 전국종점종합대학이 되었다. 학교의 총면적은 70만평방M이며 건축면적은 24만평방M이다. 해양환경, 해양생명, 해양지구과학, 수산, 공정, 화학, 기술과학, 경제무역, 외국어, 국제언어문화교류, 성인교육 등의 11개 단과대학에 30개의 학부가 있으며, 38개의 본과전공학과와 20개의 전문학과, 9개의 박사과정, 28개의 석사과정이 있다. 박사후과정은 해양학과에 설치되어 있다. 해양학과 해양화학과는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여, 中國海洋生物工程센터와 國家海洋藥物工程技術硏究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 3개의 국가교위개방실험실과 9개의 성급중점학과, 6개의 성급중점실험실, 26개의 연구소가 있으며, ‘東方紅 2호’라는 해양연구종합고찰선도 보유하고 있다.
1997년말에는 교직원이 모두 1,859명이고 그 가운데 전임교수가 578명이며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을 전담하는 교수가 45명, 교수가 180명, 부교수와 기타 고급기술직이 300명인 규모로 성장했다. 같은 해 기준으로 재학생은 5,070명, 연구생 502명, 유학생 40여명이다. 그동안 출판된 저서는 149종이며, 발표된 논문은 3028편으로 시상을 받은 것은 181개 항목이다. 35개 국가 또는 지역의 대학과 연구기관과 합작 또는 교류를 하고 있다. 이 대학에서 배출한 인재는 중국과학원의 원사로 2명, 중국공정원의 원사로 2명로 근무 중이다.
청도해양대학 캠퍼스 안에는 붉은 기와와 황색 담장으로 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독일이 청도를 점령했을 때 수축했던 3대병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병영은 원래 청군의 장고원 부대가 수축했던 병영이다. 1899년 독일군은 청군의 병영을 현대식 병영으로 수리하고 4개의 고층건물을 지었다. 가운데 제1병영과 제2병영은 1903년에 지었고, 제3병영과 재4병영은 1906년에 완공했다. 이 건물은 건축관리국 행정계획처의 설계에 따라 비밀리에 시공되었다고 한다.
이 4개의 건물은 평면으로 보면 ‘H’자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지상으로 3층 지하로 1층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지하가 2층이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연병장이 있었고, 병영의 막사에는 부채꼴인 지하실이 있다. 건물 내부에는 높고 넓은 복도가 있다. 복도 양쪽으로 병사들의 상당히 넓고 환한 숙사가 있으며, 방의 외부에는 복도 쪽으로 목제창문이 있다. 숙사의 외부에 회의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건물 내부의 계단은 정교하게 돌을 이어서 만들었다. 위로 올라가면, 석재를 단순하고 얇게 잘라서 이은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지만, 아주 튼튼하게 보인다. 현재도 병사들이 생활했던 막사, 계단, 창문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역사는 아무리 치욕적이라 해도 그대로 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병영의 주건물은 현재 해양대학의 지질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2개동의 건물에는 지하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은 은밀하고 깊게 설계된 지하도로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이 지하도로의 입구가 나온다. 그 외에도 건물의 서쪽 문 양쪽에 지하실로 들어가는 2개의 입구가 있으며, 이 입구에서 연병장으로 통한다. 병사들이 유사시에 연병장에서 지하실로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지하실의 입구는 높이가 1.5M이며 넓이가 1M정도로 성인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이다. 지하도로의 높이는 약 3M이며 넓이는 2M로 곳곳에 굴곡이 있어서 상당히 은밀한 느낌이 든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길은 지금의 영빈관 자리에 있었던 독일총독의 관저와 잔교부두 그리고 독일군의 포대로도 통했다고 한다. 현재는 이 지하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지하실이 독일군의 대피처로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모진 고통을 준 곳이었을까는 의문이다.
이 병영은 독일군이 청도에 수축한 제1병영으로 독일군의 교오사령부가 있었던 중요한 곳이다. 일본과 독일이 전쟁을 할 때 이곳은 독일군의 지휘본부였다. 독일이 패전을 하여 항복을 한 다음에는 일본군이 진주하여 ‘萬年兵營’이라 불렀다. 1922년 중국이 청도를 되찾은 다음에는 ‘靑島兵營’이라 고쳐 불렀으며, 중국육군 제5사단이 진주했다. 1924년 청도대학이 설립된 다음에도 미군이 병영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 과거에 지은 병영의 모든 건물은 지금 청도해양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청도해양대학 캠퍼스의 서북쪽 모서리에는 동떨어진 집이 있다. 紅島路를 따라서 해양대학 4호교문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붉은 기와에 황색담장으로 둘러싸인 소박하고 단아한 2층짜리 작은 건물이 나온다. 청도시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이 건물은 聞一多先生이 살았던 집 ‘一多樓’이다.
