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8일 연중3주간 금요일 (마르4,26-34)
“작은 겨자씨의 성장 가능성을 나 스스로 믿으며 살기”
제가 전에 전철을 탔다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장면을 ‘빨리 감기’ 속도로 보거나
어떤 장면은 ‘스킵’skip하는 모습....
그렇게 두 시간짜리 영화를 10분, 20분 걸려 보는 모습을 보면서
‘저러고도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있을까?’ 하며
아주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조급합니다.
그것도 많이 조급합니다.
조급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런 것을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저 조금이라도 자기 맘에 안 들면 고걸 참지 못하고
그 즉시 펴놓았던 돗자리를 걷어들고 자리를 떠버리거나
또 어느새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자기 생각에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조건 ‘척결해야 할 악’으로 취급하면서,
일말의 주저함이나 망설임도 없이
속전속결(速戰速決) 그 즉시 ‘스킵’ 하거나, 혹은 ‘제거’시키고
‘박멸’해야 할 것처럼 서두릅니다.
또, 그것을 현대인에게 필요한 신속함, 효율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0분 만에 영화를 마스터 하듯이,
그렇게 모든 것을 더 빨리 섭취하고 더 빨리 해결하려다가
결국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는
기나긴 영화나 드라마처럼 지루한 부분도 있고
때로는 ‘스킵’, 건너뛰고 싶은 부분이나
삭제하거나 편집해버리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토록 아파하고 방황하고 정체되어있는 것만 같은 그 어두운 면까지도
소중한 ‘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끄럽고 어두운 면도 당장 도려내고
뽑아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어두운 면까지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이기에
기꺼이 껴안고 함께 가야 할, 다독거려야 할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지금은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큰 나무가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과 ‘더딘 성장’ 그리고 ‘가능성’을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것, 자기가 부족한 것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배우고자 하는’ 용기를 냈을 때,
그를 환대하고 격려해주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반면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순간,
그를 조롱하고, 비판하고, 그를 ‘차별’하며 ‘내치는’ 공동체는
‘나쁜 공동체, 나쁜 사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무지를 자꾸 숨기게 되면서
‘아는 척, 있는 척’ 가면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서툰 발걸음에 동행하시고
미욱한 우리 마음에도 찾아와 주시는 분...
지금은 비록 작은 겨자씨처럼 같잖아 보일지라도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