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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림사 원문보기 글쓴이: 파란하늘
1. 수심결
三界熱惱(삼계열뇌)가 猶如火宅(유여화택)이어늘
其忍淹留(기인엄유)하야 甘受長苦(감수장고)아
탐욕과 성냄과 거짓(三界)의 뜨거운 번뇌의 삶이여 마치 활활 불타는
집에 사는 것이로세. 뜨거운 고통 속에 머물러 참으면서 긴 괴로움을 달게 받을쏜가.
欲免輪廻(욕면윤회)인댄 莫若求佛(막약구불)이요
若欲求佛(약욕구불)인댄 佛卽是心(불즉시심)이니
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부처가 되는 길 외 딴 길이 없네.
만약 부처가 되고자 할진대 부처는 곧 마음이로다.
心何遠覓(심하원멱)고 不離身中(불리신중)이로다
色身(색신)은 是假(시가)라 有生有滅(유생유멸)커니와
眞心(진심)은 如空(여공)하야 不斷不變(부단불변)이니라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랴. 이 육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육신은 변하는 거짓인지라 태어남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는 것이나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도다.
故(고)로 云(운) 百骸(백해)는 潰散(궤산)하야
歸火歸風(귀화귀풍)호대 一物(일물)은 長靈(장령)하야
盖天盖地(개천개지)라 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일백뼈는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 이 마음은 길이 신령스러워 하늘도 덮고 땅도 덮는다” 하였도다.
(해설)
ㅇ 수심결을 저술하신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는 생령들의 삶,
인간의 삶을 정도 의 차이는있을지언정
모두가 불타는 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ㅇ 수심결의 이 부분은 절박한 심경으로 느낄 수 있어야
마음으로 배울 수 있지만,
단지 글로 읽기만 한다면 글만 배우게 된다.
ㅇ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부처가 되는
길 외에 딴 길이 없으니까 어려워도 부처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삼독심을 버리지 못하면 돈, 명예, 권리, 사람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ㅇ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공부를 해야 부처다 되는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되는 게 아니다.
총부를 찾고, 법 높은 스승을 찾는 게
결국 마음을 찾는 거울을 보기 위한 것이다.
ㅇ 육신이란 허망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육신을 이별하기 위해서
준비하는것과 같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ㅇ 참마음은 어떤 것인가?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을 ‘무량수’라고 한다.
ㅇ 그 변하지도 않는, 허공같은 참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극락에 갈 수 없다. 영원히 부처가 될 수 없고,
영원히 참으로 행복해질 수도 없다.
ㅇ 결국 내 속에 있는 법신을 찾아서
‘아! 내마음, 이것을 법신이라고 하는구나’
해야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할 수 있다
2. 슬프다 요즈음 사람들
嗟夫(차부)라 今之人(금지인)이여 迷來久矣(미래구의)라
不識自心(불식자심)이 是眞佛(시진불)하고
不識自性(불식자성)이 是眞法(시진법)하야
슬프다 요즈음 사람들 어리석은지 오래 되었도다.
자기 마음이 참 부처임을 알지 못하며
자성이 이 참 법신임을 깨닫지 못하였도다.
欲求法(욕구법)호대 而遠推諸聖(이원추제성)하며
欲求佛(욕구불)호대 而不觀其心(이불관기심)하나니
법신을 찾기는 찾되 멀리 모든 성자들에게서 찾으며,
부처가 되고자 하기는 하되 자기 마음은 살피지 않도다.
若言心外(약언심외)에 有佛(유불)하고
性外(성외)에 有法(유법)이라 하야
堅執此情(견집차정)하야 欲求佛道者(욕구불도자)인댄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하며 성품 밖에 법신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굳게 갖고서 부처되는 도리를 찾는다면
縱經塵劫(종경진겁)토록 燒身燃臂(소신연비)하며
敲骨出髓(고골출수)하며 刺血寫經(자혈사경)하며
長坐不臥(장좌불와)하며
티끌 같은 긴 세월동안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몸을 찔러 피로써 경(經)을 쓰며 오래도록 앉아 눕지 않고
一食卯齋(일식묘재)하며 乃至轉讀一大藏敎(내지전독일대장교)하야
修種種苦行(수종종고행)하야도 如烝沙作飯(여증사작반)하야
只益自勞爾(지익자노이)니
부처님 제사 올리는 한때만 먹으며 나아가서 만 가지 경전을 읽고
온갖 고행을 모두 닦는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못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로다.