몇 채의 건물이 서 있는 곳 가까이로 다가가면,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위에는 ‘聞一多先生’이라는 5개의 큰 글씨가 있다. 기념비의 높이는 4.33M이며, 하부는 돌로 만든 디딤돌이 있고 상부에는 눈썹을 내려 깔고 무엇인가를 심각하게ㅔ 생각하는 聞一多의 반신상이 있다. 이 비석은 1984년에 세웠으며, 徐立中이 만들었다. 조각상은 전국우수성시조각설계방안전람회에서 동상을 받았으며, 산동시조각설계방안에서 1등산을 받았다. 또 전국성시조각우수작품에 들어가며, 《世界彫刻全集》에도 실렸다.
聞一多는 누구인가? 聞一多가 청도대학에 근무하던 시절에 학생이었고, 지금은 유명한 시인이 된 臧克家가 쓴 비문을 통해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걸출한 시인이자 학자였으며 인민의 영웅이었던 문일다선생은 1930년 국립청도대학에 초빙되어 문학원장과 중문과 주임을 겸임했다. 선생은 역대의 詩選과 唐詩 및 英國詩를 가르쳤다. 선생은 누구나 친절하게 대했고, 학자로서의 풍모를 잘 갖추고 계셨다. 또한 풍부한 시정으로 충만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고 중국인민들을 걱정하면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唐詩를 손에 잡고, 그것이 중화민족을 기사회생하도록 하는 문화적 방법이라는 소신을 가지셨다. 선생은 2년동안 학교에 계시면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인재를 기르는 일에 전념을 다하셨다. 지금 선생이 사시던 곳을 보니, 선생이 이곳에 사시면서 하셨던 모든 일들이 생각나고,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진다. 이 집을 사랑하여 ‘一多樓’라 부르고, 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늘어놓았지만, 옛 모습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정원에 비석을 세우고 선생을 영원히 기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선생의 높은 풍모와 절조를 흠모하며 바라보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선생이 사셨던 흔적이 눈과 귀로 들어와 후세의 구감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상의 글은 원문이 200여자에 불과하다. 문일다가 청도대학(나중에 산동대학으로 명칭을 바꿈)에 교수로 근무했던 시절의 인품과 학문적 열정을 기리며, 그가 살았던 곳을 ‘一多樓’라 명명하고,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잘 나타낸 글이다. 이후로 사람들은 이 집을 ‘一多樓’라 불렀다.
聞一多는 1899년에 태어난 湖北省 浠水縣 사람으로 본명이 家驊였다. 淸華大學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했으며 원래 전공은 미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문학연구에 힘을 쏟았으며 창작에도 전념했다. 중국으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다음에는 시를 짓기도 했다. 1920년대에 그는 시집 《紅燭》과 《死水》를 출간하여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로서 그는 중국현대시 부문에서 일정한 위치를 얻게 되었다.
聞一多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충만한 시를 썼다. 그의 시에는 외국의 열강으로부터 침략당한 중국에 관한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1925년의 ‘五州運動’이 발발하자, 聞一多는 비분의 심정으로, 《現代評論》 제2권 30기에 ‘七子의 노래’를 발표했다. 연이어 발표한 이 시는 수 백 년 동안 식민주의에 강점되었던 중국의 영토를 아오먼(澳門), 홍콩(香港), 타이완(臺灣),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구앙조우완(廣州灣), 지우롱(九龍), 뤼슌(旅順)과 따리엔(大連)이라는 제목으로 된 7편의 시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아오먼(澳門)’이라는 시를 감상해보자.
그대는 아십니까? ‘마카오(媽港)’가 진짜 내 성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당신의 포대기에서 떠난 지 오래 지났습니다. 어머니!
그들이 내 육체를 강제로 잡아갔지만,
당신은 내 마음의 영혼을 품고 계십니다.
30년 동안 꿈속에서도 생모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의 젖먹이 때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오먼’이라고!
어머니!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어머니!
‘七子의 노래’는 각 편마다 7행으로 되어 있으며, 시의 끝에는 모두 “어머니!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어머니!”라는 구절이 있다. 聞一多는 이 일련의 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통한과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고 있다. 그로부터 74년이 지난 1999년 중국정부는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했다.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모두 聞一多의 ‘아오먼’을 소리 높여 외치며 마카오가 중국에 돌아온 것을 환영했다. 聞一多가 70여년전에 그렇게 갈망했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던 문일다의 영혼도 이제는 조용히 쉬고 있으리라.
1930년 여름 聞一多는 국립청도대학의 교장 양진성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아 청도에 와서 청도대학 문학원의 원장 겸 중문과주임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행정사무를 제외하고 그는 역대의 詩選과 唐詩 그리고 英國詩를 강의하는 동시에 창작에도 전념하여 《奇迹》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강의과목 외에도, 《詩經》과 唐詩에 관한 연구를 하여,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사람들과 쉽게 친했으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좋아했다. 또한 청년학생들이 詩作에 관해서 자문을 구하면 친절하게 지도를 했다. 당시의 학생이었던 臧克家는, 자주 聞一多의 집에서 선생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가르침과 자문을 받아, 자신의 처녀작 《烙印》을 간행하게 되었다.
