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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다는 것, 늙는다는 것, 예전엔 모두 두려웠었다
영화배우 최민식
2001.05.15 / 오동진, 이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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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인생을 연기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나이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러날 수는 없다. 꼭 주인공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필요한 역, 최민식이 아니면 안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얘기다."
실패와 좌절을 아는 사람에게서는 진정성이 묻어나오는 법이다. 요즘의 최민식에게서는 그게 느껴진다. <쉬리>와 <해피엔드>로 성공을 거뒀고 신작인 <파이란>도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그는 더이상 성공에만
매달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인생의 행,불행은 망막 한 꺼풀 차이라고 그는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제 그도 불혹의 나이다. 최민식과 가진 인생대담. 근데 우린 뭐지?
오동진 기자 이제 <파이란>의 이강재에게선 벗어났나? 벗어나기 힘든 역할인 것 같던데.
최민식 요즘 1주일에 서너 번은 그림을 배운다. 임권택 감독님 <장승업> 때문에. 그 덕인지 이강재를 쉽게 잊어가는 것 같다. 묵향이 사람
마음을 굉장히 가라앉혀 주더라. 그리고 무엇보다 한두 시간 동안 계속 먹을 갈며 자세를 잡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지훈 기자 <장승업>은 언제 들어가나?
최 내 생각엔 6월 정도.
오 <파이란> 보고 나니까 왜 다른 작품들은 다 거절하고 이 작품을 고집했는지 알겠더라. 개인적으로도 뭔가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버릴
수 있었던 영화가 아닌가?
최 정확하다. 놀랍다. 바로 그거였거든. 사실 <JSA> 제의 받았었다.
대본은 정말 기가 막히게 좋더라. 감동받았다. <쉬리>가 상업적인 코드가 강했다면 이건 뭔가 진짜 같은 느낌이 강했다. 특히 남북 병사들끼리 닭싸움하는 장면에선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근데 북한군을 또다시 한다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뭐랄까, 제대하고 또다시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그런 걸 보면 배역에 있는 힘을 다 쏟아붓는 것 같다.
최 먹고살려면 어영부영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웃음)
이 <파이란>을 보니까 더 그런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최 <파이란>은 사건과 사건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복이란 게
없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야기가 굉장히 느슨해지고 처지겠다
싶더라. 끝까지 템포를 떨어뜨리지 않고 관객들을 빨아들일 방법에
대해 고민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집중력이 강한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을 거다.
오 극 후반부 바닷가에서 우는 장면이 좋더라.
최 그날은 다른 거 하지 말고 그 장면만 찍자고 아예 처음부터 송해성
감독에게 요구했다. 송감독도 흔쾌히 응했고. 근데 그거 굉장히 길게
찍은 거였다. 필름 한 롤이 거의 다 돌아갔다. 하루 종일 울고 나니까
몸에 힘이 쫙 빠지더라. 왜, 실컷 울고 난 뒤의 편안한 느낌 같은 거 있잖은가.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날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다. 자세를
잘못 잡아서.
오 이강재는 참 남루한 인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런 건가?
최 <파이란>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그거다. 꼭 양아치가 아니라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대부분 결함이 있다. 너무 확대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파이란>은 결코 양아치, 건달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누구에게라도 대입할 수 있는 얘기 같다.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점이 많은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에 깨닫는다. 이강재가 파이란의 편지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자동차에 깔려 죽은 강아지 한 마리를 보더라도 문득 뭔가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이 살아오면서 이강재와 같은 절망적 심정에 빠진 적이 있나?
최 항상 느낀다. 항상 내가 결함이 많고 부족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성격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그런 면 때문에 괜히 본의 아니게 실수도 자주 한다. (웃음)
오 한동안 방송에서 활동할 때,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최 그랬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방송생활이 약이 됐던 것 같다. 단적인 예로, 시트콤 드라마 할 때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우울했던 시기였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반대의 감정으로 내질러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무지하게 웃기는 시트콤을 해보자고. 웃기는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선 개인적인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려야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배우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시트콤 때문에 그런지 여전히 코믹한 배우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다.
최 (웃음) 정말? 아직도?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이제는 좀 진지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흔 줄에 접어드니까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 그러다보니 어느새 예전보다 많이 여유로워지기도 했고. 여유는
돈이 많아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도 알게 됐다.
이 데뷔작인 <구로아리랑> 때 생각나나?
