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월요일에는 명동역 근처에 있는 상영관에서 재개봉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역시 아내와 함께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3부작으로 완성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 아니나 다를까 마나님께서 이어지는 작품을 모두 보고 싶어 하셔서 나머지 두 편은 집에서 보았다. 두 번째 시간적 흐름에 위치한 작품이 <비포 선셋>이고 마지막 작품이 <비포 미드나잇>이다. 해리포터 영화 연작을 통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앳된 아역 배우로 시작한 주인공들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서사적인 흐름에 맞게 자연인으로서도 성장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 영화 세 편의 주연인 두 사람도 20대, 30대, 40대의 영화 속 설정에 맞게 외모나 분위기가 달라져 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영화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오랜 세월에 걸쳐 고치고 깁고 썼다고 하듯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성취는 인류 공동체가 쌓아 올리는 돌탑에 작은 혹은 좀 더 굵은 돌멩이 하나를 보태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장이. 스핑크스의 질문에서 인간의 본질적 상황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일생에 대한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시편 90편에서 보듯 아침에 싱싱하게 돋아났다가 저녁이면 시들어 버리는 풀꽃과도 같은 그런 필멸의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요는 삶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겸허한 태도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도 그렇다.
영화에 대한 세세한 논평은 나의 몫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다만 인간의 사랑 특히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짚어보고 싶을 뿐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에로스적 충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적인 리비도! 우선 자문해 본다. 나는 사랑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믿는가?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쓰는 것은 가능한가? 물론이다. 누군가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겠지만 여전히 서정시는 쓰이고 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사랑에 대한 불신과 불만과 젠더 갈등과 데이트 폭력과 살인사건들 와중에도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이고 꿈꾸고 노래하고 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문제는 인간 사회의 핵심적 층위를 건드리는 선택이며 동시에 개체로서의 자아에도 결정적인 실존의 결단이 된다. 존재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체로서의 우리 존재와 삶은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과 사회적, 역사적 관계와 사건의 얽힘 속에서 진동하는 현의 떨림처럼 각각의 특별한 음색을 내는 자기 현시의 과정이고 자기 실현의 과정인 셈이다. 270만 년 전 인류의 분화 이후 한 순간도 중단없이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라는 바통은 이어달리기의 주자인 우리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 저편으로 소급될 수 있는 에로스적 본능과 자기 소멸의 타나토스적 충동 사이에서 용케도 현재의 우리에게 도달해 있다. 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물학적 현존 자체를 성찰하건대 이는 하나의 기적적인 현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 혹은 희망하는 누군가의 존재와 실존적 결단이 없었다면 현재 나의 존재도 없는 것이 아닐까.
비포 3부작 영화는 비유컨대 디지털적인 사랑이 아닌 아날로그적인 사랑의 문법을 보여주는 영화다. 요즘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혼종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이는 유익한 측면도 있지만 세상 모든 것의 이치가 그러하듯 벤야민이 지적한 대로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유일성이라는 에로스적 사랑이 사회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에서 오래도록 간직되어 왔던 공통적인 경험과 정서라는 아우라의 상실이 다시 한번 문제가 된다. 딥페이크로 뒤숭숭한 세상에서 70년대 얄개 영화 시리즈의 사랑은 구석기 시대의 사랑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떨림과 순수함과 무지가 살짝 뒤섞인 그 감정을 영원히 상실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0대에게 사랑은 블랙홀과 같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에로스의 블랙홀과도 같은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표현과도 같이 ‘어느날 사랑이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의 신화적인 논리로 사랑은 큐피드의 화살처럼 불시에 심장을 꿰뚫리는 통증과도 같이 괴로운 환희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이 이 눈먼 우연에서 시작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 속 20대 미국인 남성과 프랑스인 여성은 빈으로 가는 열차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끌린다. 전에 나의 대학 동기 결혼식에 갔을 때 결혼식 주인공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대자를 만났을 때 고압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실제로 느꼈다고 토로하는 것을 들을 적이 있다. 짓궂게 도킨스 식으로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호르몬과 페로몬의 작용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인정한다면 우리 삶이 너무 삭막하지 않겠는가. 실제로도 그 이상의 무엇이 있으리라 개인적으로 나는 믿고 있다. 사랑의 시작은 충동적일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은 인간의 성숙한 이성과 감정이라고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은 자라고 더 성숙하는 것이라 믿는다. 열차에서 내려야 하는 남자는 파리로 가야하는 여성에게 빈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제안을 하고 여성은 이를 승낙한다. 새벽이 오기 전까지 이들은 함께 있을 것이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쉽게 말해 썸을 탈 것이고 마음은 긴장과 호기심과 설렘으로 당겨진 활 시위처럼 팽팽해질 것이다. 많은 말들이 오가고 서로의 내면을 궁금해하면서 내면의 창인 눈을 들여다 보기도 하면서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많은 감정들을 저울질할 것이다. 그들은 돈이 넉넉지 않아 화려한 숙소를 잡고 정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온 도시를 쏘다니며 집시처럼 릴케의 시구처럼 이리저리 배회할 것이다. 공원과 묘지와 다리와 강물은 다른 때 보던 것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며 낙인처럼 깊이 기억 속으로 새겨질 것이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 상태에서 얻어진 추억은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래 살아남아 속삭일 것이다. 술집 주인에게 술 한 병을 외상으로 사고 잔 두 개를 슬쩍 점유하여 공원에서 밤을 새면서 그들은 모르는 타인에서 흔히 현실적인 책임의 영역으로 질적 변화를 초래하는 선을 넘는다. 아침이 되고 그들은 서로의 진심을 두려움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떠보면서 자신들이 가장한 미련없는 헤어짐과 혹여 질곡의 서막이 될 수도 있는 재회의 기약 사이에서 갈등을 보인다. 6개월 뒤에도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남으면 다시 만날 수 있는 선택지를 두고 그들은 헤어진다. 그들은 만났을까?(서사적 호기심), 만날 필요가 있을까?(관객으로서의 참견적 시점), 아니 만나고 싶었을까?(서사적 주인공의 시점).
