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만은 내가 많은 은인들 도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책을 썼다”고 했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찍었는데,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부씩을 더 찍었다. 그의 동의를 받아 앞으로 책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나는 1934년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에서 상(相)字 옥(玉)字 아버지와 아산 이씨 순(順)字 녀(女)字 어머니에게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 밑으로 내리 남동생 4명과 끝으로 여동생 두 명이 있어 우리 형제는 모두 일곱 남매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고생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나를 낳자마자 양쪽 모두 유종(乳腫)을 앓으시어 나는 어머니 젖 한 모금도 못 먹고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미음만 먹고 자랐다고 한다.
당시는 우유가 없던 때라 엄마 젖을 못 먹으면 밥물을 짜서 설탕을 타서 먹였으니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첫돌이 지나서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내가 보통 아이들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늦고 약해서 혹시 잘못될까 싶어 출생신고도 1년 늦게 했다.
할머니는 혹시나 장손이 잘못될까 싶어 성황당에 가서 비시고, 봄이면 산에 가서 나물을, 가을이면 산밤·마·도토리 등을 따다가 시장에 팔아 인삼을 사다가 나에게 먹였기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삼을 장복했다. 나는 할머니 보살핌 덕택에 타고난 체구는 작았지만 자라면서 강단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얼마 안 되는 땅으로 농사를 지으며 우마차를 가지고 벌목한 목재를 실어 나른다든지 곡식가마를 운반하는 운송업을 하셨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소에게 먹일 꼴을 베거나 땔감을 할 사람이 없어 항상 걱정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일곱살 때쯤부터 당시 고모부 댁에서 관리하던 앞산에 올라가 갈퀴로 솔가리를 긁어모아 놓으면 저녁에 들어오신 아버지가 지게로 운반해 땔감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 일러스트 김성규 기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지게를 질 수 있었으므로 여름에 학교에 갔다 오면 마을 논둑에 가서 소 먹일 꼴을 베어왔고, 휴일이나 겨울 방학 중에는 바로 아래 동생과 같이 도고산에 올라가 낙엽을 긁어오거나 삭정이 등을 베다가 마당에 쌓아놓고 겨울을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가서 도고산을 바라보면 산을 오르내리면서 작대기로 장단맞춰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난다. 언젠가 그 정든 산을 다시 한번 오르겠다고 다짐하지만 이제는 그저 힘이 부칠 따름이다.
3번 떨어지고 4번 만에 입학한 초등학교
나는 겨울방학 동안에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등잔불 밑에서 양말과 장갑을 떠서 동생들을 신기고 나도 신었다. 짚을 가지고 짚신과 삼태기, 멍석 등 짚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물건들을 만들어서 집안살림살이에도 보탰다.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어 자습이나 복습은 못하였지만 학교 성적은 항상 1~2등을 다퉜다.
나는 1943년 만 아홉살(실제로는 열살)의 나이에 도고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만 6세가 되던 해부터 내리 삼년 간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간단한 구두시험만 보던 때인데도 번번이 낙방하고 네번 만에 합격하여 다른 친구보다 삼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마을에서 머리 좋다는 얘기 들었는데 번번이 떨어졌다.
그 때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철이 든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는 도고면에 한 개만 있었고, 일년에 학생 60명만 모집하였는데 입학 지원생이 정원보다 많았기 때문에 반수 이상의 지원자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도고면 내에서 면장, 지서장 등 공무원 자식들과 각 마을의 이장, 유지의 아들 딸들을 우선적으로 뽑다보면 입학 정원 60명에 이르게 되고 나머지 농민들의 자식들은 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힘 없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이곳 저곳에서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어 피해를 줄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고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할머니 말씀을 들으면 나의 할아버지는 아버지(1911년 출생)가 네살 때이던 서른 여섯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우리에게는 고조할머니) 산소를 좋은 곳에 쓰기 위해 공주시 정안면에 있는 산 속 동굴 속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을 만큼 효자였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가난 속에서 아버지와 고모를 키우셨지만 할아버지의 효심 덕택으로 손자들은 잘 살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사셨다.
손주들 위해 추운 겨울에도 성황당 찾아 치성 드렸던 할머니
그 덕인지는 몰라도 할아버지 손자들은 비교적 성공한 편이다. 나는 사법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 검사생활을 했고, 바로 밑의 동생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공학박사가 되어 동국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서 학장까지 지냈다. 셋째는 서울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치과병원을 개원해서 돈도 많이 벌었다. 넷째는 한양공대를 나와 한국전력 과장까지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병으로 요절하였고, 다섯째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여동생들도 결혼해 잘 살고 있다.
