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7월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파견한 외교사절 보빙사(報聘使)
1882년 5월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미국은 특명전권대사로 푸트를 파견하였다. 따라서 조선도 공사를 보내야 했는데 당연히 그럴 형편은 못 되었고, 대신 푸트의 건의로 답례차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선발된 것이 다음 명단이다.
- 전권대신 민영익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이자 고종의 외사촌, 그리고 후에 순종의 처남까지 되는 왕실 외척.
이렇게 써놓으면 단순 낙하산 인사 같지만 수신사로 일본도 다녀오고 묄렌도르프와 같이 청도 다녀오는 등 외교면에서 기존부터 활동해온 인물이었다. 신분과 맞물려, 조선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미 신문에서는 Prince Min으로 통칭하였다.
- 부대신 홍영식
역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내아문 외아문 통리아문의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유능한 신진 관료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 종사관 서광범
수신사로,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녔던 인물이었다.
이상 3인이 공식으로 벼슬을 받은 외교 사절이었고, 이하는 수행원들이다.
- 수원 유길준
수원 최경석
수원 변수
수원 고영철
수원 현흥택
통역 우리탕
7월 15일 출항하여 일본에 들렀는데 얘들로만 보내기는 좀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과 그 비서 미야오카가 동행하게 된다.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보빙사의 기록은 오늘날 한국측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보빙사의 주요 인물인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에 참여해 역적으로 단죄되어 기록을 파기했기 때문. 그러나 미국 내 일정은 신문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충실히 기록하여 오늘날 당시 일정을 재현할 수 있다.
8월 15일 샌프란시스코로 출항하여 9월 2일 도착하였다. 미국에서는 사절단을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었으니, 대륙횡단열차 타고 대접받으면서 워싱턴에 오고 보니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던 것. 그래서 9월 18일 뉴욕의 호텔에서 기념할만한 미 대통령과 조선 외교사절의 첫 만남을 갖게 된다.
그려진 세명은 아마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절을 받는 것이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이다.
그리고 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견학도 하고 차관 요청도 하고 기술 전수 요청도 하고
박람회 개최 협조 요청도 하는 등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0월 12일 귀국 인사차 백악관에 방문하고, 미 대통령은 군함 한 척을 내주어 본국까지 모시고 갈 것을 명한다. 그래서 두 패로 갈라졌는데,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이 군함을 타고 유럽 구경도 한 다음 1884년 6월 귀국하였다. 유길준은 미국에서 남아 유학을 하기로 하였으며, 나머지 홍영식 및 수행원은 다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 귀국해 국왕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때 로웰이 따라와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유명 블로거 迪倫님이 보빙사 일행의 미국 일정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고 있으니 역덕후라면 참고해 보시라.
그리고 뒷이야기 ¶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친청 근왕파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민영익은 급진 개화파, 그러니까 홍영식과 서광범을 비롯한 세력들에게 난도질을 당했으나 보빙사 당시의 인정을 생각해 알렌에게 인도되었으며, 그는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여기까진 좋았는데 1886년 조러 밀약등 고종의 친러거청 정책을 위안스카이에게 그대로 일러바치는 바람에 홍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홍영식은 미국의 정치 행정 제도에 관심을 가졌고 우정 시스템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하여 만든게 우정국. 그리고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역적으로 처형, 효수되었다.
서광범은 갑신정변 일로 미국에 망명, 알바로 먹고살며 공부해 미 국적을 취득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갑오개혁때 귀국, 사법제도 개혁을 주도하였다. 아관파천이후 정세가 불리하자 주미 조선공사직을 얻어 도미, 잠깐동안 활동하다가 1897년 사망하였다.
최경석은 보빙사때 농업 근대화를 위해 종자 및 가축, 비료등을 얻어와 귀국 후 땅을 하사받아 농장을 만들었다. 이 양반은 갑신정변에도 무사하여 일이 잘 되는가 싶더니 1886년 병사. 당연히 농장은 흐지부지되고 그때 들여온 젖소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변수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 도미하여 1891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 농무성에서 직원으로 근무하였는데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유길준은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간략히 적으면 1년동안 공부하다가(그 사이에 갑신정변이 났다) 유럽을 구경하고 귀국하였다. 목숨은 건지고 연금 생활 하면서 서유견문 등을 썼다. 갑오개혁때 내무부를 맡아 개혁에 힘썼는데 너무 힘썼는지 무리해서 단발령을 내리는 바람에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이후 고종에게 역적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우리탕(오례당)은 묄렌도르프 실각 후에도 해관원으로 근무하고 1890년 은퇴 후 제물포에서 큰 돈을 벌어 지역 유지로 잘 살다가 1912년 제물포에서 죽었다.
로웰은 보빙사와 같이 다니면서 홍영식과 친해져서 조선에서 국빈대접을 받고 사진사와 동행해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찍는 등 잘 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Choson : the Land of Morning Calm> 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에는 천문학자로 변신해 자비로 로웰 천문대를 건설, 화성에 운하(그리고 곧 화성인도!)가 있다고 주장하여 또 이름을 날리고, 명왕성(당시 가칭 Planet X)의 궤도를 예측해 탐사하던 중 1912년 사망하였다. 명왕성은 톰보가 그가 세운 로웰 천문대에서 1930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