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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프롬(Ta Prohm)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타프롬 사원은 앙코르돔의 동쪽으로 약 1km, 앙코르와트에서 약 2km 떨어져 있다. 12세기 –13세기에 걸쳐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돔을 만들기 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건립한 바욘(Bayon)양식으로 지어진 불교 사원이다.
타프롬은 브라마의 조상 영화<툼레이더:안제리나 졸리 주연>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 졌다. 동서 1km 남북 600m의 주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사원으로 건립당시에는 2,500명의 승려와 12,000명의 하급성직자가 관리할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거대한 나무가 사원을 감싸고 있는데, 이는 폐허가 된 사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본적인 풍경이다. 특히, 거대한 나무뿌리에 침식당하고 있는 사원의 모습은 신비함과 함께 자연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사원 내부로 들어갈수록 나무로 인해 붕괴된 곳이 많아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 많다.
문화재를 자연에 순응시키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를 보여준단다. 나무에 더 이상 자라지 않도록 주사제를 놓는다고 한다
길가의 원숭이들은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장난치면서 관광객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앙코르와트와 앙코르 톰을 비교해 보면 앙코르 톰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앙코르를 여행한 사람들 대부분이 짧은 일정 때문에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는 혼돈상태로 돌아온다. 그래서 전체적인 경로를 알 수 있도록 평면지도를 게재했다.
바욘(Bayon)사원 : 타프롬 사원에서 약 1km를 걸어서 앙코르 톰(앙코르 왓과는 별개로 앙코르 와트와는 걸어서 약 30분이상 걸린다.) 안에 있는 바욘(Bayon)사원으로 간다.
바욘사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앙코르(Ankor) 유적의 일부로,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바욘사원은 하늘과 땅의 연결을 상징한다. 200여개의 얼굴은 부처(관세음보살)의 얼굴이기도 하고 자야 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고 전해진다. 앙코르시대는 9~15세기의 크메르(Khmer) 왕조시대를 말하며, 초기에는 힌두교를 믿고, 중반 이후에는 불교를 국교로 믿으면서 뛰어난 건축물과 조각 유적을 많이 남겼다. 앙코르 유적은 크게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Ankor Thom:크메르왕조의 수도)으로 나뉘며, 바욘사원은 이 두 지역 중 앙코르톰의 핵심을 이룬다.
앙코르 톰의 문을 지나 저 멀리 바욘 사원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 이유는 백성의 아픔을 자비로 보듬기 위해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바욘의 미소가 반겨주기 때문이다.
바욘사원은 앙코르 돔 도시의 정중앙에 위치한 불교사원이다. 전체 3층 구조로 1층과 2층은 석벽, 회랑, 3층에는 십자형 구조위에 원형 돔 형태의 중앙성소가 있고 그 주위에 사면불이 조각된 탑이 배치되어 있다. 1181년경 참파(월남)를 물리친 자야바르만 1세가 세웠는데 왕은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왕 스스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자 신=왕이라 주장하며 그 상징으로 바욘을 국가사원으로 건설한 것이다. 아래 보이는 탑은 중앙성소탑이다. 왕은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관세음보살을 나타낸 인물불상 불상이 당초 54개였는데 지금은 37개만 남아있다.
바욘의 사면상의 얼굴이 학자들에 의해서 자이야바르만 본인의 얼굴이라고 주장하거나, 힌두교에 나온는 신들의 얼굴이라고 서로 다른 주장 한다.
사면상의 얼굴이 누구이든 간에 저는 기존 기득권층의 정치세력과 종교를 과감히 버리고 대승불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신진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자이야바르만 7세의 백성의 대한 사랑과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 구제 시설을 설치한 그의 치적과 정치 실험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1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앙코르 유적에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은, 바로 사전지식을 토대로 퍼즐을 끼워 맞추듯이 자기의 철학과 사고, 역사적 유추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우리 여행자 스스로의 몫이다.