할머니께서는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살아가는데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알고 그것을 지키는데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신 분이다. 손자라면 끔찍이 생각하시고 특히 연약한 큰손자인 나에게는 특별한 애정과 정성을 쏟으셨다. 항상 부지런히 일을 하셨고, 손자들을 위해 추운 겨울 밤중에 성황당 등을 찾아 다니시며 치성을 드리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서 빨리 성공해서 고생하시는 할머니께 잘해드리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살아 계신 동안 할머니께 잘 해 드린 일이 없다. 내가 서울법대에 합격했을 때, 또 사법 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제 우리 집안도 살게 됐구나!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기뻐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할머니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조기 새끼 한 마리 못 사다 드렸는데, 내가 검사된 지 3개월 만인 1967년 3월에 여든 여섯을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호강 한 번 못 시켜드리고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이 되고 가슴이 아프다.
나의 어머니는 1914년 5월에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에서 태어나서 18세 되는 해에 아버지와 결혼, 나를 비롯하여 선우·한우·열우·형우·명순·인숙 등 7남매(5남 2녀)를 낳아 키우셨다. 어머님은 학교나 서당 공부는 못 하셨지만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근검절약하고 정직했던 어머니
어머님은 몸은 약하셨으나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몸져 누워계실 때만 빼고는 열심히 일하셨다. 밭에 목화를 심어 할머니와 같이 무명실을 뽑아 겨우내 베틀에 앉아 베를 짜셨고, 여름에는 삼베를 짜서 시장에 팔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 소작논 1000평만 가지고 살던 우리 집이 나중엔 논 2000평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어머님의 근검절약 정신은 몸에 배어 노년기까지 한 푼도 헛되이 쓰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자식들이 어느 정도 살만해진 후 어머님께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려고 외식을 하자고 하면 “집에서 된장찌개에다 밥 먹으면 되지 뭣하러 비싼 돈주고 사먹느냐”고 거절하시어 어머님이 일흔이 넘도록 변변한 외식 한 번 못해드렸다.
어머님은 정의감도 강하신 분이었다. 항상 자식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며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또 이유 없이 남에게 의지하거나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195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이 든 자식들이 공부한다고 객지에 나가 있을 때 허약한 몸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느라 말로 표현 못할 고생을 하셨다.
혼자 농사를 지으시면서 10리나 떨어진 높은 산에 올라가 점심도 굶어가면서 하루 종일 땔나무를 해놓으시고 며느리와 함께 저녁 늦게 집으로 운반하는 일을 매일 반복하셨다. 그 와중에도 둘째아들이 고학하느라고 돈벌이를 하다가 사기를 당하여 빚을 많이 지자 어머님은 두말없이 우리 가족의 생명줄과도 같은 논밭을 전부 팔아 빚을 갚아주는 결단을 보이기도 하셨다.
어머님의 자식 사랑은 지극하셨지만 겉으로 드러내놓고 칭찬하는 일은 없었으며, 대신 잘못하면 호되게 나무라곤 하셨다. 아들들이 직장을 가지고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할 때부터 매월 용돈을 조금씩 드렸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와 딸들을 호출하길래 무슨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긴장했는데 어머님께서는 “그동안 늙은 시어미 모시느라고 고생들 했다”며 봉투 한 개씩을 나누어 주셨다. 집에 돌아온 며느리들은 봉투에 10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씩 들어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님은 이렇게 통이 크신 분이기도 했다. 자식들로부터 조금씩 받은 용돈을 한 푼도 안 쓰시고 수 10년 간 은행에 저축했다가 7000만원을 한꺼번에 찾아 7남매에게 1000만원씩 나누어 주신 것이다.
어머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때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시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셨으나 노년기에 들어서시면서 건강한 몸으로 병원에 안 가시고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다 2009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57년간 이승과 저승으로 떨어져 계셨던 아버지 곁에 합장해 드렸다. <계속>08.12
1934년생. 예산농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6년부터 서울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28년간 검사로 일했다. 1994년 대전지검 홍성지청장이 검사로서 마지막 보직이었다. 검사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 없지만, 나름대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옆을 기웃거리지 않고 나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