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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종교에 대한 이해
1절 종교 정의와 종교 개념의 역사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말할 때 ‘종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다양하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은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자신의 종교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비종교인들의 경우도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아니면 종교의 윤리적, 교화적 기능, 또는 사회봉사 활동 등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종교 개념이 정확하게 의미와 내용이 규정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음에 연유한다. 본 장에서는 종교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알아보고 종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종교의 상식적 정의 종교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종교란 ‘하나의 믿음’이라는 정의가 있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과 자연의 불가항력에 따른,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의지와 피난으로서 종교를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믿음 대상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믿음의 방식의 차이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믿음은 종교적인 삶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아 우정, 권력, 예술, 윤리규범, 법 등 인간 삶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조건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종교란 ‘인간이 위안 받기 위해 또는 구원 받기 위해 허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과학적 비판의 외형을 띠고 있다. 이에 의하면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계와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을 남김없이 다 설명할 수 있으므로 종교와 같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는 결국 소멸할 것이고, 따라서 종교란 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의 유약함에서 비롯된 허구적 위안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인간중심주의적 과학주의라 하여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에 다름 아니며,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 삶의 풍부하고 복잡한 측면들이 모두 해명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겸손함으로 대체되었다. 또 서구사회의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사와 그들의 견문기에 의해 생성된 주장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가짜 종교이며,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짜 종교’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지극히 오만하고 배타적인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나라, 심지어는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그래서 기독교화한 국가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는 범주는 가치 판단적인 용어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성숙한 견해에 의하면 종교란 우리 눈앞에 보이는 여러 현상들 중에 사회적 합의에 의해 ‘종교’라고 분류되고 불리는 현상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만일 기독교인이 이런 배타적 주장을 고집한다면, 그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기본적인 전제를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오류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기독교는 종교에 대한 개방적인 정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가 믿는 종교가 자기에게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는 자기와 다른 종교, 자기와 다른 사람들,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개방된 것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믿음으로서 죄를 용서받는 것”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알라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 등 종교별로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러나 이는 문화권마다 종교에 해당되는 개념들이 서로 다르고 그 내용도 상당한 편차를 보이기 때문에 각 종교 신자들의 호교론적(護敎論的) 입장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종교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견해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초연한 접근(detached approach, Winston King)’ ‘구조화된 감정이입(structured emphathy, Ninian Smart)’ 등의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2 학문적 정의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상식적인 종교관이나 태도들 외에 학문적인 정의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유명한 종교사회학자 베버(Max Weber)의 이야기처럼 “종교를 정의하는 것, 종교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연구의 첫 단계에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필요하다면 정의는 연구의 결론에서만 시도될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사회적 행위의 특수한 상황들과 결과들을 연구하는 것이 과제다.” 한편 ‘무엇이 참이냐/진리냐’ 하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종교’라 불리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정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작업을 전개하기 위한 잠정적이며, 전략적이며, 방편적인 정의일 뿐이다. 모든 작업의 상황에 따라 적합한 정의가 있으며, 그것은 그 순간에만 유효하다. 보편적으로 옳은 종교 정의란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우선 종교 탐구의 첫 출발이었던 종교기원론과 이후의 다양한 종교 정의의 방식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1 종교기원론 먼저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종교에 대한 정의보다는 그 기원 규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표적인 종교기원론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뮐러(Max M웞ler, 언어학, 종교학) : 종교란 “언어의 질병(disease of language)”이다. 뮐러는 종교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신학에서 종교학을 독립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종교 기원에 대한 탐구는 결국 “무한으로 경험된 죽어 있는 객체인 자연현상(하늘, 땅, 물 등)을 살아 있는 주체(의인화)로 언표한 경험이 바로 종교 경험이다. 이는 언어의 굴절 현상 속에서 벌어진다. 종교는 사실을 비사실로 표현한 비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다. 결국 종교는 질병이며 비현실적인 산물이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언어가 실재 혹은 인식을 만들어 낸다(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일러(Edward B. Tylor, 인류학) : 종교는 “잘못된 추론의 결과(mistaken logical inference)”다. 그는 진화론적 입장을 갖고 현존하는 원시부족의 종교를 연구하여 종교의 기원과 본질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는 원시인이 ‘죽음과 삶’ 그리고 ‘꿈속의 비현실적 세계’라는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여 삶도 죽음도 아닌 제3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었고, 그것이 몸에 붙으면 살고 떠나면 죽는 것이며 잠자는 데 붙으면 꿈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결론지었다. 이 제3의 실재가 바로 유명한 아니마(anima, 영적 존재)로서 애니미즘(animism)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프로이트(S. Freud, 심리학) : 종교는 “유아기적 강박 노이로제의 표상화이며 망상이다.” 프로이트는 인간 심성의 무의식 영역을 발견하여 마르크스나 니체와 더불어 현대 서구사상의 대전환을 이룬 심리학자로서 에고(ego)와 슈퍼에고(superego) 개념을 통해 종교의 기원을 규명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라면서 에고를 형성하는데, 슈퍼에고인 부모가 늘 자기 존재를 얽어매는 짐이 되고, 이에 부모살해의 충동을 지니나, 결국 자신도 어느새 슈퍼에고가 됨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영원한 슈퍼에고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고, 그 신적 존재에 의해 죄의식을 용서받는다. 그러나 “슈퍼에고로의 변화를 삶의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신적 존재에 의탁하는 것은 미성숙의 표시로서 정신분열적 증세이며, 따라서 종교는 유아기적 강박 노이로제 현상의 표상화, 즉 망상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뒤르껭(Emile Durkheim, 사회학) : “종교는 사회 그 자체다.” “종교는 성스러운 것(격리되고 금지된 것)과 관계된 신앙과 실천의 독특한 체계다.” “신앙과 실천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교회라 불리는 유일한 공동체 속으로 통합한다.” 뒤르껭은 현대 사회학의 비조로서 사회는 단지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유기적 구조를 가진 단위체임을 규명했다. 