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를 뒤적이다가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닿았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책 표지의 문구 때문이었다. 광고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나는 금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런 상은 내 삶에 똬리를 틀 자리가 없었다. 그저 그때그때 관심이 가는 책을 무심하게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딱이 좋아하는 장르도 없다. 사실은 소설보다는 비소설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런데도 『한 여자』라는 책에 눈길이 간 것은 순전히 그 광고 문구 덕분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로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 담긴 개인 기억의 뿌리, 소원, 집단 통제를 드러낸 용기와 임상적 예민함”을 들었다. ‘한 여자’를 읽으면서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은 개인 기억의 뿌리라는 처음의 단어들이었다.
아니 에르노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소설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회상이 전부였다. 세계대전을 오롯이 견뎌낸 질기고도 질긴 삶이 책속에 진하게 녹아 있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그녀의 어머니 또한 억센 모정을 가지고 있었다.
중편 정도의 소설이었으므로 단숨에 읽어 내렸지만 울림은 의외로 컸다. 책머리에 소개된 그녀의 프로필에는 “등단 초기부터 픽션을 거부한 아니 에르노는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을 혼합해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해부해 왔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림 자료 : 인터넷(다음), 이하 같음
‘한 여자’는 삶의 끝자락에서 치매를 잃다가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한발 물러선 곳에서 풍경화를 그리듯 어머니를 그려놓았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언뜻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동안 별로 떠올려본 기억이 없는 그런 어머니다. 내 어머니 역시 억척스럽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어디 내 어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어머니가 그랬을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가 전쟁이라는 험한 세상을 살아낸 것처럼 내 어머니 역시 한국전쟁을 온전히 감당해내셨다.
더구나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을 하셨고, 부상을 입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히 상처는 잘 치료가 되어 보행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상이용사가 누릴 수 있는 국가 연금을 외면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고집을 감당하며 우리를 키웠다.
저자의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살았던 모습이 그대로 나의 어머니에게 투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여자’는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헌사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내 형편없는 글 솜씨가 원망스러웠다. 작가의 현란한 글이 무척 부러웠던 것이다.
소설은 언뜻 박완서의 ‘그 많은 싱아를 누가 다 먹었나?’를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박완서의 소설은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억척스럽게 아이들을 길러냈다. 세상의 어머니가 다 그랬다.
작가의 알츠하이머를 앓던 어머니가 가끔씩 정신이 온전해지면 이야기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다 자식의 행복을 소망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행복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의 삶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반석이 되어 줄 수는 있겠지만 자식의 삶에 직접적인 개입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그런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작가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가는 와중에도 배움을 열망했다. 아마도 그러한 어머니의 지적 갈증이라는 유전인자가 딸에게 그대로 이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이 위대한 작가가 되는 토대라 되었으리라.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 최근 영화 상영작, 공원의 꽃 이름도 알고 싶어 했다. 책을 만질 때는 손을 씻을 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 배움을 향한 열망을 딸을 통해 얻고 완성 시키고 싶어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노인 요양원에서 쓸쓸히 험하고도 고된 삶을 마감했다. 내 어머니가 노인 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것처럼. 작가는 하루 전에도 어머니의 병문안을 했다. 나는 인천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차이 때문에 겨우 일주일 전에 병문안을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소설을 통해서 새삼 내 어머니를 떠올려보았다. 낙천적이셨던 분인지라 기억 속에서도 희미하게 웃고 계셨다.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지만 그것은 이제 상상의 영역이 되었다. 작가는 어머니를 활자 속에 각인시켜놓았는데 나는 그저 상상의 영역에 가두고 말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