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요약]
■이장곤(李長坤)
1474년(성종 5) - 1519(중종 14) / 향년 46세
조선 전기에, 대사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 · 금헌(琴軒) · 금재(琴齋) · 우만(寓灣). 이신지(李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이호겸(李好謙)이다. 아버지는 참군(參軍) 이승언(李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우찬성 금헌 이장곤 묘비명 병서(右贊成琴軒李公墓碑銘 幷序)
공은 휘는 장곤(長坤), 자는 희강(希剛)이고, 벽진 이씨(碧珍李氏)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에 현달하였던 장군 이총언(李悤言)이다. 10대조 이견간(李堅幹)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고, 또 몇 대 지나 이희경(李希慶)에 이르러서 중추부사 병마도원수를 지냈으니 이분이 공에게 4대조가 된다.
증조 이신지(李愼之)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이호겸(李好謙)은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이며, 선고 이승언(李承彦)은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는데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종학하였다. 선비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이조 참판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의 따님이니,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 5)에 공을 낳았다.
공은 모습이 장대하고 훤칠하며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다. 을묘년(1495, 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태학에서 공부했는데 이음애(李陰崖) 등 여러 공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임술년(1502)에 등제한 뒤 연산조에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거제도에 귀양 갔다.
연산군은 그가 난을 평정할 재질을 지니고 있다고 의심하여 끊임없이 감시하고 시기하니, 공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바다 건너 도망가서 함흥(咸興)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얼마 뒤에 중종이 반정(反正)하여 당금(黨禁)이 풀리자 공이 나와서 직접 함경도 관찰사를 만나니, 감사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그를 맞이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특별히 교리에 제수하고 소재의 관아로 하여금 호위하여 보내게 하니 영광과 은총이 당대를 놀라게 하였다.
공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을 맡았는데 모두 그 직분에 걸맞았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북방의 변이 생기자, 상이 특명으로 공에게 찬성으로서 병마절도사로 나가게 하니, 이조 판서 신상(申鏛)이 아뢰기를 “찬성은 중요한 자리이니 오랫동안 비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젊고 감당할 수 있는 자로 바꾸십시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중신(重臣)을 임용해서 그 지역을 진무해 복종시키고자 한 것인데 경의 말도 타당하다.” 하여,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당시에 공이 병조와 의금부를 겸하여 관장하고 있었는데, 11월에 남곤(南袞)이 급보를 보내 나라에 큰일이 생겼으니 말을 달려 급히 오라고 고하여, 공이 황급히 말을 달려 가 보니, 홍경주(洪景舟)가 밀지를 받들고 신무문(神武門)에서 대명하고 있었다.
공은 홍경주, 김전(金詮), 고형산(高荊山)을 따라 궐문 밖에 이르렀다. 홍경주 등이 상에게 편전으로 납시기를 청하고, 조광조(趙光祖) 등이 붕당을 지어 상을 무함한 죄를 아뢰며 그 죄를 밝히고 처단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정원과 옥당에 입직한 관료들을 수금하도록 명하기를 청하였다.
그때 누고(漏鼓)가 이미 세 번 울렸는데, 여러 재신이 신하들의 성명을 은밀히 기록하여 속히 체포해 죽일 것을 청하니, 공이 그제야 그날 밤 안에 쳐 죽이려는 모의인 줄을 알고서 경악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인군이 도적의 모의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수상을 배제하고 대사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복해서 간절히 간하였다.
홍경주가 일어나 일을 아뢰고자 할 때마다 공이 번번이 손을 휘저어 물리쳐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니, 상의 노여움이 조금 가라앉아 영상 정광필(鄭光弼)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정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극간하는데 상이 갑자기 일어나니 영상이 상의 소매를 부여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이 조금 진정되어 조광조 등의 사형을 감하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금부와 대간이, 공이 추국(推鞫)할 때 엄하게 하지 않았다고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여강(驪江) 근처에 우거하면서 김모재『金慕齋: 김안국(金安國)』, 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과 노닐며 시를 읊으니, 여러 소인배가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라고 헐뜯었다.
공은 창녕(昌寧)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세상을 마쳤다. 묘소는 현 북쪽 합산(合山)의 오향(午向) 언덕에 있다. 뒤에 향인들이 연암(燕巖)에 사당을 세우고 공의 부자를 제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지조가 꿋꿋하였으며, 어려서는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고 조정에 입사해서는 음애(陰崖), 모재(慕齋), 권충재(權冲齋 권벌(權橃) 등 여러 공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여러 유현이 다 함께 출사하여 치세(治世)를 도모할 적에 공이 찬성의 지위에 있으면서 병무를 겸하였으므로 의지됨이 매우 컸는데, 소인들이 틈을 엿보아 북문(北門: 신무문)의 화를 양성한 것이다.