또한 사회는 사회 자체가 형성한 자기 이념의 결과이며, 이러한 사회의 형성에는 사회를 묶을 수 있는 자기 이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집단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른 욕구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에 사회는 언제나 해체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개별 구성원들의 차이를 상쇄시키고 이들을 묶어줄 수 있는 초개인적인 준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차이가 존재하는 현실적 차원은 속(profane)이고, 이를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성(sacred)이다. 이 성은 개인의 욕망의 차이를 누르고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속에서 성으로 올라간 차원을 뒤르껭은 토테미즘(totemism)이라고 했다. 사회는 이 성에 의해 현실의 상충을 해결하고 신화를 형성하고 제의를 실행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한다. 결국 종교란 사회를 존재케 하는 기본 요건이지,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사회가 있기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즉 종교는 사회 그 자체다. 뒤르껭은 사회 자체가 형성한 자기 이념이 곧 종교라고 보는 것이다. 유물론(Materialism) : “종교는 인간 자신의 투사물이며, 인간과 인간 자신의 관계이며, 그 자신의 본성에 대한 관계이다. 신적인 존재는 단지 인간 존재일 뿐이며,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가진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화된 인간 본성이 객관화되어 다른 존재처럼 직관되고 존경받는 것이다. 따라서 신적인 본성의 속성은 인간 본성의 속성에 불과하다(Ludwing Feuerbach).”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 종교는 아직 그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상실한 사람들의 자의식이며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 밖에서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인간 세계요, 국가이며 사회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환상적인 인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참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Karl Marx, Fridrich Engels).” 이와 같이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들은 종교의 중요한 측면에 대해 밝혀주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원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특정 측면을 보편적 기원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원에 대한 물음은 종교의 풍부한 측면을 특정한 한 요소로 환원함으로써 종교를 다 설명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종교는 기원에 대한 한두 마디의 언급으로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에 대한 정의는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2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정의 방식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잠정적인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 정의는 방법론적(heuristic) 차원과 전략적(strategic) 차원에서 요청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종교정의의 방식으로는 ‘본질적 정의’와 ‘기능적 정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많은 설명을 요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정의 내용을 열거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 본질적 정의 이 정의 방식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스피로(Melford Spiro) : 종교는 문화적으로 당연시되는 초자연적 존재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문화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이다. 오토(Rudolf Otto) : 종교란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의 경험이다. 궁극적 실재는 두려움과 매혹의 대상이다. 스트렝(F. Streng) : 종교란 궁극적인 변형을 위한 실천적 수단이다. 파슨즈(Talcott Parsons) : 종교는 인간들이 다양한 사회에서 진화시켜 온 일련의 신앙과 실천, 제도다. 벨라(Robert Bellah) : 종교는 일련의 상징적 형태와 인간을 그 존재의 궁극적 조건과 연관시키는 행위다. 잉거(J. Milton Yinger) : 종교는 인간 공동체가 그들 삶의 궁극적 문제와 투쟁하는 수단인 신앙과 실천의 체계다. 로버트슨(Roland Robertson) : 종교 문화는 경험적인 실재와 초경험적이고 초월적인 실재 사이의 구분에 관계된 일련의 신앙과 상징들(그리고 그로부터 유래되는 가치들)이다. 경험적인 것의 중요성은 비경험적인 것에 종속된다. 본질적 정의들은 종교에 대해 깔끔하고 분명한 이해를 제공한다. 이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종교라 규정되었던 것에 기초하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정의들은 종교의 추상적 본질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종교의 형성과정과 변형, 즉 역사적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본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힘과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2) 기능적 정의 이는 ‘종교는 무엇을 하는가’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설명 방식을 취하는데, 앞서 보았던 뒤르껭의 정의가 대표적인 예다. 그 외에도 많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정의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루크만(Thomas Luckmann) :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 실재로서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종교의 기본적인 사회적 형태다. 이러한 사회적 형태는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세계관은 포괄적 의미의 체계다. 그 의미 체계 안에서 사회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는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 목적이 더욱 구체적인 해석적 틀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틀 속에서 실재는 구분되고, 구분된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 버거(Peter Berger) : 사회적으로 성립된 규범(nomos)이 당연시될 때마다 우주(cosmos)에 내재한 근본적인 의미라고 생각되는 것과 노모스의 의미가 결합된다. 노모스와 코스모스는 동시에 연장된다. 종교란 성스러운 노모스를 설립하려는 인간의 한 기획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성스러운 방식으로 우주화하는 것이다. 기어츠(Clifford Geertz) : 인간은 드러난 세계(속)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세계(성)를 경험하며 산다. 드러난 세계는 드러나지 않은 세계에 의해 의미를 얻는다. 종교는 이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드러내는 상징체계다. 이 상징체계는 강력하고, 깊이 스며들며, 지속적인 분위기(mood)와 동기(motivation)를 인간 안에 형성해 준다. 이 분위기와 동기는 인간의 실존이 일반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들을 형성한다. 이 개념들은 사실성의 후광을 지니고 나타난다.(여전히 존재하는 혼돈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의미와 질서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실성의 후광을 지닌 것이다. 그 사실성은 신앙에 의해서 확보된다.) 이 현실성은 독특하게 현실적이다.(그러나 이는 사실적 의미에서의 현실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미 있게 되는 매우 독특한 현실이다.) 결국 이러한 상징체계는 인간의 삶을 변화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기능적 설명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종교와 연관지워 설명할 수 있게 한다(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스포츠, 예술, 섹스, 현대 대중소비사회). 그러나 사회가 어떤 기능적 필요요건을 가지고 있는지에서의 출발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합당한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기능적 정의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요구하며 그 기능 중 일부는 특별히 종교에 의해 완성된다는 순환논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종교라고 정의된 것으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기능적인 종교 정의는 본질적 종교 정의가 설명하는 바 종교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결국 본질적 정의와 기능적 정의는 종교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될 뿐이며 그 어떤 정의도 완전한 것은 없다. 모든 정의는 종교를 묻기 위한 잠정적인 출발점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종교를 물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종교 정의는 특정한 종교 현상에 대해 묻고 이해하고자 할 때 나름대로 구성해야 하는 것이지, 이것이 정답이라고 뒤따를 만한 어떤 모범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종교 개념의 역사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종교를 이해하는 적합한 물음이 될 수 없다면, 질문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 경우 질문은 첫째, 지금 아주 상식적으로 사용하는 ‘종교’라는 단어가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둘째, ‘종교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도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일컬어 종교라 하는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1 종교개념의 기원과 역사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확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되고 폐기되고 변화해 온 것이다. 