최 물론이다. 그게 88년이었으니까 복학하고 나서였다. 그땐 참 요즘과 달랐던 시절이다. 촬영감독님 앞에서 담배도 못 피웠으니까. 현장에서 누가 “야, 최민식” 하고 부르면 바짝 긴장해서 “네” 하고 달려가던 때였다. 요즘도 가끔 그 영화 본다. 비디오 가게 가서 뭘 찾다
그 테이프가 꽂혀 있으면 슬쩍 빌려오곤 한다. 보고 나면 참 우습다.
저걸 연기라고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연기하는 모습이 꼭 무슨
웅변대회 나간 애 같더라. 끝까지 못봐주겠더라구. 하지만 그 영화 찍을 당시의 일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옥소리는 그 영화가 데뷔작이었다. 신은경은 그때 중3이어서 술 마실 때 끼지도 못했다. 촬영 끝나면
엄마가 와서 데려가고 그랬으니까. 의상도 다 배우들이 직접 준비했다. 코디도 없었다. 우리끼리 가리봉동 시장 가는 거지. 배우들끼리 서로 옷 골라주며 어울리네 마네, 정말 웃겼다. 그땐 차도 없었다. 내 기억으로 차 있는 배우는 옥소리뿐이었다. 프레스토. 얼마나 부러웠던지.
오 아까 얘기한 '여유'는 어찌 보면 다 그런 시절 덕일 거다.
최 맞다. 근데 지금 <장승업> 준비하고 마음이 꼭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임권택 감독님이나 정일성 촬영감독님 앞에서 여전히 담배를
못 핀다. 갑갑할 때도 있지만 그런 분위기에 나를 다시 몰아넣고 싶더라. 건강진단 받는 기분이다. 지금 내가 얼마만큼 와 있나 살펴보는.
피 검사도 하고 소변, 대변 검사도 하고, 간 수치 재고. 연기생활에 대한 중간점검이라고나 할까. 여태까지는 같은 나이 또래 아니면 나보다 어린 감독들하고만 작업을 해왔다. 아무래도 그 친구들은 나한테
신랄하게 얘기하지는 못했다. 근데 임감독님은 그럴 수 있는 분 아닌가. 예를 들어, 너 이래가지고 밥 먹고 살겠냐, 이런 말도 해주실 수 있는 거고.
이 장승업은 어떻게 그려지나?
최 아직 정확한 컨셉은 없다. 장승업에 대한 얘기들은 워낙 구전이 많다. 나라가 망해가던 어수선한 시기여서 차분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없다. 한국화 거장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이분 말씀 저분
말씀이 다 다르다. 대체적으로 기인이라는 평가가 많은데, 그런 면만
부각돼서는 안 될 거다. 조선시대의 편협한 윤리적 시각에서 보면 기인으로 보이겠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정상적인 인간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 형님이 화가라고 들었다. 동양화를 그리시나?
최 아니, 서양화. 그래도 동양화 쪽에 아는 분들이 많다. 형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재료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면에선 똑같은 거다. 속된 말로 '환쟁이' 속성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많이 겪고 자랐다. (웃음) 형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술 마실 때 많이 끼어보기도 했고. 그 사람들 술 마시는 거 장난
아니다. 지긋지긋해. 영화쟁이들은 댈 것도 아니다. (웃음)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중견 화가도 술 마시면 배트맨처럼 계단에서 날고 그런다니까, 글쎄.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하고는 생각하는 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오 그동안 출연했던 영화들이 다 잘됐다. 그럼 <파이란>도?
최 흥행 부담에서는 많이 자유로워졌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쉬리> 땐 신경 많이 썼었다. 전국 5백만 넘고 이러니까, 어이쿠, 다음 작품이 이렇게 안 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더라. 근데 지금은 다르다. 물론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젠 내가 좋은
작품을 선택하고 진지하게 임했으면 관객이 좀 안 들어도 괜찮다, 이런 생각을 한다.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밥을 먹을 수도 있지만 라면과
김치만 먹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 맨날 총 쏘고, 대박 예감이
드는 영화만 하나? 그래선 안 된다.
오 <장승업>이 내년 칸에 갈 수도 있다. 해외에도 자신을 알릴 기회다.