聞一多는 처음에 청도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회천광장 부근에 살았다. 그는 매일 바다를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생활이 그의 詩心을 자극했다. 1931년 聞一多는 아내를 湖北省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고 혼자 학교에서 생활하게 된다. 당시의 ‘第8校舍’였던 2층짜리 작은 건물이 聞一多가 살았던 곳이다. 그는 이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1932년 여름휴가를 맞은 聞一多는, 靑島大學을 떠나 자신의 모교였던 淸華大學으로 가서 교수가 되었지만, 머무는 곳은 이 작은 집이었다.
抗日戰爭이 폭발한 다음 聞一多는 雲南으로 옮긴 淸華大學을 따라갔다. 나중에 北京大學, 淸華大學, 南開大學이 합병을 하여 西南聯合大學이 되었지만 聞一多는 여전히 西南聯合大學의 교수로 근무했다. 당시의 문일다는 항일운동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 편, 국민당의 독재에 반대하는 중국민주동맹 운남지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蔣介石은 적극적으로 내전을 준비하면서 민주운동을 박해했지만 전국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聞一多는 장개석의 독재와 공산당과의 내전에 반대할 결심을 하고, 민족해방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학생들과 선생들을 규합하고 진보적 인사들을 옹호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국민당의 특무조직은 이러한 聞一多를 미워했다.
1946년 7월 15일 聞一多는 얼마 전에 국민당 특무조직원에게 암살된 친구이자 동지였던 李公朴교수의 추도회에 참석했다가 암살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중국공산당은 민주인사에 대한 국민당정권의 폭행을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聞一多를 민주투사로 추대했다. 1949년 8월 18일 毛澤東은 聞一多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국인들은 기개를 가지고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미국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주구였던 국민당에 반대하는 투쟁대열에 섰다. 聞一多선생도 그 대열에서 싸우면서 국민당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 우리는 지금 聞一多선생이 노래한 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 그의 시에는 중국민족의 기개가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다음 산동대학의 선생과 학생들은 聞一多의 높은 품격과 뛰어난 절조를 기리기 위해 1950년 聞一多선생이 살았던 집을 ‘一多樓’라 불렀다. 1984년 一多樓는 청도시인민정부에 의해 시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지금의 청도해양대학인 산동해양대학에서는, 聞一多가 살았던 곳에 一多樓를 포함하여, ‘聞一多故居展示室’을 새로 짓고, 정식으로 외부인들에게 공개했다. 전시실에는 聞一多의 저작, 사진, 聞一多에 관한 연구논문과 저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평생의 사적도 잘 정리되어 있다. 편액은 유명한 서예가 舒同이 쓴 것이다.
청도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대학인 靑島大學은 홍콩중로 동쪽 끝에 있는 부산의 서남쪽 자락의 高科技工業園 文化區에 있다. 이 학교는 산동성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종합대학이다. 학교의 건물은 산세에 따라서 지었으며, 전형적인 背山臨水의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흰색의 높은 도서관 건물과 원형의 화원광장이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어서 청도시내의 동부지역에서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꽃들이 만개하는 시절이 오면, 이곳에는 두견화, 월계화와 같이 봄빛이 완연해진다.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과 함께 파란 잔디밭이 잘 어울리는 이곳을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색색의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과 같다.
청도대학은 1994년 5월 국가교육위원회와 산동성정부의 비준을 받아, 원래의 청도대학과 산동방직대학, 청도의학원, 청도사범전문학교를 병합한 종합대학이다. 학교명을 청도대학으로 한 것은 산동성과 청도시가 관리체제를 단순화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한다. 캠퍼스의 면적은 111만평방M이며, 건축면적은 42만평방M이다. 교, 원, 계로 3단계 관리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文學院, 理學院, 국제학원, 의학원, 사범학원을 두고 있다. 모두 40개 계열에 76개 전공과목이있으며, 26개의 석사과정과 7개의 성급중점육성학과가 있다. 또 7개의 성급중점실험실에서 기초학과의 위탁교육을 받게 하고 있다. 문과, 이과, 공과, 상과, 법과, 의과, 사범과 등의 여러 개 학과가 발전된 교육시스템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교직원수는 모두 2,315명이며, 그 가운데 전임교수가 1,344명, 교수와 부교수가 800여명이다. 학생수는 14.000명으로 현재 산동성에서 가장 큰 대학이다. 개교 이래로 완성된 연구가 300여종이며, 출판된 책이 200여종, 논문이 5,000여편이다. 그 가운데 230편의 과학연구물이 성급 이상에서 시상을 받았다. 지금 청도대학은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의 12개 대학과 교류합작을 하고 있다.
첫댓글 이상에 나오는 최근의 자세한 수치를 누가 알려주세요. 특히나 칭다오신님~ 더 좋은 자료가 있으면 부탁합니다.
아들놈 중간고사 마지막날이라 오늘밤도 저는 이곳에서 역사공부?를 합니다. 시험문제 낼 사람도 없지만 읽고 또 읽고...교육기관이어서 한번도 딴짓안하고 원 스톱ㅎ 건강하십시요 두 분...
청도해양대학이 중국해양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지 않았나요
맞습니다.작년이지요 아마,청도해양대학이 국가급 중국해양대학으로 승격되었습니다.청도의 3개 종합대학이라면 청도대학,중국해양대학,과기대학(이전 화공학원)이라고 하더군요.
감쏴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