또 이는 다양한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분류 기준을 대상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져 온 것이다. 따라서 ‘종교’ 자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종교’라는 단어가 출현한 역사적 맥락을 밝히고 그 의미가 변해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 어 ‘religio’에서 유래한다. 인도-유럽 어에는 본래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고대에 종교가 사회의 다른 영역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religio’의 어원은 ① 신에 대한 숭배행위에서 나타나는 ‘망설임’ ‘삼가함’ ‘두려움’을 의미하는 relegere(반복, 음미, 정돈), ② 인간을 신에게 묶어 주는 경건한 결합을 의미하는 religare(다시 결합한다)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이를 종교경험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보면 ②는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경건의 객관성을 강조하며, ①은 대상을 숭배하는 신자의 주관적 태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상용하고 있는 종교 개념의 역사는C.E.* 4세기 이후 서구에서 소위 제도 기독교가 성립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4세기 로마의 황제국가와 기독교가 결합하여 로마가톨릭이 형성되고, 이는 바로 초기의 지하 신앙공동체로부터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심지어는 국가적인 기독교 공동체(eclesia,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 교회)로의 전이를 의미했다. 이로부터 ‘religio’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공동체 내부의 종교적 규율, 제의적 실천방식, 신자의 준수 사항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못박힌 religio는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갖게 되며 여기에는 기독교만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이해를 뒷받침하는 권위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여기서 다른 종교들(비기독교적인, 제도적/비제도적 신앙과 실천)은 단지 이교(異敎, paganism)에 불과할 뿐, ‘religio’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러한 종교 이해는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내내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타자의 발견’과 르네상스에서의 합리주의, 그리고 이의 한 결과물인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수정된다. 우선 타자(광대한 신대륙과 종족, 문화, 종교)와 만남으로 인해 ‘종교’는 기독교 공동체의 교리나 규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좀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한다. 이제 ‘religio’는 그에 속하는 많은 현상들을 포괄하는 보편적 범주가 된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religio’가 ‘기독교적’으로가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제 기독교는 새롭게 출현한 ‘religion’이라는 유(類) 속의 한 종(種)이 된 것이다. 타자의 발견은 유럽 인의 종교인 기독교를 보편적인 종교의 일부로 재편성하게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합리성의 개념은 이성, 합리라는 잣대로 ‘종교’를 인간의 합리성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에 위치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을 합리에 반대되는 ‘비합리의 영역’으로 묶게 만들었다. 즉 합리성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종교의 범주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종교가 보편적인 범주로 설정된 후에, 이제 거기에 다시금 ‘진보’의 개념이 결합한다. 그리하여 인종 간에 진보의 정도에 따라 위계질서가 매겨지듯이 종교 간에도 이른바 진보의 원칙에 따라 위계질서가 매겨진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많은 종교 기원론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질서 아래서 결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또다시 정점에 배치된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진보의 기준에 가장 접근한 것이 바로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개신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야말로 합리적이며 진보한 사회의 상징인 근대 자본주의에 가장 적합한 종교라고 여겼다. 다른 하나는 개신교가 발견한 개인의 내면을 가장 적합하게 발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의 대표적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신학자가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내적 경험에서 찾으려 한 시도 등에 의해 더욱 힘을 얻었다. 결국 17, 18세기의 ‘종교’ 개념은 이전 시기의 기독교 중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 범주로서 재형성되었지만, 이는 결국 서구 중심적이고 백인남성 우월주의적인 타자 인식에 의해 종교 간의 서열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비록 인간의 합리적 영역에서 배제되기는 했지만, 이른바 ‘비합리와 감정의 영역’에 그 토대를 든든히 두면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우월한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계몽주의보다 더 긴 뿌리를 갖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적 전통이 결합되어 지금의 서구적 종교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 이해는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틀거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을 타고, 기독교의 세계 선교붐을 타고 수많은 비서구 사회로 퍼져 나갔고,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 중국, 한국에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라는 개념은 이러한 서구 역사와 그 팽창사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2 동아시아에서의 종교 개념의 수용 동아시아의 경우 종교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교(敎), 학(學), 도(道), 법(法), 예(禮) 등의 언어가 이에 상응하는 의미로 쓰여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문물의 유입과정에서 특히 정교분리(政敎分離) 등의 단어를 번역하면서 종교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동아시아3국 중에서 가장 먼저 ‘종교’라는 단어를 만든 곳은 일본이다. 일본 학자들은 1860년대 후반 명치기에 독일 헌법 중의 정교분리 조항을 번역하면서 ‘religion’이라는 용어를 불교경전인 ≪능엄경≫ 중의 한 구절을 따서 ‘종교(宗敎)’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는 역시 처음에는 ‘기독교’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점차 ‘어떤 한 종교만이 참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동질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성립되면서 보편적인 ‘종교’ 개념이 성립되었다. 중국도 19세기 말까지 ‘종교’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으나 서구의 근대적 지식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종교’라는 단어를 수입하여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일본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근대 학문과 지식체계를 수입하면서 종교라는 일본식 조어를 수입하여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종교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사례는 1883년의 ‘한성순보’ 기사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기독교, 도교, 유교, 불교, 유대교, 회교 등을 언급하기 위해 종교라는 보편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종교’라는 단어는 다양한 종교 현상들을 지칭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종교’ 개념은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두 가지 과제 즉 서구의 모델을 따라 문명화를 이룩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 이 두 원칙에 따라 그 사용방식이나 함의도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중 대표적인4가지 용례를 보면, ① 서구가 발달한 것은 비합리적인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므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반종교적 개념, ② 종교의 보편적 존재 근거를 인정하지만 이를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 즉 비합리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신론적(理神論的) 개념, ③ 서구의 부강의 원인을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찾음으로써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문명기호적(文明記號的) 개념(이는 대부분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장이며, 이의 세례를 받은 국내 기독교 신자나 학자 및 근대화론자들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④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도 포함하여, 사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인민교화적 개념(그러나 이는 매우 세력이 미미했으며, 현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나 종교다원주의와도 맥락을 달리한다.) 