최 꿈도 안 꾼다. 나와는 먼 얘기 같고. 하지만 <장승업>은 분명히 외국 사람들한테 동양의 미에 대한 호감을 심어줄 거다. 임감독님 하시는 말씀이, 촬영하면서 붓 소리까지 잡아내겠다고 하신다. 갈필로 그릴 때와 세필로 그릴 때 미세하게 소리의 차이가 나는데 그것까지 영화에서 표현하시겠다는 거다. 임감독님만이 할 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에 대한 탐구 같은 영화가 아닐까? 나는 우리 역사 속에도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박찬욱 감독하고 몇몇이 모여서 한 얘긴데, <글래디에이터>도 결국은
서양의 역사 아닌가. 물론 가공의 역사지만.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 있다. 관창과 계백의 황산벌 전투 같은 거, 그걸 <글래디에이터>처럼 만드는 거다. 그럼 얼마나 재미있겠나. 와이어 액션 쓰지 말고 육중한 액션으로. 계백장군이 자기 식솔들
다 죽이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거다. 벌판에 나섰는데 5천 명 병사들이
쫘악 있다. 그리고 관창이 잡혀오는 거다. 두 번은 살려보내 주고. 멋있지 않은가, 한국 장군의 모습이?
오 얘기를 듣고보면, 사나이의 의리나 뭐 이런 남성적 코드가 굉장히
강한 것 같다.
최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지 뭐. (웃음) 나는 여성스러운 남자는 별로
안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 많이 하고, 꽃 같은 거 사주고, 발렌타인
데이 때 초콜릿 사주는 남자들, 정말 닭살 돋는다. 그런 것보단 진짜
그 여자가 힘들 때 옆에서 손 한 번 잡아주는 남자, 열 번 속 썩이다가도 한 번 손 잡아주는 남자, 그게 진짜 우리나라 남자상이라고 생각한다.
오 부인이 연기에 대해 충고도 해주고 그러나?
최 그럼. 이젠 집사람도 영화 전문가가 다 됐다.
이 <해피엔드> 때는 부인이 뭐라고 하던가?
최 출연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더라.
오 영화가 원래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나와서 갈등이 있었던 걸로 안다.
최 마지막에 서민기가 부인을 살해하는 장면이 원래 현실이 아니었는데, 현실로 바뀌는 바람에 속상했다. 명필름과 정지우 감독은 그렇게
바꾸는 게 더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생각이 좀 달랐다. 좀
늘어진다 싶어도 원래 시나리오엔 향기가 있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도
죽이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건 상상이었다. 죽이고는 싶지만 상상만 하고 실행에는 못 옮길 정도로 서민기는 바보 같은 놈이다. 그래야
관객은 서민기와 최보라 모두를 수긍하고 공감할 수 있다. 보라의 불륜도 어쩔 수 없는 욕망이라 이해하고, 분노를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민기의 초라함에 연민을 느끼고. 근데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걸로 바꿔놓으니까 그런 정서가 다 깨져버렸다. 그게 현실이 돼버리는
바람에 영화의 주제가 권선징악이 됐다. ‘바람피면 죽는다’가 된
거다.
이 정지우 감독의 의도도 원래는 그 방향이지 않았나?
최 그럴 거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좀더 대중적인 걸 생각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되게 아쉬웠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이 이번에 송해성 감독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이 잘 됐나?
최 알고보니 송감독이 내 고등학교 1년 후배다. 그러니 뭐.... (웃음)
그보다는 열려 있는 친구다. 특히 감동을 받았던 건 연출부 막내한테까지도 의견을 물어본다는 거다. 세심하게 의견을 물어보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신뢰를 줬다.
오 장백지는 <파이란>의 정서를 이해하던가?
최 처음에 딱 만났는데 자기가 홍콩에서 아주 유명한 가수라고 하더라. 아이고, 참. (웃음) 근데 그게 밉지가 않았다. 그 나이답게 발랄하고 웃기도 잘 하고. 그래서 좋더라. 목소리도 아주 허스키하다. 김수희처럼.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게 있더라. 우리식 정서를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오 배우란 게 워낙 다양한 인생을 경험할 수 있어서일 거다.
최 맞다. 배우는 사람을 연구하는 직업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일이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병원 24시> 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그거 보면 정말 감동받는다. 도대체 어떤 배우가 거기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만들어낼 수가 있겠나? 거기엔 연출이란 게 없다. 본인들의 삶의
굴곡을 본인들이 그대로 표현하는 거다. 연기하는 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좋은 교과서다.
오 어렸을 때부터 배우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나?
