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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맥주로 유명한 도시 청도(靑島,칭다오)
지역의 이름을 딴 청도맥주와 노산의 깨끗한 광천수로 유명한 도시 청도는 산동 반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부와 서부가 황해에 인접해 있는 산동성의 대표적인 도시다. 예전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급속도의 성장을 이루었고, 그 영향으로 도시가 마치 작은 독일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중국속의 유럽'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서, 지방 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도시 전체의 면적은 10,654㎢이며, 총 679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연평균 기온은 12℃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76㎜이다.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며,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봄과 가을이다.
청도는 젊은 도시이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이 곳에 1891년 청 정부는 군사를 파견하여 청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7년 11월에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고, 1914년 11월 독일에 이어 일본에게 점령당했다. 1922년 12월에 회복되었지만, 1938년 1월에 일본에 의해 또다시 점령당했다. 1945년 8월 항거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에 국민당 정부에 의해 회복되었으나, 곧 미국의 해군 기지가 되었다. 시내 곳곳에서 독일식, 스페인식, 일본식 등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청도의 과거 식민지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특히 근 20년 이래로 청도는 놀라운 변화를 이룩하여 대외 무역 항구, 해양 과학 연구 도시, 관광 도시 등의 특성화된 도시로 성장하였다. 청도는 LA한인타운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8만정도가 되는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다. ,,북경은 유학으로 온 한국 학생들이 많은 반면에 청도는 기후나 환경 등이 한국과 비슷하여 살기 좋은 환경으로 인하여 이민을 오거나 청도에 기업을 두고 있는 가족단위의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청도의 여행정보라 하면 제일 먼저 꼽을수 있는 것이 청도의 해수욕장으로 현재는 해수욕을 하긴 힘들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분위기를 느끼기엔 정말 좋다. 청도의 해안가 서쪽부터 동쪽까지 제 1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동쪽의 노산끝자락의 석노인 해수욕장까지 정말 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해수욕장 외에도 모래사장 주변에 사륜오토 바이크도 탈수 있고, 미니 모터보트를 타 볼 수도 있다. 가격은 부르는 값에 절반 값부터 깎고 흥정한는 것이 좋다, 그리고 노산(老山) 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바다와 산이 붙어 있어 둘의 어우러진 풍경도 정말 멋있고, 노산의 시작부분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올라가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 외에도 청도의 잔교, 5.4광장, 팔대관 , 중산공원 , 해군박물관, 노신공원 등등이 볼만하다.
청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려 싸여 있으며 대부분의 관광지는 바닷가주변으로 많이 발달되어있다. 중국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인 청도는 맑은 하늘과 넓은 해변 그리고 작은 유럽이라고 할수 있는 빨간 지붕의 유럽풍건축물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시간과 어우러져 지금의 평화롭고 여유 있는 휴양지 청도를 대표하고 있다.
@ 청도의 1일 관광코스
팔대관(화석루) > 영빈관 > 잔교 > 천주교회당 > 찌모루시장(짝퉁쇼핑) > 타이둥(저녁6시 이후 야시장이 열림)
★ 팔대관은 중국의 작은 유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예전 청도가 독일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유럽풍 고급 주택단지로 생각하면 된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봄부터 가을까지는 웨딩사진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타이둥 거리는 한국 서울의 명동과 같다고 생각되는 곳이다... 청도의 젋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젊음의 거리다... 저녁 6시 이후에는 타이둥 거리 내에 작은 야시장도 열리고, 재미있는 것은 타이둥 거리의 건물들을 보면 건물벽면 전체에 모~두 그림을 그려놓았다. 타이둥거리 바로 앞에는 월마트가 자리 잡고 있어서 찾기가 편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바가지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곳이다
청도를 대표하는 명소인 노산(嶗山,라오샨)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동해의 노산만 못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 노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산동 반도의 동서부에 위치해 있고, 청도시 동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황해에 바로 인접해 있으며, 총 면적은 1,133㎢이다.