등이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서로 뒤섞이면서 개항기 우리 사회의 ‘종교’ 이해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개항 이래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세번째의 문명기호적 입장이 가장 성행했으며, 오늘날도 종교 간의 갈등이나 분쟁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절 종교 이해의 방법 위에서 서술한 종교 정의 및 개념의 역사는 바로 그대로 종교 이해의 여러 역사적 과정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본격적인 종교학은 19세기 이후 전개되었으며, 이는 오늘날도 유용한 많은 방법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더구나 19세기 이후 학중의 학, 학문의 왕인 철학에서 분화된 수많은 학문분과들,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언어학, 자연과학, 문학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종교에 대해 탐구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교학이나 신학 등 종교 내부의 학문적 전통들도 강력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역시 포괄적 종교 이해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하는 학문은 종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종교학은 19세기 뮐러(Max M ler)가 종교과학(the science of religion)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래 현대에서의 비교종교학(Comparative Study of Religion)이나 종교현상학(Phenominology of Religion), 종교사(History of Religion) 등 다양한 접근 방식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종교 이해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종교학사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약하기로 하고 여러 학문에서 종교 이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종교의 다양한 측면(차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 측면들을 종교경험, 신화와 교리 및 제의, 사회(조직)과 윤리적 차원 등으로 묶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종교경험 인간이 살면서 겪는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인간 경험의 층위는 감각(sense), 지각(perception), 느낌(feeling), 인식(recognigion), 표현(expression!), 소통(communication), 변환(transformation) 등 매우 다채로우며, 일상적 경험과 비일상적 경험도 존재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내(주체)가 외적 대상(객체)을 만나서 그것을 나의 삶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해 나의 삶 자체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의 다양한 경험 중에서 도대체 무엇을 일컬어 종교 경험이라 하는지를 살펴보자. 종교경험의 한 양상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는 누미노제(Numinose)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오토(Rudolph Otto)라는 종교학자가 개념화한 것인데, 정령(spirit)을 뜻하는 누멘(numen)이란 라틴 어에서 만들어 냈다. 이 누멘은 인간의 등뒤에 숨어서 전율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오토에 의하면 이 누미노제 체험은 공포심과 경외감을 유발시키고 황홀하게 해주며,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잡아끄는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경험이라고 한다(mysterium tremendum et facsinans). 오토는 이러한 체험이 모든 종교의 핵심에 있다고 보았다. 오토는 이를 통하여 성스러움(the Holy)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 나와 절대 타자(wholly other)의 만남,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과 무한한 창조주인 신과의 만남이라는 이원론적 설명으로 귀착되었다. 이것은 절대의존의 감정으로서 격렬성과 열정성, 역동성을 특징으로 하며, 그 감동의 표현은 바로 예배로 드러난다. 이러한 종교 체험의 대표적 인물로는 모세, 욥, 예수, 바울, 모하메드, 루터 등 서구 기독교와 이슬람의 예언자(선지자)나 창시자 및 그 중창자들이 있다. 따라서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종교 체험을 ‘예루살렘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관조나 명상의 과정에서 하게 되는 신비스러운(mystic) 종교 체험이 있다. 이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하며, 인도의 요가수행법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수행의 높은 단계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든 감정은 소멸하며, 깊은 정적과 초탈의 상태로 침잠한다. 이러한 체험은 확실히 누미노제의 역동적이고 파괴적인 경험과는 매우 다르다. 힌두교의 범아일여나 불교의 해탈 및 선에서의 깨달음 등이 이의 전형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경험이 인도적 사유와 수행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베나레스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예루살렘형과 베나레스형은 분석적인 범주일 뿐 실제 인간들의 종교 체험은 훨씬 복합적이다. 더구나 각 체험형을 대표한다고 하는 기독교나 불교 내에도 전혀 다른 체험도 존재한다. 기독교의 경우 중세 기독교의 수도사들의 종교 체험 중에는 지극히 베나레스적인 경험이 존재하고, 이는 제도화되어 가톨릭 전통 내에서 수도회로 정착되어 있다. 또한 불교에도 대승불교에서 형성된 불보살 신앙과 그 신비로운 가피와 만나는 신자들의 열광과 기쁨을 담고 있는 영험담의 전통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들의 종교 체험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는 유형론의 위험에 빠지지 말고, 신앙인들의 역사적, 사회적, 개인적 체험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원시부족 사회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존하는 무속이나 원시부족의 제의 속에 나타나는 종교 체험 유형이 있다. 이들 중 전형적인 사례는 유라시아 동편 소규모 유목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샤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샤만은 자신의 특유한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황홀경(trance) 속에서 천상계로 올라가고, 사자의 세계로 내려갈 수 있다고 믿는다[脫我]. 유명한 종교현상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이를 고대종교의 핵심적인 현상이라고 하여, 중국의 도가적 수련법이나 인도의 요가수행법 같은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탈아의 기법 외에도 신들림(入神)을 통해 정령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교량 역할을 하는데, 이는 마치 누미노제 체험에서 예언자가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다. 한편 이같이 특유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 체험 외에도 보통 사람들(신자들)에 의한 일상적 종교 체험이 있다. 이는 일상적이고 정규적인 예배나 축제를 통한 종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종교 집단의 존재가 보장되며, 신자들은 공동체에의 귀속감을 확보한다. 이러한 종교 체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표현 방식은 말(언어)과 몸짓과 만남을 통해 드러난다. 말은 신화와 교리, 교학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몸짓은 전례와 예식, 예법, 축제 등으로 나타나며, 만남은 공동체의 형성으로 나타난다. 한편 이러한 말과 몸짓과 공동체는 역으로 사람들의 종교 체험을 가능케 해주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은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 신화와 교리 및 제의 1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흔히 신화에 대해서는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들이 존재한다. 가장 일반적인 입장은 그리스-로마 신화나 단군신화와 같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보거나 위대한 일이나 인물에 대한 찬사 정도로 보는 것이다. 때로는 비과학적인 것에 대한 경멸조의 언사 속에 신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화는 사실적인 이야기(정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유희)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며, 인간 삶의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한 물음과 답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myth)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그리스 어 뮈토스(mythos)에서 유래하였다. 맨 처음 뮈토스는 신들의 이야기 정도로 쓰였으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경멸조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중세 기독교에서 기독교의 이야기 이외의 다른 이야기는 다 거짓이라는 맥락에서 사용하기도 했고, 계몽주의 시대 이후 합리주의적 흐름의 시대에는 ‘과학-역사/신화’의 도식에서 모든 종교의 이야기를 다 거짓된 이야기로서 묶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는 신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인식하며 신화 연구를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이는 현대의 종교학자나 인류학자, 신화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대중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표현들을 현대의 신화적 담론(談論)으로 규정하고, 이를 신화의 계보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형성된 신화 개념이 도입되어 지금까지도 일반적인 신화관으로 정착되어 있다. 