나에게는 이 위대한 앙코르의 역사가 어떻게 해석되고 다가오는지 생각하면서 유적을 보면 앙코르 여행이 더욱더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된다. 크메르(앙코르)의 미소라 불리워지는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미소는 참으로 미묘하기만 하다.
수 톤이나 되는 바위를 포개 올리고 동서남북으로 관음상(일본발굴단은 힌두교의 신상이라고 한다고 함)을 새겼는데 그 표정은 전부 다르다. 근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는 불가사의한 미소다.
수많은 불상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데,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불상이 특히 유명해 【크메르의 미소】라 불린다.
아래 부조는 춤추는 무희(압살라)를 나타낸 부조로 아주 생동감 있고 코믹한 표정이 예술적인 감각과 감성이 물씬 풍겨난다.
동문 왼쪽 외부회랑에 조각된 부조다. 자이야바르만 7세의 승전 이야기다. 하나의 벽을 상하로 3등분해 조각해 놓았다.
남문 외부회랑에 조각된 똔레삽 대전투의 이야기다.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참파족들이 1177년 투본강을 거쳐 베트남 동해로 남중국해를 지나 메콩강을 거슬러 똔레삽까지 진출. 앙코르제국을 침범한다. 이 장면은 자이야바르만 7세가 참파에 맞서 똔레삽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스스로를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을 내세우며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 구제 시설을 건설하는 등 대국민 정책을 수립했던 자이야바르만 7세도, 그의 죽음과 함께 종교는 다시 기득권층을 형성했던 힌두교로 환원되고 국력은 급격히 쇠퇴해진다.
불교 사원인 바욘의 2층 내부에 모셔져있는 시바를 상징하는 링가와 요니다.
링가는 인도에서 숭배되는 남근상이고, 요니는 링가의 상대개념으로 시바의 아내인 파르바티의 여근상을 상징한다고 하며 4각형이나 6각형이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압살라의 춤추는 모습의 부조: 천상의 무희로서 추는 율동과 허리의 잘록함, 다리의 곡선, 손동작과 코믹한 미소는 불가사이한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푸온(Bapuon) 사원이다. 11세기 중엽(1160년 경) 우다야디야바르만 2세때 건설된 것이다. 바욘사원이 건립되기 이전까지 도시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고, 앙코르 톰 건설이전에 만들어진 힌두사원이다.
코끼리 테라스: 자야바르만 7세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는 곳이다. 바욘입구에서 라이왕의 테라스에 이르기까지 350m의 길이로 길게 늘어서 벽면에 코끼리모양의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계단의 한 쪽에는 머리가 세 개인 코끼리 신 에라완이 긴 코로 연꽃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이 테라스 부근에 승리의 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들어와 왕에게 보고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문둥이왕의 테라스로 코끼리 테라스의 연이은 북단에 위치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왕이 밀림에서 뱀과 싸우다가 피가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는 이야기와 자야바르만7세가 참족과 전쟁 중 참족왕자를 죽였는데 그 피가 얼굴에 튀어 문둥병에 걸리고 본인의 병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로 벽면 전체가 인물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테라스와 문둥왕의 테라스에서 수많은 군대와 백성들을 사열했을 당시를 상상해보면 그 위용과 위엄이 굉장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앙코르 와트의 동쪽 출입구다. 난간에 사자와 나가(커다란 뱀)로 장식되어 있다. 난간은 소실되고 없다. 앙코르의 유적은 적어도 10일 이상 봐야 조금알 수 있을 것인데 1-2일 주마간산의 여행은 갔다 왔다는 의미일 뿐.
저녁에 식당에서 연극하는 모습으로 앙코르 와트의 영화로운 시대를 표현한 것으로 당시의 압살라 무희들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캄보디아 무용의 특징은 손가락과 손동작이 춤의 중심 요소다.
석양의 씨엠립 풍경은 공해가 없어서인지 청초한 아름다운 선경을 자아낸다.
