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장과 화장. 그리고 시신기증 ***
2007.02.10 글 / 이영진 회원
2005년 9월 26일부터 28까지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의 효소제 만드는 회사에서 초청하여 전액 무료로 생전 처음으로 섬나라의 배 밭과 포도밭을 견학하고 왔다.
돈 값어치도 10배 정도로 잘사는 일본이라는 나라이기에 메모지에 열심히 적으면서 뜻 깊은 견학이 되었다.
과수 쪽 견학이기에 농촌으로만 다녔는데 묘(산소)를 전혀 구경할 수 없었고.
마을 입구나 마을 가운데쯤에 비석이 여러 개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곳이 공동묘지라고 하였다,
100%가 화장을 한 후에 그곳에 모셔진다고 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한국의 묘지 문화와 비교할 때 너무나
배울 점이 많았다. 2005년 10월 28일. 수원에 있는 농업기술원에서 농촌지도자와 생활 개선회 행사에 참석해서
원광대학교 동양화 대학원 교수이며 불교 민속학자인 조용헌 박사의 “팔자 바꾸는 6가지 방법”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듣게 되었는데 참으로 명 강의였다. 그중에 화장을 권유하는 대목에서는 공감할 수 있었고. 납골문화!
즉. 납골함에 넣어서 보관하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 하였다.
벌레도 생기고 심지어 뱀까지도 나왔다고 한다. 그분 하는 말이 항아리 속에서 갇히게 하는 것보다
훨훨 날아다니게 뿌려주어서 자유롭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묘를 잘못 쓰게 되면 집안이 엄청나게 피해가 올 수
있고 명당자리 잘 쓰면 자자손손 잘 풀리는 것을 얘기 하였다. 그런데 화장을 하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0)이기
때문에 아무런 해가 없다는 것이다. 땅 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이기에 화장을 강조하였다.
이쯤에서 우리 집안 얘기를 할까 한다.
우리 집안 (전의 이씨)선산이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었는데. 개발에 밀려서 경기도 광주로 선산을 옮겼고.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돌아가신 아버님도 그곳 선산에 모시게 되었는데. 지관을 보시던 분이 장손인 나에게
묘 자리가 너무 안 좋으니까 오늘은 그냥 여기에 모셨다가 정리가 되는 대로 딴 곳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기도교인이신 작은 아버님과 난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곤 그곳에 모신 채로 신경을 안 쓰다가 점차
그 지관의 말을 잊어버렸다.
그 이후로 커다란 우환이 생겼을 때도 설마 묘 자리 때문이란 생각은 전혀 안했다. 제일 큰 우환은
2001년 8월 21일 내가 살던 집이 완전 전소되는 화재를 당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네 식구가 집에 없을 때라서
괜찮았지만. 엄청나게 놀랐고 엄청나게 손해를 보았다. 지관을 보시던 분이 사촌 네를 오셨다가
“너희 큰 아버님 묘는 나중에 옮겼냐?” 하고 물으셨다고 사촌한테 전화가 왔다. 19년 전의
일을 기억하시고는 걱정을 하시더란 얘기를 듣고는 바로 집안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촌의 코미디온 이주일 선생을 모신 경춘 공원 묘원으로 이장을 하자고 합의를 했는데.
마을 어른께서 사람의 뼈마디가 삼천마디라는데 이장보다는 화장을 하는 게 낫다고 하시며 예로부터
이장 덕 보다는 화장 덕이야 하셨다. 다시 가족회의를 하여 화장을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뼈 가루를 식구들이
선산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뿌리면서 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님! 그동안 지하에서 얼마다 답답하셨습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요 미국 백악관에도 가셔서 부시대통령도 만나보고. 이라크의 자이톤부대도 구경 가시고. 북한의 주석궁에 가셔서 김정일도 보고요.
생전에 못 봤던 사위가 치과의사랍니다. 경남 사천에 치과도 가보시고요. 우리가 잘못하고 있으면 회초리질도
해주세요.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우선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가 바뀌었다. 압구정의 우리 소망교회는 곤지암에
수양관이 있는데. 그곳 수양관 입구에 대여섯 평 정도에 하얀 자갈이 깔려있고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소망 성도의 묘” 우리 교회 성도들은 본인이 원하면 누구든지 화장을 한 후에 뼈 가루를 이곳
한곳에 뿌려지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사후에 한곳에 모인다는 의미와 땅 덩어리가 좁은 우리나라에 매장으로 인한 국토 훼손이 문제가 되고 있는 때에 이 얼마나 획기적인 화장 문화란 말인가? 아무튼 아버님을 화장 모신 후에 딸아이는 치과대학에 합격을
하여 열심히 학업중이고 아들은 농업고등학교에 전액 국비로 다닌 후에 화성에 있는 농업대학에 수시로 합격을 하여 그곳에도 전액 국비로 다닐 예정에 있다. 어느 날 딸아이에게 치과 실습할 때 진짜 사람이빨로 하느냐고 물었더니
개나. 돼지. 원숭이 등 동물로 하고 외국에서 시신을 사온 후에 사람이빨 실습을 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엔 시신기증이 별로 없어서 의과 대학생들이 실습에 많이 모자란다고 해서 난 딸아이가
다니는 광주의 조선대학교에 전화로 시신기증 의사를 비쳤더니 며칠 후에 서류가 우편으로 왔다. 유언장과 시신
기증서를 작성했는데 직계가족의 서명이 있어야 하기에 애 엄마와 아이들에게 설득을 해서 서명을 받은 후에
대학교에 서류를 보냈다. 그리고 또 장기기증본부에도 전화를 해서 각막기증과 장기기증까지도 완전하게 해놓았다.
면허증과 주민등록증에는 분홍색 작은 스티커가 세장씩 붙여있는데 그곳에는 장기기증. 각막기증. 시신기증이라고
쓰여 잇다. 나의 지갑에는 주민등록증 말고 시신기증증도 함께 넣고 다닌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은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보람이 있고. 언제라도 그분이 데려가셔도 항상 기쁨 맘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팔불출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누구에게나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하라고 설득을 한다.
시신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도 어느 유명한 스님이 동국대학교에 시신기증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불교신자들도 기증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고 코미디언 김형곤씨도 시신기증 했다고 한다. 끝으로 삼대를 이어서
배 농사를 하며 농협대학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한 후에 남양주에서 2명밖에 없는 새 농민으로 선정되어서 자부심을 가지며 2006년에는 한국유기농업협회로부터 친환경 인증 (저 농약)을 받아서 환경보호와 안전한 남양주 먹 골 배를
생산하고 있고 엄청나게 까다로운 위생허가를 받아서 배 즙 공장도 운영을 하고 있다.
향우회원 여러분!! 뜻이 있으신 분은 나처럼 시신기증은 아니라도 각막이나 장기기증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올 땐 순서대로 온다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