但識自心(단식자심)하면 恒沙法門(항사법문)과
無量妙義(무량묘의)를 不求而得(불구이득)하리니
다만 스스로의 마음만 깨달으면 항하사 모래수와
같은 법문과 한량이 없는 묘한 도리를 찾지 아니하여도 얻어지나니라.
故(고)로 世尊(세존)이 云普觀一切衆生(운보관일체중생)하니
具有如來智慧德相(구유여래지혜덕상)이라 하시고
又云一切衆生種種幻化(우운일체중생종종환화)가
皆生如來圓覺妙心(개생여래원각묘심)이라 하시니
是知(시지)커라 離此心外(이차심외)에 無佛可成(무불가성)이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 모든 생령들을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스러움을 갖추었도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허망한
생각이 모두 여래의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나오도다’ 하셨네.
이렇게 알지어다. 이 마음을 떠난 밖의 무엇으로도
부처를 결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해설)
ㅇ 마음의 바탕과 작용에 대하여, 성자의 경전을 볼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경전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마음을 보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 마음은
살피지 않고 경전 해석에만 몰두한다.
ㅇ 마음은 살피지 않고 경전만 보는 사람은 지식은 늘어도 법신은 볼 수 없다.
경전을 통해서 내 마음을 보고 찾을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ㅇ 마음을 몇 번이나 찾는가?
마음을 찾고 찾아서 많이 찾을수록
‘내 본마음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확신하게 된다.
ㅇ 방향을 잘 잡고 정진해야 한다.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결국 부처를 구할 수 없다.
고행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방향을 잘 잡고 고행을 해야 한다.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서 속도를 내면 나중에는 천리가 넘게 멀어지는 법이다.
즉 마음공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니,
밖에서 구하지 말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ㅇ 마음만 찾아 길들여야 한다.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은 형제간이다.
번뇌망상이라는 것은 그때 그곳에 맞지 않는 마음을 이름하고,
그때 그곳에 맞는 생각은 옳은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때 그곳에 맞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3. 부처는 마음훈련으로
過去諸如來(과거제여래)도 只是明心底人(지시명심저인)이며
現在諸賢聖(현재제현성)도 亦是修心底人(역시수심저인)이며
未來修學人(미래수학인)도 當依如是法(당의여시법)하리니
과거의 모든 여래도 다만 이 마음을 밝힌 분이고
현재의 모든 현인과 성인도 또한 마음을 닦는 사람이며,
미래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마음 공부법에 의지하리로다.
願諸修道之人(원제수도지인)은 切莫外求(절막외구)어다
心性(심성)이 無染(무염)하야 本自圓成(본자원성)하니
但離妄緣(단리망연)하면 卽如如佛(즉여여불)이니라
원컨대 수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마음 밖에서 찾지 말지어다.
마음 바탕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두렷함을 이루었나니,
망녕된 생각만 떠나면 바로 틀림없는 부처인 것이다.
4. 어떤 마음이 부처 마음입니까.
問(문)- 若言佛性(약언불성)이 現在此身(현재차신)인댄
卽在身中(즉재신중)이라 不離凡夫(불리범부)어니
因何我今(인하아금)에 不見佛性(불견불성)이니꼬
更爲消釋(갱위소석)하야 悉令開悟(실금개오)케 하소서
묻기를 만약 불성이 현재 이 몸 안에 있을진대
이미 이 몸속에 부처가 있는 것이라,
어리석은 범부를 떠나지 않은 것인데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내게 있는 불성을 볼 수 없습니까.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여 확실하게 깨닫도록 하여 주소서.
答(답)- 在汝身中(재여신중)컨만 汝自不見(여자불견)이로다
汝於十二時中(여어십이시중)에 知飢知渴(지기지갈)하며
知寒知熱(지한지열)하며 或瞋或喜(혹진혹희)가
竟是何物(경시하물)고
답하기를 그대의 몸 가운데 불성(佛性)이 있는데
그대 스스로 보지 못 하는도다.
그대가 하루 종일 배고프고 목마른 줄을 알며
춥고 더운 줄을 알고 혹 화를 내고
혹 기뻐하는 것이 필경 어떤 것이 있어서 그러한가.
且色身(차색신)은 是(시)- 地水火風四緣(지수화풍사연)의
所集(소집)이라 其質(기질)이 頑而無情(완이무정)이어니
豈能見聞覺知(기능견문각지)리오 能見聞覺知者(능견문각지자)는
必是汝(필시여)의 佛性(불성)이니라
이 육신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네 가지가 인연 따라 모인 것이라
그 바탕이 완고한 무정물(無情物)일진대
어떻게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알리요.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은 반드시 너의 불성이니라.
