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에 내린 비탓인가.....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가을 햇살은 내 마음까지 하늘 높이 증발시키는 기분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봉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휴식도 취하면서 쉬엄쉬엄 도착한 곳은 경북 봉화군 명호리 북곡리에 위치한 청량산!!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청정도량이라는 수식에 걸맞게 거대하고 빽빽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 사이에,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자리에 청량사는 자리를 잡고 있다.
큰바위(立石)앞에서 시작된 등산로는 오른쪽은 암벽이고 왼쪽은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좁은 오솔길이다.
산행 내내 왼쪽 시야가 툭 터져 있어 나무 그늘아래 돌아돌아 나 있는 가파른 길도 그리 힘든 줄을 모르게 했다.
약 20 여분을 오르면 거대한 암벽밑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전이 안치된 응진전(외청량사)에 닿게 된다.
초라한 요사체옆 암간에 흐르는 그 맛이 일품인 약수로 마른 목을 축이고 다시 응진전 앞을 돌아 다시 산길을 오른다.
10분쯤 올라 갔을까 거대한 바위굴이 보인다.
여기가 김생굴이다.
굴위에서 떨어지는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마치 굴입구를 가리는 물 커텐(?) 같다.
먼 옛날 김생이라는 사람이 이 곳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9년만에 하산하려는데 어느 낯 모르는 여인이 나타나서 자기는 길쌈을 할테니 실력을 겨루어 보자고 했단다.
결과는 그 여인의 승리.
좀더 공부를 하라는 여인의 충고로 또 다시 10년간을 더 공부해서 신라의 대문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 곳이다.
김생굴앞 갈림길에서 우측 바위길을 내려서서 계곡을 건너가다 다시 우측으로 꺽어 지능선길을 따라 보살봉(자소봉)동편의 안부에 닿게 된다.
가쁜 숨도 고르고 출출한 배도 달랠겸 나무 그늘아래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갑자기 들려오는 웅장하고 울림이 좋은 음악소리....
아마도 오늘 산사음악회를 위한 리허설인가보다.
암벽산으로 둘러쌓인 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그 어떠한 성능이 우수한 오디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울림과 퍼짐성을 가지고 있었다.
산 중턱 그늘에서 듣는 음악소리는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안부에서 다시 철계단을 밟고 벼랑길을 오르면 너른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은 과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사방 360도 툭 트진 시야는 온통 산들이다.
보살봉에서 다시 안부로 되돌아 내려서서 암봉사이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을 따라 약 18분을 가다보면 고개에 청량사로 내려가는 길과 뒤실고개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곧장 가면 청량산 정상인 의상봉에 닿게 된다.
우리는 시간상 청량사골 가파른 돌길을 따라 하산했다. 우측 연봉이 장관이다.
4시에 시작하는 육법공양을 마치고 6시 30분에 시작하는 음악회 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다.
육법공양(六法供養)
육법공양이란 신라시대부터 전통적으로 행해온 불교의 전통예법으로 6가지 신선한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6가지 공양물은 향, 등, 차, 꽃, 과일, 쌀이 보편적으로 쓰이며 이 중에서 차와 꽃 공양은 별도의 문화예술적 쟝르인 다도와 불교 꽃꽂이로 발전되기도 했다. 육법공양 의식의 절정인 각 공양물을 올리는 순서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불자의 발원을 담은 게송이 범패로 불려지는데 최근에는 이 게송을 우리말로 번역해 국악 가락에 얹어 부름으로써 참가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경내에 위치한, 황토벽에 너와지붕을 얹은 찻집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에서 차를 청해 놓고 고단한 몸을 잠시 쉬게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 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 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청량산인--
조그만 돌맹이을 깔아 놓은 찻집 앞뜰에서 통나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라보는 경관은 무척 인상적이다.
주지스님께서 하루 두차례씩 3시간을 걸어 지게로 지어 날라서 만들었다는 침목 계단과 침목을 깔아 놓은 비탈길은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다.
저녁 6 시 30분에 하유 스님의 법고소리로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해발 600 여 미터의 가파른 지형에 계단을 놓고 축대위에 가람을 배치한 고찰의 모습에서 불사의 어려움과 그 공적을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지형적 특성으로 산비탈과 삼신각, 유리보전, 요사체 주위...곳곳에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수천명은 족히 될듯하다.
조명빛을 받은 주위 암벽산들이 통째로 없어졌다 나타나는 멋진 모습과, 모든 조명등을 껐을때 펼쳐지는 하늘의 별들은 마치 검은 벨벳 천 위에 무수히 뿌려 놓은 보석보다 더 아름답다.
드릴 것은 없고 돌아갈때 한 웅큼씩 별을 따다 가라고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어느 가수의 즉흥적인 멘트에 모두들 박수를 치며 좋아들했다.
불교적인 분위기와 전혀 관계없이 열창을 하던 한영애, 장사익과 노름마치의 흥겨운 장단과 노래가락,안치환의 아름다운 젊음의 노래....안동대 최조웅교수의 가을밤의 세레나데, 성상희의 국악교실,다 함께 얼씨구....
결실과 베품의 계절인 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이 곳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와 몸짓으로 환희로운 마음과 그 열기가 가득했다.
연이은 앵콜로 가을밤은 깊어만 가고....
모두들 일어 설줄을 몰랐다.
심진스님의 음성공양 중,
".....그리운 내 어머니......다시 못 뵈올 그리운 내 어머니...." 란 대목에서 갑자기 울컥해진 나는 울음을 삼키기에 한참을 애를 먹어야만 했었다.
아마도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시어머님, 친정 어머님 두 분 어머님이 그리워서라기 보다, 가을밤의 정취와 스님의 청아하고 구성진 목소리와 노래가락탓이 아니었을까.....
거의 10시가 훨씬 넘어 막을 내린 음악회가 끝나고 비탈진 길을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어두운 산길을 연등과 발밑의 촛불로써 길을 밝히고 있다.
길 중간 중간에 배치된 경찰들의 안내로 한꺼번에 몰리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는 덕택에 모두들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여 소방차와 구급차까지 동원시켜 놓은 세심함도 있었다.
생명이 깨어나는 봄, 녹음이 우거져 화창한 여름, 붉은 색으로 물드는 햇살이 영롱한 가을, 그리고 바위마다 쌓이는 하얀 눈속 ...어느 것 하나도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곳 청량산, 청량사는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