공이 처음엔 직분 때문에 소명에 나아갔다가 놀라운 조짐이 불측한 것을 목견하고는 앞장서서 극간하여 간악한 모의를 저지하였고, 수상을 불러들여 주상의 노여움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기묘년의 으뜸가는 공로로 치는 것이 어찌 믿을 만한 논의가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청주 경씨(淸州慶氏)로 군수 경상(慶祥)의 따님인데, 아들이 없었다. 서자로 덕남(德男)이 있고, 딸은 시집가 김생(金生)의 처가 되었다. 덕남은 충서(忠恕)라는 아들이 있고, 김생은 김일양(金一陽)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공의 방계 후손인 서룡(瑞龍)이 선조의 덕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개탄하여 나에게 사적을 기재한 글을 부탁했었는데, 얼마 뒤 또 말하기를 “묘도에 비명(碑銘)이 빠져 있어 무지한 후손들을 가르칠 수가 없으므로 감히 다시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글에 익숙하지 못한데 어찌 거듭 그대에게 폐를 끼칠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자, 서룡 씨가 눈물을 흘리며 “그렇지만 이는 사림과 후손들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니,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옛적 기묘년에 / 昔在己卯
국운이 창성하여 / 邦運煕昌
명군 양신 만나서 / 明良際會
요순 시대 도야했지 / 陶鑄虞唐
이에 우리 공께서는 / 惟時我公
우뚝이 묘당에 서서 / 屹立廟右
장상 몸소 도맡으니 / 身都將相
문무 재주 겸전했네 / 才稱文武
시운이 비색하여 / 時値大往
소인이 틈을 엿보아 / 宵回伺釁
북문이 한 번 열리매 / 玄門一啓
철인이 어육이 되었네 / 群喆齏粉
공이 충담을 떨치어 / 公奮忠膽
뇌정의 위엄 무릅쓰고 / 觸冒雷霆
영상을 부르길 청해 / 請召首相
간악한 싹을 막았네 / 力遏奸萌
위기를 되돌리어 / 斡轉危幾
사형을 유배로 바꾸니 / 易死以竄
당일의 으뜸 공로 / 當日首功
공이 아닌 누구리오 / 匪公誰辦
조정에서 편치 못해 / 迹不安朝
파직되어 고향 가니 / 罷還故山
휘파람 불고 읊조리며 / 一嘯一咏
거문고와 술로 즐겼네 / 琴酒娛閒
아득한 백년 세월에 / 百載綿邈
고풍은 더욱 완연해 / 宛宛高風
외루에서 제향하고 / 俎豆畏壘
청정한 사당 모셨네 / 有侐閟宮
높고 높은 언덕 무덤 / 崔崔者岡
사방 너비 네 척이라 / 廣輪四尺
내 글이 아첨 아니니 / 我銘不諛
무궁토록 길이 전하리 / 永詔無極
<끝>
[주해]
[주01] 이음애(李陰崖) : 이자(李耔, 1480~1553)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ㆍ몽옹(夢翁)ㆍ계옹(溪翁)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이장곤(李長坤)과는 성균관에서 교유가 있었을 뿐 아니라 1514년(중종 9)에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되기
도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함께 파직되어 용인(龍仁)에 은거하다 졸하였다. 문집으로 《음애집》이 전한다.
[주02] 양수척(楊水尺) : 백정의 하나로 유기장(柳器匠)이다. 신라 말부터 일정한 부역(賦役)이나 관적(貫籍)이 없이 무리 지어 떠돌아다
니며 사냥과 버들고리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명화적(明火賊)이 되거나 거란이나 왜적이 침입할 때 향도(嚮導) 노릇
을 하기도 하였다. 화척(禾尺)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관기나 광대가 이 무리에서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星湖僿說 卷23 經史
門 官妓》
[주03] 공이 …… 보고하였다 : 이장곤이 유기장의 사위가 되어 숨어 살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야기는 당시 매우 유명했는데, 야담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에도 실려 있다.
[주04] 기묘년에 …… 하였다 : 당시 함경도 일대에서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적변(賊變)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장
수를 보내 진무하고자 했는데 이조 판서 신상(申鏛)이 반대하여 결국 유용근(柳庸謹)이 병마절도사로 가게 되었다. 《己卯錄補遺》
[주05] 사적을 기재한 글 : 대산이 본 묘비명보다 먼저 지었던 이장곤의 행장을 말한다. 《대산집》 권49에 〈우찬성 금헌 이선생 행장(右贊
成琴軒李先生行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06] 시운이 비색하여 : 《주역》 〈비괘(否卦)〉에 “군자의 곧음이 이롭지 않으니, 대가 가고 소가 오기 때문이다.〔不利君子貞 大往小
來〕” 하였는데, 여기서 대(大)는 군자를, 소(小)는 소인을 의미하니, 군자가 물러가고 소인이 득세하는 비색한 시운을 말하는 것이
다.