故(고)로 臨濟(임제)- 云四大(운사대)가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이요
虛空(허공)이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이요
只汝目前(지여목전)에 歷歷孤明(역역고명)하야
勿形段者(물형단자)라사 始解說法聽法(시해설법청법)이라하시니
고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지수화풍 사대가 법문을 설하거나 듣지 못하며
허공이 법문을 설하거나 듣지 못하는 것이요,
다만 너의 눈 앞에 역력하게 홀로 밝아서 형상할 수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들을 줄 안다’고 하셨도다.
所謂勿形段者(수위물형단자)는 是諸佛之法印(시제불지법인)이며
亦是汝(역시여)의 本來心也(본래심야)니라
이른바 형상 없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또한 너의 본래 마음이니라.
5. 어떤 마음이 부처 마음입니까.
則佛性(즉불성)이 現在汝身(현재여신)이어늘
何假外求(하가외구)리요 汝若不信(여약불신)인댄
略擧古聖(약거고성)의 入道因緣(입도인연)하야
令汝除疑(영여제의)하리니 汝須諦信(여수체신)이어다
불성이 현재 그대의 몸에 있거늘 어찌 헛되이 밖에서 구하리요.
그대가 믿지 않은 듯하니 간략히 옛 성자들의 도를
깨달은 예를 들어 그대의 의심을 제거하려하니
그대는 자세히 들어서 믿을지어다.
昔(석)에 異見王(이견왕)이
問婆羅提尊者曰何者是佛(문바라제존자왈하자시불)이니꼬
尊者曰見性是佛(존자왈견성시불)이니이다
옛적에 이견왕이 바라제존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 대답하기를 불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王曰師(왕왈사)- 見性否(견성부)이까
尊者曰我見佛性(존자왈아견불성)이니이다
王曰性在何處(왕왈성재하처)니이꼬
尊者曰性在作用(존자왈성재작용)이니이다
이견왕이 말하기를 존자께서는 성품을 깨달았습니까.
존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불성을 알았습니다.
이견왕이 묻기를 불성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하기를 성품은 작용하는 데 있습니다.
王曰是何作用(왕왈시하작용)이관대 我今不見(아금불견)이니꼬
尊者曰今現作用(존자왈금현작용)이언마는
王自不見(왕자불견)이니이다
왕이 묻기를 어떻게 작용하기에 저는 지금 볼 수가 없습니까.
존자 대답하기를 지금 불성이 들어 작용하건만
왕 스스로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王曰於我(왕왈어아)에 有否(유부)이까
尊者曰王若作用(존자왈왕약작용)인댄
無有不是(무유불시)어니와 王若不用(왕약불용)인댄
體亦難見(체역난경)이니이다
왕이 묻기를 나에게 지금 있다는 말입니까.
존자 대답하기를 왕이 만약 심신작용을 하면
불성자리 아님이 없지만 왕께서 만약 작용을
하지 않으면 성품의 체성을 알기 어렵습니다.
王曰若當用時(왕왈약당용시)하야는 幾處出現(기처출현)이니꼬
尊者曰若出現時(존자왈약출현시)에는 當有其八(당유기입)이니이다
王曰其八出現(왕왈기입출현)을 當爲我說(당위아설)하소서
왕이 묻기를 만약 작용하는 때는 몇 군데로 나타납니까.
존자 대답하기를 대게 여덟 군데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이 묻기를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저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尊者曰在胎曰身(존자왈재태왈신)이요 處世曰人(처세왈인)이요
在眼曰見(재안왈견)이요 在耳曰聞(재이왈문)이요
在鼻辨香(재비변향)이요 在舌談論(재설담론)이요
在手執捉(재수집착)이요 在足運奔(재족운분)하야
존자 대답하기를 태중(胎中)에 있을 때는 몸에 나타나고
세상에 나와서는 인격으로 나타나며,
눈에는 보는 데 있고 귀에는 듣는 데 있고,
코에는 냄새를 분별하는 데 있고 혀에는 말하는 데 있으며,
손에는 잡는 데 있고 발에는 걷는 곳에 있는 것이니,
徧現(변현)하야는 俱該沙界(구해사계)하고
收攝(수섭)하야는 在一微塵(재일미진)이니
識者(식자)는 知是佛性(지시불성)이요
不識者(불식자)는 喚作精魂(환작정혼)이니이다
王(왕)이 聞(문)하고 心卽開悟(심즉개오)하다
두루 나타내서는 온 세계에 다 있고 거두어들이면
미세한 티끌 속에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을 불성이라고 알고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영혼이라고 지어 부르지요.
