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시나리오 공모 본심 심사총평
심사를 마치고
다시 부활된 시나리오 공모전에 무려 1204편이 공모되었다고 한다.
예심을 거쳐서 본심에 올라온 시나리오들이 40편, 그리고 시나리오마켓을 통해 걸러진 작품 6편을 합해서 46편이었다. 예심을 했던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짐작을 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본심의 46편도 기간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편수였다.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기쁘고 행복했고 희망에 부풀었다. 이만큼 많은 오리지날 시나리오 작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영화 소재 강국이란 뜻이다. 중국은 소재와 시나리오에 목말라 있고, 일본은 오리지날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지 않은지 오래며 헐리웃은 좋은 소재를 찾아 이미 만들어진 영화들을 사기에 바쁘지 않던가. 이런 이유로 시나리오를 보는 동안 느낀 자부심과 희망은 굉장한 것이었다. 수십 편을 봐야하는 부담감과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좋은 시나리오를 만났을 땐 모든 피로와 부담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기우가 사라지더니 이 많은 좋은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순위를 매길까 하는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과 함께 토론을 하고 읽기를 반복하면서 세편을 걸러냈다. 순위를 매기지 않은 세편을 뽑을 땐 모두 만장일치였다. 우선 시나리오가 전체적으로 찜찜한 구석이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도가 있어야 할 것이며 가능한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이 수상을 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가려낸 작품들이 다음 세 작품 들이다.
<종말의 새>, <과녁>, <첩첩산중>.
위의 세 작품의 순위를 정하는데 장시간의 토론이 있었다. 결국 상업영화 시나리오로서 손색이 없는 <종말의 새>를 대상으로 뽑았지만 최근 영화계의 동향도 있어서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전체를 관통하는 힘과 아이디어, 스케일감, 그리고 완결성은 다른 여타의 작품을 능가하는 위력이 있었다.
최우수상은 양궁을 하는 청소년들을 다룬 <과녁>이란 작품으로 이 작품의 작가는 영상에 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보였다. 현실의 어두움에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밝음과 귀여움이 있었다. 아직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데 약간의 미숙함이 느껴졌지만 앞으로 충분히 극복될 작가로 여겨졌다.
우수상인 <첩첩산중>은 어느 누가 봐도 재미있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꽉 채워져 있는 시나리오였다. 인물들의 개성과 대사들도 모두 재미있고 끝맺음의 반전 또한 재미있어서 읽는 동안 내내 즐거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대상 또는 최우수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영화가 제작될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모두 축하하고 좋은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켜주길 바란다.
수상작 이외에도 아쉽기 짝이 없는 작품들이 있었다. 특히 청도의 소싸움을 소재로 한 <챔피언>은 낯익은 소재와 통속적인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아주 매력적이었고 마지막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작품이어서 더욱 아쉬움이 컸다. 특히 소재가 가진 약점이랄 수 있는 통속성이 감동으로 연결되는 작품임이 분명했다. 정말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연애>는 호러 장르에 등장하던 주인공들이 로맨틱코미디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너무 신선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부분이 극복되지 않아 수상권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좀 더 다듬는다면 좋은 새롭고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보였다. <아직까진 괜찮아>는 보험을 통한 두 남자의 스릴러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대사, 그리고 이야기 진행이 숨막힐 정도로 재미있었지만 결말부분의 처리가 너무 아쉬웠다. 모든 심사위원들이 살인 말고도 좋은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 작품은 현역 배우들의 이름을 배역의 이름으로 직접 가져왔는데, 이런 시나리오 작법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이 된다.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갈라파고스>는 시나리오를 놓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강렬하면서도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영화적이기보다 문학적이란 점도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이외 <심연>, <결빙구간> 등 좋은 작품들이 수상권에 들진 못했다. 모두 살인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란 점도 아쉽다. 더 많은 작품에 수상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언제나 공모전에는 한정된 상패가 있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
이번 공모전 심사를 끝내고 느낀 것은 스릴러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영화계에도 요즘은 스릴러가 너무 많다고 말들을 하고 있다. 내가 본 46편 속에서만 무려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너무하단 생각도 들었다. 또한 가끔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맞춤법 때문에 헛갈려서 다시 읽어보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또 시나리오마다 폰트가 달라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소화해내기에 너무 피로한 점도 지적되었다. 그런가 하면 분량이 너무 많아 영화 세편 정도의 길이가 될 시나리오들도 있었다. 또 이미 충무로에 돌아다니던 시나리오가 본선에 올라온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결론은 앞으로 우리나라 영화계는 밝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는 오리지날 시나리오 천국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되어 극장들이 꽉꽉 메어 터지고 영화인들도 돈들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2009년 12월
2009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공모전 본심 심사위원장 곽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