옛날에는 도교의 본거지라고 여겨질 만큼 노산의 도교 사원은 매우 유명하다. 중국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할 목적으로 노산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산 곳곳에 남아 있는 비문들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 72개의 도교 사원이 있고,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교센터가 있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 동굴, 폭포, 오솔길은 절경을 이루어, 노산은 중국 정부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 개의 등산로가 있으며, 1,113m 높이의 정상 코스를 등반하는 데에는 약간의 체력과 지구력이 요구되지만, 청도의 경관과 정상으로부터 외곽 지역을 둘러싼 곳의 경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정상에 서면 바다 너머로 일출, 일몰 등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 도교(道敎) 이야기
도교는 송대(宋代)에 이르러 한 차례 큰 변화를 겪게 되어 정일종(正一宗0과 전진종(全眞宗)으로 양분된다. 왕중양(王重陽)이 세운 전진도교(全眞道敎)는 이론적으로 도가와 불가와 유가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왕중양(王重陽)은 노산에서 수양을 했으며 구처기(丘處機), 유처현(劉處玄), 담처서(譚處瑞), 마옥(馬鈺), 학태고(郝太古), 왕처일(王處一), 손불이(孫不二)라는 7명의 제자를 두었다. 스승을 따라서 노산에서 수양을 했던 이들을 칠전(七眞)이라 부른다. TV드라마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은 칠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산의 도교는 왕중양(王重陽)이 전진파(全眞派)를 창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전진파(全眞派)의 북칠진(北七眞)이 모두 노산의 도교에 족적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구처기(丘處機)가 3차례나 노산에 와서 설법을 함으로써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다음에 북칠진(北七眞)이 각각 노산에서 종파를 창건하고 도관(道觀)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이 벌어졌다. 명대(明代)에 이르면 9궁8관72암(9宮8觀72庵)이라는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이 때 노산의 전진도교(全眞道敎)는 도교(道敎)의 2대총림(2大叢林)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명대에도 노산의 도교는 전혀 시들지 않았다. 무당파(武當派)의 개조(開祖)였던 장삼풍(張三豊)도 명(明)의 영락년간(永樂年間)에 노산에서 수련을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명하동(明霞洞) 옆에 있는 삼풍동(三豊洞)이 그가 수련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장삼풍(張三豊)은 이름이 통(通)이었고, 자(字)는 군실(君實)이었으며, 호를 삼풍(三豊) 또는 납탑(邋遢)이라 불렀다. 그는 나중에 노산에서 죽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노산에는 원래 인동(耐冬),락석(絡石) 또는 운단(雲丹)이라고도 하는 담쟁이 풀이 없었는데 장삼풍(張三豊)이 그것을 가져와 길렀다고 한다. 그 후로 인동(耐冬)은 노산의 명화(名花)가 되었다. 장삼풍(張三豊)은 제자 서복양(徐復陽)을 티화자(太和子)라 부르며 진인(眞人)에 봉했다. 서복양(徐復陽)은 선학동(仙鶴洞)에서 수련을 하여 학산파(鶴山派)를 창건했다. 노산의 도교는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발전을 했지만, 이철현(李哲玄), 유약졸(劉若拙), 구처기(丘處機), 유처현(劉處玄), 이지명(李志明), 서복양(徐復陽), 장삼풍(張三豊), 손현청(孫玄淸), 경의란(耿義蘭), 제본수(齊本守) 등의 유명한 도인들을 배출했고, 그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부름을 받았었다. 도교가 노산에서 번성을 했던 것은 역대정권의 비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도교의 경전인 도경(道藏)은 명의 성조시대(成祖時代)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영종시대(英宗時代)인 정통(正統)9년에 출판되었다. 