한편 합리주의적 흐름에서의 입장처럼 과학이나 역사가 모두 다 사실은 아니며, 패러다임이나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과학 - 역사와 신화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특정한 진리성을 기준으로 전자를 참이고 후자를 거짓이다고 못박는 것은 근대의 과학주의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 경험을 왜곡하고 제한한다. 종교에 대한 이해는 따라서 ‘신화’라는 것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화는 참도 거짓도 아닌 ‘이야기’다. 신화에서는 참과 거짓의 실증성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전해 주는 메시지, 그것이 이야기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신화가 전해 주는 메시지는 태초에(in illo tempore, 시간적 원초성) 있던 일(model, paradigm, 사건의 원형)을 통해 인간의 삶과 한계상황(자연재해, 출생, 질병, 죽음,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즉 신화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수반하는 실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화의 기능은 ① 인간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우주의 창생, 인간의 출현, 질병과 죽음의 원인), ② 인간과 우주의 미래를 설명(종말, 윤회, 가까운 미래), ③ 인간의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여 우주적 질서 속에 통합(chaos→cosmos), ④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정향짓고 변화시킴(세계관은 삶의 세계를 구성한다.), ⑤ 본래적인 것에 기반하여 인간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막고 현존 체제를 유지함(이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지배층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도 한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편 신화는 현실의 사건이나 경험 → 상상력을 통한 이야기의 구성 → 구전과 변화 → 다양한 변종의 출현 → 문자사회의 등장과 특정한 판본의 기록(경전의 구성) → 다양한 변종의 출현 → 교의학을 통한 경전의 재결정 → 다양한 해석의 출현(정통/이단 싸움) → 승리한 쪽이 정통이 됨 → 또 다른 해석들의 출현 등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치며 현대사회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서, 신화(경전 내용, 하나의 해석) 자체에 대한 문구적 해석이나 역사적 변화에 대한 규명 없는 믿음은 그 자체 도그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언제나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2 종교 교리 대부분의 제도종교들은 문자로 된 교리를 갖고 있다. 이는 문자사회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이전의 구전이나 신화를 경전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문자는 말보다 변화에 훨씬 둔감하기 때문에 변하더라도 보이지 않게 천천히 변한다. 따라서 짧은 세월 동안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당연히 이전의 구전보다 더 큰 권위를 획득한다. 경전의 첫 출발은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 몇 가지가 다양한 기록자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의 특정 집단(종교전문인, 사제)에 의해 다양한 판본 중에서 좀더 원형에 가깝고 현재 그 종교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만 채택되고 나머지는 자기 종교의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 종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여기는 경전(canon)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편 경전이 확정되면 다음에는 경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는 종교적 권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며 승리를 결정하는 건 진리성이라는 기준이다. 그러나 그 진리의 결정에는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여기서 승리한 집단은 정통이 되고 반대 집단은 이단으로 낙인찍혀 추방되거나 화형당한다(중세 기독교의 수많은 이단사냥, 마녀사냥). 단 어떤 해석들은 비록 다르더라도 궁극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용인되어 같은 울타리 안의 약간 다른 종자들(교단, 교파)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권위를 비판하며 전혀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오고 심지어 경전 자체를 재구성하는 흐름이 출현한다. 이는 당장 이단으로 낙인찍혀 쫓겨나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종교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신종교의 출현). 이러한 과정에서 교리는 기본적으로 여러 조각들이 비체계적으로 어우러진 모자이크의 외형을 띠게 된다. 예를 들면 대중적 교리와 엘리트적 교리가 서로 근본 바탕을 달리하면서 해당 종교의 교리 내에 혼합되어 있는데, 제도종교는 모두 이러한 혼합교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확고히 하는 한에서 이러한 교리혼합은 용인되고 또 신학자나 교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교리의 기능은 크게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교리는 전승이나 경전 또는 계시의 내용에 일관성을 부여해 준다. 둘째, 교리는 우주를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해 신화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확증해 준다. 셋째, 교리는 종교의 주장과 당대에 통용되고 있는 지식 사이의 간격을 메꾸어 준다. 넷째, 교리는 세계에 대한 신선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해 준다. 이외에도 기독교 단일문화권이었던 서구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지만, 교리는 사회를 규정짓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는 진정한 교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회와 구원의 확신에 위협적인 존재라 여겨 박해함으로써 정당성을 찾는 기능을 한다. 한편 교리는 세속사회의 지식, 특히 철학과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근대 이후 철학에서 여러 학문이 분화해 나갔듯이 종교도 철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이후 이러한 갈등은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근대 철학이 특히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에 대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해 왔기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근대 이후 철학과 종교의 교리는 ① 세계관(철학)들이 모두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② 철학이 항상 운동이나 제도를 발생시키는 신념체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③ 최근 들어 철학은 논리학이나 현대과학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치중하는 등 오히려 특수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서로 현격히 구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구의 신학자들은 ‘종교철학’을 발전시켜 왔는데, 이는 이성에 의한 종교(기독교)적 진리의 이해가 얼마나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신 존재 증명’이나 ‘변신론(辯神論)’, 또는 종교 언어 등이 주요 과제로 대두되었으나, 이는 대부분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문제일 뿐 다른 종교 문화전통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종교와 제의 인간의 행위에는 일상적 몸짓과 비일상적 몸짓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대개 종교에서 말하는 의례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양자를 넘나든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몸짓의 두 층위를 넘나든다. 따라서 몸짓에 대한 이해는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인간 문화의 실천적 측면에 대한 이해로서 중요하다. 의례의 어원은 ‘성스러운 관습’을 의미하는 라틴 어 ritus로서 이로부터 의례(rite)나 제의(ritual) 등의 용어가 파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너무 좁은 정의다. 의례는 종교적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규칙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놀이와 축제, 전쟁, 경기 등과 함께 융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의례문화가 근대 이후 예술적인 기능, 의식적(ceremony)인 기능, 놀이적인 기능으로 분화해 나간 것이다. 의례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고 삶의 모든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 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정의나 분류 방식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희생제의(犧牲儀禮), 갱신(更新)의례, 수련(修練)의례, 금기(禁忌) 등으로 분류한다. 희생제의(sacrifice)는 주로 유일신론적인(예루살렘형) 종교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종교의례로서 신과 인간간의 소통이 중심주제가 되는 의례다. 희생제의는 고대 사회에서 동물이나 심지어는 인간을 희생물로 공희(供犧)했기 때문에 종교들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약화되거나 아니면 상징화, 개인화, 합리화 과정을 거쳐 예배나 기도로 대체되었다. 예배나 기도는 신의 은총과 인간의 정성이라는 거래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희생제의와 그 원리를 공유하는 종교 행위다. 갱신의례(renewal)는 사회와 집단, 개인, 사건이나 사물의 갱신을 목적으로 하는 의례다. 여기서 갱신이란 사회의 위기극복, 개인과 집단의 위기극복과 재생, 사물의 기원으로의 회귀와 부활을 의미한다. 이에는 반드시 종교의례라고 할 수 없는 의례들이 많이 포함된다. 