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시대의 청계천 풍경(지금의 을지로 롯데백화점 근처)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통령의 꿈을 안고 시작했던 '청계천 복원사업'의 성공으로 청계천은 다시
서울시민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아마도 청계천을 보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이명박 시장'을 연상할
정도로 청계천 복원사업의 홍보가 대단했지만 우선 '청계천 복원'이라는 용어부터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싶고 다음으로는 이 인공하천을 일년 내내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세금이 소요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청계천은 이명박 시장의 작품이 아니라 조선왕조 영조의 작품이다. 復元(복원)이란 원래의 모양대로 원형을 再現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청계천은 원형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이 경우 '쳥계천 정비사업'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복원'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1894년(청일전쟁이 일어났던 해),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여인 Isabella Bishop女史가 저술했던
'朝鮮과 그 이웃 나라들'에는 청계천이 악취가 진동하고 너무나 불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비사업이후의 모습 서울의 한복판을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은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 을 거쳐 성밖으로 흘러 나간다. 이 두 水門사이의 삼각주가 바로 지금의 서울운동장 남쪽이다. 일제때 운동장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그 남쪽에 모래산이 둘러 있었는데 이 산을 가짜산이라는 의미로 假山(가산)이라 했다. 영조 36년 인부 20만명을 동원, 준설한 청계천의 모래를 을지로 6가에서 방산동에 이르는 청계천의 양둑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기로 가짜산이요 인공으로 만들었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 假山이 그때부터 한양거지들의 집회소요 센터가 되었는데 옛날 전과자는 얼굴이나 팔뚝에 전과자임을 표시하는 입묵자자(入墨刺字)를 하여 격리, 소외시켰었다. 이를 '경'을 친다고 했는데 '경'을 치이면 조상을 욕되게 한다하여 제사에도 참여시키지 않았으며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해도 물건을 사기는 커녕 도망을 치기 일쑤이니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이러니 주인없는 이 假山에 몰려들어 땅굴을 파고 그속에서 살면서 얻어먹을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거지를 땅꾼이라 불렀음은 바로 이 假山에 땅굴을 파고 산다하여 얻은 이름인 것이다. 이렇게하여 假山은 거지의 소굴이 되었고 조정의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순종때 假山거지들의 집단파워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성판윤으로부터 진정이 올라왔는데 "假山일대에 거지 수백명이 모여 사옵니다. 그것들은 법도 두려워하지않고 날마다 소란만 피우니 좌우포도청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옵소서"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좌우포도청의 포졸로 다스리기에는 너무 수가 많은데다 파워도 커져있고 또 세도가와 야합되어있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차라리 조직화하여 생계를 보장해주고 행패를 자제시키는 쪽으로 거지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이들은 한해에 한번씩 나름대로 덕망있고 깡이세며 통이 큰 두목을 선출하는데 선거로 추대된 두목을 꼭지딴이라 부르고 生殺權을 부여, 기강을 잡았으니 말하자면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꼭지딴은 이 지역의 사법권을 손에 쥔 절대자인 셈이었다.
청계천 수표교(일제시대)
이 假山에 대본영(大本營)이 있고 大門안에 광교지영(支營), 수표교지영, 복청교지영, 大門밖에 서소문지영, 새남터지영, 만리재지영이 있었는데 이들이 나라로부터 받은 특권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 벼슬아치나 부잣집에서 혼사나 상사같은 대사가 있으면 이들로 하여금 잡배들의 출입을 막게하고 상여나갈 때 요령을 흔들고 만장들고 하는 궂은 일을 도맡고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 (지영의 두목은 '꼭지'라고 불렀다.) 그 뿐만 아니라 內醫院(내의원)이나 惠民署(혜민서)에서 약품으로 쓰는 뱀, 두더지, 지네 두꺼비, 고슴도치같은 것을 잡아바치는 일도 꼭지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추어탕에 쓰는 미꾸라지의 유통도 이들의 손을 거쳐야만 가능했었다. 또 세도가들의 행동부대가 되어 반대당이나 政敵의 행태, 드나드는 사람을 염탐할 필요가 있을 때도 꼭 꼭지딴에게 의뢰했으니 요즘으로치면 사설탐정이나 흥신소직원역할을 담당 했다고 보면 된다. 개화기에 독립협회 회원들의 가두연설회가 벌어지면 수구파에서는 이 연설회의 훼방을 꼭지딴에게 의뢰해 연설회가 벌어진 현장에서 각설이판을 벌이든가 청중속에 뱀을 풀어 사람들을 도망가게 하거나 심한 경우엔 몽둥이로 사정없이 독립협회인사들을 개패듯 두들겨 패기도 했었다. 이렇게 살다가도 명절이면 꼭지딴은 잘 차려입고 문안밖의 '꼭지'들을 대동해서 고관대작이나 세도가를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두둑한 세베돈을 챙겼다.(자유당 시절 경무대를 들락거리던
정치깡패를 연상하면 된다.) 이 假山 꼭지딴은 日帝때인 1917년 동대문국민학교를 짓고 1922년에 경성사범학교를 지을 때 이곳 假山의 모래를 갖다 쓴 바람에 假山이 사라지면서 거지떼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꼭지딴도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初의 청계천
<옮긴글 : 이태준 한양산책-꼭지딴 이야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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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로 좋은 자료일세....
꼭찌딴 =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집단 + 조폭???
복원도 정비도 제대로 했으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리도.
그나마 이 정도 정비한 것도 다행인지?
어느 시대에도 부패한 권력의 비호를 받는
주먹집단이 있었음이 증명 되는구나.
꼭지딴 ! -- 오늘날 조폭의 뿌리였네그려.
청계천 !
이왕 복원(?) 아니고 정비하는 김에
친환경적인 自然美가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는데..
시멘트 우리 안에 가둬 놓은 "川" 이 --
음식으로 말하면 인스탄트 식품같아서...
그래도 옛날 슬럼화된 청계천에 비하면
좋기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