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추위에 떠는 갈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를 날아간다.
나루터를 찾는 길손은 응당 말에 채찍질을 빨리 할 것이요.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할 리가 없다.]
이것이 첫 수 4 구절이고 다음 수는 ,
[방목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고,
남편을 기다려 높은 대 위에 섰는 아내의 쪽 그림자가 낮다.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여기까지 외고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생각을 자아내는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글귀가 뭐더라?」
노인은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하다가 사라졌다.
박문수는 번쩍 눈을 떴다.
노인이 보이지 않을 뿐, 주위의 모습에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역시 등잔불은 깜박이고 있었고, 자기처럼 과거를 보러 가는
나그네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노인은 분명히 어제 저녘 때 그 노인이었는데.......)
아니,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꿈속에서 외던 그 시구는 너무나 머리에
뚜렷했다.
(낙조라구? 참 이상한 일이다.)
하고는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
「여보시오, 그만 일어나시오.」
박문수가 눈을 떠보니 세수를 하고 들어온, 곁의 나그네가 자기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았고, 밖에서 아침 준비를 하느라고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곤하게 잘도 주무시는 군요.」
박문수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어젯밤의 꿈이 너무나 뚜렷하게 떠올랐다.
다시 한 번 시구를 되풀이하여 보았다.
기가 막히게 뛰어난 구절이었다.
역시 노인이 잊었다는 마지막 글귀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는 새벽에 자기를 깨워준 길손과 나란히 남대문을 지나 과거장으로
들어섰다.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선비들이 모두 자기의 실력을 겨루고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무리 뱃심이 두둑한 박문수였지만, 몹시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글의 제목이 나붙었다.
박문수는 너무나 놀라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글제는 틀림없는 낙조(해지는 저녘)였다.
극도로 흥분한 박문수는 곧 익숙한 솜씨로 붓을 휘둘렀다.
외고 있던 일곱 구절을 순식간에 써내려 간 다음,
잠시 손을 쉬고 붓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다시 어제 계곡에서 자기의 등뒤를 지나가던 노인의 생각이 났다.
「이놈의 황소야! 피리를 불어야 하겠니?」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아직 먹도 다 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이른 시간이다.
박문수는 다시 한번 글귀를 되새겨 보았다.
자기가 보아도 놀라운 솜씨였다.
과거장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가장 일찍 제출된 시가 장원을 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를 일컬어 신선이 가르쳐 준 시라고 하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문수가 계곡 시냇가에서 바라보던 낙조가 그의 머릿속에서
시로 엮어져서 꿈에 나타난 것이리라 생각된다.
꿈에 시를 쓴 예는 많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시는 박문수의 장원시로 널리 전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