왕은 이러한 설명을 듣고 고 마음이 열려서 깨달았느니라.
叉僧(차승)이 問歸宗和尙(문귀종화상)호대
何者是佛(하자시불)이니꼬 宗云(종운)-
我今向汝道(아금향여도)하려하나
恐汝不信(공여불신)일까하노라
僧(승)이 云和尙誠言(운화상성언)을
焉敢不信(언감불심)이리이꼬 師云卽汝是(사운즉여시)니라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지금 그대를 향하여
말하려 하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로다.
스님이 말하기를 화상의 정성스런 가르침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僧(승)이 云如何保任(운여하보림)이니꼬
師云一(사운일)在眼(재안)에 空花亂墜(공화난추)니라하시니
其僧(기승)이 言下(언하)에 有省(유성)하니라
스님이 말하기를 어떻게 보림해야 합니까.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한 티끌이 눈에 있음에
허공 꽃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하시니
그 스님이 화상의 가르침에 깨우친 바가 있었다 하니라
6. 부처님과 함께 손잡고 가자
上來所擧古聖(상래소거고성)의
入道因緣(입도인연)이
明白簡易(명백간이)하야
不妨省力(불방성력)하니
위에서 말한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쉬워서 수고를 더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因此公案(인차공안)하야
若有信解處(약유신해처)면
卽與古聖(즉여고성)으로
杷手共行(파수공행)하리라
이러한 공안(公案)으로 인하여 만약 믿어 깨달은 바가
있다면 곧 옛 성인과 더불어 손잡고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제2편 견성(見性)과 신통(神通)
7. 견성과 신통
問(문)- 汝言見性(여언견성)이 若眞見性(약진견성)인댄
卽是聖人(즉시성인)이라
應現神通變化(응현신통변화)하야 與人有殊(여인유수)어늘
何故(하고)로 今時修心之輩(금시수심지배)는
無有一人(무유일인)도 發現神通變化耶(발현신통변화야)이까
묻기를 스님께서 말한 견성(見性)이 만약 참다운 견성이라고 할진대
이는 바로 성인이라, 마땅히 신통변화를 보여서
보통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요즈음
마음공부 하는 무리들은 한사람도 신통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8. 옳은 것과 그른 것
答(답)- 汝不得輕發狂言(여불득경발광언)하라
不分邪正(불분사정)이 是爲迷倒之人(시위미도지인)이니
대답하기를 그대는 경솔하게 망녕된 말을 하지 말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런 것을
어두워 전도(顚倒)된 사람이라고 하나니라.
今時學道之人(금시학도지인)이 口談眞理(구담진리)호대
心生退屈(심생퇴굴)하야 返墮無分之失者(반타무분지실자)는
皆汝所疑(개여소의)니
요즈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에는 퇴굴심(退屈心)이 나서 도리어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에 떨어지는 것이 모두 다 그대와 같은 의심 때문이로다.
學道而不知先後(학도이불지선후)하며
說理而不分本末者(설리이불분본말자)는
是名邪見(시명사견)이요 不名修學(불명수학)이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앞뒤를 모르고 이치는 말하되
근본과 끝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그릇된 견해라고 이름하며,
도학을 배운다고 이름하지 않나니라.
非唯自誤(비유자오)라 兼亦誤他(겸역오타)니
其可不愼歟(기가불신여)아
이것은 스스로를 그릇되게 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다른 사람도 잘못되게 하나니 어찌 이것을 삼가지 않으랴.
9. 돈오돈수 되는 내역
夫入道多門(부입도다문)이나 以要言之(이요언지)컨댄
不出頓悟漸修兩門耳(불출돈오점수양문이)니
대개 도를 깨달아 실천하는 길이 많으나 요약하여
설명하자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에 벗어나지 않는다.
雖曰頓悟頓修(수왈돈오돈수)는
是最上根機(시최상근기)의 得入也(득입야)나
若推過去(약초과거)인댄 已是多生(이시다생)에
依悟而修(의오이수)하야 漸薰而來(점훈이래)라가
비록 돈오돈수는 최상 근기가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지만
만약 지난 과거 생을 미뤄보면 이미 여러 생 동안에
깨달음에 표준하여 닦아서 점점 길들여 오다가
至於今生(지어금생)에
聞卽發悟(문즉발오)하야 一時頓畢(일시돈필)이
以實而論(이실이론)컨댄
是亦先悟後修之機也(시역선오후수지기야)니
현생에 이르러 들음과 동시에 한 때의 깨달음과
닦음을 마친 것이니 실상을 말하자면 이것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은 것이니라.
