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장례길(8, 끝) - 경주 기림사 용연폭포
신문왕은 이렇게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화(化)한 해룡과 천신으로 부터 무가대보의 대나무를 얻었다. 이제 서라벌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는 기림사(祈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참을 치렀다.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치하하면서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에 달린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가 진짜 용들입니다" 하니 왕이 물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옥 장식 한 개를 따서 물에 담가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곧 왼쪽에서 둘째 옥 장식을 따서 개울물에 담그니 즉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이름지었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를 가지고 젓대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방(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젓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개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잦아졌으므로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여 국보로 일컬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기림사 서쪽 냇가에서 점심을 먹었으니 이미 이전에 기림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기림사에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탑의 초석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이 옥대를 얻어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태자 이공(理恭)이 마중을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태자 이공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이며,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다. 왕비는 김씨이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원년 8월 8일, 소판 김 흠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3년 봄 2월, 일길찬 김 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납채를 하였는데, 폐백이 열다섯 수레,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식혜가 1백 35수레, 벼가 1백 50수레였다.
3년 여름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 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 손문과 아찬 좌야, 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 왔다.
4년 겨울 11월,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잔적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그 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대문을 혹은 실복이라고도 한다.]
7년 봄 2월, 원자가 출생하였다.
11년 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8 新羅本紀 第八 神文王>
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홍’을 ‘공(恭)’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신목왕후이며, 일길찬 김 흠운[‘金欽運’을 ‘金欽雲’이라고 하기도 한다.]의 딸이다.
<삼국사기 권 제 8 新羅本紀第八. 孝昭王>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문왕의 비는 김흠돌의 딸이었는데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쫓겨난다. 왕은 새로 김흠운의 딸을 비로 맞아들이는데 이 비가 신목왕후이다. 그리고 신문왕 7년에 원자인 이홍이 태어나고 왕 11년에야 태자로 봉해진다. 다시 말해서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돌아올 때에는 태자는 아진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만파식적 설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왕은 왜 이같은 이야기를 꾸몄던 것일까?
문무왕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문왕에게는 두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첫째는 왕의 정통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옥대를 하늘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설화를 꾸몄다. 둘째는 16년 간의 통일전쟁으로 황폐화된 나라와 백성들에게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우리를 지켜주므오 더이상 근심이 없을 것임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즉 태평성대가 예고되어 있음을 알리려는 뜻이다. 전형적인 유훈통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삼층석탑
*기림사 목탑터 초석
*기림사 목탑터 심초석과 사천주 초석
*기림사 목탑터 심초석
*기림사 목탑터 초석
*기림사 목탑터 초석
*기림사 목탑터 초석
*기림사 용연폭포
*기림사 용연폭포
*기림사 용연폭포
*기림사 용연폭포
<2007. 4. 15>
첫댓글 2000년 답사를 시작하면서 찾았던 기림사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찬 곳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