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근심과는 다르게 비만 오면 참 좋았다.
태풍이 와도 좋았다.
이유인즉 풋감도 많이 떨어지고 남의 단감을 따 먹을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마을 뒤에는 소화라는 일본 사람이 심어놓고 간 감나무 밭이 있었는데 해방이 되면서 임자없는 밭은 소작을
하는 사람것이라고 여겼는데 비가 많이 오면 감나무밭 임자가 없다는 것이다.
장두감을 주워 단지에 넣어두면 떫은 맛은 없어지고 단맛이 나고 단감은 맛이 들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따버렸다.
그래서 난 단감은 익지 않는 감이고 크지 않는 감이라고 생각했다.
감도 부지런해야 많이 주웠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주우러 가면 어느새 몇몇의 아이들이 다녀 가버리기 때문에 허탈했다.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끼고 논둑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폭포라고 생각 했다.
뫼주굴에 사시는 어느집 아줌마가 떠내려가는 돼지를 잡으려다가 물에 떠날라 갔다는 어른들 말씀에 멀리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저 물은 우리동네를 지나 나주군 세지면을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 목포 앞바다로 간다는 것이었다.
열 두 고을 물이 합쳐저 만난 강이 영산강인데 영산강의 저지대 사람들은 홍수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석기내란 곳은 열여섯살 큰애기가 오줌만 싸도 물이 찐다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고을은 비가 와도 끄덕 없었다.
입석 저수지가 터지면 우리면은 물바다가 된다고 하시는 어른들 말씀에 그 광경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천석굴 저수지가 터지면 우리마을까지 덮친다고 했으나 그 어떤 저수지도 터지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지만 철없는 나는 물바다의 그 광경을 그려보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바다를 가까이서 보지 못한 의식없는 마음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유속이 비교적 빠른 우리마을 앞 냇가는 아이들이 놀기에 좋았다.
목욕을 하면서 때를 밀어 봤다던가 비누로 머리를 감아 본적은 없다.
그저 물에서 놀다가 한기가 느껴지면 나와 말리고 다시 들어가서 놀았다.
코를 잡고 물속을 뀌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코를 잡고 반드시 누워 누가 더 긴 시간을 견디는지 시험해 보기도 했다.
손바닥을 땅에 대고 물장구를 친것이 나의 수영 실력인데 은자랑 명자는 땅을 짚지 않아도 나가는것이 아닌가?
내가 시도하나 금방 땅을 짚고만 만다.
나의 일기장은 대부분 이랬다.
난 오늘 아침밥을 먹고 누구랑 누구랑 목욕을 하러 냇가에 갔다. 참 재미 있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누구랑 누구랑 비를 맞고 달렸다.,참 재미 있었다.
재미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농촌에서 변화되는 산과 들 풍경은 보지를 못했고 그 어떤 사건도 내 일기장엔 등장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이 읽기엔 참으로 따분한 일기장에도 내겐 날짜와 날씨를 꼭 기록했다.
그것이 냇가로 갔는지 비를 맞고 돌아 다녔는지 알 수 있기에
비가오니 내 마음이 싱숭생숭 하여 어릴적 이야기를 쏟아 본다.
첫댓글 ㅋㅋㅋㅋ 비 많이 오는 날엔 발가벗고 동네를 뛰어 다니며 목욕하자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물론 개구쟁이 꼬마 남자아이들이었긴 하지만요.....빗물에 흠뻑 젖으면 머리에서 개털냄세가 나곤 했는데...
울 어머니 개내 난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지요. 제일 힘든것이 마당에 보리 널어 놓고 소나기가 오면 집으로 달려와 보리를 담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도 되고 주식이 되었기에 시키지 않아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에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적혀있네요.. 그렇게 자란 사람이 훌륭한 어른이 되는거잖아요^^.. 시골에서 놀이 문화가 비슷 비슷했던 것 같아요. 지금 아이들에 비하면 우리 시절들이 추억도 있고 놀이도 있고 돌아보면 철없지만 좋았네요.
감삭혀서 어머니가 소풍때 몇개씩 챙겨줬던 기억도 나네요. 감삭힌다고 단지가 이불에 파묻혀 있고 겨울 긴 밤에는 콩나물 시루에서 물떨어지는 소리.. 청국장 삭히는 담요을 들썩이면 코을 막고 아침잠에서 깨어났던 기억들이 새롭네요^^
장난감도 없었고 5학년때부터 승희와철수 공책뒤 겉표지에 종이 인형이 있었는데 많이 놀았습니다. 울 어머니 가위 뻐무린다고 해도 어머니 안보이시면 뒷당의 옷만으로 부족해 종이를 오려 색칠을 해서 그것이 그것이고 그날이 그날이었지만 그렇게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