아침 거리풍경
톤레사프호수
건기 11-4월 면적이 3000㎢정도지만 습한 남서풍의 몬순이 강한 바람과 엄청난 비를 몰고 오는 우기(5-10월)에는9000 ㎢의 거대한 민물바다로 변한다. 메콩강의 수위가 낮아지면 300만평 수심은 1미터, 수위가 높아지는 우기에는 물이 역류하여 700만평 수심은 9미터란다. 눈으로 보면 바다이지 호수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여기 농장은 보통 30-40만평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것이 10만평인데 30-40만평은 정말 큰 농장이다. 끝없는 지평선에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어서 물었더니 코렘산 127미터란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로 앙코르 왕조가 수도를 여러 번 옮겼지만 모두 톤레사프 호수 부근이었다. 그 이유는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제공할 수 있고, 육상에서 자란 식물의 유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다량의 플랑크톤이 발생해 600여종의 다양한 물고기가 많아 어획량만으로 100만 명이 먹고 살 수 있고 캄보디아 국민의 단백질 섭취량의 6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앙리무오가 물고기 때문에 노를 젓기가 힘들다고 했을 정도다. 한마디로 톤레삽호수는 앙코르 문명의 발상의 에너지원이었고 토대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초딩 3학년 정도 되는 어린이가 승객의 등을 두드려 주고 1-2천원 정도 받는다.
톤레삽호수 위에는 10만호에 달하는 수상가옥이 있는데 나무기둥 위에 집을 지어 우기에도 잠기지 않도록 높게 지은 것도 많고 배로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며 배의 닷처럼 집을 큰 기둥에 묶어 놓은 것도 많다. 우기 때에는 주위의 정글도 온통 잠겨버린다. 작은 수상가옥은 철거하는데 3시간 조립하는데 1시간이면 된다. 주민들은 어업이 주요 생계수단이며 호수위에 학교, 병원 상점, 경찰서, 농구장등 여러 시설이 있다. 가이드 말로는 수상거주 인구 중 베트남 난민이 많은데 월남전 당시 미국 등 다른 나라로 피신한 사람들을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아주 멸시하므로 이곳에 정착하여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식수, 빨래, 분뇨처리를 모두 호수 물로 하는데 “전염병 위험이 없느냐?” 고 물었더니 황토물이라 자연 살균 효과가 있어 괜찮다고 하며, 지금은 봉사단체에서 큰 정수기를 설치하여 물을 배급해 주기도 한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로 인한 악몽으로 아이들이 배우면 죽임을 당한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보내지 않고 구걸을 시킨다. 어른 하루일당이 1.5달라, 구걸하여 천원을 받으면 일당의 반이 넘는다. 아이들은 천원만 달라고 여행객들에게 달라붙어 사정사정한다. 가이드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 계속학교에 보내지 않음으로 돈을 주면 안된다한다.
가이드가 여덟 명을 일렬로 세워 한국노래 노사연의 누이를 부르게 하고 각자 천원을 주었다.
한국 KOIKA, KT&G, 하나투어 등이 합작으로 다일나무배조선소를 만들어 배를 무료로 전달한다는 사진이고, 망고라는 단체는 30명 정도의 봉사단체로 마을 4-5개 단위로 학교를 설립해주고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며, 담비는 우물파주는 것의 원조 격이며, 최일도 목사가 주축이 된 밥퍼는 무료급식의 시초다.
킬링킬드
2차대전으로 일본군이 물러나고 프랑스신탁통치로 이양되고 베트남과 프랑스간에 1차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고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군 18,000명을 사살 프랑스가 패퇴 철수하고, 1965년 미국과 베트남이 통킹만사건으로 제2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 미국은 월남에 무기를 지원했으나 월맹으로 빼돌려지는 혼미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캄보디아는 중립을 선언하였는데 호치민과 시아누크가 만나 호치민루트(월맹에서 월남으로 이어지는 산악 2만㎞) 완성을 위해 캄보디아 땅을 경유 빌려줄 것을 요구하고 조건으로 전쟁승리 후 메콩델타를 준다고 한다. 이 비밀협정이 시아누크의 오른팔격인 손산이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을 잃어버렸다. 1968년 호치민루터에 대한 집중폭격으로 캄보디아는 미국을 원망하며 반미로 돌아선다. 1970년 시아누크가 중국으로 나간사이 론놀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데 이것이 1차 킬링필드다.