갱신의례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존주기(life cycle) 및 공간적, 사회적 이동과 관련될 때는 평생의례(life cycle ceremony)를 포함하는 통과제의(rite of passage)로, 자연의 주기와 연관될 때는 계절제로, 역사적인 삶에 관련될 때는 기념제로 나타난다. 수련의례는 내면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베나레스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교 의례로서 수행과 고행의 실천적 금욕주의의 외형을 띤다. 이는 심신을 단련하는 과정에서의 종교 체험을 통해 종교적인 이상을 실현하려는 정형화된 행위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금기는 드라마적이고 체계적인 종교의례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떤 행위를 금하거나, 혹은 신과의 소극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정형화된 신성한 의례로 볼 수 있다. 금기는 종교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하면 계율이나 계명으로 정착되어 종교적 행위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종교의례는 매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나, 이를 개인, 종교 집단,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의례는 개인의 삶의 위기와 충격에 대한 유화적 기능을 담당한다. 즉 개인과 우주(신)를 연결함으로써 개인존재를 무화시켜 개인의 고통을 무의미하게 한다. 이를 통해 개인은 죄를 용서받거나 내세의 복락을 약속받는 한편 사회행위의 모델을 제공받고, 사회행위의 범주를 설정한다. 다음으로 종교의례는 종교단체의 정당화의 기능과 구성원의 결속 기능을 수행한다. 종교 단체는 이로써 그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구성원에게 세계관을 제공하여 그 감정적 동질성을 확보하게 한다. 셋째로 종교의례는 종교적 세계관이 현실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기능하는 곳이며, 세속문화와 만나는 장이기도 하다. 종교의례는 사회 가치를 성화(聖化)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종교의례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 갈등을 해결하는 동적인 기능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회적 목적을 위하여 사회구성원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 좁은 의미의 종교의례는 종교 경험과 사상을 현실에서 행위로 표현함으로써 경험과 사상을 현재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원형적(archetype) 사건을 재현시켜 참여자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의미의 종교의례는 종교 행위에서 핵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근현대의 세속화 사회에서 광의의 종교의례에 비하면 기능과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이 현실이다. 3 종교조직과 사회, 그리고 윤리 1 종교와 윤리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위에 관해 거의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도둑질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죽이지 말 것, 허용된 범위 내에서 성관계를 가질 것 등 도덕적 금지 조항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도덕적 영역은 특정 사회의 전체적인 세계관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제 각 종교의 도덕적, 윤리적 명령들은 각각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특히 예배 참석, 순례, 자선 등의 종교적 의무와 달리 도덕적 의무들은 세속사회의 실질적인 이해 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일례로 세속적 힘의 사용에 관한 문제를 보자. 힘은 살생, 약탈, 정복 등을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세속적인 힘을 알라의 지배의 표현 및 그것의 강화 수단으로 보아 성전을 정당시한다. 이슬람 사회의 건설을 방해하는 적에게는 전쟁을 포함하여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며, 심지어는 미덕으로 숭앙받는다. 물론 알라는 온정이 많고 자비로우며 자선의 도덕률을 권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 공동체 내의 형제에 한하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의 경우 초기에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당한 삶을 추구하였기에 (박해받는 자의 다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나쁜 행위로 여겼다. 그러나 교회가 로마제국을 지배하게 되자 ‘정당한’ 전쟁이라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는 십자군전쟁으로 이어졌다. 불교의 경우 부처가 세속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수행의 결과로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당연히 세속적인 힘의 사용보다는 평화와 공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멸 후3세기 남짓한 시기 아쇼카 왕이 정복전쟁과 그 참상에 대해 괴로워하였고, 결국 평화적인 제국의 통치를 위해 노력한 사례처럼 근본적으로는 힘의 사용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했다. 도덕적 규범과 연관되는 결혼, 살생, 법, 자선(자비), 음주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종교의 교리는 대동소이한 규정을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실행된다. 또한 사랑과 자비의 경우도 현실적 실행은 세속적으로 동일할 수 있으나, 근본 교리나 세계관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에는 “신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가페의 관념이 있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실제 그 바탕에는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인식이 있으며, 개신교의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 또한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라는 입장(루터의 경우)이 강력하게 제기된다. 불교에서도 해탈과 자비의 긴장관계 속에서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현대 합리주의의 흐름에서 이러한 종교적 신념체계와 그에 의한 도덕률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옳고 그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도덕의 자율성이나 독자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칸트의 “도덕은 신은 물론이고 어떤 외부적 원천도 가지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잘 드러난다. 칸트는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을 소위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며, 외부에서 인간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실제 칸트는 실천적인 면에서는 도덕법칙이 신을 전제로 한다고 하였고, 도덕법칙에서 신을 추론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칸트식의 도덕자율성 확립은 논리적 차원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서 현대에는 이를 수정하려는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보다는 하나의 행위나 제도, 법칙의 도덕적 판단기준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최소소수의 최소불행’을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소위 결과론적인 공리주의(ultitarianism)가 현대 도덕학이나 윤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대 윤리학은 종교적인 신념과 상관없이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태어났으나 실제 윤리학이 도덕, 윤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윤리체계는 그 자체 안에 세계관에 관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종교적 세계관과 세속적 세계관이 서로 비판적 시각에서 이해하면서 무엇인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2 종교조직과 사회 근대 이후 소규모 부족사회 등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회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대단히 큰 변화를 겪어왔다. 첫째, 근대 이후 형성된 민족국가들은 점차 내적으로 다원화하고 있다. 즉 이들은 사회의 세밀한 분화를 겪음과 동시에 다양한 소수인종을 수용하는 등 근대 이전의 동질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종교와 국가가 점진적으로 분리되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때로는 공식적인 신념체계나 종교를 거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셋째, 대부분의 현대 산업사회는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로써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특정한 신념체계를 신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현대의 종교들은 예전과 달리 신앙이나 믿음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보통 단일한 가치관과 신념체계를 당연히 생래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가능치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당연히 사회학자들, 특히 종교사회학자들의 주요 관심거리가 되었고, 이들은 크게 보아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방식’과 ‘사회가 종교에 영향을 주는 방식’의 두 방향으로 연구의 가닥을 잡았다.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방식의 대표적인 연구는 유명한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교회와 미사와 자선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적 공동체 신앙을 거부하고 말씀(Word)을 통한 개인적인 믿음을 강조한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인적인 검소한 생활과 근면을 통해 부를 축적한 도시중산층에게서 베버는 자본주의의 맹아를 보았던 것이다. 