올해 4월 나는 결혼 30주년을 보냈다. 3월에는 제주에서 올레길을 함께 걷고 4월에는 지리산에서 둘레길을 같이 걸었으며 5월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걸었다. 내년 1월 말이면 첫째인 딸이 만으로 30이 된다. 둘째는 올해 11월이면 28살이 된다. 만 31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퇴직한 상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과거 경험과 많은 것들이 맞물리며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과연 삶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특히 남녀 간의 에로스적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렇다 사랑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유동하며 넘쳐흐르는 것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다소 아가페적 성격을 띠게 되기도 한다. 왜 로맨스 영화가 결혼식 장면에서 끝이 나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거기까지가 연애고 그 뒤에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싸우고 울고 한숨짓고 웃고 춤추고 하는 온갖 희로애락을 감당해야 하는 날들이기에 그렇다. <비포 선라이즈>를 다 보고 나서 그 다음 서사를 상상하는 것은 관객 각자의 다음 이야기다. 결국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지눌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이 우리를 환희롭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사랑 없이 살 것인지 사랑을 껴안고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갈 것인지.
<비포 선셋>은 어긋남과 다시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6개월 뒤에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은 결국 여자의 할머니가 그 약속 시점에 돌아가심으로 인해 장례식 참석으로 인해 재회하지 못하고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고 헤어진 자기방어 장치로 인해 아름답지만 상처 깊은 추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가장 집중적으로 감정을 쏟아버린 사람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다른 곳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는 가장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던 사람이 그 길에서 벗어났을 때 기괴하게 심신이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는 데 그 사례는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고 최근의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너 왜 이렇게 망가졌니? 어쩌다 그토록 찬란하던 너의 영혼이 이렇게! …. 작가가 된 남자가 파리에 나타나고 그는 결혼해서 아들이 있지만 결혼 생활은 별로 생기가 없다. 여자는 애인이 있지만 역시 그렇게 첫사랑만큼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 둘이 다시 만나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파리를 헤매고 다닌다. 빈에서처럼.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그는 비행기를 놓치고 첫사랑을 다시 찾는다. 사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야 하지만 스핑크스의 정답은 세 가지를 모두 파악해야 한다.
<비포 미드나잇> 비행기를 선택적으로 놓친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되었고 이혼한 남자의 아들의 양육권을 가진 전 부인과 새로 낳은 딸 둘이 있는 배경 속에 있다. 무대는 그리스에 작가로서 초대되어 휴가 겸 보내는 상황이다. 육아 문제, 그리고 아들과 전 부인의 감정에 대한 마음 쓰임이 남자와 여자를 감싸는 한편 연인에서 부인으로 변화한 자리에서 부부간의 갈등이 터지지만 워낙 과거가 튼튼한 감정의 기초 위에 있어서 낙관적으로 해결될 것 같은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사실 과거가 찬란할수록 현재의 누추함과 비교되어 더 크게 폭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맡겨두자. 그 이후야말로 진짜 관객인 우리들이 현실 세계에서 이어가야 할 서사적 몫일 테니까. 영화는 이렇게 끝나지만 나의 현실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본다. 아, 남자여 그대는 이 현실의 영화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어떤 대사를 하고 다음 무대는 어디이며 어떤 사건과 사태가 이어질 것인가? 나는 아직도 내 앞에 펼쳐질 삶이 궁금하다.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