최 원래는 감독을 하고 싶었다. 폼 나 보이니까. (웃음) 근데 지금은
절대 감독할 생각 없다. 대학 때 연극 연출 한 번 해보고 생각을 접었다. 후배들 데리고 해봤는데, 걔들이 학교에서 가장 말썽꾸러기 녀석들이었다. 맨날 술 퍼마시고 시간 약속 안 지키고. 참다 참다 어느 날
몽둥이를 들고 패버렸다. 그리고 드는 생각이, 야 연출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였다. 하던 연기나 제대로 하자고 결심했다. (웃음)
오 로버트 드 니로처럼 <폴링 인 러브> 같은 멜로도 어울릴 것 같다.
최 멜로를 한다고 해도 내가 이정재나 정우성처럼 될 수는 없을 거다.
(웃음) 맞다. 나는 중년 아저씨와 아줌마의 사랑, 예를 들면 부동산 아저씨가 집 보러 온 아줌마에게 문득 사랑을 느끼는 그런 사랑 연기를
해보고 싶다. 진짜 진솔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거 말이다.
오 집에서 쉴 때는 뭐 하고 지내나?
최 틈나면 운동한다. 그냥 뛴다. 집 앞 호수공원에서. 한 바퀴 뛰고 나면 그냥 땀에 절어 땡칠이가 된다. (웃음) 헬스클럽은 체질적으로 싫다. 러닝 머신에서 뛰고 있으면 내가 다람쥐가 된 기분이 든다. 성질이
나. 러닝 머신 앞에서는 또, 아줌마들끼리 싸움하잖아, 자기가 먼저라고. 왜 힘들게 기다리면서 운동을 하나? 맨손체조하고 뛰는 거, 그게
진짜 운동이다.
이 그래도 아줌마 팬이 많지 않나?
최 실은 그런 이유 때문에도 헬스클럽에를 가지 않는다. (웃음) 아줌마들이 ‘쒜리’ 가 어쩌니 저쩌니 하며 사인해달라고 한다. ‘쉬리’라고도 안 그런다. ‘쒜리’라고 하지. 아저씨들은 술 한잔 하자고
하고.
오 자주 어울리는 후배는?
최 어제도 송강호, 김석훈하고 술 마셨다. 같은 회사 소속이니까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다. 석훈이가 겉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한량이다. 우리끼리 술 마시면 맨날 하는 얘기가 있다.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 태어났다면 서당 간다고 거짓말하고 명월관 같은 데 가서
코가 빨개지도록 술이나 마셔댔을 거라고. (웃음)
이 여배우들도 자주 만나나?
최 (웃음) 절대! 그런 일 없다. 근데 아, 도연이, 전도연이하고는 종종
만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촬영장에도 한 번 간 적 있다.
도연이는 성격이 화끈하고 폼을 안 잡아서 좋다. 나는 사실 여배우 복이 없는 편 아닌가? <해피엔드> 때도 도연이하고 같이 출연하긴 했지만 남 좋은 일만 다 시켰고... (웃음) 장승업은 네 명의 여인들이 스쳐지나간다니까 기대하고 있다. (웃음)
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최 나는 나중에 중국집 할 거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자장면 먹는
것만큼은 절대 양보 안 한다. 형하고 자장면 놓고 대판 싸운 적 있다.
자장면만큼은 아버지한테도 안 준다. (웃음) 뭐, 언제까지 연기를 하겠다 하고 정해놓은 건 없다. 다만 배역을 구걸하진 않을 거다. 한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계 풍토에서 말이다. 하지만 문성근 선배나 안성기 선배는 이걸 깨며 버티고 있는 거다. 나도 그 반열에
끼고 싶다. 안성기, 문성근, 최민식, 송강호, 이렇게 나이 먹은 배우들이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 보여줄 수 있는 게 나의 바람이다. 억울해서라도 노력할 거다. 온 인생을 연기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나이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물러날 수는 없다. 꼭 주인공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필요한 역, 최민식이 아니면 안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얘기다.
오 돈은 많이 모았나?
최 워낙 내 성격이 그런 문제는 잘 모른다. 근데 웃기는 게 우리 매니저도 그렇다. 천생연분이다. (웃음) 돈은 하늘이 내리는 것 같다. 먹고
살 만은 하다. 내 이름으로 집 한 칸 있고 마누라 고생 안 시키니까.
오 요즘 행복한가?
최 행복하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제는 내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얼마 전에 라식 수술을 받았다. 근데 신기한
게, 망막 한 꺼풀을 살짝 벗겨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그
작은 망막 하나 때문에 바로 금방 암흑으로 변하는 거다. 근데 그걸 레이저로 깎고 나서 다시 덮으니까 다시 보이더라. 그런 게 행복 아닌가?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살 줄 아는 마음을 알게 되는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