또한 베버는 고전에 집착하는 선비들이 지배하는 중국이나 카스트제도를 지닌 인도에는 자본주의의 발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 없다고 보고, 오히려 그러한 사회제도가 방해물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는 최근 일본의 경제발전에 미친 유교, 불교, 신도의 영향에 대한 천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사회가 종교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례로는 세속화를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된 삶이란 전통적인 가치나 실천으로부터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말한다. 농경과 확산가족의 구조는 유동적인 산업사회에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주는 또 다른 문화적 대안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전통적인 축제 대신 축구경기, 순례 대신에 관광, 성당 대신에 극장, 종교 공동체 대신에 국가, 경전 대신에 신문, 성전(聖戰) 대신에 전쟁, 구원 대신에 행복, 예수의 재림 대신에 진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또한 세속화는 정교분리와 종교자유의 인정으로 특정 종교를 공적인 영역, 국가적인 교육체계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인 것이다. 이는 곧 세속국가가 모든 종교의 위에 서서 종교를 중립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는 전체적인 삶의 구조 속에서 사소한 부분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종교사회학자들은 이들 새로운 운동과 기존의 종교사를 포괄하여 전체적인 종교조직의 상황을 개관하는 도식을 개발했는데, 이는 크게 보아 교회와 섹트, 그리고 교파와 컬트의 네 유형으로 분류된다. 트뢸치(Ernst Troeltsch)에 의하면 교회(church)는 사회에 대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구성원의 자격에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종파(sect)는 배타적이며, 개인의 완전성과 구성원간의 직접적인 동료의식을 요구한다. 교회는 사회질서의 통합된 한 부분이며, 지배계급의 이해에 영합하며, 제도를 통해서만 구성원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 종파는 기존 사회와 다르거나 그에 적대적이기도 하며, 종속(소외)계급에 연계되어 있고, 우애와 봉사의 자발적인 공동체로서 동료 구성원들과 신의 관계가 더 직접적이다. 섹트의 대표적인 종교단체로는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이나 몰몬교,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같은 신종교를 들 수 있다. 한편 교파(denomination)는 섹트와 교회의 중간에 위치하는 유형으로 교회에서 갈라져나온 분파를 말한다. 이들은 기존 교회만큼 사회를 지배하려는 능력이나 의도는 없고, 초기 한 세대의 열광이 지나고 나면 기존 교회나 사회와 타협하게 된다. 이들은 결국 사회에 순응한 조직화된 종교, 즉 교파로 옮겨간다. 이에는 개신교의 수많은 교파들이나 다양한 불교 교파를 예로 들 수 있다. 컬트(cult)는 일종의 비의적(秘義的) 종교행위를 수행하는 종교 집단을 일컫는데, 이들은 대부분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집단의 주장들을 용인하여 그를 혼합시키며, 사회와 부정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컬트는 점차 종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특성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 네 유형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의 신종교 운동 및 종교 조직의 상황에 관한 관심이 낳은 분류틀로서 동양문화나 이슬람 등에는 잘 맞지 않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상에서 서술한 종교 이해를 위한 여러 분석적 차원들은 대부분 서구 종교학자들에 의해 분류되고 내용이 다듬어진 것이기 때문에 특히 동양의 고전문명과 우리나라의 상황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념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이론들의 바탕에는 기독교문화가 깔려 있으며, 그 분석 사례도 기독교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이론이 보여주는 포괄적이고 객관적인 종교 이해에의 노력은 그 자체로 값진 것이기에 잘 헤아려 살펴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절 세계종교사와 종교 현황 세계종교의 역사라는 주제는 너무나 덩어리가 크다. 위에서 열거한 종교 이해에 필요한 여러 측면들을 골고루, 그것도 역사의 매 시기마다 적용하여 서술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 완성도가 뛰어난 세계종교사는 출현하지 않았다. 세계종교사 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주요 종교 전통별로 교주, 교리, 교단, 혹은 의례나 예술 등에 지면을 할애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종교사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대표적인 책은 스미스(H. Smith)의 『세계의 종교들』(연대출판부, 1973)과 노스(J. Noss)의 『세계종교사』(현음사, 1986)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주요한 종교 현상을 중심으로 수천 년의 시간과 수많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자료를 집성한 세계종교사도 있다. 종교현상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저서 『종교사개론』(까치, 1993)이 그것이다. 또 과학적 무신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부족의례, 민족의례, 세계종교별로 세계종교의 역사를 기술한 책도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종교학자인 토카레프(S. Tokarev)의 『세계의 종교』(사상사, 1991)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어떤 책도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모두 다 풀어줄 수는 없다. 아마도 세계종교사 서술은 끝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단지 자신의 관심과 시각에 맞추어 나름대로 세계종교의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의 핵심에 다다르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예로서 세계종교사 서술을 위한 진화론적 도식이 있는데, 벨라(Robert Bellah)의 논문 「사회변동과 종교적 진화(Religious Evolution)」(『사회변동의 상징구조), 삼영사, 1981)가 그것이다. 그는 종교의 ‘현세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며 종교적 진화의 길을 걸어왔는가를 거대한 도식을 활용하여 개관하고 있다. 그는 원시종교, 고대종교, 역사적 종교, 초기근대종교, 근대종교의 다섯 단계를 설정하고, 각 단계마다 현실부정과 긍정의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의 진화 개념은 이전의 진화론보다는 보다 섬세하고 가치판단을 배제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근대 이후 진화론을 종교에 적용한 것이라는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이나 주제를 갖고 세계종교사를 그려본다면 남다른 안목으로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세계종교 현황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1989년도 연감에서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8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무신론자들의 급감과 종교 인구의 증가, 구미 사회에서의 동양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에 대한 관심과 인구의 증가 등이 반영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대륙별 종교 인구, 각 종교가 퍼져 있는 정도와 그 영향력(신자 집단이 있는 국가수) 등을 개관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어 수록하였다. 4절 한국의 종교 상황과 종교인의 자세 한국사회는 매우 특이한 종교 문화 전통을 갖고 있다. 고대 이래로 여러 외래 종교 문화를 적합하게 수용한 전통과 여러 종교문화가 서로 공존해온 전통이 그것이다. 여러 종교문화가 유입된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는 어느 한 종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을지라도 다른 종교 전통이나 문화를 인정하고 그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불교와 민간신앙을 억압하고 탄압한 성리학 중심의 조선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조선시대를 보통 조선조 성리학의 전일적 지배체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도교적 수련, 대중적 불교신앙, 무속이나 마을 굿을 포함하는 다양한 민간신앙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단지 서구문물의 충격에 대응하여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킨 적이 있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종교 탄압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에 대한 봉건정부의 대응이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다양한 종교의 공존과 원효의 회통(會通)에서 보이는 관용과 탁월한 융합의 정신은 한국종교사상사의 한 특징을 이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항기 이후 앞에서 이야기한 서구의 백인남성 위주의 기독교만을 유일한 참종교로 신봉하는 선교사들과 그의 세례를 받은 개신교, 그리고 해방 후와 한국전쟁 이후의 근본주의적 미국 개신교의 강력한 영향은 이러한 종교간 공존과 평화 및 상호 관용의 정신을 상당 부분 파괴해 버렸다.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서구의 종교들은 근대 사회가 지닌 갖은 병폐들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며, 정보화 사회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의 문제나 환경문제, 그리고 민족주의와 패권주의 문제 등 세속적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한편, 세계의 여러 종교 전통에 대한 존중과 학습, 종교간 대화 등 미래지향적 작업에 진입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우리의 종교 상황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타종교를 바라보는 태도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한국종교계의 앞날을 가늠해 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타종교에 대한 태도 중 자기중심적인 것으로는 배타주의(exclusivism)와 포괄주의(inclusivism)가 있다.