則而此頓漸兩門(즉이차돈점양문)은
是千聖軌轍也(시천성궤철야)니라
그러므로 돈오와 점수의 두 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오신 궤도(軌道)이다.
則(즉)- 從上諸聖(종상제성)이
莫不先悟後修(막불선오후수)하야
因修乃證(인수내증)이니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으로 인하여 증득한 것이니라.
所言神通變化(소언신통변화)는
依悟而修(의오이수)하야 漸薰所現(점훈소현)이요
非謂悟時(비위오시)에 卽發現也(즉발현야)니라
말한 바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서 점점 익혀 나타나는 것이요
이른바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라
10. 깨달으면 의심은 없어지나
如經(여경)에 云(운)- 理卽頓悟(이즉돈오)라
乘悟倂消(승오병소)어니와 事非頓除(사비돈제)라
因次第盡(인차제진)이라하시니
저 경전에 이르시기를 ‘천지대소유무의이치는(性理)는 곧 문득 깨달음이라
깨달음에 따라 모든의심은 일시에 바로 소멸되지만
인간의 시비이해로 다생에 익힌 속세의 습관은 단번에 제거되지 못할지라
닦음으로 인해 점차로 없어지나니라’ 고 하시니.
故(고)로 圭峰(규봉)이
深明先悟後修之義曰(심명선오후수지의왈)
識氷池而全水(식빙지이전수)나
借陽氣以鎔消(차양기이용소)하고
悟凡夫而卽佛(오범부이즉불)이나 資法力而薰修(자법력이훈수)니
그러므로 규봉선사께서 밝고 깊이 먼저 깨닫고 난뒤에 닦는 뜻을 밝혀 가로되
‘얼음 연못이 온전히 모두가 물인 줄로 알았으나
태양의밝고 따뜻한 기운를 빌려서 녹히고
범부가 곧 부처인 줄은 깨달았으나 법력을 바탕하여 닦아 익힐지니.
氷消則水流潤(빙소즉수류윤)하야
方呈漑滌之功(방정개척지공)이요
妄盡則心靈(망진즉심령)이 通(통)하야
應現通光之用(응현통광지용)이라하니
얼음이 녹으면 물의 흐름이 윤활하여
바야흐로 심전에 물을 대고 삼독심이 가득한 마음때 씻는 공덕을 나툴것이요
망념이 다하면 심령이 통하여
마땅히 걸림없는 광명을얻어 임의로 지혜를 사용하나니라.’ 하시니.
是知事上神通變化(시지사상신통변화)는
非一日之能成(비일일지능성)이요
乃漸薰而發現也(내점훈이발현야)로다
이렇게 알지어다. 닦는 중에 밖으로 나타나는 일상의 신통변화는
하루에 능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요
점차로 훈습한 결과에 스스로 나타난 것임을 알겠도다.
況事上神通(황사상신통)은
於達人分上(어달인분상)에는
猶爲妖怪之事(유위요괴지사)며
하물며 닦는 중에 나타난 일상의 신통변화라 하는것은
통달한 깨달은사람(達人)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일이며.
亦是聖末邊事(역시성말변사)라
雖或現之(수혹현지)라도
不可要用(불가요용)이어늘
역시 또한 성인들은 지말적(支末的)인 변사로 여겨서
혹 신통(천안통,천이통,신족통,타심통,숙명통,누진통)이 나타나더라도
중요하게 사용하지 아니하거늘
今時迷痴輩(금시미치배)는
妄謂一念悟時(망위일념오시)에
卽隨現無量妙用神通變化(즉수현무량묘용신통변화)라 하나니
요즈음 혼미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녕되이 그릇되게 한 생각 깨닫는 때에
곧 한량없는 묘용과 신통변화를 얻는다고 생각하나니
若作是解(약작시해)인댄 所謂不知先後(소위부지선후)며
亦不分本末也(역불분본말야)니
만약 이러한 견해를 짓는다면 이른바 소위 선후를 알지 못하고
역시 또한 본말은 분간치 못하는 짓이니.
旣不知先後本末(기부지선후본말)하고 欲求佛道(욕구불도)인댄
如將方木(여장방목)하야 逗圓孔也(두원공야)니
豈非大錯(기비대착)이리오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이루고자 욕망한다면
마치 모난 나무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 함이니
어찌 큰 착오가 아니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