만력28년인 1600년 이 도경(道藏) 가운데 한 질이 노산의 태평궁에 하사되었으며, 그 사실을 칙론비(勅論碑)에 새겨 두었다. 명대에 간행된 이 도경(道藏)은 현재도 잘 보존되고 있는 진귀한 고서적이다. 역대의 도교 사원인 궁(宮)과 관(觀)은 모두 전지(田地)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청산촌(靑山村)의 주민들은 모두 태청궁(太淸宮)의 소작인들이어서, 봄가을에 태청궁(太淸宮)에 세금을 받쳐야했다. 청의 가경년간(嘉慶年間)에는 즉묵현령(卽墨縣令)이 태청궁(太淸宮)이 차지하는 토지의 범위에 대한 판정을 내리기도 했으며, 함풍시대(咸豊時代)에는 현령이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태청궁 안에 있는 수정석(水晶石)을 파내지 못하도록 했다. 관우(關羽)를 모신 관제묘(關帝廟)와 마찬가지로 도사 4~5명이 있는 작은 묘당에도 무려 60묘나 되는 토지를 주었다. 자료에 따르면, 도교에 대한 역대 조정의 비호는 중화인문공화국이 청도를 차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도교사원의 도사들은 태화관(太和觀)이 25세대, 옥청궁(玉淸宮)과 태평궁(太平宮)이 24세대나 세습되었다. 그렇다면 노산일대의 대부분이 도교와 관련된 땅이었을 것이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도교사원의 소작인들이었을 것이다. 역대정권이 이렇게 도교를 우대한 것은 다른 종교와 달리 도교가 가진 단단한 조직력과 정부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지 않는 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정부가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파륜공의 확산이다. 파륜공이 보급되는 과정을 보면 도교를 근간으로 결집되었던 과거의 반정부단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진나라가 통일을 한 다음부터 산동은 정치적 중심에서 비교적 멀어졌지만, 천연의 조건과 문화적 자부심, 그리고 산동사람들의 호전적이고 강인함이 도교라는 종교적 조직으로 결집될 때는 반드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역대 정권은 아마도 그것을 가장 경계했던 것 같다.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칙명(有仙則名)”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노산은 경치는 아름답지만, 바다를 끼고 있고 산림이 울창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오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 소동파(蘇東波)는 이런 글을 남겼다. “뢰산(牢山)에 은자(隱者)가 많다던데, 듣기는 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보더라도 다가가지 못한다네.” 이런 전설도 있다. 낙정자(樂正子)는 늘 노산에서 선단을 만들어 먹고 180세가 되었지만 홍안(紅顔)에 학발(鶴髮)을 유지했다. 신선 안기생(安期生)은 노산과 봉래산을 오가며 참외만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 엄청나게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풍경이 서로 융합되어 하나의 신기한 전설을 만들어 냈으며, 거기에서 다시 여러 가지의 민간고사가 탄생했다. 역대의 제왕들도 자기의 생명과 사직이 만세에 이어질 것을 갈망하면서 노산에서 그 방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도 노산에서 영실도인경(靈寶度人經)을 얻어서 이 경을 연구했지만 끝내 초도(超度)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얻지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도 노산에 올라갔다가 봉래산을 바라며 서복(徐福)에게 바다로 나가 선약을 구해오라고 했지만 사기꾼에게 걸린 셈이 되고 말았다. 한무제는 노산에서 신인에게 제사를 지냈고, 당태종 이세민과 송태조 조광윤도 모두 노산과 인연이 있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일세의 영웅인 징기스칸도 친히 ‘금호붚패(金虎符牌)’와 성지(聖旨)를 새겨 노산의 태청궁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사료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 된다
짝퉁 쇼핑의 천국 지모르 시장(即墨路市场)
청도에 관광을 왔다면 갈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와중에 쇼핑을 하려면대부분 <지모루시장>을 찾기 마련인데 암튼 들어가 보면 한국인 무지 많다.
★ 지모루 시장에는 진짜 A급 짝퉁은 없다.