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은 모두 다 사라져야 한다는 태도다.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은 있으나, 결국은 자신의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참다운 길이라는 주장이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 모두가 현대사회의 종교간 대화의 흐름에 배치됨은 자명하다. 이와는 달리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고 그것은 동일하다는 병렬주의(parallelism)도 있다. 그러나 이는 구원이든 깨달음이든 종국에 가서는 만날 수 있으므로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이 없다는 태도로 귀결되기 쉽다. 한편 대화와 타협, 상호이해를 위한 태도로는 다원주의(pluralism)를 들 수 있다. 현대와 같이 다양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병행주의에서와 같은 동일성의 원리가 아니라 차이성의 원리다. 종교들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것은 과거 종교간의 갈등과 과오를 생각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전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편적 진리라는 동일성에 근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게 존재해 온 종교들간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과한다. 따라서 그러한 동일성 추구는 비역사적이고 무반성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역사적이고 추상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종교들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성이다. 각 종교들이 갖고있는 궁극적 진리, 신앙과 실천은 천차만별이지만, 이들은 각각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 왔다. 문화란 역사적인 것이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문화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문화는 나름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특정 종교는 특정한 문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 충분한 역할을 하며 존립 이유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문화의 차이와 상대성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종교의 차이와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는 종교가 각 문화 속에서 행해온 일정한 역할을 인정하며 그 가치를 충분히 긍정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차이성에 근거하여 다양한 종교들을 이해할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진정한 대화란 동일한 것들이 서로 그 동일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성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대화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성숙이 가능하다. 이럴 때에만 다른 종교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하다. 앞의 모든 태도들은 ‘승리’ ‘포용’ ‘병행’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진정한 ‘대화’와 ‘공존’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다원주의는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세속성이라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현대사회는 과거와 같이 종교가 궁극적 진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사회다.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궁극적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가 제공했던 신화나 의례는 무수한 다른 세속적 신화와 의례들로 대치되고 있다. 물론 종교는 여전히 나름의 위치를 갖고 역할을 하지만, 이는 세속 문화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무의미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종교들간의 다원주의, 종교들간의 대화, 종교들간의 공존만이 아니라, ‘종교와 현대문화의 대화와 공존’이다. 종교들이 상호간의 차이와 상대성을 인정하고 진정한 대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것이 종교들간의 집안 잔치로 끝나면 현대사회에 아무런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 다원주의는 더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면 종교는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같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세계관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그 밖에도 종교가 대화해야 하는 현대문화의 제 측면들은 무수하다. 문학과 예술은 종교가 그려내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실존적인 정황과 한계상황을 극명하게, 진실하게 표현한다. 이 점에서 종교는 이들이 그려내는 인간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또 과학도 마찬가지다. 진화론, 생물공학, 유전공학, 우주공학 등 현대과학의 모든 발견들은 종교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 위협적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견들은 비록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원자탄, 자연파괴, 생명의 존엄성 문제) 인간의 지적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으며, 현대인의 궁극적 세계관의 근거를 형성하고, 나아가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한다. 이 점에서 종교는 현대과학으로부터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제 종교라는 대상을 벗어나 비종교인을 포괄하는 일반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종교가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분명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고, 긍정적, 부정적 기능을 해 왔음을 인정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세속사회에서 대화는 더 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자기와 다른 문화의 존립가치를 긍정하는 태도를 요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탈성화(脫聖化)되고 세속화된 세계에서 종교가 여전히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신화의 원천으로, 의례의 준거로, 사회적 실천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종교인에게 비종교인은 타자다. 그리고 비종교인에게 종교인은 타자다. 종교인에게 현대의 세속적 정황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완전한 타자다. 비종교인에게 성스러움의 세계 속에서 사는 종교인은 완전한 타자다. 양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그들은 차이성의 세계에 산다. 진정한 대화와 성장, 그리고 진보는 언제나 자기와 다른 것, 타자, 차이성을 인정하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마주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를 자기 안으로 흡수해 들이거나 퉁겨 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고 그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삶, 타자를 향해 한없이 열린 삶, 그것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의 공동 과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세계관,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필요하나 지나칠 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긍정적인 삶은 인류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 자기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천착이 없다면 그 전통의 유지, 전승과 새로운 창조의 몫은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어느 종교학자(스마트)는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교황은 종교적인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설파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다원주의의 긍정과 더 나아간 문화적 다원주의의 자세를 겸비할 때 비로소 종교적이라면 역설일까? 자기 종교 전통에 기초하면서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 문화 전통이나 현대의 세속적 변동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내성(內省)과 참여를 더불어 할 때 완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우주와 세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더불어 현실을 유지하는 여러 실질적인 원리와 현실적인 힘을 파악하고 세계를 더 인간적인 체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종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배움이나 학식, 권세와는 상관없이 보살도를 행하며 깨달음과 구원의 경지에 이르는 수많은 보살행자들을 우리는 주변에 수없이 갖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그나마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으리라. 출처: 교리강좌: http://happy.buddhism.org/buddhism/bud_2/Doc_0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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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oianhome 원문보기 글쓴이: 최안
첫댓글 좋은 자료가 많네요. 감사히 잘 봅니다.()
천천히 다시 읽어 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선법님, 최안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