시아누크는 중국, 북한(김일성과 의형제)에 머물며 노동자의 나라를 갈망하는 반미 공산주의 가담자들인 크메르루즈군을 지원한다. 중국에서 무기지원을 받은 시아누크는 폴폿을 내세워 귀국한다.
1965년 월남전이 종료되고 폴폿정권은 민주주의자들을 숙청하는데 이것이 제2차 킬링필드다.
원론적으로 앙코르시대의 농경사회를 지향한 자급자족의 국가건설이 목표였음으로 노동자, 농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제거대상이었다.
폴폿정권은 프놈펜입성 브루조아는 죽어 마땅하므로 3일 이내에 떠나라고 방송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3일 뒤 총성이 울리고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었다. 12-17세 정도의 젊은 아이들이 행동책이 되어 공무원, 은행원, 성직자, 학자, 선생, 기자, 등 나중에는 안경 낀 사람, 배나온 사람,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 연필 잡은 자국이 있는 사람, 일한 흔적이 없는 사람,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처음에는 총으로 죽이고 나중에는 의자에 묶고 뒤통수를 드릴로 뚫고, 눈알을 빼고, 굶기고, 수십 명 씩 굴비를 역고, 물 먹이고, 어린 아이는 빼앗아 공놀이 하듯 던지고, 총검으로 찌르고.............. 특이한 것은 팝나무 입 줄기(길이 3m 폭10㎝)로 목을 치는 바람에 가장 많이 죽었단다.
살인이 놀이 수단화 되어 지옥도를 연출한답시고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고, 죄책감이나 도덕율은 아예 안중에 없었다. 이제 캄보디아는 문맹들만 살아남았다.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사회에서 예전의 국민평균 IQ를 회복하는 일은 아마 수세기가 걸릴 것이고 미래가 암담하다.
-노란 뼈는 남자들의 뼈고, 흰 뼈는 여자들이 출산으로 뼈의 영양분이 많이 빠져나가 희단다.
* 북한이 캄보디아 지식층보다 더 이성적이라 단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3일내에 서울을 떠나라 한다면 아마 남한 인구의 절반이상은 죽을 것이다.
킬링필드의 주역 폴폿은 1927년 부농의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나 프랑스 유학 전자학을 전공한 엘리트로서 레닌사상에 심취, 귀국하여 교사생활을 하다가 서기장까지 된 사람으로, 정권의 장관들도 대부분 유럽, 미국 등 선진국 유학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870만 국민 중 300만 명을 죽음의 늪으로 내몰고 정부군 승리의날(베트남군 진입일: 1978.1.7.)까지 살인은 계속되었다. 폴폿은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심장마비로 죽었다는데 자연사다 타살이다 아직 불분명하고, 살인 주역들은 국제사법심판소에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반성하는 기미도 없다.
이념의 맹종과, 불완전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정치는 정말 위험한 것이다.
부산저축은행 등 못된 놈들이 부동산 투기를 일으켜 사진으로 보이는 땅 한
평에 1,500-2,500만원씩 한단다. 저급한 자본주의 논리로 과거 우리나라에 쌀을 무상 원조했던 캄보디아를 깔보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도와주었으면 한다.
하늘이 내린 베트남 하롱베이 바다와 기형의 섬들, 캄보디아 조상이 만든 인간이 만든 유상 중 세계 7대 불가사이인 앙코르와트를 관광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연적인 산하의 아름다움도 이에 못지않음에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나라와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남방지역 인간들의 삶과 역사를 조금이라도 현지에서 체험할 수 있어, 어느 여행보다 느낌이 많았던 여행이었던 것 같다.
청솔산우회 회원들과 함께 한 여행기간은 정말 보람찬 날들이었고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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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거운 여행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여행이 너무 좋아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