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 배에 불을 지른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
원균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무기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배에 불을 지른후 도주했으며
훗날에는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을 모함했으니..... 욕을 먹어도 싸지만
그보다 더한 박홍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으니 이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진왜란은 기습을 당한게 아니라 예고된 전쟁이었으니 조선과 무역으로 살아가던 대마도주
소씨는 임진왜란 전쟁을 막기 위해 심지어 국서까지 위조했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의 지시도 있으니... 1589년 7월 공작 한쌍과 조총 2자루를 조선에 보내면서 전쟁이
난다고 통지했지만 사격을 참관한 선조는 "군기시에 보관하라고 말하고는 끝" 입니다.
황윤길은 일본에 다녀와 전쟁이 곧 일어난다고 말해 경상도의 도로가 피란민으로 차기도
했으며 부산왜관에서 무역하던 왜인 수백명이 철수하고 마지막으로 대마도주
는 동래부사에게 전쟁이 임박했으니 조정에 한번만 더 기별해 달라고...... 애원(?) 합니다.
조정도 경상감사에 김수, 전라감사 이광에 충청감사 윤선각을 내려보내 성을 수축하게 했으며.....
원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하는데 부임하는 도중 그가 백성들에게 인자하지 못하며 인사고과
도 낮다는 이유로 유극량이 새로 좌수사가 되어 부임했는데, 이번에는 사헌부에서 그 출신이
한미(극량의 어미가 노비) 하다고.... 파직하고 이순신을 승진시켜 임명하니 전쟁 13개월 전입니다.
부산의 경상좌수사 박홍은 평판이 좋다고 해서 2년 임기가 끝나 해직하는 관례를 깨고
다시 임명되는 특전을 받았으니 2년 6개월 정도 준비기간을 가진 셈인데, 조정에서도
전쟁이 임박해 다급해지니.... 다시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하니 전쟁 3개월전 입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5관 5포에 판옥선이 25척이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8관 13포에 35척이며
경상우수사 원균은 11관 16포에 판옥선이 50척이고 부산의 경상좌수사 박홍은 7관 10포에
40척이며 각 수영은 판옥선과 비슷한 수량의 협선이 있었는데.... 왜선 세키부네는 낮고 약한
수송선이나 조선 판옥선은 높고 견고한 군함이라 적이 배에 오를수 없으니 백병전은 불가능합니다.
우수사 원균은 저 3개월 동안 통영의 본영과 예하에 떨어져 있는 8관 16포 순시가 다 끝나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으니.... 당시 기강이 문란해 배나 무기류등이 부족하고 파손된채
수리되지 못한 상황에서 수군을 소집할 겨를조차 없으니 배에 불을 지르고 도주
했지만 한차례 적과 싸운 내용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통지하며 원군을 6차례나 요청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억기 및 원균과 함께 한산도 해전에서 55척으로 왜선 73척을 맞아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할 때 아군 피해는 배는 손상이 없고 전사자 3명이며, 명량해전에서는 적선 31척을 격침
시켰지만 아군 배는 손상이 없고 전사자가 2명인데서 보듯 조총 유효사거리는 100미터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600미터 정도니 200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한채 포격하면 아군 피해 없이 적선을 격침할수 있습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사전에 배를 띄워 대마도를 염탐하는등 정보수집을 하지 않은게 아쉬운데, 4월 13일 배를
출진시켜 700척 수송선에 포격을 했으면 왜군의 부산 상륙 자체가 불가능 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속극 징비록에 보면 수군의 총수가 배를 단 한척도 띄우지 않고 부산진성에 들어가 정발장군에게 짐만
되다가 14일 오전에 적이 공격하자 주제넘게도 성 안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혼자 성문을 빠져나와 도주합니다.
수영(해운대)에 있었던 좌수사가 부산진성에 들어갔다는게 사실과 전혀 다르기도 하지만, 그는 사전에 전쟁
준비나 계획이 전혀 없었던 모양으로 겁에질려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수영 앞산에 올라가 멀리 부산진성에
연기가 오르자 성이 함락된 것으로 보고 배를 불지르고 무기를 바다에 쳐넣은후 수군을 해산하고 도주합니다.
수송선인 일본 세키부네는 75명이 타지만 군함인 조선 판옥선은 큰데다가 대포를 20문 장착하니 125명이
타는데, 원균과 박홍이 배에 불을 지른건 왜선의 침공에 대해 배들을 수리하고 무기를 적재할 시간이
없고 또 승선할 수군을 민가에서 소집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적에 배를 뺏기지 않으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홍 경상좌수영은 부산포와 다대포(서평포)가 4월 14일 왜군 공격을 받았을때 두모포, 서생포, 개운포, 감포,
포이포, 칠포 및 축산포의 수군을 본영에 합류시켰다면 1군 고니시군의 상륙은 저지하지 못했더라도
4월 18일 2군 가토 기요마사와 4월 19일 3군 구로다 나가마사군의 상륙은 "대포로 저지" 할수 있었을
것이며 전쟁은 예고되었으니 처음부터 "부산에 함대를 미리 집결시켜 방어 훈련" 을 하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성이라고 하면 보통은 10일 정도는 버텨주어야 하건만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적이
공격해 온 당일 반나절만에 함락된게 아쉬우니 2~3일씩 이라도 버텨주었으면 제승방략으로 대구에 모인
수만명의 군대를 이일이 지휘할수 있었을 것인데 저들이 지휘관을 기다리다가 흩어졌으니 그게 원통합니다!
박홍이 수군을 해산시켰으니 임진왜란 전기간을 통해 경상좌수영 수군의 활약은 전무한 데 이각 과는
달리 처형을 면한 것은 전쟁발발 소식을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에 알리는 한편 군관을
말에 태워 서울 조정에 보고하니 나흘후 도착하는데..... 하루만에 올라와야할 봉화가 기강해이
로 인해 그때까지도 도달하지 못했으니..... 조정에 전쟁소식을 알려 큰 공을 세운데다가
도주하는 중에 죽령에서 수비하는 병사들에게 합류하고 이후 임진강전선에 참가한 때문인가 합니다.
이순신 13개월, 원균의 3개월에 비해 2년 6개월이 있었는데도 정보수집도 게을리했고 배를 띄워 포격으로
상륙을 저지하지 않고 방관하다가 배를 불지르고 무기를 바다에 쳐넣은후 수군을 해산하고 도주한 죄는
크니 원균을 욕할때는 박홍도 함께 욕해야 공평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부산진 첨사 정발과 다대포 첨사 윤흥신에 동래부사 송상현 그리고 밀양에서 싸운 부사 박진이 돋보입니다!
전투도 없이 도주한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우병사 조대곤도 함께 욕을 먹는데...... 반면에 주장이 도망친
성에서 싸운 사람들이 있으니 박홍이 도주한 부산 좌수영은 민간인 25명이 왜군에 항전하다 전사했으니
"25의용단" 이 세워졌으며, 이각이 버린 울산 좌병영은 백성들과 병사들이 싸운게 1차 울산병영전투이고
초계군수 이유검과 김해부사 서예원이 싸우다 달아난 김해성은 4충신과 의병들이 혈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박홍이 도주한 반면에 원균은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으로 첫 해전인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과 만나 함께 싸운 이래 사천해전, 한산도해전등 여러 전투에서 함께 싸웠건만...
영화나 연속극에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악역을 담당할 자가 꼭 필요하니 원균이 더욱 욕을 먹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