짝퉁의 생산지는 99%가 남부 광동성인데 그중 A급은 거의 홍콩, 상하이로 다 빠져나가고 잘해봐야 B급 밖에 없다.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C급들이다. 지르기 전에 분명히 알고 가시라.
★ 짝퉁의 가격이 광동성에 비해 20~30%가량 비싸다.
이건 당연한거 아닌가...노동력과 운송비가 들어가니...청도에서 좋은 물건을 아무리 싸게 사봤자 광저우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사는 것이다.
★ 누구나 겪는 사실이지만...<호가>와 <실거래가>라는 게 분명히 있다.
뭐든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호가>는 5~600위엔이나. <실거래가>는 100~200위엔이고...못 깍고 비싸게 샀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 없다. 그냥 기분 좋게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 누군가에게 선물할 거라면(특히 애인에게) 적어도 300위엔 이상 가는 것을 살 것
사는값이 300위엔 이상인 물건을 사려면 아마 <호가>는 7~900위엔 정도 할 것이다. 150위엔 짜리 샤넬 짝퉁백 사줬다간 욕만 먹기 십상이다.
★ 원래 청도의 명물은 짝퉁 명품이 아닌 <담수 진주>이다.
뭐 눈이 높아서 <해수진주>만 찾는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진주 목걸이 선물하려면 진짜 청도 지모루 시장이 가장 좋은 쇼핑 장소가 될 수 있다. 가격은 워낙 차이가 심하므로 흥정을 잘 보시길....
★ 시계 .멋있는 것 너무 많다.
그렇지만 15,000원 짜리 시계가 오죽할까...시간 안 맞을 확률 무지 높다. 그리고 바로 서버릴 확률도 꽤 높다. 알고 사시라.
★ 지모루 시장에 한국인 장사꾼들이 몇몇 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그들에게서 양심을 기대하지 마시라. 그들도 분명히 이윤을 남겨야 하는 장사꾼일 뿐이다.
★ 많고 많은 짝퉁 중에 그래도 쓸만한 걸 고르라면.가죽 제품을 고르시라.
가죽이 원체 싸기 때문에 짝퉁의 퀄리티도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죽이 싼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황소가죽을 써야 하지만 짝퉁에는 대부분 남방의 <물소가죽>을 쓴다. 그래서 싸다. 물소 가죽이면 어떠리...어차피 구별하기도 힘들고 천년만년 쓸것도 아닌데...뭘
★ 시장에 소매치기가 많다던데.....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소매치기라고 해서 성인을 생각했다간 큰 오산이다. 소매치기의 대부분은 꼬마 애들이다.
★ 시장에 한국식 분식점들이 있다.
그런데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별로 맛이 없기 때문에...한국 같으면 진작에 망했을 음식 맛이다.
★ 그래도 뭔가 추천한다면 <과일을 설탕으로 둘러 놓은 꼬치>다.
엄청 달다. 그렇지만 맛도 있고 하니...한번쯤 먹어 봐도 절대 후회 안한다.
★ 시간이 된다면 이곳에만 있지 말고 가까운 <타이동로>로 가라.
부근에 있는 타이동로의 <골동품시장>으로 코스를 잡아보면 딱 좋다.
특히 <골동품시장>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있는데...집안 장식품, 여행 기념품 사기엔 딱 좋은 곳이다. 적극 강추!
여행을 위한 도우미
ꁾ 청도는 해안도시이기에 습도가 높을 뿐 아니라 바닷바람으로 여름에도 긴팔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잠바 하나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ꁾ 신발은 노산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등산화를 준비하는 것이 좋고 시내관광은 운동화가 아니면 니커즈면 될 듯 싶다.
ꁾ 맑은 날 해변의 자외선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선블럭 로션과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ꁾ 청도는 해산물 요리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음식으로 배탈이 날 수도 있으므로 지사제나 알레르기 약을 미리 챙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