[주07] 북문이 …… 열리매 : 원문의 현문(玄門)은 궁의 북쪽 문, 즉 신무문(神武門)을 말한다. 기묘사화 때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일파가 신무문을 통해 들어가 고변하였으므로 이때의 정변을 ‘북문의 화’라고 부른다.
[주08] 외루(畏壘)에서 제향하고 : 노자(老子)의 제자인 경상초(庚桑楚)가 외루 지방에 들어가 소박하게 산 지 3년 만에 풍년이 드니, 외
루의 백성들이 경상초를 성인으로 여겨 제사하고자 하였다. 《莊子 庚桑楚》 여기서는 이장곤이 살던 곳의 향인이 이장곤을 제향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대산집 제47권 / 비(碑)
-------------------------------------------------------------------------------------------------------------------------------------------------------
[原文]
右贊成琴軒李公墓碑銘 幷序
公諱長坤。字希剛。碧珍人。上世祖將軍悤言。顯於麗世。十世祖堅幹。官進賢館大提學。又數世至希慶。官中樞府事兵馬都元帥。是於公間四世。曾祖諱愼之。贈吏曹判書。祖諱好謙。知興海郡事。考諱承彥。漢城參軍贈左贊成。遊佔畢金先生之門。妣完山李氏。吏曹參判春陽君徠之女。以成化甲午生公。狀貌魁偉。才兼文武。乙卯。中生員壯元。遊太學。與李陰厓諸公遊最密。壬戌。登第。燕山朝。以弘文校理謫巨濟。燕山疑其有撥亂之才。齗齗未已。公懼及禍。越海竄伏於咸興楊水尺家。未幾。中廟改玉。黨禁解。公出自見關伯。倒屣迎之。聞于朝。特除校理。令所在護送。光寵聳一世。公出入將相。咸稱其職。己卯。有北方虞。上特命公以贊成出節度兵馬。吏判申鏛啓曰。貳公重地。不宜久曠。請易以年少可堪者。上曰。予欲以重臣鎭服。卿言亦當。事遂寢。時公兼判兵曹義禁府。十一月。南袞馳書告國有大事。走馬急來。公蒼黃馳赴。洪景舟承密旨。待命神武門。公隨景舟,金詮,高荊山。至闕門外。景舟等請上御便殿。啓趙光祖等朋比誣上之罪。請明正其罪。又請命囚政院玉堂入直官。時漏鼓已三下。諸宰密錄諸臣姓名。請速逮捕以誅。公始知當夜格殺之議。愕然進啓曰。人君不可行盜賊之謀。亦不可諱首相而行大事。反復切諫。景舟欲起啓事。公輒揮手却之。使不得離席。天威少霽。命召領相鄭光弼。光弼涕泣極諫。上遽起。領相引御裾叩頭。事得少緩。命趙光祖等減死定配。公遂辭遞。禁府臺諫論公推鞠不嚴請罷。遂寓居驪江。與金慕齋,申光漢諸公。倘佯嘯咏。羣小詆以誹訕朝政。公還昌寧舊居。懮游以卒世。墓在縣北合山向午之原。後鄕人立祠于燕巖。以享公父子。公天資豪邁。志操耿介。少學於寒暄金先生。及立朝。與陰厓,慕齋,權冲齋諸公。爲道義交。當己卯。羣賢騈肩。陶鑄至治。而公位貳公。兼兵務。毗倚方隆。而羣小伺隙。釀成北門之禍。公始以職事赴召。目見駭機不測。挺身極諫沮奸謀。召首相得少緩雷霆之威。論者以爲己卯之首功。詎不信然哉。公配淸州慶氏。郡守祥之女。無子。有庶子德男。女嫁爲金生妻。德男有子忠恕。金生有子一陽。公之傍後孫瑞龍。慨先德之寖遠。屬象靖以紀載之文。旣又曰。墓道闕顯刻。無以詔穉昧。敢復以請。象靖辭以不嫺於文。何足以重辱吾子。瑞龍氏泫然曰。雖然。此士林與裔孫之志也。乃不敢終辭。銘曰。
昔在己卯。邦運煕昌。明良際會。陶鑄虞唐。惟時我公。屹立廟右。身都將相。才稱文武。時値大往。宵回伺釁。玄門一啓。
羣喆齏粉。公奮忠膽。觸冒雷霆。請召首相。力遏奸萌。斡轉危幾。易死以竄。當日首功。匪公誰辦。迹不安朝。罷還故山。
一嘯一咏。琴酒娛閒。百載綿邈。宛宛高風。俎豆畏壘。有侐閟宮。崔崔者岡。廣輪四尺。我銘不諛。永詔無極。<끝>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七 / 碑
▲금헌 이장곤 묘(琴軒 李長坤 墓) / 배위 청주경씨淸州慶氏(군수 경상경慶祥敬의 딸)와 쌍분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 산6번지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兵曹判書知 經筵事判義禁府事李公兩位之墓
(숭정대부의정부우찬성겸병조판서지 경연사판의금부사이공양위지묘)
▲망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